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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편 최초의 한류 구다라 열풍!
방송일: 20050916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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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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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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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역사스페셜 19편 <최초의 한류, ‘구다라’ 열풍! >
프롤로그
-C.G. 백제에서 일본까지
항로표시 15“ (음악 나오고)
-삼국시대 ,백제를 출발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문물들- 기나긴 항로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일본의 오사카항이다.
(음악 나오고)
-북치는 걸로 디졸브 5“ 고대일본에 불어닥친 거센 바람 -
그것은 최초의 한류, 구다라열풍이었다
스튜디오 1.
(실사세트)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한류열풍 -
이제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죠.
그런데 지금보다 더 거센 한류의 열풍이
고대일본에서 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
(사이버쪽으로 걸어가면 한일지도 깔려있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고대 일본에서 불었던 한류열풍의 실체를 찾아
고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여기 한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팔랑회도 등장하고)
지금 이건 1098년 일본에서 제작된 일본 지돕니다.
그런데 일본 오사카에 백제주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아마 백제와 고대 일본간의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이름을 지역의 이름으로까지 썼을텐데요,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또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제의 일본식 발음인데요,
(손으로 가리키며 강조해서) “구다라”
백제를 일본에서는 구다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마 일본어를 배운 분들이라면 이 발음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실겁니다.
백제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백을 하큐, 제를 샤이라고 읽습니다.
구다라라는 발음으로는 전혀 읽히지않는데요,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할까요?
그 의미를 통해 고대 일본사람들이 백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VCR 1
-오사카 궁 3“
-일본오사카 전경..호수 보이는 12“ -일본 제 2의 도시이자
역사가 깊은 도시인 오사카 -
백제의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거리풍경 3“ 곳이기도 하다.
-서점 풀 팬 PD 책 보는 11“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오사카시내의 한 서점을 찾았다.
-책꽂이의 일본사 국사사전 3“ -일본의 역사용어들을 풀이해놓은
-책 장 넘기는 5“ 일본 국사사전-
-해당 페이지 줌인 3“..스틸 이 책에서 구다라란 단어를 찾을 수
-표시 되어 나오고 5“ 있었다.
-자막 나오는 6“
”고전에는 많은 경우 백제라 쓰고 (자막 나오면 멘트)
구다라라고 읽는다 유는 아직 알려져 -구다라의 유래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있지않다“ 그런데 그 다음 줄에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다음 자막 나오는 4“ 적혀있다.
-글자 나오는 9“ (자막 보고)
-과연 이 책에서 말하는 고대 일본과 백제의
수수께끼는 무엇일까?
-거리 풍경 팬 간판 11“ (팬 간판 보이면 멘트)
-오사카에서는 지금도
백제,즉 구다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백제역 간판 4“ 백제와 고대 일본사이에
-백제보농리 상점가 2“ 뭔가 긴밀하고도 특별한 관계가 있었음을
-백제..KUDARA 영문 간판 5“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C.G. 지도 고우구리.. 11“ (고구려로 줌인 들어가면)
-더구나 고구려를 한국어의 원래 발음을 살려
고우꾸리라고 하고 ,
-틸다운 시라기 구다라 9“ 신라를 시라기라고 부르는 것에 비해
백제는 구다라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구다라라는 말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을까?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는 모습 3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아키씨 -
-책 보는 교수 3“ 그는 구다라란 말을 통해 백제에 대한 일본인들
-책 타이트 3“ 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인터뷰..구다라 큰나라 “한국의 큰나라가 구다라다..
스튜디오 2 사이버 - 일본마을
(실사세트..)
고대 일본사람들이 백제를 큰 나라로 부를 정도로
백제를 우러러보고, 더 나아가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백제를 대단한 나라로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있기로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이라면 사찰 불상
불교문화,이런 것들일텐데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문물이
일본에 건너갔고..그것은 고대일본사람들의 실생활에까지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
으켰습니다.
(사이버세트쪽으로 걸어가면 사진이 한 장 내려온다)
지금 이 그림은(사진)은 5세기경 일본 마을의 모습을 재현놓은 것입니다.
