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64
시 창작은 ‘다름’을 인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펜데믹 시대에 살아서 만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는 게 다 기적인 것 같다.
봄이다
점심때가 되어 꽃이 확 피었다
기적이다
그러자 한순간에
연두잎 새잎도 바람소리도 물소리도 이슬도 햇살도
먼 곳의 안부도
다 기적이다
하늘의 뜻이 지천에 번진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다 기적이다
나의 오늘 하루가 온통 기적이다 - 신병은 <봄, 피다>
어떠세요
오늘 여러분은 재미있습니까? 즐겁습니까? 행복하십니까?
그보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일이 있었습니까?
창조적 삶은 새로운 일을 만들며 사는 것이니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저는 정말로 새로운 일을 많이 했더라구요.
어제보다 5분 늦게 일어났어요. 사워는 1분 빨리 했구요. 집은 3분 늦게 나왔구요 개나리 두 송이를 보았구요. 408호 여주인을 만났어요. 우편물함에서 시대문학월간지를 꺼냈어요. 차가 어제와는 달리 아파트 골목에 세워져 있구요. 사무실에는 크로크스꽃이 피어있었구요. 말발도리 꽃망울 더 커졌구요. 사는게 기적같다는 생각을 했구요 목련꽃망울이 어제 다르게 탐스럽게 부풀었구요.
가만히 돌아보면 살아오는 65여 년 동안 단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었고 기적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늘 그날이 그날 같다고 생각했다. 창조적 삶은 거창한 것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사는 것이 창조적인 삶이고 끌림과 울림이 있고 떨림이 있는 삶이다.
모든 창조는 단 한순간도 같지 않다는 것, 사는 모든 게 기적 같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시창작도 다름을 인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른 봄에 핀 매화꽃도 아침햇살 아래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비가 올 때 다르고 달밤에 다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나와 너’에 따라 다르다.
시 창작은 세상을 새롭게 만나고 대상과 현상의 새로운 모습,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런데 새로운 것은 생전 듣도 보지도 못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그 전에 보아왔던 것들인데 조금 다르게 느끼고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는 ‘생각’이란 것도 알고 보면 어딘가 본 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이다,
시창작도 대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다르게 볼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점의 문제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새로운 것은 없고 새로운 관점만 있을 뿐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늘 보아오든 풍경, 대상을 똑같이 보지 않는 사람이다.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水墨정원 9 – 번짐>
번진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한 시다.
봄이 번져서 여름이 되고 꽃이 번져서 열매가 되고 여름이 번져 가을이 된다. 음악이 번져 그림이 되고 그림이 번져 시가 된다. 삶은 번져 죽음이 되고 저녁은 번져 밤이 되듯 세상의 모든 관계성은 번짐임을 알게된다. 그러고 보면 번지지 않는 관계는 없다고 번져야 사랑이 된다고 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번지는 일임을 알게 된다.
시창작은 인문학의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나란히 함께 가는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면 시 역시 독자의 공감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문학과 시는 둘 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사람에 대해 알아가기 때문이다.
시 창작은 자라는 어른들의 지적인 수다이며 착한 스캔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하다.
꽃과 대화하고 나무와 대화하고 바람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꽃, 새로운 나무, 새로운 바람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꽃의 언어를 들을 수 있고, 나무의 언어를 들을 수 있고 바람의 언어, 강의 언어, 여자의 언어, 남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진정한 소통은 언어를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원래 말言(말씀, 화기애애할)은 辛(매울 신)과 口(입 구)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글자다
그래서 말을 잘하면 화기애애하고 말을 잘 못하면 매운 맛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문학은 말을 다루는 예술이다.
말이 재미있으려면 서로 주고받는 대화여야 하고 혼자서 독백처럼 말하면 재미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나무이야기, 꽃이야기, 물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오래오래 그 앞에 오래 쪼그려 앉아라?
그냥 지나치지 마라?
관심을 갖고 기다리면 문득 한 순간에 나무와 꽃과 바람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어느 때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어느 때는 공자의 입을 통해, 장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어린왕자가 들려주고. 니체가 들려주고. 헤밍웨이가 들려준다.
책이 들려줍니다.
그래서 시창작은 독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쌓여있는 다양한 경험과 정보, 즉 스키마를 통해 듣게 된다.
스티브잡스는 오늘날 넘쳐나는 것이 정보라며 그래서 지금은 정보를 활용하는 편집자가 중요한 시대라고 했다. 창조는 선택과 결합의 구조, 즉 Ctrl C 와 Ctrl V의 활용이다.
피아제도 생각의 본질은 representation(다시 보여주다)라 했다, 어디서 한 번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 했다.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것은 떠 올릴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세상에 없는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재해석하고 편집하는 것이다.
여서동 한재 로터리에는 성질 급한 벚나무 한그루 있는데요.
해마다 이맘때면 사람도 나무도 저렇게 성질 급한 놈이 있다고
오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을 하는 데요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는데요
오늘 아침 그 나무 곁을 지나는데
꼭 그렇게만 보지 마라고 귀띔을 하는 데요
한발 앞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되묻는 데요
나는 대답 대신 저 나무가 관통한 겨울나기를 생각하는 데요
한발 앞서 여린 햇살을 끌어 오기 위해 발버둥친 흔적을 보는 데요
땅 속 깊숙한 체온을 다독이던 젖 먹던 힘까지 보는 데요
한발 앞서 혼자 깊어 간 뒤태를 생각하는 데요
한발 앞서 세상의 문을 연 저 나무의 꽃자리를 생각하는 데요
부끄럽게도 나는 그 나무의 앞선 한발을 보지 못한 채
성.급.한 수식어로만 바라만 보았는데요 - 신병은 <성급한 벚나무>
해마다 한재터널을 로타리 근처에는 성급한 벚나무 한그루가 눈길을 끈다. ‘성급한’이란 수식어를 앞세운 눈길로만 그 나무를 본다. 그런데 그 벚나무와 진정으로 대화를 해보면 성급한 삶의 모습만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남 보다 한발 앞서 사는 삶의 지혜를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한 꺼풀 뒤집어보면 새로운 다른 의미가 있다.
시의 화법은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면 안 된다. 독백하지 말고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진정을 앞세워 마음보를 바로 하고 대화하라.
그러면 나무도 그의 진정을 들려주고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벌레먹은 나뭇잎은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이라고 말하고, 국화는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고 말하고, 만찬의 의미는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이라 말해 준다. 그리고 나들목은 전방 2킬로미터에서 생의 속도를 좀 줄이라고 귀띔하고, 나무의 옹이는 바람의 기슭에 단단한 집을 짓는 일이라고 귀띔한다.
입춘은 서로 따뜻해지라고 말하고, 버팀목은 산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다고 일러준다.
별일 없는 게지
간 밤 꿈에 너가 보여 혹시나 해서 전화했어
이제 우리도 곧 칠순이잖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켜 봐
거봐,
허공에도 봄은 오잖아
네가 반을 허락하고
내가 반을 허락하면
반반半半으로 웃다 하나로 만날 수 있지
봄이잖아 -신병은 <아름다운 파문>
세상은 늘 우연과 필연으로 진행되면서 우연을 필연으로 설명하고, 필연을 우연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시적 시선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그쪽으로 옮겨가 내 정보에 의해 다시 편집된다.
이것이 시창작의 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