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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는 멀리서 오셨는데, 늘 말씀드리지만 미사 참석하는 과정을 보면
본인이 주도하여 온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은 제대 가운데 작은 십자가를 놓지 않고, 진짜 십자가 나무 조각,
보목을 성광 안에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제가 피정이나 십자가 현양 축일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은 했고,
또 감곡 찬미기도 밤이나 배티와 서운동 은총의 밤에 항상 오신 분들께 십자가 보목을 뺨에 대드렸었기에,
한국의 많은 교우들이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압니다.
그래도 모르시는 분이 더 많고,
오늘은 성지 주일이기에 십자가에 대한 특별한 날이니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긴 세월 동안 유대 나라는 로마인들이 지배했죠.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로마 제국도 황제들이 서로 싸우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에 거처를 옮기면서
로마도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지게 되죠.
그런데 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그 유명한 헬레나 황후입니다.
헬레나 성녀 아시죠?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D313년에 국교는 아니어도 가톨릭을 허용한다는 칙령을 내리기 전에
정말 300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많은 우리 신자들이 죽었어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십자가형을 받기도 하고, 정말 잔인하게 죽었죠.
물론 우리 한국의 역사에도 큰 박해만 4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죽은 한국 신자들만도 이만 명에 가까워요.
이 가톨릭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마련된 종교입니다.
그분들 덕에 이렇게 꽃이 피어 살아가는 거지, 지금 현대 신자들이 열심히 해서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현대 가톨릭은 여러 가지로 병이 들어있어요.
통계에 의하면 미사 참석자 수가 교적의 3분의 1이 안 돼요.
코로나 터지고 난 다음에는 아예 20%가 안 돼요.
세례받고 1년 안에 쉬는 사람이 65%가 넘어요.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성당 다니면서도
하는 일이 잘 안될 때 점집이나 철학관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 38.5%이래요.
이것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현주소에요.
어찌 건강한 천주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막말로 두 다리만 안 갔지, 가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던 사람까지 하면 더 많을 겁니다.
이게 어찌 건강한 천주교라 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우리 천주교 선배들이 그렇게 피를 흘려서 이루어 놓은 교회인데 후손들은 좀 시원치 않죠.
아무튼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는 천주교 신자가 됩니다.
신자가 되자마자 이 황후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은 예루살렘이었어요.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정말 머나먼 길입니다.
비행기를 타고도 대여섯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죠.
그래서 수행원을 거느리고 거의 예닐곱 달 만에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에 갑니다.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황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골고다 산 순례를 가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골고다까지 갔더니, 이게 웬일이래요?
예수님 돌아가시고 한 270년이 흐른 후다 보니, 그동안에 이교도들이 들어와서
사형장의 흔적은 다 사라져버렸고, 그 입구에는 비너스상 등, 별의별 신상이 잔뜩 세워져 있었어요.
그래서 헬레나 황후는 모든 것을 부수고 옛날 지도를 가지고
예수님이 못 박혔던 형장이라 추정이 되는 곳의 땅을 파내라고 그랬어요.
일꾼들이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한참 파다 보니까 이게 웬일이야! 십자가가 나왔어요.
그런데 3개가 서로 엉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을 텐데, 그 명패는 뚝 떨어져 있고
세 개의 겉모양은 다 같았어요.
그리고 놀랍게도 300년이 흘렀는데도 그 십자가 3개는 변색만 되고 썩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일단 십자가 세 개를 땅바닥에 가지런히 눕혀놓았대요.
그리고 헬레나 황후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비천한 여종을 여기까지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찾고자 하는데 모양이 너무 똑같습니다.
어느 것이 주님의 성혈이 묻어 있는 진짜 십자가 나무인지 찾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당시 예루살렘 주교님, 또 교우들이 모여 함께 기도했지요.
그런데 기도하던 중에 당시 주교님 머릿속에
‘예수님의 몸이 눕혀져 있던 십자가라면, 예수님의 성혈이 덮여있던 십자가라면 분명 능력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나갔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환자들을 모았죠.
들것에 실려 오는 사람,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 아무튼 병자들에게 십자가에 손을 대보라 했어요.