고대 일본 집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자료인데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움집들과 비슷한 형태의 집들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5세기 무렵 갑자기
전혀 새로운 집의 형태가 마을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VCR 2
-차 트래킹..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시 4“ -일본 오사카 나라현의 가시하라시-
-발굴 현장 풀팬 8“ 유적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발굴하는 사람들 타이트 3“ -6-7세기 고대일본의 주거형태와는
-사람들 타이트 2“ 전혀 다른 형태의 집터가 발견되었다.
-땅 파는 타이트 3“
-PD 현장 보는 5“
-대벽건물지 5“ -사각형으로 도랑을 파고
-대벽건물지 구멍 선명히 보이는 7“ 그 도랑에 크고작은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독특한 모양의 집이다.
*인터뷰 일본에는 없는 기술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대벽건물 유적 사진 11“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방식
이라 10여년전만해도 그 기원을 알지 못했다.
-공주정지산 유적 사진 나오는 11“ 그런데 지난 96년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공주 정지산 에서 똑같은 집터가 나타났다.
-C,G, 기둥 나오는 12“ -유적을 근거로 집을 세워보면
우선 네모형태의 도랑에 촘촘히 구멍을 낸 뒤
그 구멍에 크고 작은 기둥을 세운다
-벽 발라지는 5“ 그리고 기둥 사이에 흙을 바르면
-지붕 얹어지는 10“ 벽체가 완성되는 이른바 대벽건물이다.
-한반도에선 유일하게 벡제지역에서만
보이는 건물형태다.
-발굴 현장 팬 12“ ..구멍 많이 보이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건축방식인
대벽건물-
그런데 모든 일본사람들이 이 건물을
-구멍 타이트 4“ 이용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대벽건물이 소속된 집락이 마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도 수혈식 주거와 세트가 되는 경우도 많다
-사진 9“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대벽건물 -
이 건물에 거주하던 사람은 아마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발굴현장 풀 6“
-PD 보는 7“ -그 터에서는 또 한가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돌 씻는 3“
-돌 씻는 3“ -건물 안쪽으로 군데군데 박혀있는 무수한
-돌 씻는 6“ 온돌 자막 돌들은 바로 온돌이다. 건물과 함께 난방을 위한
기술이 같이 들어온 것이다.
-시가현 오츠시 풀팬 9“ -온돌의 흔적은 시가현 오츠시에서도
보인다 발굴작업이 이미 끝나
-논 풀 2“ 건물터를 눈으로
-허수아비 논 3“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도 타이트 4“ 이 부근에서도 대벽건물과 함께
-유적 사진 대벽건물 터 줌인 10“ 온돌이 발견되었다.
*인터뷰 발굴조사는 도로의 노선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집락의 전체규모는
알 수 없다. 단 온돌로 보이는 것이 세 개 나왔다.
-온돌 타이트 5“ -그렇다면 일본땅에 대벽건물과 온돌은
-온돌 타이트 3“ 어떻게 전해지게 된걸까-
(도래인 자막)
efo자막 나온.. 도래인 /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
-온돌 틸다운 14“ -처음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도래인들이
백제식의 건물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도래인 혹은 그런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사람들이 나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하고 과시하는데 이용하지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도 틸다운 한일대벽건물
분포도 백제 왜 표시되고 7“ -백제에서 온 도래인에의해 일본에 처음
소개된 대벽건물 -
왜 부분 박스 14“ 그러나 6세기경이 되면 점차
서일본지역일대로 퍼져나간다.
일본사람들에게까지 대벽건물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온돌 타이트 7“ 온돌.. -대벽건물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전해져..
보다 빠른 속도로 일본에 확산된
-시루 줌인 10“ 것이 부뚜막과 시루다.
‘ 서일본지역 뿐만아니라
일본전역에서 발견이 되고 있다.
* 인터뷰 5세기에는 한국의 토기제작기술로 만들어진다. 그러다 6세기가 되면
일본 전통기술로 제작된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문화의 전달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조리법과 조리도구등이 크게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박물관 틸다운 12“ (좀 흘리다가)
-백제에 의해 고대일본사회에선
주거문화와 함께 주방 문화
-전시물들 4“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음식문화까지 변화하게
된 것이다.
-부뚜막... 올려진 모형 8“ 그것은 분명 일본에 분
백제, 즉 구다라바람이었다.
