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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역사학과 춘계 정기답사 리포트
역사학과 20132250 이선오
이번 춘계 정기답사로 공주, 부여, 논산, 보은을 다녀왔다. 3박4일간 수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가장 기억이 남았던 곳이 부여의 부소산성과 보은의 삼년산성이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를 방어하던 산성이고 삼년산성은 통일전쟁시기 신라의 최전선을 지키던 요새이다.
Ⅰ.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백제의 도읍인 사비를 지키는 도성의 역할을 하는 성이다. 사비에는 부소산성뿐만 아니라 나성이 존재하지만 백제의 왕궁을 바로 근접에서 방어하는 성은 부소산성이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의 정상과 계곡을 둘러 싼 퇴뫼식(山頂式)과 포곡식(包谷式)이 합쳐서 나온 성이다. 그리고 부소산성의 재료는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의 성이다. 또한 부소산성 성벽 근처에서 목책(木柵)을 설치한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와가 발굴이 되기도 한다. 이 것의 의미는 부소산성 토성(土城)을 만들기 전에 목책을 설치하여 임시 방어선을 구축해 두었던 것이던가, 아니면 토성 뒤에 목책을 설치하여 이중으로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추측된다. 그리고 토성 근처에서 기와 조각이 발견되는 것은 아마 토성의 취약한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토성 위에 담장을 쌓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소산성을 올라가는 길에 삼충사(三忠寺)라는 사당이 있다. 원래 이 자리는 산줄기가 이어지는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이 곳에 서울 남산 신궁에 이은 두 번째 신궁을 짓고자 하였으나 제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인한 광복으로 실패하자 1957년에 이 자리에 백제의 마지막 세 명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이 부소산성 안에는 여러 건물지가 나왔다. 백제군이 있었던 군사시설지도 있고, 조선시대 군수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로도 계속 요충지로서 부소산성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부소산성 밖에 낙화암(落花巖)이 있다. 낙화암은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의 삼천 명의 궁녀가 뛰어내린 곳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낙화암을 봤을 때 사람이 곱게 떨어지기에는 돌출되어 있는 바위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낙화암은 사람이 백마강으로 뛰어 내리는 곳으로는 적당하지 않는 것 같다.
Ⅱ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삼국시대 시기 신라가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교두보와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삼년산성은 산 정상을 두른 퇴뫼식 산성으로 성의 규모는 커 보이지 않지만 산에 오르는 길이 가팔라서 성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또한 성벽도 높아서 쉽게 성을 공격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실제로 그동안 이 곳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이 성을 공격하는 측에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산성은 토석혼축으로 이루어진 부소산성과는 달리 이성은 성의 재료가 오로지 돌로 이루어진 협축(夾築)의 석성이다. 또한 이번 답사 때에는 확인하지 못 하였으나 삼년산성의 성문은 쉽게 공격받지 못 하도록 만들어졌다. 삼년산성의 서문에는 두 개의 옹성을 설치하였고, 동문에는 이중꺽임의 구조를, 북문에는 이중 차단벽을 남문은 현문식(懸門式)으로 지어 사다리가 없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의 가장 취약지구인 성문을 이중의 방어시설로 방어력을 높였으며 성벽에도 치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이렇게 산 정상부에 위치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곳인데다가 성벽에도 이중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었다.
성의 서문 안에는 큰 연못의 흔적이 있는데 서문에서 아미지(娥眉池)라는 글이 발견되어 그 자리에 연못이 있어서 식수를 해결했음을 알 수 있다.
Ⅲ. 성의 종류
성에는 재료, 축성 위치, 목적 등의 기준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어진다. 재료에 따라 석성과 토성(土城), 목책성(木柵城), 전축성 등이 있다. 위치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산성이 있고, 목적에 따라 도성, 궁성, 장성, 진성 등이 있다.
성의 재료에 따라 성을 구분하지만 석성이나 토성은 온전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것은 드물고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든 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들어진 종류는 토석혼축이 있다. 토석혼축의 성은 흙으로 만든 성 안에 돌을 넣어 쌓은 것으로 비에 약한 흙을 보완하기위해 돌로 기초공사를 하고 그 위를 돌로 덮은 것이다.
순전히 흙으로 만드는 방법에는 판축(版築)과 성토(盛土), 삭토(削土)의 방법이 있다. 그 중 판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판축법으로 쌓은 토성은 성을 쌓기 전에 나무 기둥으로 기반을 쌓아놓고 그 속을 점성이 강한 흙으로 채워 넣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냥 흙으로 쌓는 것 보다 더 단단하게 쌓을 수 있어 토석혼축(土石混築)을 할 수 없는 평지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이 방법은 다른 방법과는 달리 흙으로만 10m 가까이 높은 성벽을 단단히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대표적인 판축식 토성은 풍납토성이 있다.