첫 번째 십자가에 손을 대시 아픈 사람 병이 나았죠.
사람들이 막 손뼉 치며 주님의 십자가라고 환호했어요.
하지만 황후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주님의 십자가는 죽은 사람도 살려야 한다.’ 했어요.
그래서 며칠 지난 송장 하나를 꺼내 그 십자가에 올려놓았는데 꿈쩍도 안 해요.
이것은 아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는 못했지만 만지는 사람마다 치유가 일어났던
이 첫 번째 십자가는 바로 ‘주님, 하늘나라에 가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께 간청했던 회개한 죄수, 전설에 의하면 디스마스라고 하는 우도인 거죠.
전설에 의하면 우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래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박해를 피해서 도망을 쳤죠.
그런데 헤로데 군사들이 쫓아와! 도망치다 보니 굴이 있는 거예요.
그 굴속에 들어가서 피했는데 이 성가정 들어가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거미들이 굴 앞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고 아침이 밝았어요.
헤로데 병사들이 쫓아오다 굴 앞에 와보니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있는 거예요.
‘여긴 사람 없다.’ 거미가 살린 거예요.
성탄 때 나무에 줄을 늘어뜨리는데, 그것이 바로 거미줄을 나타내는 거예요.
거미조차도 아기 예수님을 살렸다는 거죠.
그리고 난 후에 다시 이집트로 향해서 도피하는데 산적을 만났죠.
그 산적 두목 이름이 바로 디스마스였어요.
다른 산적들은 물건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두목은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얼굴 뒤에서 후광이 환하게 비치는데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먼 훗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했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십자가 위에서 만난 거지요.
예수님은 간난 아기 때 자기를 살려 준 디스마스를 잊지 않고
‘오늘 너는 나와 같이 천국에 갈 것이다.’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제일 확실하게 천국에 간 사람이 누구예요?
우도 디스마스예요.
그러니까 만지는 사람마다 치유가 일어난 바로 첫 번째 십자가는
회개하고 죽은, 갓난아기 예수님을 지켰던 산적 두목 디스마스의 십자가였다는 거죠.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어요.
이번에는 두 번째 십자가에다 손을 대라 했어요.
첫 번째 십자가에 손을 대고 나으니까, 나머지 환자들도 우르르 손을 댔겠죠?
웬걸? 만지는 사람마다 그냥 뒤로 넘어가서 죽거나 상처가 더 심해졌어요.
몇 사람이 봉변을 당하니 아무도 안 만지려고 했어요.
이 두 번째 십자가, 여러분들 이제 감 잡으셨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도 살려보라고 십자가 위에서도 교만을 떨었던 좌도!
교만은 다른 사람을 상처를 줘요.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은 온몸에 가시가 숭숭 나 있어서 곁에만 가도 찔려 피가 나요.
겸손하게 죽은 우도의 시신이 올라가 있던 그 십자가마저도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나왔지만,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교만하게 죽었던 좌도의 십자가는
만지는 사람마다 깊은 상처가 생기거나 급사를 한 거죠.
자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십자가가 남았죠.
두 번째 십자가 만지다가 혼난 사람들은 세 번째를 안 만지려 했어요.
그래서 헬레나 황후가 본인도 지병이 많으니 먼저 만지겠다고 합니다.
주교님과 둘이 만졌는데, 침침했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온몸에 힘이 솟는 거야.
만지고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니 환자들이 하나둘 만지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첫 번째 십자가처럼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고,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보이신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 테스트가 뭘까요?
죽은 사람을 살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썩은 냄새 풀풀 나는 송장을 조심스럽게 예수님 십자가에다 올려놓았어요
사람들은 무릎 꿇고 숨도 못 쉬며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다렸어요.
3분 지났을까?
죽어 시커멓게 변한 송장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송장의 썩은 냄새가 장미 향기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송장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마치 낮잠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배시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 웃는 겁니다.
그때야 헬레나 황후는 ‘주님, 드디어 주님의 십자가를 이 죄인이 찾게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3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찾아진 거예요.
그 후 주님의 십자가를 로마로 가지고 돌아와 긴 세월을 보관하다가,
베드로 대성전이 지어질 무렵에 십자가를 여러 토막으로 나눴어요.
