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열린시학》신인작품상 당선작
헬로우, 크로커다일 외 3편 - 신운영
어제와 만나다 외 3편 - 강형오
운주사 생각 외3편 - 조숙형
헬로우, 크로커다일 / 신운영
악어의 눈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열대의 늪이 부글거린다
단물이 다 빠진 껌처럼 허옇게 부푼 발이 움찔한다
낯선 길에서 우린 쉽게 지쳐버렸다
어색한 이름이 서로에게 등을 기댄다
어디선가 악어새의 초록 휘파람소리 들려온다
악어의 늪이 고요해지고 있다
악어새가 이백육십 개 악어 이빨을 꼼꼼히 어루만져준다
육식주의자의 어둡고 퀴퀴한 입에서
동굴공포증이 물러나고 있다
악어가 천천히 입을 닫는다
악어 이빨과 발등 사이 오 밀리쯤 불신의 거리에서
꼭꼭 신발끈을 졸라맨다
악어가 악어새를 등에 업고 성큼성큼 길을 나선다
코를 벌름거리며 풀섶을 헤치고 계곡을 건넌다
종일 악어는 열대의 늪을 물었고
악어를 몰며 악어새는 악어의 등을 마구 짓이겼다
악어는 한 번 문 여자를 결코 놓지 않는다
핸드백을 흔들며 지나가는 저 여자의 손에서는
열대의 늪이 부글부글 끓는다
종달새 우는 부푼집 / 신운영
뽁뽁이 속에는 종달새
동그랗게 부푼 집에 예쁜 그녀가 살고 있지
나는 초록의 보리밭에 날게 하고 싶어
버드나무 그늘로 들이고 싶어
뽁뽁이 하나 터트리면
뽁, 하고
놀란 눈의 종달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가네
종달새는 가슴으로 콩알을 삼킨 새
돌아와 종달새야
호주머니 속으로 숨는 종달새야
종달새 손엔
별자리 찾아 떠도는 슬픈 눈의 소행성들
새알을 쥐고 눈물 흘리지
그만해, 알이 깨질까
종달새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을 수 없네
내 손은 고드름처럼 굳어 툭툭 부러지고
이름 지운 새는 강물에 익사하네
함부로 종달새 호주머니에 손 넣지 말 것
거기엔 위험한 뽁뽁이가 살고 있어
건드리지 마, 뽁뽁이를 지키는 종달새 한 마리
뽁뽁이가 잠들 때 종달새는 돌아오지
나는 구겨진 종달새 울음을 펴서 뽁뽁이를 싸네
겨드랑이에 끼고 백까지 세어볼까
셋에 한 번 깜빡이고
헛기침 두 번
그리고 길게 길게 심호흡.
매[鷹]의 기억 / 신운영
풀밭이 다녀갔다
털썩 내려놓았던 엉덩이 풀물 들어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넓적한 어금니 되새김질하며
초원을 거닐던 초식 습성을,
숨이 여린 짐승은 밤마다 풀밭에 귀 기울여
곤두선 수만의 시간에 짙은 풀물 들이는 것일까
초원을 가르고 날아 온 매는
부리에 묻은 휘파람을 초원에 닦았다
감춘 발톱에선 갈가리 찢긴 이리의 울부짖음이
한 방울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저물도록 언덕에 앉아
지평선 너머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림을 동경한다
그 숲 송곳니 감추고 서성이는 이리떼
붉게 충혈된 눈을 동경한다
신화 속에서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초원을 건너 온 바람이
아이 엉덩이 초원의 표지(標識)를 쓰다듬고 있다
초원을 들인 아이 단잠이 들고
푸른 요람 안에선
비와 황토 바람이 떨어진 화살처럼 순해진다
노을의 성찬이 끝난 후,
태양보다 먼저 길을 나선 전사들이
숨을 놓는 구릉을 끌고 온다
목덜미에 늘 상처를 입는 전사는 초원에 칼을 씻고
젖은 풀잎이 비틀거리는 발을 감싼다
발등 흥건한 저녁
점점 묽어지는 초원의 흔적
층층나무 / 신운영
몽환 속으로 그림자 하나 꿈틀거렸다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언 몸을 추스르자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다
머문다는 것은 끝없이 날개를 기우는 일
보라는 핏빛에 가까워지며 아름다워진다
넘어질 걸 알면서 상상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슬펐다
폭죽처럼 달아오르며 유월이 오지만
꽃은 피지 못하고
팝콘처럼 터져버린다
계절은 여지없이 덤이 되고
한 번 펼친 날개는 도로 집어 넣을 수 없었다
또 한 층 층계가 높아져
간지러운 겨드랑이에
방울방울 방울이 내걸린다
이제 곧 날개는 바람의 의자
소낙비의 북이 되고
깃털 젖는 소리가 온 산에 가득하면
보라는 다시 잊혀진 색이 된다
잎이 지는 가지를 따라
녹이 스는 소리
나무 속으로 사라진 방울 소리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신운영 시인
1960년 충남 공주 출생. '비유와 상징' 동인.