성토법은 단순히 흙을 쌓아서 만드는 방식이다. 이 방법 역시 판축법만큼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문헌상에는 보이지 않고 또한 판축과 구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삭토법은 산의 지형지세를 성벽처럼 급경사로 깎아서 만드는 방법으로 지형상 토성이나 석성을 쌓을 수 없는 곳에서 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성이다. 이 방법은 산성이나 장성, 행성 등지에서 판축법, 석축과 함께 성곽의 일부를 구성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축성방식이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법이라 실제 지형과 삭토법으로 된 성벽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흙으로 만드는 방법 외에도 나무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드는 방법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후기로 올수록 석성과 토성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나무로 만든 성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목책(木柵), 목성(木城), 목책도니성(木柵途泥城), 녹각성(鹿角城) 등이 있다. 목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나무로 담벼락을 만드는 것이다. 이 방법은 토성과 석성에 비해 사람의 노동력이 적게 들어서 어느 시대나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목성은 나무를 빽빽이 심어서 그 나무들이 목책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성은 나무로 규모로 적들을 압도하여 공포감을 심어주고 목성의 통과를 어렵게 하며 아군의 적군 공격을 원활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목책도니성은 목책으로 기본 구조를 만들고 거기에 진흙을 발라 하나의 토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불에 약한 목책의 약점을 보완하고 목책을 쌓는 인력으로 석성 못지않는 토성을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목책도니성은 조선 초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던 전라도 일대에 소규모로 많이 지어졌음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성은 돌로 만들어진 석성이다. 석성은 목책과 토성과는 달리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력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으나 목책과 토성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목책과 토성으로 이루어진 성도 후에 석성으로 바꿔 축조하였다. 이러한 석성의 양식에는 편축법, 협축법, 전축법이 있다.
편축(片築)은 성의 외면 만 돌로 쌓고 내부는 일정한 두께의 돌과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산지나 평지 어디에서도 축조가 가능한 방식이라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현재까지 많이 남아있는 방식이다. 또한 산지에서 이 방식을 사용하면 산지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를 하기 때문에 평지에 축조하는 편축법 석성에 비해 드는 재료와 인력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다.
협축법(夾築)은 성의 내외 벽을 모두 돌로 채워 넣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지형이 평평한 곳에서 사용이 된다. 이러한 지형에서는 협축으로 축조하는 방법이 편축으로 축조하는 방법보다 더 축조하기 쉽기 때문에 많이 이용하였다.
전축(塼築)법은 전탑처럼 벽돌을 만들어 그 벽돌로 성을 쌓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이었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전통의 석성과 혼합되어 축조되었다. 대표적인 성이 강화성과 남한산성, 수원 화성이다.
성의 목적에 따른 분류는 도성(都城), 궁성(宮城), 행성(行城), 장성(長城), 진성(鎭城), 읍성(邑城) 등이 있다.
도성은 한 나라의 도읍을 방어하는 성이다. 왕성(王城), 황성(皇城)이라고 불리며 일부 도성에서는 나성으로 2중 3중의 방어선을 구축한 곳도 있다. 도성은 한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을 방어하는 성으로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나 다름이 없던 성이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도성은 서울 성곽과 평양의 평양성, 개성이 있다. 부소산성과 부여의 나성도 백제의 도읍을 지키기 위한 성이므로 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궁성은 도성 안에서 왕이 사는 궁궐을 방어하는 시설이다. 궁성은 도성과는 달리 석성이나 토성이 아니라 일반 담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궁성만의 특징이다.
읍성은 지방의 읍의 관청이 있는 곳에 방비를 위해 쌓은 성이다. 읍성은 방비를 위한 성이나 평지에 쌓은 평지성이라 근체에 있는 산성과 연계하여 방어를 하였다. 읍성은 중국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으나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산성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산성에 비해 방어력이 취약한 평지성이라 많이 이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읍성이 중요하게 대두된 시기는 고려 말부터이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늘어나자 그에 대한 방비책으로 읍성이 다수 축조되었다. 또한 산성과 백성들의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읍성이 다수 축조되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거친 후 산성과 읍성 모두를 이용하는 방식이 조선 후기에 이용되었다.
장성은 국경지대에 길게 축조한 성곽이다. 대표적인 예로 중국의 만리장성, 고구려의 천리장성, 고려의 천리장성이 있다. 기존의 성곽을 연결하여 토성으로 쌓거나 석성으로 길게 이어서 쌓는 방법이 있다.
참고문헌
손영식, 「한국의 성곽」, 주류성, 2011,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14. 성곽, 경인문화사, 2012
첫댓글 석성, 토성, 목성 말고 벽돌로 만든 성은 존재 하지 않나요?. 무령왕릉이나 발해 무덤같은 경우를 보면 흑을 구워서 만든 벽돌무덤도 많은데 성에는 이용하지 않았던건 궁금하네요.
우리나라에는 벽돌로만 이루어진 성은 없습니다.
대신 성의 일부를 벽돌로 만든 성이 있습니다.
답사리포트에서 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니 평소에 성에 많은 관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설명에 비해 느낀 점이 조금 없어서 그런 점은 개인적으로 아쉽네요 :) 좋은 설명 잘 읽었습니다 !
낙화암에 돌출된 바위가 많아 '곱게' 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는 의견이 무척 충격!적입니다.
성에 대해 재료, 위치, 목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조사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름이 예뻐, 녹각성이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말 그대로 사슴뿔 과같이 성 주위에 나무 울타리를 치는 거였네요. 성곽뿐 아니라 야외 행궁에도 설치한다는게 신기합니다. 사용되는 가시나무들은 고을에서 식목을 권장한다는 것이<주례>에도 나오고요.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