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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설교자? 행복한 설교자?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강단에 오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무례이다.”
서른 살,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던 그 해, 할아버지(고 손명복 목사)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그 해 가을에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한 참 지난 후에 이 말이 스펄전 목사가 먼저 한 말이란 것을 알았다. ‘하나님에게도, 성도들에게도 결코 무례하지 않은 설교자가 되는 것’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말’이 아니라 ‘삶’이었다. 설교자로서 혹 부족함은 있을지라도, 혹 연약함은 있을지라도, 무례함만은 결코 없는 종이 되기를 기도해왔다.
필자는 뭔가 내세울 것이 있는 뛰어난 설교자가 아니다. 그러나 감히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나의 삶 전체는 둘 중 하나이다. 설교 준비이거나, 설교이거나’ 목회의 초년부터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 것 세 가지를 지금까지 몸부림치며 지켜오고 있다. 결코 무례하지 않은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새벽 설교를 제일 큰 설교로 여기는 설교자
‘오늘’이라는 날은 우리 남은 생애의 첫째 날이다. 그렇다면 ‘오늘 새벽’은 우리 남은 생애의 첫 날 첫 시간이다. 이 귀중한 첫 날의 첫 시간에 주님 앞에 나온 성도들은 그야말로 보배 중의 보배이다. 이들이야말로 교회와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이며 복음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첫 시간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반드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반드시 성령님의 감동을 깊이 맛보아야 한다. 그런 그들 앞에 적당히 준비한 채 나서는, 무례한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주님께, 새벽부터 무례한 모습을 보여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담임목회의 초기에 이런 모토를 정했다. ‘새벽 설교를 제일 큰 설교가 되게 하자!’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이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기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새벽이 살아 있는, 새벽이 큰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새벽 설교에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새벽의 역사를 보게 됐다. 새벽이 살아있는 교회, 정말 새벽이 큰 교회가 됐다.
새벽 설교 덕에 제일 수지맞은 사람은 필자 자신이다. 새벽기도회 후 일과를 시작하기 전, 매일 한 장씩 꼭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됐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부끄럽게도 필자는 목회 이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매일 성경읽기를 3개월 이상 지속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걸 1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새벽 설교를 위해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정한 주님과의 교제가 됐다. 부교역자들이 설교하는 새벽을 앞두고도, 이 가슴 설레는 주님과의 말씀 교제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아침에 주님과 나눈 말씀은 심방과 상담에 있어 어찌 그리 절묘하게 효력을 발휘하는지,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깜짝 놀란다. 매일 주님과 나누는 말씀이 새벽 설교는 물론 주일예배와 다른 예배 설교 준비에 얼마나 기막히게 역사하는지 모른다. 필자에게 제일 큰 즐거움은 아침에 한 장씩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큰 설교는 단연 새벽 설교이다.
반드시 주실 ‘새로운 깨달음’을 끝까지 기다리는 설교자
‘뻔한 설교는 무례한 설교이다’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성경에서 ‘새 노래’ ‘새 날’ ‘새 일’ ‘새 것’ ‘새로운 피조물’ 이런 단어를 만나면 정말 좋다. 날마다 ‘새 설교’를 하고 싶다. 주님은 이 소원을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는 이 위대한 약속의 영역 속에 설교자의 설교 사역도 포함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 준비를 할 때마다 반드시 주실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감동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물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깊이 묵상하면서,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 연구하면서, 때로 참고 서적을 읽으면서, 말씀을 붙잡고 고민하며 씨름하며 부르짖으면서, 그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주실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갈급함으로 기다린다는 뜻이다.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기다리는 것이 만만치 않을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단언 컨데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은 없다. 주님은 반드시 그리고 기어이 감동적인 새 깨달음을 주셨다.
그 새로운 깨달음을 늘 설교의 핵심 메시지로 삼는 것은 아니다. 핵심 메시지는 이미 알고 있는 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깨달음이 설교라는 무대에서 주연의 역할을 하든, 조연의 역할을 하든, 엑스트라의 역할을 하든, 확실한 것은 그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서 설교의 무대가 생동감으로 가득 찬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 설교의 무대에 집중하는 청중들에게 새로운 감동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설교 준비 중에 혹은 매일 말씀 묵상 중에 그 새로운 깨달음이 마침내 임하면, 그래서 그 깨달음이 내 가슴을 적시고, 내 인격을 적시면, 춤출 듯 기뻐하며 말씀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 된다.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좋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주님이 너무 좋다. 살아 펄펄뛰는 이 눈부신 말씀이 너무 좋다. 말씀은 내게 날마다 첫 사랑이다. 말씀은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못살 것 같은, 언제나 풋풋한 연인이다. 필자는 오늘도 치열하게 준비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반드시 주실 새로운 깨달음과 그 감동을 영접하기 위해. 이런 기다림이야말로 하나님께 무례하지 않은 설교자의 모습이라 생각하면서.