어제와 만나다 / 강형오
ㅡ 신강 위그르 박물관에서 미라를 보다
뜨거우면 서로 부딪치며 우는
嗚砂山 모래사막에
낡은 여자 하나 낙타 타고
칼날 같은 능선
모래산을 오른다
새김질 하는 낙타의 입눌림 검은 뼈 발자국
月牙川* 늪 깊은 눈은
오늘을 살면서
어제에 머물러 있다
구령에 맞춰 몸 일으켜
딸랑딸랑 방울소리
산도 멀리 함께 운다
모래 깊숙이
삼천 오백 년 전 고운 여자 하나
유리관 속에 누워 있다
감은 눈 속 회오리 모래바람
아득한 기억의 늪을 헤맨다
눈을 뜨면 살아온 모든 것
스르르 사그라질 것 같아 눈을 뜰 수 없다
숨이 멎지 않았다 다만
지나온 날들 안에 갇혀 있을 뿐
모래 울음 내 귀에 아직 가득
떠돌고 있지 않은가
코와 입술 날리던 머릿결 그대로
어제가 오늘에 떠서
천 년 시간을 그물질하고 있다
구겨진 발자국, 빛을 잃은 낮달
타는 듯 골목길과 아이들
울부짖는 맨발의 어머니를 찾아서
*실크로드 돈황 남쪽 5킬로미터 쿠무타크 사막 명사산 기슭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바닥 / 강형오
하늘을 마주보는
바닥이다
채소를 가꾸듯 들판을 떠다니는
햇살의 기착지
솟은 건물의 붉은 지붕과 피어난 하늘을 보는 순간 이 곳이 바닥이구나! 날거나 떠다닐 수 없기에 바닥, 사는 곳 눕는 곳이 바닥으로 삶이 단순해 보인다 나는 오늘 어디를 지치도록 걷다 깃털 가벼운 창 옆 의자에서 생각의 날개를 펼까 바닥에서 조금씩 가벼워질까
달팽이
갯펄을 기어 다니다
구멍으로 숨듯
평생 바닥에서
꽃이 되다
별이 되다
무덤으로 쏙 들어가
숨는다
신문에 난 부고가 그렇다
이쪽과 저쪽 / 강형오
그 무렵
바람이 머무는 맞은편 나팔꽃에
빗소리가 살고 있었다 하마터면
덜컹거리는 아우성으로
소곤거리는 그의 숨소리를 놓칠 뻔했다.
상추쌈 아귀아귀 씹는 소리
목울대를 끄르륵 넘어가는
만성 해수병 환자*에게
피부는 헉헉 모공을 열어
풀들이 비와 함께 가벼이 비상하는
은근한 날갯짓을
못 들을 뻔했다.
누군가와 부딪고 싶어 하는 비
풀밭에 떨어지자
새어나오는 환희의 오르가니즘은
푸르고도 은근했다
늙어 골다공증이 되어 덜덜거리는
소리 맞은 편
유연한 것은
대지와 하늘을 순환하는 비와 풀잎 소리 뿐,
나는 두 개의 와우각(蝸牛殼)*으로
이쪽과 저쪽을 마주하는
여름 날
길게 누운 작은 언덕이었다
*낡은 선풍기.
*달팽이 속귀.
염소 / 강형오
배가 불룩하고 불그레한 눈을 가진 하얀 염소를 키웠습니다 해가 길어지던 봄날, 퇴근하여 마당에 들어서니 방금 낳은 새끼 두 마리를 어미염소가 혀로 핥아주고 있었습니다 갓 세상에 나온 새끼들은 두어 번 다리를 꺾다 일어서더니 금세 툇마루를 겅중겅중 뛰어 다닙니다 그 무렵 나도 예쁜 딸을 낳았지만 멀리 산골에서 온 소녀에게 맡기고 날마다 염소만 데리고 학교에 갔습니다 가다가 산길 풀밭에 매어 두었습니다 못 먹여 힘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염소의 목 힘은 장사여서 끙! 하고 고개를 돌리면 내가 질질 끌려갔습니다 산길에서 아침마다 염소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퇴근하며 데리러 가면 말뚝에 칭칭 줄이 감겨 앞다리가 들린 채 어메~ 반가운 듯 울었습니다 마른 콩을 주면 후루룩 먹었습니다 해 질 무렵 젖을 짜, 네 살 아들과 함께 마셨습니다 키우기 힘들어 새끼들을 어미에게서 떼어 놓던 날 염소는 어메~ 어메~ 길고 슬프게 울어 멀리 서녘 노을도 불그레 떨며 울었습니다
돌을 앞둔 막내 남동생을 홍역으로 보내던 날
고향집 전봇대에 기대어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의 긴 흐느낌이었습니다
강형오 시인
전북대학교 문리과 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 시립대학 시창작과 수료. 경기도 중등교사 역임.
