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오디세이] 6. 분황사
한반도 첫 여성군주 '선덕' 향기 가득한 절을 세우다
분황사 전경. 괴질의 영향으로 절이 텅비었다.
5월 끝물의 분황사 들판은 황금빛 보리의 바다에 떠 있다. 황색이 짙어 붉은빛을 뿜어낸다. 보리 바다의 수평
선 끝을 남산이 막아서고 보리밭이 시작되는 지점에는 구황동 당간지주가 우뚝 섰다. 천 년 동안 비바람 맞고
서 있는 이 석조유물은 빛나는 문화유산으로서 보다 일렁이는 보리와 함께 괜찮은 포토존으로 각광을 받고 있
다.
보리밭을 등지고 분황사에 들어서면 경내는 적요하다. 괴질 때문에 봉축법요식이 한 달 연기됐다 하더라도
그래도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인데 절은 ‘절간같이’ 적막하다. 사람들은 보리밭에서 사진을 찍은 뒤 미련 없이
절을 떠났고 소망을 품은 몇몇이 연등으로 장식한 석탑 주위를 돌며 소망을 빌었다.
분황사앞 들판의 보리밭
분황사는 634년 선덕여왕이 세웠다. 여자가 왕이 되자 우려와 조롱이 넘쳐났고 권위가 떨어지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건립했다. 황룡사 9층 목탑도 세웠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위기간
16년 동안 정치적 위기를 자주 맞았다. 결국 비담이 난을 일으키자 신병으로 숨졌다.
분황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여인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 때문인지 경주시가 분황사 앞 너른 들판에 철철이
꽃을 심어 구경거리다. ‘분(芬)’은 ‘향기롭다, 부드럽다’는 뜻이고 ‘황(皇)’은 ‘임금’과 같은 의미다. 황룡사 황복
사 등과 마찬가지로 사찰의 주인이 왕임을 명시한다. 자장 의상 원효가 설법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신라십성
(新羅十聖) 가운데 3명의 대사가 이곳에서 주석한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 법요식을 앞둔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높이 9.3m로 현재는 3층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7층 또는
9층으로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위 네 모퉁이에 수컷 2마리와 암컷 2마리의 사자상이 배치됐고 탑신
의 사방 감실에는 좌우에 인왕상이 조각됐다. 돌을 잘라 벽돌처럼 쌓은 조성양식도 독특하다.
김정희가 글씨를 새겨 넣은 화쟁국사비부.
석탑 북동쪽 옆에 화쟁국사비부가 있다. 고려 숙종이 원효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비석과 시호가 없다며 대성
화정국사라는 시호와 함께 세운 비부다. 비신은 없어지고 비부만 남았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추사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이것이 신라 화쟁국사비의 흔적이다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는 각자를 새겼다.
『삼국유사』에는 분황사 관련 기사가 여러 건 나온다. ‘아도기라’조에 나오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가
그중 하나다. 칠처가람지허는 전불칠처가람(前佛七處伽藍)을 일컫는데 석가모니 이전 과거 부처가 설법하던
7곳의 사원을 말한다. 분황사가 그중 하나다.
분황사약사여래.
755년 경덕왕 재위시절에 분황사 약사동상을 조성했는데 무게가 무려 30만6700근이며 이를 만든 사람은
본피부에 사는 강고내말(强固乃末)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보광전에 있는 약사여래입상은 1608년 광해군
원년에 현재의 보광전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
분황사에 대한 신라인들의 기대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분황사 천수대비 맹아득안’편이다. ‘희명(希明)의 눈먼
자식 구하기’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일이다. 한기리에 희명(希明)이라는 여자가 살았다. 자식이 다섯 살이
되던 해 난데없이 앞이 보지 못했다. 자식의 실명은 어미에게 청천벽력이었다. 희명 자신이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이름 희명은 ‘광명을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연한 불행이 덮치자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힘든 일에 시달리는가. 사람들을 붙잡고 방법을 묻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
얻은 해답이 분황사 천수관음이다.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벽화일 것이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
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
무릎을 곧추세우며/두 손바닥 모아/천수관음께 비옵니다/천수천안/눈 하나를 내어/하나를 덜기를/ 둘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아아 나에게 주시오면/그 자비가 얼마나 클까요.
희명이 지었다는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다.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졌으니 하나
정도 내게 주면 어떤가. 나는 눈이 둘 다 없으니 하나만 주시면 그 자비가 얼마가 크겠는가. 어미와 자식의 간절한
소망을 관세음보살이 들어줬다. 아이는 눈을 떴고 분황사는 신라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찰로 기억됐다.
이 대목과 관련해 이어령의 해석이 눈길을 끈다. 그는 유사에 나오는 절들의 기록을 훑어보면 사찰이 오늘날의 정
부기관이나 행정관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황룡사 9층탑은 삼국통일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의
통일문제연구소나 국가안전보장회의 쯤 되며 호국사찰인 사천왕사는 국방부, 중생사는 아들이 없는 사람이 빌면
아들을 낳게 해주는 산부인과, 분황사는 희명의 사례에서 보듯 눈먼 사람 눈 뜨게 해주는 안과 역할을 했다는 것이
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금광명경소』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분황사에 들어오기 전 원효는 요석공주
와의 사이에 설총을 뒀다. 요석궁에서 사흘을 지내면서 생산한 자식이다. 원효가 죽자 설총이 그의 유해를 부수어
진흙으로 그 모습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설총이 옆에서 예배할 때마다 소상이 돌아보곤 했는데 일연이 삼국유
사를 쓰던 그 때까지 원효의 소상이 돌아보는 모습으로 있었다고 기록했다. ‘원효불기’조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유사와 관계없이 부자간에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설총이 원효의 소상을 정성껏 모시는데 하루는 원효가
설총에게 말한다. “네 마음을 쓸 듯이 마당을 깨끗이 쓸어라” 설총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려고 나와 보니 이미
누군가가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았다. “쓸데가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
오늘날 사용할 곳이 마땅히 없다, 쓸모가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쓸데없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일연은 원효 소상 앞에서 숙연해져서 이렇게 찬미했다.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경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로병은 마침내 온 길거리에 바람 타며 걸려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소상 허망도 하여라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호국삼룡변어정.
분황사 석정은 신라시대 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우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우물은 지름 1.2m, 우물담
높이가 72cm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 우물 중 가장 크다. 화강암을 통째로 써서 안쪽은 둥글게 팠다.
바깥의 상부는 8각형으로 다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벌어지는 꽃잎처럼 모양을 잡았다. 이 석정이 호
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魚井)이다.
원성왕 때 일이다. 당나라 사신이 한 달 동안 머물다 갔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분황사 우물과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못에 사는 세 마리의 호국룡에게 주문을 걸어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가 버린다. 동지와
청지 용의 부인인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왕은 사람을 시켜 하양관(지금의 경산 하양)까지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는데 이 우물이 호국삼룡변어정이다. 나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통쾌한 첩보전을 떠올리게 한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완전한 삼국통일이 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
나라는 신라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신라가 당나라의 음흉한 계략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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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김동완 역사기행작가 ㅣ 승인 2020.05.28 ㅣ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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