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오랫동안 본당에서 전신자 성지순례를 위하여 준비해서 오늘 2024년4월7일, 그 대단원의 막을 올리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십 수년 전에 공세리 성지등을 전 신자가 다녀 온 후, 꽤 오랜만에 떠나는 성지 순례이다. 여운동 바오로 신부님께서 부활 행사도 하지않고 성지 순례에 힘을 많이 쓰신것 같다.
주변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특히 벚꽃은 금호강변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어 꽃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강변에는 수양버들이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 입고 축 늘어져 춘심(春心)을 건드린다. 뜰에는 영산홍이 떼를 지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도로 양켠에는 가로수에 연두색 이파리들이 머리를 내밀어 신록의 계절이 온 듯 하다.
1~6호차 까지 구역별로 인원을 배정하여 구역장을 조장으로 하고 부조장을 지명하였다.
차량별로 승차 인원을 파악하고 탑승 후 아침 7시에 동대구 IC를 거쳐 배티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고속도로 양켠에는 신록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맞는다!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어 속리산 휴게소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이 되었다. 그 곳에는 구병산(九倂山 876M) 9개의 병풍이 쳐 진것 같다하여 뷸리는 이름이다. 젊은시절 최고봉 도 밟아 본 곳이라 더욱 마음이 설레인다. 가까운 지인들과 구병산을 배경으로 연이어 사진을 찍어된다.
한 30여 분을 더 가니 배티 성지가 눈에 보인다. 예부터 충청도 진천 땅은 고즈넉한 자연과 과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곳으로 물이 좋고 살기 좋다는 뜻이리라, 주변에 진천 농다리가 꽤 유명 하며,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은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땅이 좋다 라는 뜻이다.
7~8년 전에 전국 성지순례를 할 때에는 이렇게 큰 건물들이 없고 오솔길로 다녔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성지 입구에는 진달래가 느부러 지게 피어 우리를 환영한다. 산상제대로 올라가는 길에 카터가 있어 불편한 순례자들을 태워 나르는 수녀님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전국에서 5백 여 명이 산상제대로모여 미사를 참례하게 되었다. 신부님께서는 미사전 부터 최양업신부님의 치적에 관하여 많은 설명을 하셨다.
강론중에 어릴 때 미사 참례시 춘부장께서 거룩한 변모 중 거양 성체시 입으로 중얼중얼 거려서 무슨 내용인가 나중에 물었더니 "내 주시오, 내 천주시로소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님들이 하느님 공경의 숨결이다. 선조님들의 공경의 뜻들이 전해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참으로 좋은 숨결을 받을 수 있음에 보람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을 잠궈놓고 있는 제자들앞에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렸을 때 모두 도망을 간 상태라무섭고, 미안한 제자들의 마음을 읽어시고 안정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라고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 주셨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의 은총을 빌며 그의 전구에 힘입자라고 하셨다.
산상 미사를 마치고 산채 나물에 도토리묵을 포함한 다양한 반찬으로 오손도손 둘러 앉아맛 있는 식사를 마치고, 각 구역별로 십자가의 길을 마치고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박물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및 성당 및 사제관을 둘러 보며 단체 사진과 구역별로 촬영하는 시간을 보내며 보람된 성지 순례가 되었다. 준비하고 진행하고 마무리까지 수고하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ps : 충청도 진천땅은 경기도와 인접하여 박해시 충청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피신 하기 좋은 곳으로 선조님들의 지혜가 스며 있었다.
■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생애
1821년 3월1일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성인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충남 청양 다락골의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15세 때인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조선 교회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고, 1844년 12월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먼저 사제품을 받고 1845년 가을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1846년 9월16일 병오박해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자,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포함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마침내 최양업 토마스 부제도 1849년4월15일 상해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해 5월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베르뇌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인 12월 말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하자마자 흩어지고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전국 120여 개의 교우촌 순방을 시작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12년 동안 해마다 7천 리(2,800km)가 넘는 길을 쉼 없이 걸으며 사목하였고, 휴식 기간에는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옮기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여느 때처럼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서울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계속된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안타깝게도 1861년 6월 15일 문경 또는 진천 교우촌에서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고, 그해 11월 제천 베론에 안장되었습니다.
서양에 바오로 사도가 있다면 동양에는 최양업 신부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대단하고 괄목할 만하였다. 1849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도착한 그는, 단 하루만 쉬고는 바로 다음 날부터 사목활동에 들어가 그 가 과로로 쓰러져 숨진 1861년 6월15일까지 12년간 구만리를 되는 거리를 발로 뛰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5개 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 해도 127개나 되어 1년간 7,000여 리를 두루 다녀야 했다. 차분하고 겸손하였던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교우들을 돌보고, 위로해 주고, 성사를 베풀고, 예비자를 가르쳤다.
최양업 신부는 장마철이 되면 비 때문에 전교 여행이 어려웠으므로 충북 진천의 ‘배티’에 머물면서 그간의 지친 몸을 쉬곤 했는데, 그 와중에서도 교우들을 위해 책을 저술하였다. [천주가사]를 직접 지어 보급 시켰고, [천주 성교 공과]를 번역하였고 [성교 교리문답]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라틴어, 프랑스어에 뛰어났던 그의 어학 실력은,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전을, 상해에서 프랑스 사전의 도움 없이 라틴어로 번역할 정도였는데, 그 번역문은 르그레주아 신부가 몇 개의 오자(誤字)만을 수정한 채 그대로 로마교황청으로 보낼 만큼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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