-시루 타이트 8“
스튜디오 3 사이버마을 - 위의 마을에 대벽건물이 여러채 끼어있음
(마을에서 대벽건물 앞으로 걸어가며)
대벽건물의 등장으로 마을의 모습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이전엔 마을 중앙에 제사를 지냈던 큰 건물을 제외하면
모든 집이 다 움집형태의 집이었는데요,
이렇게 대벽건물이란 새로운 형태의 집이 등장하게 된것입니다.
더구나 그 겉모습만으로도 움집형태의 집에 비해
한단계 발전했음을 알 수 있죠.
그럼 집안으로 들어가볼까요
(집안으로 들어가면 부뚜막)
앞서 보셨던 부뚜막이 눈에 띄죠
이전엔 주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화로에서 음식을 해먹다가
이제 부뚜막에 서서 음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화로보다는 음식 만들기가 훨씬 더 편리해졌을텐데요,
그래서인지 부뚜막은 일본에 전해진 뒤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 전역으로 퍼집니다.
그야말로 지금으로 치면 대단한 히트상품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인기를 끌었던 것이 또한가지 있습니다.
(옆으로 가서 시루 보며..)
바로 부뚜막위에 올려져있는 큰 토기인데요,
바로 시루입니다.
이 시루의 등장으로 쪄서먹는 음식문화가 일본에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 시루를 가지고 떡을 쪄먹기도 하고
생선이나 고기요리도 했을텐데요,
이전에 굽거나 국을 만들어먹던 것에서 요리방법이 보다 더 다양해진 것이죠
그렇다면 고대 일본사람들의 밥상은 어떠했을까요?
(화면 등장하고...화면 나옴..그 화면에 따라 멘트하는)
(유적지 화면)이곳은 일본 나라의 등원경 유적에서 발견된 화장실터인데요,
재밌는 유물이 나왔습니다.
(기생충알)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바로 기생충알입니다.
(연구하는 그림)이 기생충알을 통해 고대 일본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화면 사라지고....밥상 옆으로 걸어가는)
지금 제 옆에 밥상이 전문가의 고증을 얻어 차린 고대 일본사람들의 밥상입니다.
밥도 보이고..생선도 보이죠.
아마 이런 음식들 중엔 백제에서 건너간 시루를 통해 쪄서 만든 음식도 있었겠지요.
이렇게 백제에서 건너간 대벽건물이며 부뚜막 시루의 유행은
일본주거문화와 식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요즘으로 치면 새로운 유행...패션이라고 할때 빼놓을 수 없는게 바로 옷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일본에 건너가 인기를 끌었던 백제문물중에 옷도 있지않았을까요?
VCR 3
-아스카 트래킹 5“ -일본 고대국가의 수도인 아스카-
-아스카 마을 3“
-할머니 걸어가는 3“ -이곳에 백제 옷이 일본에 전해졌음을
-일하는 농부 5“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잇다.
-신사 풀 틸업 6“ -아스카의 한 시골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신사-
-돌에 새겨진 오진언신사 글 5“ 이 곳에 옷의 신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걸어올라가는 5“ .
-건물 풀팬 ..신위모셔진 것 ? 10“ -그런데 이곳에 모셔진 신은
바로 백제에서 건너간 부부다.
-향 타이트 3“
-향 모셔진 틸다운 작은 것 12“ -어떻게 백제의 옷 만드는 기술자를
신으로까지 모시게 된 것일까-
-아저씨 설명하는 타이트 10“ -이 일대엔 백제에서 건너온
의복 기술자들이 모여살았다고 교토다찌바
나대학의 이노쿠마 교수는 이야기한다.
-책 타이트 줌인 5“ -이러한 사실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글자 나오고 5“
-자막 나오는 12“ -옷감을 짜고, 봉제를 하는 사람들이
정착한 곳은 바로 신사가 있는 이 마을이었다
*인터뷰 메쁘히코와 구레쯔히메를 아야하토리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와서 베를
짰고 옷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어다고 그후 기술자들이 많이 오지만
이 두분이 일본에서 백제식 옷을 만든 최초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건물 풀 8“ -그렇다면 백제 기술자들이 전해준 백제 식의
옷은 어떤 것일까 -
-책 타이트 팬 9“ 백제식 옷을 추정해볼만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않다.