한 1m 되는 제일 큰 토막은 로마 주교좌 성당 밑에 지금도 모셔져 있고,
나머지는 작게 잘라서 대개는 세 군데로 보냈어요.
첫째는 각 나라의 상징인 주교좌 성당에 보냈어요.
물론 우리 한국의 명동성당에는 보목이 없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너무 작은 나라였죠.
주로 가톨릭 국가들, 브라질, 이태리, 스페인, 에스파냐에 그 나라를 상징하는 대성전의 조각을 보냈죠,
둘째는 유명한 수도회나 봉쇄 수도회에 보냈어요.
수녀원 종류가 참 많은데, 교황청령 소속 수도회가 있어요.
베네딕도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모두 교황청 소속이에요.
근데 한국 순교 복자회, 예수 성심 시녀회 등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수도회기에 교황청령 소속이 아니에요.
마지막 세 번째로는 가톨릭에 공로를 많이 쌓은 가문에 보냈어요.
대성전을 지어서 봉헌했다든지 하는 가문들이 있겠죠.
그러면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십자가 나무 보목은 어떻게 해서 김 신부에 이르게 됐느냐?
2002년도에 제가 미국에 가서 모셔왔어요.
모셔오게 된 과정은 내 외국서 한 피정 이야기 들어보면 다 나오고, 정말 기적처럼 제게 왔죠.
내가 모시고 산 지 벌써 20년이 되었으니, 20년째 한국에 모셔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후 신기하게도 훨씬 작은 십자가 나무 두 개도 제가 또 모시고 있어요.
그것도 아무튼 기적처럼 저한테 왔어요.
여러분들 세 개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셨죠?
겸손하게 죽은 사람의 십자가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죽은 이는 못 살린다.
그리고 교만을 떨면서 죽은 사람은 또 교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절대 누구를 치유 못 시켜요.
하지만 겸손은 치유가 일어나요.
또 본인도 치유 받으려면, 하느님에게 겸손과 회개를 청해야 해요.
목을 한 번에 치면 고통 잠깐이고, 교수형도 몇 번 몸부림치다 그냥 가요.
그런데 십자가형은 피를 말려 죽이는 거예요.
명이 긴 사람도 열 시간 이상은 못 버틴다는데, 예수님은 굉장히 빨리 돌아가신 편이죠.
그만큼 기력이 떨어지셨던 거죠.
거기다가 옆구리에 창으로 또 찔렀고, 거기서도 피가 또 나왔잖아요.
양손 양발에도 흐르고 오죽하면 십자가 전체가 다 피로 물이 들었겠어요.
지금도 이 십자가 나무 보목을 보면 예수님의 성혈이 우러나와 뻘겋게 보여요.
이천년이 된 나무 조각이 진공 상태도 아닌데 썩지도 않았어요.
100년만 지나도 뿌리에서 나온 나무는 다 가루가 되지 않습니까?
쇳덩어리도 아닌데 나뭇결이 그대로 보여요.
사람의 피를 말려 죽인 사형 틀이었던 십자가,
그 위에 예수님이 계실 때는 축복의 상징이고 해방의 상징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십자가는 그냥 고통 그 자체요. 흉물 덩어리예요.
오늘 이 미사 강론 들으시는 개신교 신자들도 많고 목사님들도 유튜브 듣는 거 제가 많이 압니다.
심지어는 스님들도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 몸이 있어요?
없어요. 왜죠?
개신교 측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왜 십자가에 올라가 있느냐,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사실 구약시대 때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었죠.
그래서 하느님이 달리기를 잘할 것 같아, 힘이 셀 것 같아, 이러면 소도 만들어 하느님이라 생각했고,
말도 만들어 하느님이라 생각했죠.
그리고 부르는 이름도 아도나이, 강한 자, 이름은 무서워서 못 불렀어요.
하지만, 신약시대 때는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2위인 성자께서 이 세상에 33년을 분명히 살다 가시잖아요?
예수님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분을 십자가 위에 올라가 있는데 그게 왜 우상이에요?
그 십자가에다 말 모양을 올려놨다면 그게 우상이겠죠?