운주사 생각 / 조숙형
1
무슨 사연 있어 쫓기는 자들이
희망의 땅 물어물어
전라도의 양산박
화순 천태산에 모였다던가
미륵세상 가는 지름 길
불국정토라 믿고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켜켜이 쌓은 천불 천 탑의 절집
생각이 통 했으면
이미 이루었다
와불臥佛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더군.
2
비가 오면 중장터엔
땡중들 모여들어
호리병을 까는 소리
잘들 계셨지라우 응 그려 안거 자네들도 별일 없었제 잉 자네들 얼굴 본께 벌써부터 고파부네 자, 언른 받으시오 크ㅡ윽, 크ㅡ으 아따, 포도청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또랑물이 내려가요 그려 성님! 여기까지는 안오것제라우 설마 여까지 오것능가 이사람아 디질라고 동상! 현상금이 워낙 쎄분께 혹시 오면 한두 놈은 안 올거여 그러니 한사코 방심 말어 비가와도 입소문 듣고 포졸 나불랭이 새끼들이 올지 모르니까 그렇고 말고요 고놈들이 안 올 놈들이요성님 말씀이 옳아요 쉬ㅡ쉿 누가 온갑다
지금도 비가 오면 중장터엔
목 부러진 원혼들이 저쪽 운주사에서
떼굴떼굴 굴러온다
3
목련 향 은은히 배 적삼에 스미면
한 아름 안고 아버지 산소에 가자더니
누이야 보아라 창 밖에 목련이 핀다
아픈 기억 지그시 누르고 일어서면
소복한 네 치맛자락 끝에도 봄은 와
너는 눈부신 목련 한 송이.
매서운 바람 견디어 온 인동초
기지개 펴는 소리
가슴앓이 터뜨리는 소리 들으렴
운주사 산정의 슬픈 와불이 되어
구름 속 달처럼 우는 누이야
붉은 카펫 / 조숙형
천 냥 무거운 아버지 치료비를
목사의 도움으로 퇴원했다
아들은 늘 가슴 한 구석에
빚진 은혜가 은하처럼 떠돌았다
26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병원 계좌로 1천 만 원을 송금하고
그 동안 아버지가 짊어지고 온 마음의 짐을
이제야 가볍게 내려 드린다고 말했다
기사를 읽는 순간
가슴에 뭉클 파도가 일었다
눈시울에 붉은 카펫이 깔리고
사람다운 사람 하나가
그 위를 걸어 나에게로 온다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시다.
복불복 / 조숙형
로또복권 몇 장 샀다네
막걸리 마신 것처럼 뱃속도 든든하네
누군가 원요일 날 사가지고
그런 기대감으로 추첨일 동안
병아리 알같이 품는다하더군
당첨확률이 80만분의 1 이라니
애초부터 답은 없는 거지만
뽀짝거려야 떡고물이라도 얻어먹는다고
자동으로 하든 숫자를 찍든
어디 한번 사보는 거라네
만약에, 말 일세 혹시 안가?
그러다가 딱 걸려
돈다발 뭉치, 한 웅 큼 쥐고
탁 ㅡ 방바닥에 한 번 던져 주고픈
사나이 소망 이루어질지 말이여
ㅋ ㅋ
내 복에 무슨 복 하면서도
로또복권 가게 앞을 지나가면
한두 장이라도 사야 직성이 풀렸거든
그게 습관의 독 이었어
복불복이라는.
야구공 / 조숙형
내 몸뚱이는 왜
108개 솔기로 엮어진 것일까?
수신호가 오가고
투수의 주술내린 손끝에서
물수제비처럼 날아가
딱!
운명처럼 한 방 크게 얻어맞고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백팔번뇌를 날려 버리듯
열광하는 저 삶에 지친 사람들
해탈의 통쾌한 몸짓이라니
그래!
내 몸뚱이를 108개 솔기로 엮어 놓은 건
우연만은 아니었어.
조숙형 시인
전남 광주 출생. 1993년 《문학공간》신인상. 광주죽란시사회 회원. 현 광주광역시문인협회 사무국장.
심사 : 이상국, 정일근, 이지엽
《열린시학》201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