.
-사람들 앉아있는 풀... 6“ -그런데 그 단서가 될만한 귀중한 자료가
일본에 있다.
-천수국수장 타이트 6“ 자막 천수국수장 -성덕태자가 죽은 뒤 그를 기리기위해
그린 천수국수장 -
-그림 타이트 7“ 이 옷들이 백제의 영향을 받은
백제식 옷이라고 이노쿠마교수는
주장한다.
*인터뷰 475년 백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건너옵니다 그 전과 달리 일본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충격을 받습니다
당연히 말도 그렇고 소지품이나 입고있는 옷에 많은 관심을 가졌
으리라 생각됩니다 서로 앞다투어 고급관료나 귀족들이 백제의
복장을 따라했습니다.
-천수국수장 줌인 7“ -고대 일본의 황실의복에서
백제식 옷의 찾을 수 있었다.
*인터뷰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 이 당시 일본의 궁전이나 고위층의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적이라고 할까 백제옷과 똑가
지는 않겠지만 그 원류는 백제입니다. 그러니까 백제적인 것이
었겠죠
천수국수장 그림 5“
한 사람 나오고 화면 내려오고 8“ -옷깃을 한쪽으로 여미고
-다른 또 한사람 나오고 10“ 치마엔 주름을 넣기도 했으며
화려한 색으로 염색을 한 의상-
고대일본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패션이었다.
-차 트래킹 4“ -그럼 백제식 의복기술이 전해지기 전
일본의 옷은 어땠을까?
-중국 난징박물관 4“ 중국의 난징박물관 -
-양직공도 그림 9“ 6세기초 양나라에 온 각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이다.
-백제사신 나오고 5“ -백제사신은 무릎까지 오는 도포를 걸치고
가죽신까지 갖춰신고 있다.
-왜사신 9“ -하지만 고대일본사신은 ..
천을 허리에 두르고 끈을 묶은 정도-
거기에 신발도 신지않았다
-백제사신 들어가고 8“ -6세기 초인데도 외국에 나가는 사신조차
아직 제대로 된 옷을 입지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 넘어가고 4“ -중국의 역사책은 당시 일본의 옷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자막 나오는 8“ (자막 조금 보다가)
-천을 그대로 몸에 걸친 가사의와
천에 구멍을 내 목만 끼운 관두의를
입었다고 적고있다.
*교수 인터뷰 “남방형계통인 관두의와 횡포기를 들 수 있는데재료는 주료 가죽
같은 원시적인 재료로서 만들어서 그래서 이것의 특징은 봉제하지
않고 허리에 끈을 묶는다든지 해서 옷을 입었다.
-차 트래킹 4“ -이러한 고대 일본에 비로서 제대로된 옷의
형태를 전해준 백제-
-오사카문화재세너 외경 5“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오사카 문화재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베틀 조각 드는..베틀 부품자막 5“ -바로 베틀의 한 부분이다 .
-베틀 부품 들어 설명해주는 풀샷 10“ -백제에서 온 기술자들이 모여살았다는
오사카동쪽의 히라카타시 마을에서
-조각 타이트 7“ 올 봄에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조각 타이트 팬 실자국 14“ (실자국 보이면)
-아직도 실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베틀은 백제에서 온 기술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줌인 4“ -방사선 연대측정 결과
-자막 나오는 연대측정결과...461 - 533 .. 베틀이 쓰인 시기는
10“ 461년에서 533년사이-475년 백제인이 제봉기술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c.g. 조각 4" -뿐만아니라 이 베틀부품의 길이를 통해.
베틀로 들어가는 14“ 어떤 종류의 베틀인지도 알 수 있다.
-이 베틀로 어떤 옷을 만들었을까?
*이너뷰 이번에 발견된 베틀은 고기의 일부이다 비단을 생산하는 베틀이다.
-c.g. 원시베틀 5“ -일본 고대의 원시베틀은 이런 모습이었다
-지기...마등 식물계섬유용 4“ 그러다 마와같은 섬유를 짜는 베틀로
발전하고,
-고기 비단 직조용 4“ 뒤이어 비단을 짜는
베틀이 백제에서 건너온 것이다.
