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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특집-2 : 한국 천주교 성지개발, 이대로 괜찮을까?- “선조 신앙인의 공로에 적어도 먹칠은 말아야”
편집자 주)
올해 3월부터 가톨릭프레스는 매월 특집 주제를 선정해 주제와 관련한 내용을 취재하고 분석하여 연재 보도 합니다. 특별보도팀 ‘저스티스(Justice)’는 가톨릭프레스만의 살아있는 언어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네 번째 특집 주제는 [성지]입니다.
천주교의 지능적인 성지화 전략
성지개발과 관련한 이 같은 분쟁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성지화 의지는 계속되고 성지화 과정은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소문공원을 예로 들어 천주교의 전략을 알아보자.
천주교 서울교구는 2011년부터 서울시 중구청과 함께 서소문공원을 재개발하고자 하는 사업 논의를 진행했다가 2014년 말 서소문범대위가 출범해 편향된 개발에 대해 제동을 걸면서 한차례 위기를 맞았다. 천도교와 역사학자들은 천주교의 ‘서소문공원 단독 성지화’를 비판하며, 역사적인 사실이 교차하는 역사적 장소를 진정한 의미의 역사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주교는 범대위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천주교와 범대위의 갈등이 심화되자 서울 중구청은 양 측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2015년 5월 21일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천주교 측 발언자로 나온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박문수 교수는 “이 사업은 천주교를 위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며, 천주교가 정부와 지자체에 이를 요구한 적이 없다”며 범대위의 비판을 ‘오해’라고 일축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서종태 교수는 “서소문 공원 내의 역사적 사실과 직접 관련이 없는 독립협회와 서소문 감옥, 군대해산 등 서소문 공원 밖의 역사까지 서소문 공원의 공간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으며, 평화방송은 “서소문형장에서 처형당한 동학 지도자는 김개남 뿐이고, 나머지는 서소문공원과는 상관없는 역사적 사건들이다”라고 보도해 범대위로부터 정정보도 요청을 받았다.
이처럼 천주교는 정부와 지자체와의 유착관계를 부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소문공원 개발을 지켜보고 있으며, 교회 관련 학자와 언론을 통해 범대위의 주장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과연 서울대교구는 서소문공원 개발에 있어서 정말 중립적인 입장일까? 또, 서소문공원이 천주교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저스티스 보도팀의 취재결과 천주교는 서소문공원 성지화 개발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사업추진에 힘을 실어주신 추기경님께 감사”
서울 중구청 이진형 도시관리국장은 2월 16일 서소문 공원 재개발 기공식에서 사업의 개요와 추진경위를 설명하면서 “본 사업은 2011년 7월 염수정 추기경님과 최창식 중구청장님의 만남을 통해 처음 구상됐으며 같은 해 12월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해 장소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사업의 필요성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최장식 중구청장은 “서소문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워주고 사업추진에 많은 힘을 실어주신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에게 깊이 감사한다”며 “서울시 및 관련 구청과 협력해서 명동성당, 약현성당, 새남터성지, 절두산 성지 등을 연결하는 순례길을 조성해 순교자들의 정신을 후세에 알리는 관광네트워크로 이용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기공식에서 밝힌 지자체 단체장들의 말을 정리해보면 서소문공원의 사업계획을 제안한 것은 염 추기경이고 서소문지역의 역사성과 사업성의 필요성을 확인한 것도 천주교 측의 심포지엄이다. 기공식에서 언급된 심포지엄은 2011년 12월 8일 한국경제신문사 다산홀에서 개최된 ‘조선시대 서울 한양도성 서소문과 천주교 박해’ 심포지엄으로 천주교 측 역사학자들이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성지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학술회의였다.
