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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에 우리 집 두 아들과 함께 통가리오산을 등반했습니다. 통가리오산 정상과 그 주변을 돌아오는 서든 서킷 코스였습니다. 이 등산을 하고 난 후에 한 아들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안가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한 아들은 그 어떤 코스에서 충분히 풍경을 즐기지 못해서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후에 또 마운트 타라나키를 등정할 일을 계획했습니다. 이때에 누구를 데리고 갔겠습니까?
오늘 말씀에도 예수님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때에 12명의 제자 가운데서 세 명만 데리고 갔습니다. 누구입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이들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일어났던 일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에게 다가오는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세 명만 데리고 갔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인데 다 데리고 가시지, 왜 세 명만 데리고 갔을까요? 본문에 가면 “따로 데리고” 갔다고 했습니다. 왜 열두를 다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정확한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세 명의 제자 외에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나는 왜 예수님과 함께 가지 못하는가? 나도 저 선두 그룹에 끼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없을까요?
오늘 우리도 이런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영주권을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은 빨리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10년 20년을 살면서 나는 키위사회에 들어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세 명만 데리시고 높은 산에 간 것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도 사람을 편애하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손상을 입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 차별하는 예수 믿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아니다’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의도하신 바가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선택함을 입어서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서 올라가서 하늘의 놀라운 영광을 보는 것은 아주 놀라운 체험입니다. 귀한 훈련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에 9명의 제자들을 남겨주심에도 분명히 의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산 아래의 마을에서 병든 자식을 가슴에 안고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보면서 산 위에서 그 놀라운 영광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보며 느끼게 하시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낍니다. 세상의 고통을 깨닫게 합니다. 이 가운데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실 예수님의 의도하심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고 받는 은혜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아주 유명하고 중요한 두 개의 대표적인 설교가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이 두 설교는 아주 복음적인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은 각각 달랐지 않습니까?
사실 논리적인 면에서 본다면 스데반의 설교가 베드로의 설교보다 더 뛰어난 설교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는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는 마음에 찔려 이를 갈며 돌을 던졌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설교의 차이가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의 차이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어떤 교인이 두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기를 스데반의 설교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끔 말씀 중에 “들을 귀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귀가 있다고 다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따로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말씀을 사모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사 중의 은사요, 축복 중의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에 (1) 믿음을 가지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은혜가 되면 입으로 혹은 마음으로 ‘아멘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2) 긍정적인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귀중한 귀금속인 금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금은 돌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돌이 금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금이 돌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보다는 언제나 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전하다보니 쓸데없이 돌과 같은 말들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설교에는 금보다 돌이 더 많을 때도 많습니다.
금을 캐는 사람은 돌은 버리고 그 속에 있는 금만 캐어냅니다. 이처럼 설교도 그렇게 듣기를 바랍니다. 돌 속에 금을 찾으면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금은 버리고 돌만 캐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금을 캐는 사람, 돌을 캐는 사람,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갔습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평소의 얼굴이 아니라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옷이 빛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황홀한 관경을 쳐다보던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당장 여기에 집을 세 채를 짓자는 것입니다. 한 채는 주 예수님을 위하여, 다른 한 채는 모세를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한 채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순발력있는 제의이며, 열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열정이 실수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큰 일을 해내기도 합니다.
황홀한 광경 속에서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때에 세 제자는 급격한 변화에 두려워서 엎드렸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 위에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고 하시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어나서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나중에 남은 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 가운데 함께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두 사람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먼저, 모세를 살펴 보십시다.
그는 위대한 종교 지도자입니다. 정치 지도자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사람입니다. 그의 얼굴이 얼마나 광채가 났던지 보통 사람은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얼굴을 수건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가 홍해를 가리킨즉 홍해 바다가 갈라지어 육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가 기도한 즉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백성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가 반석을 치면 생수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가 손을 들고 기도한 즉 아말렉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를 온유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세 편에 있었습니다. 그를 비방하던 자는 그의 누이라 할지라도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그를 대적하던 자를 땅을 갈라 즉결 심판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를 원망하던 자들을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모세오경이라고 하기도 하고 율법서라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지도자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약 선지자의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그가 기도한즉 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죄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일어났고, 기도한 즉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는 능력의 선지자입니다. 불쌍한 과부집에 가서 그 가정을 축복한 즉 3년 6개월 동안 떡반죽 그릇과 기름병이 마르지 않아 흉년가운데 이기게 했습니다. 갈멜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든지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에 까마귀를 명령하셔서 그를 먹이도록 했습니다. 그는 좋은 제자들 양육해서 자기보다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엘리사를 두기도 했습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니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능력의 종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종들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예수님만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모세나 엘리야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지만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받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히브리서 3:5). 그는 하나님 집의 사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구세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선지자입니다.
(2) 때문에 우리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피흘려 주신 구속의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나를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나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여러분의 죄를 씻어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정치자, 예술가, 사업가, 선교사들이 많습니다. 순교자도 많습니다. 현재도 있습니다. 외국에도,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자기 몸을 불사르는 순교자라고 할지라도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다 드리는 헌신자라고 해도 그들이 구세주가 아닙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일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자입니다. 알려주는 자입니다. 교회의 충성된 자는 다만 예수님이 드러나게 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 예수님을 드러내어야 할 자리에 슬거머니 우리 자신이 차지할 때가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걸고서 드러내어야 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아멘.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받았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찬송가 194장)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주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교회입니다. 다른 일꾼은 사라집니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름에 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 우리를 심문하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재판관이 물을 것입니다.
“무엇하다가 왔느냐? 도대체 너는 어떤 사람인가?”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일찍이 교회에 다녔고요, 성가대도 했고요, 주일학교 교사도 했고요, 식당봉사도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느냐?”
“예, 저의 아버지는 장로님이고요,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더 없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의 문지기는 말할 것입니다.
“너는 여기 들어갈 자격이 없어”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왔습니다”
그러면 천국 문지기는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오케이( O.K)"
천국가는 길은 쉽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의 주요,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오직 예수 아멘.
찬송 / 천지에 있는 이름 중(101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