-세개 놓고.. 6“ 백제에서 건너간 베틀은 가장 정교하고
발달된 형태의 것이엇다.
*인터뷰 백제옷의 전래가 문헌자료로만이 아니고 실물베틀을 발견해 매우 이례적
귀중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베틀 조각 7“ -1500여년전 이곳에 와서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유행을 전해준 백제인의 직조기술이
-베틀 팅럽 실자국 10“ 한올 한올 그대로 남아있다.
-논 풍경 팬..고분 13“ -이외에도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은
모두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 중의 하나인 염료기술의 흔적이
후지노끼 고분에 남아있다
-후지노키고분...설명판 4“
-풀 팬 8“ -이 고분은 고대 한일관계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중의 하나로 한일역사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말안장 4“ -그 이유는 무덤안에서 대거 쏟아져나온
화려한 금동마구들-
-금동 여러개다 놓인 3“ 이 유물들을 통해
-금동 타이트 15“ 후지노끼 고분은 한반도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관안의 사진 15“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유물들 사이에
염료기술과 관련된 유물이 하나 발견되었다
-씨앗..잇꽃 꽃가루 6“ -바로 관안에서 꽃씨가 발견된 것이다
*인터뷰 이것은 빨간색을 내는 염료인데 꽃을 여러형태로 가공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잇꽃은 염직에 사용되었다 고분 퇴적물에서 일부 발견되었
는데 일본에 없었던 식물이므로 베mf과 함께 일본에 전달됐다고
본다.
-고송총 벽화 8“ -백제 옷에 관한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않다
아스카에 남아있는 고송총벽화를 비롯해
고대일본사람들이 남긴 그림을 통해
-타이트 7“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두 옷 비교 9“ -비단으로 옷을 만들고 화려하게 염색을 한 백제옷은
일본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신사하늘부터 10“ -백제에서 온 의복 기술자를 신사에 모시고
참배했을 정도로 일본에게 백제의 옷은 혁명,그
‘ 자체였다.
스튜디오 4 시장 그림 배경
(뒷 배경인 시장 보며)
앞서 보셨던 일본 아스카자료관에서 복원한 일본고대시장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제 옷 입은 여자 가리키며)
바로 이 여인인데요,
한 눈에 주변사람들과는 옷차림이 다르다는 걸 알 수가 있죠
백제에서 전해진 기술로 봉제를 하고, 화려하게 염색까지 한 옷을 입은건데요,
글쎄요 이 정도면 백제풍의 옷을 입은 사람이 이 시대 일본에서 최고의 멋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시선 바꿔)
이렇게 고대일본사람들의 의식주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다준 백제 -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새장 걸려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여기 새장속의 있는 새가 말을 한다는 앵무샙니다.
요즘도 애완용으로 기르는 분들 많으실텐데
그런데 앵무새도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 등장하고)
일본서기에 보면... 599년 ‘백제가 앵무새 1마리, 노새 1마리, 양 2마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구요. 또 657년에는 “백제로부터 낙타 1마리 당나귀 2마리가 왔다”고
되어있습니다.
앵무새뿐만아니라
낙타까지도 일본에 보냈다는 얘긴데요,
그런데 앵무새와 낙타는 한반도에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입니다.
앵무새는 열대지방에 살고
낙타는 사막이나 초원지대에 사는 동물이죠 .
그런데 어떻게 한반도에 없는 이런 동물들을
백제는 일본에 까지 전해줄 수 있었던걸까요?
vcr 4
-동물원 풀 4“ -일본 오사카의 텐노지동물원
-텐노지 동물원 자막 일본
오사카..사람들 지나가는 5“
-아이 얼굴 2“ -일본에서 서식하는 동물들뿐아니라
-동물들 새 2“ 세계각지에서 들어온 동물들이
-코끼리 5“ 모여있다.
-낙타 5“
-낙타 3“ -그 중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줬다는
낙타...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인터뷰 없다 젊어서 모른다
지금 들어서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있다사회수업시간에 배웠다.
어떤? 선물 받았다
-낙타 11“ -실제 고대 일본에서 낙타를 비롯한
동물을 길렀던 흔적이 있다.