기공식에 참석한 범대위 관계자는 “중구청장을 비롯해 모든 정부 관리가 이 사업이 천주교의 제안과 협조로 이뤄졌다고 고백하고 있는데도 천주교는 사업과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며 “천주교는 서소문에 대한 국민적 시선이 따가우니까 묻어가려고 하는데, 기공식에서 밝혀진 내용만 가지고도 천주교가 얼마나 서소문 공원을 단독 성지화 하려는지 알 수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서소문공원이 앞으로 역사를 활용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활용하겠다고 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천주교의 순교자 역사만 포함되는 것이다. 개발하는 목적 자체가 천주교 단독 성지인데, 어떻게 천주교 단독 성지화가 아니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어떤 모습으로 가꾸어도 천주교만의 성지일 수밖에”
우리는 지난 2015년 9월 1일 오전10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서소문밖역사유적지관광자원화사업지원특별위원회회의’ 속기록을 통해 국민 세금으로 개발된 공원이 어떻게 천주교성지로 변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회의록에는 천주교 신자인 시의원이 천주교 순교기념관 등이 포함된 공원 설계도면을 가져가 추기경의 의향을 살피고, 종교시설로 예산이 삭감될 위기에 처하자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천주교가 노력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천된 새누리당 이혜경 시의원은 “작년 여름 설계공모를 했을 때 모습을 보면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그때 염수정 추기경도 명동성당에서 함께 설계공모 당선작을 보면서 만족했다”라며 “그런데 뜻하지 않은 범대위의 저항에 부딛혀 (설계가) 변경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며 회의석상에서 천주교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서소문공원 사업을 설명한 중구청 도심재생과 B과장은 사업비 예산 편성과 관련해서 “기재부에서는 종교사업과 관련된 사업에는 30% 이상을 줄 수 없다는 방침을 올해 만들었다”며 “그래서 당초 투자심사가 된 것 대로 50%의 예산을 받을 수 있도록 천주교와 구에서 여러 각도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B과장은 “특정종교 사업으로 보이게끔 되면 정부나 시에서 많은 예산을 내려줄 수 없기 때문에 관광산업이라는 부분으로 진행했다”며 “어떤 색깔을 입히고 어떤 모습으로 서소문공원을 가꾼다 하더라도 천주교에서는 천주교만의 성지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운영자금 문제로 천주교에게 정식 운영 맡길 것”
회의록에 따르면 서소문공원은 개발 이후 천주교에 위탁될 전망이다. 종교 사업으로 판단될 경우 사업예산을 삭감당하기 때문에 설계공모에서 문제가 됐던 ‘지하성당’과 ‘침묵의방’, ‘제의실’ 등 천주교 관련된 명칭을 바꿔 심의를 통과한 후 운영상의 문제를 들어 서소문공원을 천주교 측에 위탁하겠다는 것이다.
B과장은 “추기경님은 ‘성당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미사와 기도를 할 수 있는 장소만 만들어주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며 “이 사업이 끝난 다음에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 있는데,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천주교에게 위탁이라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B과장은 “겉에서 조성되고 몇 년 간은 중구청 시설물로 운영되겠지만, 추후에 MOU를 체결하든가 해서 정식적으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은 기존의 서소문 근린공원 일대를 활용해 역사공원으로 재조성하는 사업이다. 전체 사업 부지면적은 21,363㎡(6,473평)에 달하며, 약 460억 원(국비 230억, 시비 137억, 구비 93억)의 예산이 들어간다. 현재 서소문 역사공원 사업은 타당성 조사와 투자심리를 마치고 설계심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부터 기존 근린공원 해체·정리 작업에 들어갔으며 기공식 이후 가설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소문공원 개발을 담당한 C주무관은 “공원 건립에 책정된 국비와 시비는 어디까지나 건립에 책정된 것이다. 공원을 유지하고 운영할 예산은 책정된 것이 없다”며 “공원에서 입장료를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구청에서 공원을 운영하면서 매년 수억 원씩 적자를 감당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공원 관리는 중구청이 하지만 시설은 민간위탁을 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관에서 관리하는 것보다 민간에서 관리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다. 당고개 성지를 봐도 천주교에서 관리하니까 수익도 내고 관리도 잘 된다”라며 “전혀 엉뚱한 단체에 서소문공원을 위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공간과 연관성이 있는 단체가 관리하면 좋고, 현재 천주교가 가장 연관성이 있다”고 말했다. 천주교 이외의 다른 단체가 민간 위탁을 맡을 수 있냐는 질문에는 “향후 고민할 사안이다”고 말했다.
