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행 9장 10-18절
설교제목 : 하나님의 듀얼 모드
아침을 깨우는 사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쉬이 지치고 피곤해집니다. 잘 드시고, 건강하게 이 장마를 보내시길 빕니다. 지난주에 친구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새벽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10일 동안 외국선교여행으로 대신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오랜 만에 새벽에 기도하는데, 따뜻한 품에 안긴 듯한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매일 거의 동일한 성도님들이 나오셔서 예배드리고 계셨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제 마음 속에 떠오른 이름 혹은 정의가 있었습니다.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 “교회의 든든한 희망의 불”, “세상에 희망의 불꽃” 이런 이름들을 붙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기도로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분들인지 새삼 가슴 속에 다가왔습니다. 시편 108편 2절에서 시인의 고백처럼, “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고 노래하며 새벽을 깨우며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듀얼모드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빛으로 실명을 하고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그 자신에게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는 음성을 듣고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성으로 들어올 때 주님은 또다른 사람을 준비시킵니다. 다마스쿠스에 사는 아나니야입니다. 주님은 환상가운데 아나니아를 호명하시고 그에게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두가지 모드로 작동하셔서 사울과 아나니아에게 각각 나타나셔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시력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는 사울을 위해 아나니아를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은 시공간에 제한된 인간이 의식적으로 조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두 사람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동시성적 사건과 유사합니다. 동시성적 사건은 비인과적인 우연의 일치로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사건이 시간을 달리하여 의미있는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이라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험적 패턴이 있고, 그것은 서로 이질적이며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의미상 동류성을 띤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사건은 어떤 의미있는 현상의 배열의 한 국면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 어떤 예기치 않은 사건은 또다른 삶의 국면을 펼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예정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에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삶의 길을 굳굳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차단되고 막연하게 기다려야만 할 때 나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또다른 곳에 일어고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고 있는 중에 밤해 동풍을 불어 물을 말리셨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서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해가고 계십니다. 나를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저 너머에서 날 위해 준비하고 게심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어 그를 고치라고 명을 받고 나서 당황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에게 해를 끼쳤던 악명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듣자하니 그가 사람들을 옥에 가두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그 사람을 만나서 기도해주라고 하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이건 받아들이기 힘든 소명입니다. 두려운 호출이었습니다. 위협을 무릅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잡아 죽일지 모르는 사울에게 가는 일은 호랑이굴로 죽기를 각오해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이런 납득할 수 없고, 두려운 일 앞으로 가야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은 안전한 길도 아니요, 인기를 얻는 길도 아닙니다. 성공과 출세를 위한 길, 잘 닦아진 완벽한 조건의 길이 아닙니다. 나에게 두려움과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길로 가야할 때, 길 없는 길을 내야만 할 때는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일 것입니다. 갈등과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의 순간입니다.
나의 택한 그릇
아나니아는 그 두려움을 딛고 일어나 사울에게 갑니다. 아마 주님께서 그를 향해 품고 있던 계획을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나의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15-16).”
주님은 사울을 가리켜 우리의 적대자나 핍박하는 원수가 아닌 내 이름을 위해 고난받을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지목한 그릇을 자신의 제한적인 시각으로 판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사울을 향해 붙여진 수식어가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나의 택한 그릇’입니다. 택하신 그릇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선택된 도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이라는 표현 속에 존재의 의미를 아주 명확하게 확증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이 택하신 자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엇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이나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도 고백합니다. 심지어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선택하시고) 은혜를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자이고 선택된 자라는 분명한 인식 속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은 어떨까요? 자신보다 더 위대한 인격과 연합하여 살게 되고, 자아를 넘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소명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헛되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개인성의 엄청난 증대로 인하여 자신이 자신보다 더 큰 운명의 부름 속에 있다는 감각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왜 위대한 이념과 종교에 봉사해야하는지, 자신보다 더 높은 관념에 헌신해야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추구에만 골몰합니다. 이것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자아만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더 깊은 고립감과 이기심으로 인간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이라는 사울의 수식어가 우리에게도 붙여질 수 있는 그런 존재의 별칭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로 받아들임
아나니아는 사울을 향한 주님의 계획에 순복하여 사울에게 찾아갑니다.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말합니다.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17).”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고, 긴장을 견디며, 사울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형제라는 헬라어는 ‘아델포스(adelphos)’입니다. 이는 ‘델피스(delphys)’에서 유래한 말로서 자궁을 뜻합니다. 한 태중에서 난 사람들이란 의미가 형제입니다. 아나니아는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아델포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형제로 사울을 품은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공동체 안의 모든 이는 한 형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을 아나니아가 형제로 받아들였듯, 나를 반대하고, 심지어 나와 적대적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그곳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만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처음 교회가 주인과 노예, 남녀노소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이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대 계급사회에서는 혁명적이고, 사회전복적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자, 심지어 나의 적대자까지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나니아처럼 두려움을 넘어서 적대자까지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과 순명이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운명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개입되고 실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