-차 트래킹 4“
-판개궁터 일본 아스카 풀 4“ -아스카의 여러 왕궁 중 하나인
판개궁 터
-타이트 10“
-연못터 풀 4“ -그 판개궁 옆에 넓은 터가 있는데
궁에 있던 연못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연못터 타이트 자막 연못터 6“
-사료...5“ -사료에 의하면 이곳이
-글씨 나오는...5“ 백금후원 고대일본 왕궁의 정원인 백금후원이다.
-자막 나올때 8“ -아마 이곳에서 낙타와 앵무새같은 희귀한
동물들을 사육했을 것으로 일본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인터뷰 천무천황시대의 백금후원이라고 생각되는데 중국을 보면 그런 정원터에서
여러 동물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스이코천황 이후 낙타
앵무새등 신기한 동물들이 전해졌으므로 이곳에서 사육되지않았을까 여겨진다
-백금후원상상도 풀 5“ -백제에서 전해준
-동물들 모습 5“ 낙타와 앵무새는 이렇게 왕궁의 정원에서
- 2" 사육하며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무있고 말머리 보이는 11“ 백제에서 전해준 낙타와 앵무새는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매우 진귀한 동물들이었다.
-금동대향로 나오는 12“ -백제는 어떻게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는 동물들을 일본에 전해
줄 수 있었을까 -
-금동대향로 2“ 백제를 상징하는 유물인 금동대향로 -
-대향로 틸업 19“ 이곳에 동식물을 비롯해 백제사람들의 모습까지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있는데 .
그 중 동물은 42종류가 그려져있다
-이중엔 백제에 서식하지 않는 동물들도 여럿
보인다. 그런데 그 표현방식이 아주 사실적이다.
-코끼리 4“ -코끼리 등에 사람이 타고 있는 건
코끼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용되는 걸 직접
-사자 6“ 보고 그린 것이다.
-악어 5“ 금동대향로에서 또한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악어다
.
*인터뷰 이것도 백제사람들이 동남아 지역 그 지역에 활동하고 있었고 그 지역에서 서식하는 악어의 존재를 확인 직접 봤다 다른 역사서 조등장 안해악어 고스란히 재현..눈으로
목격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묘사
-배 나가는 4“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또다른 기록이
-배 그림에 자막... 14“ 있다.
자막 성왕 4년 겸익이 항해로 인도에 이르렀다.
미륵불광사사적 -성왕 4년인 526년
백제의 승려인 겸익이 배를 타고
인도까지 다녀왔다는 사실이다
*인터뷰 이건 바로 단순한 열정만 가지고 겸익 스님이 인도에 갈 수 있는 문?
아니다 뱃길 열려있고 조선술 항해술 전제되어야가능
-일본서기 줌인 4“ -백제의 교역망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자막 나오는 백제가 부남국 일본서기에도 발견된다.
캄보디아의 노비 두명 보내다
일본서기 17“ -이렇게 세계와의 교역의 결과물을
백제는 일본에 전해줬다.
-차트래킹 6“
-나라문화재연구소 외경 자막 4“ 나라문화재연구소..
-문열고 들어오는 상자 들고 7“ 이곳에는 그것을 입증하는 유물이
보관되어있다.
-상자 여는 5“ (보고)
-아스카지출토 d유리 9“ -아스카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리
구슬들이 그것이다.
-유리 kdlxm 4"
-유리l 타이ㅡ m 5" -6세기까지만해도 일본은 유리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유리는 외국에서 들여
와야했다.
-현미경 보는 12“ (좀 보다가)
-고이스카씨는 유리성분을 분석해
유리의 원산지가 어딘지를 찾아내는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다.
-빨간 구슬 타이트 3“
-눈 타이트 2“ -그런데 고대 일본에 들어온 유리 중에
-으로 본 빨간 구슬 5“ 바다 건너 인도에서 들어온 것도 있다.
*인터뷰 유리 자르는 기술의 기원은 인도라는 것이 최근 조사에의해
밝혀졌다. 화학분석을 통해 인도부근의 유리와 화학성분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교역은 매우
광범위하게 바다 루트를 사용해서 이뤄지지않았을까한ㄴ
최근 알아냈다.