천주교가 역사 민영화 파트너가 된 이유 하나, ‘돈’
서소문공원 개발 담당자는 공원의 MOU 체결 대상으로 천주교가 유력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더불어 천주교가 위탁운영을 맡아 잘 관리되고 있는 사례로 당고개성지를 들었다. 당고개성지로 알려진 신계역사공원의 경우 2009년 근린공원에서 역사공원으로 변경되면서 녹지와 조경시설을 줄이고 당고개 순교성지 기념관의 규모를 3배 이상(391.5㎡→1417.2㎡) 증축해 천주교 특혜 논란이 있었던 곳이다.
공원의 운영비용을 구청이 모두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당고개성지처럼 천주교에게 위탁 운영을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설명. 그렇다면 지자체에서 운영을 포기할 정도로 운영비 문제가 발생하는 대형 공원을 서울대교구는 어떻게 관리하는 것일지 궁금했다.
저스티스 팀의 조사 결과 각 교구가 공식적으로 성지라고 밝힌 곳은 101곳이었다. 여기에 사적지로 등록된 성지를 포함할 경우 그 수가 179곳에 달했다. 대전교구가 20개로 가장 많았고, 수원이 17개로 뒤를 이었다.
각 성지의 규모와 개발 정도 등은 모두 달랐지만 170여 개의 성지 중에서 주보나 소식지를 통해 성지의 재정규모를 밝힌 곳은 많지 않았다. 수입, 지출 등의 재정상태가 공개된 일부 성지를 확인한 결과 연간 수억 또는 수십억 원의 수입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울대교구 절두산 성지는 2015년 한해 미사예물과 후원금 등의 다른 수입을 제외하고도 6억8천만 원 가량의 미사헌금을 받았다. 특히 부활절이 끝난 4월에는 한 달만 1억 원 이상의 헌금을 받았고, 1월과 10월에도 각각 7천만 원 이상의 헌금을 받았다.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의 경우 2015년 한 해 동안 2억5천만 원의 미사헌금과 성지 후원금 1억2천만 원, 특별후원금 1억6천만 원, 기타수입 5천만 원 등 6억 원대의 수입을 기록했다.
수입 금액을 밝힌 다른 성지 사례들을 분석한 결과 성지 기념성당은 일반 성당과 다르게 미사예물이 헌금과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금액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헌금만으로도 연간 수억 원에 달하는 수입을 기록하는 성지의 경우 미사예물 또한 헌금과 비슷한 수입을 기록한다고 볼 수 있으며, 성지 시설면적과 기념성당의 수용인원, 방문자 수 등을 고려할 때 수입을 공개하지 않는 다른 성지들도 연간 수억 원 이상의 수입을 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성지는 헌금과 미사예물 외에 성지 후원금과 특별 후원금을 받고 있다. 더불어 순교성인 봉헌함, 성지발전 기금, 성상제작 기금, 순교자 현양기금, 성물판매 기금 등 다양한 이름의 봉헌금이 존재해 주보나 소식지로 밝힌 성지 수입액보다 훨씬 큰 금액의 수입이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천주교가 역사 민영화 파트너가 된 이유 둘, ‘또 돈’
천주교가 성지를 통해 얻게 되는 수익은 또 있다. 납골당 운영이다. 성지 납골당의 경우 일반 납골당과 달리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는 점과 공원, 주차장 등이 잘 갖춰져 있어 특히 신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위령성월 등 특별한 기간에는 성지를 중심으로 봉헌미사가 거행되기 때문에 신자들이라면 비싼 돈을 주고라도 성지납골당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장례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성지 납골당의 경우 성인의 유해나 제대, 감실 근처의 납골함에 ‘프리미엄’ 가격이 추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사설 납골당에서 추가되는 프리미엄에 비해 그 가격 편차가 매우 크다. 이쯤 되면 순교성지는 순교성인의 정신을 기리는 곳인지 신개발단지 분양현장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절두산 성지에 납골당 가격을 문의한 결과 한 구좌에 1,000만 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성지 내 기념교육관 지하 3, 4층에 있는 납골시설 ‘부활의 집’은 2009년 기준 6,452기를 안치할 수 있으므로 서울대교구가 절두산 납골시설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어림잡아 645억 이상이다.