그리고 솔직히 예수님이 여기 올라와 있지 않으면, 이 십자가가 우도 것인지 좌도 것인지 어떻게 아냐 이거예요.
성물 만드는 사람이 ‘나는 좌도 모양을 올려야지’ 하고 올린다면 사이코패스죠.
누구나 성물을 조각할 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조각해서 십자가 위에 올려요.
그것은 우상이 아니에요.
예수님 없는 십자가는 2천 년 전에 그냥 흉물 덩어리였어요.
그 후에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올라가 앉으심으로써 비로소 축복의 상징이요, 구원의 상징이 됐던 거죠.
요즘 신자 아닌 분들도 액세서리 비슷하게 십자가를 하나씩 목에 걸고 다녀요.
마피아도 십자가에 굵은 거 하고 다니잖아요?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매달리셨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는 강도의 십자가인지 도둑놈의 십자가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래서 천주교회에서 예수님의 몸이 매달려 있는 십자고상이 성서적으로 맞는 거예요.
태극기 보고 경례하는 것도 우상이겠네요?
태극기를 통해서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잖아요.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보고 우상 숭배한다고 해요.
우리가 그 돌덩어리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모상 앞에서 우리는 천상에 계신 성모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본질로 들어가게끔 우리의 인성은 그렇게 돼 있어요.
어떤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더하기 빼기를 배웠대요.
그리고 엄마와 성당에 처음 나가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말했어요.
‘더하기야, 더하기.’
맞아요, 저 십자가는 우리에게 더하기를 뜻해요.
다시 말하면 주님과 함께 계시면 모든 것이 더해져서 선하고 아름답게 변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에요.
그러면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
첫 번째, 십자가를 내가 움켜쥐고 살면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더해준다는 걸 믿어야 해요.
십자가가 싫다고 서로에게 탓을 돌리는 곳에는 불화만이 존재하지요.
그러나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라고 생각하고
상대편의 십자가까지 끌어안으려 할 때는 화목과 평화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인이에요.
내가 죽어야만 가정이 편해져요.
내가 포기해야만 내 영혼이 편해져요.
두 번째, 십자가는 유한성 때문에 떨고 있는 인간에게 영원을 더해줍니다.
사람에게 죽음만큼 두려운 건 없지만 누구나 한번은 거쳐 가야 할 큰 문이죠.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끝이 아니죠.
문 열고 가면 지금 내가 살았던 곳보다 훨씬 더 좋은 곳 영원히 행복한 곳입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자궁을 열고 나올 때는 너무너무 불안한 거야.
엄마 배에서 정말 편안하게 있다가 나올 때는 얼마나 무서웠겠어?
그러니까 우는 거죠.
하지만 아기 나오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행복해하죠?
아가는 불안하나 사실은 더 큰 세상으로 가는 것처럼, 죽음도 마찬가지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엄마 배를 열고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천국 가고 싶으신 분?’하면 다 손을 들어요.
그런데 ‘지금 가고 싶으신 분?’ 그러면 손 하나도 안 들어요.
재미난 세상 행복하고 또 재미나게 살다 천국 가고 싶다는 말이죠.
이렇게 우리는 너나 나나를 할 것 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처음부터 담대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질 않아요.
옛날에 KAL기가 떨어져서 많이 죽었던 사고가 있었어요.
제가 그 사고 일주일 후 중국으로 취소할 수 없는 선교 갈 일이 있었어요.
모택동이 죽고 덩샤오핑이 달러를 벌기 위해 중국 문을 열었던 때였죠.
저도 재빨리 선교단을 꾸면 6명이, 조선족 5년, 한족 5년 성당을 찾아다녔죠.
모택동이 공사나 혁명 일으킨 후에는 어영 종교지, 종교 자유는 없었잖아요.
어쨌든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 안전띠를 매고도 불안했죠.
둘러보니 제 옆에 같이 간 회장과 평신도들 얼마나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개신교 분들은 손잡고 통성기도하고, 스님들도 염주 열심히 굴리더군요.
그걸 보면서 참 죽기도 싫어하는구나.
비행기가 착륙해서 정지하니 막 손뼉 치고 그럽니다.