몇 번이고 청중의 자리에 내려가 보는 설교자
설교 준비에 있어, 절반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나머지 절반은 청중들의 귀에 말씀이 들리게 하는 일에 투자하자는 것이 필자의 제일 중요한 다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과 청중의 중간에 서 있다. 설교자는 먼저 본문을 통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도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내야 한다. 그 다음 하나님의 그 뜻과 의도와 마음이 기필코 청중들에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자라면서 경험한 큰 아픔이 있다. 성령님을 통해 설교자에게 전달된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대한 하나님의 뜻이, 그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작 청중들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중도, 이해도, 감동도 안 되는, 아니 아예 들리지도 않는 설교가 존재한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심지어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설교를 하면서도 정작 설교자 자신만 그걸 잘 모르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물론 대부분은 그렇지는 않다. 일반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청중 속에 누군가는 들리지 않음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현실을 설교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존 파이퍼는 설교의 목표를 “피조물의 기쁜(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설교는 청중들을 말씀으로 설득해, 자발적인 순종이라는 변화를 일으키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설득은커녕, 변화는커녕,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귀에 들리지 않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는데, 어떻게 설득이 되고, 적용이 되고, 변화가 되겠는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는 살지만, 말씀을 받는 기쁨, 말씀에 순종하는 즐거움, 말씀을 따라 변화되는 감격을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설교자의 책임이다.
필자는 목회를 시작할 때 절규하며 외쳤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주십시오. 설교에 관한한 하나님을 묵상하는 만큼, 청중들 곧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양떼들을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청중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 청중들의 가슴을 울리는 설교가 되도록 저의 역량 전부를 투자하겠습니다.’
특히 새 가족,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새 신자 그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기존 성도들은 무난히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존 성도들이 적어도 설교에 있어서만큼은, 새 신자 대접 받는 것을 정말 기뻐하고 좋아했다. 들린다는 것이 주는 새로움 때문일 것이다.
들리는 설교를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내는 절반의 준비가 끝나면, 나머지 절반은 몇 번이고 청중의 자리로 내려가 본다.
‘어떤 멘트, 어떤 표정으로 시작하면, 청중들의 마음을 여는 데 도움이 될까?’
‘내가 교회에 처음 나온 청중이라면, 이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면 청중들이 계속 집중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어느 지점에서 적절한 유머, 적절한 영상, 적절한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면 좋을까?’
청중을 위한 이런 고민들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되면, 그 다음 드라마의 대본처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원고를 작성한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몇 번씩 고치고, 특히 청중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고치고 다듬고 재배치한 후, 시작 부분과 끝 부분을 온 정성을 쏟아 부어 만든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를 구한다. 설교자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아니 이 이상으로 하겠지만, 필자의 경우 전달을 위한 노력의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한 설교자
스스로 이 준비의 과정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행하는 창조적인 작업’이라 부르는데, 청중들을 위해 충분히 투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이 창조적인 작업이 정말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작업이 주는 최고의 보람, 최고의 열매가 있다. 그것은 이 창조적인 작업을 하다보면 원고가 거의 완전하게 외워진다는 것이다. 아니 원고의 흐름과 내용이 몸에 스며든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 결과 비록 원고는 세밀한 의도를 갖고 만들었지만, 전달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유익을 얻게 된다. 원고에 매이지도, 원고를 벗어나는 위험에 매이지도 않는 설교가 가능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과 소통하며, 동시에 거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청중들과도 소통하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눈과 그 설교에 반응하는 청중들의 눈이 마주친다는 것,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요 환희이다.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여러 가지 유형의 설교를 시도할 수 있는 자유로움, 청중들을 더욱 집중하게 만들만큼의 반전이 있는 제법 드라마틱한 설교를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은 이 창조적 작업이 주는 상여금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은 귀에 들리는 설교를 들으면 반드시 반응한다. 설교 중에도 반응하지만 무엇보다 설교 후에 반응한다. 설교자는 심방이나 상담을 통해 직접적으로 청중들의 반응을 듣기도 하고, 소그룹 모임에서 나온 반응들을 간접적으로 듣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령님이 그들을 통해 설교자에게 들려주시는 설교가 된다. 설교자는 그 청중의 설교를 붙들고 청중들을 위해 그리고 설교자 자신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 청중들의 설교를 생각하며 다음 설교를 준비한다. 그런 설교자는 하나님에게도 청중들에게도 결코 무례할 수가 없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설교자는 괴로워도 행복한 자이다.