물론 이러한 납골당을 설립하는 것은 주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다. 주민들은 주민설명회도 한번 없이 종교시설이란 이유로 납골당을 설치하는 천주교의 모습에 적잖은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절두산 성지 인근 주민들은 탄원서를 통해 절두산 성지가 국가 사적지라는 이유로 아파트 건축의 고도를 제한하는 등 사적지의 권리를 행사하다가 돌연 종교시설이란 이름으로 납골당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 괘씸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사적지인 절두산 성지와 종교시설인 절두산 성지 기념관이 별개라는 천주교 측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며, 아무리 편법으로 납골당 건립이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납골당 건설을 지역 주민에게 숨기고 강행하는 이해타산적인 행동이 종교단체가 추구해야할 모습인지를 반문했다.
한편, 장례업계 관계자는 “종교시설의 경우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라 500기이하는 납골당 허가가 수월하고 지속적인 관리 대상에서 제외돼 시설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며 “불교 사찰이나 천주교 성당, 혹은 성지에서는 대외적으로 납골당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납골당이 혐오시설로 평가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정부의 장묘문화 개선사업에 왜 천주교가 적극적인지에 대한 문제까지 다루지는 않겠다. 그러나 천주교는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성지 이미지에 타격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지 납골당 건설을 지속하고 그 납골당은 일반 사설 납골당에 비해 비싼 가격에 거래돼 수백억대의 수익사업이 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정부는 민간공원을 통해 수입을 거둬들일 수 없지만 천주교는 신자들에게 성지와 관련한 각종 모금행위를 할 수 있고 연간 수억에서 수십억의 수익을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보다 좋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정치인은 국민의 세금으로 화려한 공원 개발의 업적을 남길 수 있고 천주교는 큰 어려움 없이 수백억의 세금이 들어간 공원을 ‘위탁운영’의 형태로 단독 성지화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수익 창출에 혈안이 된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천주교의 성지화 개발 방법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국가 세금으로 성지를 개발할 수 있어 비용이 절감되고, 개발 주체도 지자체이기 때문에 단독 성지화에 대한 타 종교의 비난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학술회의를 통해 ‘단독 성지화 의혹은 오해다’라고 부인하면 된다. 설계 공모나 언론의 집중도 막을 수 있고, 신자 정치인들을 통해 중간보고만 확인하며 의사를 내비치면 된다.
선조 신앙인의 공로에 적어도 먹칠은 말아야
조선후기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이들은 조선 천민들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노비, 광대, 백정, 무당 등 소위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 자리가 성지였고, 성인으로 기억되지 못한 더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이 땅에 피를 뿌리고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교회가 성지개발에 갖은 노력을 다 하는 것은 이처럼 앞선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고귀한 정신과 강렬한 신앙의 열정을 오늘날 교회가 본받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나 성지개발로 인한 공격적인 사업성향, 남의 역사를 지우고 내 역사를 심는 욕심은 자칫 성인의 고결한 정신을 왜곡하거나 파괴할 수 있음을 한국교회는 명심해야 한다.
성지(聖地)란, 말 그대로 성스러운 땅이다. 그 땅이 성스러운 것은 땅에 얽혀 있는 지나간 시간의 사람이나 사건이 기억할만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도하기 위한 전제이다. 온전히 기억해야 올바로 기도할 수 있다. 성인들과 순교자들에 대한 올바른 기억이 올바른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
성지화 사업을 위해 정권과 결탁한 ‘정치적’ 행보와 교구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본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교회 스스로의 정체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성인들의 뜻과도 반대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지화 사업에 정신을 못 차리는 교구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하며, 이제부터라도 우리 신앙인들이 성인과 순교자들을 위해 온전히 기도할 수 있도록 ‘올바른 기억의 자리’를 내 주어야 할 것이다.
선조 신앙인들의 목숨 값을 더 이상 성지화 사업에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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