죽음에 대한 유한성에 대한 공포는 다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우리 선배들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순교자들의 교회가 가톨릭교회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것은, 십자가 뒤에 있는 영생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세 번째 십자가는 절망과 탄식이 있는 곳에 희망과 찬양을 더해주는 표시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외적인 자유는 만끽하고 삽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피곤과 절망, 노이로제, 스트레스 등 자기 감옥 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풍요를 넘어서 낭비의 시대 살아가고 있고 퇴폐 산업과 향락산업 시대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오염 때문에 지구는 죽어서 지금 막 아파 죽으려고 그래요.
테러와 전쟁,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병으로 그야말로 죽음의 문화로 우리 지구촌은 향해가고 있어요.
이미 오래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았어요.
그렇지만 아가들은 참 불쌍해요. 쟤네들이 컸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그래서 저는 요즘 제 양심으로 제게 우리 딸 좀 결혼시켜달라는 말 하지 말라 해요.
그냥 기도하며 혼자 살라 해요.
사제 입에서 혼자 살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죠.
이만큼 지금은 시대가 너무 혼란의 시대라 어려운 거죠.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어요.
우리 인류에게는 갈보리산의 십자가가 있기에 희망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세상이 어떻게 망가지든 우리 믿는 이는 무너지지 않아요.
그래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불평이 감사로 바뀝니다.
절망이 찬송으로 바뀝니다.
총성과 포성이 화해의 메아리로 분명히 울려 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확신해야 해요.
유대인은 기적을 찾고, 희랍인들은 천하를 외치며 과학 문명을 찾았지만,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 6장 14절에서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신 신앙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죠.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십자가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고통 덩어리죠.
대부분 십자가는 기쁘게 질 수는 없어요. 억지로 지고 갑니다.
그러나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라 하더라도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왜냐?
예수님이 세 번 넘어지셨죠.
십자가 지시고 그런데 중간에 누가 나타나서 대신 들어주었죠?
키레네 사람 시몬, 그 사람은 예수님 믿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그냥 군중이에요.
덩치가 크다 보니 로마 병사의 눈에 띄어 ‘야, 이리 와서 대신 들어.’ 한 거예요.
사형수 틀이 되는 십자가에 손만 대도 3년 동안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억지로 진 겁니다.
사실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몇 미터를 끌고 갔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동안에 예수님은 기력을 회복하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도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 봉양하는 자매, 옆에서 효부비를 세워준다 칭찬하죠.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어머니 돌아가시라고 하루에 몇 번도 기도한대요.
억지로 지는 십자가래요.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사랑하신다는 거죠.
십자가를 기쁘게 지기는 쉽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내 팔자라 하면서 질 십자가들이 많아, 우리는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님께 미안한 마음을 갖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나도 억지로 지는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단다. 괜찮다.’
이제 우리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가 부활할 날이 이제 딱 일주일 남았어요.
사순시기는 예수님을 부활시키려고 있는 주간이 아니죠.
부활한 예수님을, 또 우리가 뭐라고 그분을 또 부활시킵니까?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은 우리들이 부활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에요.
이제 거의 산 꼭대기까지 올라왔어요.
그리고 성 주간 동안에 우리는 십자가에 박혀야 해요.
그리고 부활절날 우리 부활해야 해요.
이제껏 사순시기라는 것을 의식도 못 하고 살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일주일 동안이라도 침묵하시면서,
그리고 말씀 가까이하시면서, 누가 시비 걸더라도 같이 맞서 싸우지 마시고 온유한 마음으로
마음의 평화 잃지 않으면서, 그리고 혹시라도 아직 성사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성사 보시고,
정말 깨끗한 마음으로 부활절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일주일 동안 근신하시면서, 싸움에 휘말리지 마시고, 혈기 부리지 마시고, 분노하지 마시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묵상하시고,
또 시간 되면은 빈 성당의 성체 앞에 가서 성체 조배 하시고,
그리고 일주일 동안 손에 묵주기도 놓지 마세요.
마귀가 여러분들 분심 들게 유혹하더라도 얼마든지 능히 이겨내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202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4/1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주님!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모여든 신자들의 정성이 하느님께 닫기를.
모인 것이 우리들인것 같아도 그 속에 하느님의 뜻이 계심을 압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