추수할 것은 없고 일꾼도 적으니
어느덧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가을바람이 소슬한 계절이 됐다. 풀은 마르고 잎은 시들고 꽃은 떨어져서 모든 것이 지나가지만 금년은 유독 어려운 것 같다. 세월호가 침몰되면서 대한민국이 침몰됐다고 한다. 정치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울해서 집단우울증이 왔다고 말한다.
교회는 분주한 여름철을 지나고 가을을 맞이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행사가 아니라 행복이 돼야 하지만 여름철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지나며 교사도 지치고 아이들도 피곤하다.
어린이들도 줄어들고 교사도 없고…. 여름성경학교를 이대로 계속해야 될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가 성장 동력을 상실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침체되기가 쉽다.
성경학교에 성경이 없다. 수영과 게임과 간식은 있는데 성경교육은 자리 잡을 데가 없다. 헌신하는 교사들도 줄어들고 모이는 아동들도 점점 줄어든다. 전국적인 현상이 집회 회집인원이 줄어들고 임원이나 봉사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이 시대의 한 가지 특징이 되고 있다.
필자가 복음병원에 근무할 때 병원장이 하던 말이 기억난다. “여름철 무의촌 의료봉사활동을 나가니 정작 병원이 무의촌이 돼서 진료할 의사가 부족하다”는 아이러니한 얘기다.
어떤 교회는 건축하고 난 이후부터 이상하게 성장이 멈추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축 전에는 온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눈물로 기도하고 손에 손을 잡고 교회건축에 매진했지만, 어려운 건축이 끝난 후에는 허리띠를 풀고 마음을 놓고 기도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사이 영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도 없고 갈급한 것도 없어지면서 간절함이 사라진 교회가 되기가 쉽다.
옛적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 우리 어머니들은 가방끈도 짧고 집안에 돈도 없고 영감님도 도와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예배당에 가서 새벽마다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세월이 지나고 자녀들이 형통하게 되고 어머니들의 기도는 기어이 응답됐다.
지금시대는 풍요속의 빈곤이요, 정보의 홍수 속에 정작 마실 물은 없는 형국이다. 교회에서도 사랑하면 상처를 받고, 기대하면 실망하고,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고, 음식 끝에 마음이 상하고, 말끝에 시험이 들고, 명절 끝에 파혼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지치고 피곤하고 상처가 많다.
교회마다 건물은 커졌는데 첫사랑은 식어가고 기도의 골방은 비어간다. 기도회 때 훌쩍거리며 기도하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다. 찬송을 부르며 목이 메어 울먹이는 모습이 이제는 천연기념물 보듯이 희귀한 시대가 됐다.
마태복음 9장에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교회의 현실은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추수할 것도 없고 전도열매도 없고 심방할 가정도 줄어들고 할 일이 점점 없어지는 현실이다. 교회 일에 헌신해 몸을 바쳐 일하던 헌신자들이 점점 줄어든다. 교사도 적고 전도대원도 줄어들고 구역장을 할 사람도 부족하다. 어느 교회에서 대청소를 하니까 교인들은 안 오고 파출부들만 모였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다. 추수할 것이 없고 일꾼이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본다고 쳐도 정작 아쉬운 것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간청하는 기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어두운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한 명 디셉사람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수많은 거짓선지자들을 물리쳤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간절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성경은 엘리야 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기도의 파수꾼이 절실한 시대이다.
시대와 환경과 배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엎드리는 기도의 사람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대상 10:14). 인간관계의 소통이 어렵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기도로 소통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렵다.
추수할 것은 없고 일꾼도 적으니 주인에게 청해 일꾼을 보내어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된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가 사역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고쳐주신다.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는 주께서 응답하시고 만나주시고 열어주신다.
분주한 여름을 지나며 추수의 계절 가을을 맞이할 때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처럼만 되라는 말이 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는 아굴의 기도처럼 일용할 양식을 감사하고 한날의 괴로움도 그날로 족한 줄 알아야 된다(마 6:34). 늦은 비의 복을 주옵시고, 겨울 길도 감당하게 하옵소서.
손덕현 목사 / 서울보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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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이 너무 없습니다 카페지기 어려움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드네요...
6월입니다 결국 지난달 공과금 절반은 못냈습니다 공과금을 납부하도록 도와주세요
이번 6월은 병원에서 합병증검사와 췌장씨티.당화혈색소 검사를 해야하기 대문에
검사료 30만원 정도가 더듭니다 인슐린 약값 합병증 약값도 30만원이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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