-아스카지 출토유리 4“ - 아스카지에서 출토된 유리와
-작아지고 옆에 무령왕릉 출토유d사 9" 똑같은 것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됐다.
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건 아닐까-
*인터뷰 “여기서 재밌는 건 이 유리구슬은 중국에서 많이 보이는 거 아니다
이걸 통해서 이 유리는 인도 파스픽 유리구슬이라 부르는ㄴ
당시 동남아 널리 교역되는 유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실크
로드 해상루ㅡ 기원이 일지기 발달해있어서 그러한 해상교역의
일단이 우리나라 한반도가지 이루고 있음을 우리가 유리구슬 통해
알 수있다
-배 지도 나오며 fnm 18 " -중국을 지나...바다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가 교류를 했던 백제 -
부남국 지나서까지 백제가 일본에 다양한 문물을 전해줄 수
있었던 건
백제의 우수한 교역망의 결과물이었다.
스튜디오 5 ...국제관..지구본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여러 물건들
(백제 교역망이 연결되어있는 지도 보이고)
제 뒤의 지도가 당시 백제의 교역망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당시 백제의 대표적인 교역국하면 중국의 남조 빼놓을 수 없죠.
그리고 앞서 보신대로 저 멀리 캄보디아 인도까지 교역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문물이 걸려있는 쪽으로 걸어나오면서)
이렇게 발달된 교역망을 통해 백제는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변화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섬나라 일본은 백제를 통해 세계를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 제 뒤로 보이는 금동말안장이며 기와, 천자문이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보다 오히려 더 생생한 백제의 유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VCR 5
-항구 팬 12“ -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자
국제 관문인 오사카항 -
지금도 동북아시아의 가장 큰 물류중심지이다.
-배 지나가는 7“
-차 트래킹 6“ -이렇게 일본으로 들어온 백제인들이
남긴 놀라운 유적이 있다.
오사카에서 30키로 덜어진 곳에 위치한
-길 v 협산지 지나가는 사야마이케 협산지 -
협산지 자막 15“ 도시에 거대한 저수지가 있어..
홍수방지용 댐과
농업용수용으로 쓰이고 있다
-사람들 서있는 정자가은 7“
-물.. 3“ -저수지는 오사카 사람들의
-제방 3“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물 중앙의 건물 5“ 이 저수지가 만들어진 건 지금으
로부터 무려 1400여년전의 일이다.
*인터뷰 산지는 616년 탄생했다. 당시 고대일본이 경제기반 인ㅍ비를 위해
만든 저수지다.
-c,g, 협산지 표시되고 4“ (보고)
협산지 부분 커지로 2“ -흐르는 강에 제방을 쌓아
제방 쌓아지고..물 고이고 9“ 저수지를 만드는 공사는 엄청난 시간과
인력을 요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다.
*인터뷰 당시 제방의 길이는 300미터로 다니강을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는 당시로써는 매우 고도의 토목기술이다 일본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다
아마도 백제에서 제공받아 일본에 처음으론 쓰인 기술이 된다.
-물에서 틸업..제방 10“ - 습지대인 오사카지역은 지반이 약해
제방을 쌓기도 어렵고 붕괴되기도 쉽다.
-풀샷 3“
-사야마이케 박물관 7“ - 이를 극복한 백제의 토목기술은 무엇이었을까?
-제방 쌓이는 8“ - 박물관의 홍보비디오를 보자.
-여자 나와서 말하는 12“
자막 백제에서 사용된 부엽공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부엽공법 c.f. 16" -부엽공법이란
흙을 한층 쌓고 그 위에 나뭇가지와 낙엽을
쌓기를 반복하는..공법이다.
‘-제방 쌓이는 7“ 저지대나 습지에 쓰이는 것으로
흙의강도를 높여 제방의 붕괴를 막는 특수
공법인 것이다.
-단면도박물관의 제방 절개단면 6“ -박물관 한쪽에 제방의 절개단면이
-단면 5“ 전시되어있다.
-타이트 풀 동그라미 6“ -절개단면 군데군데에
-나뭇가지 4“ 나뭇잎이며 잔 나뭇가지들이
-나뭇가지 10“ 선명하게 드러나있다,
-나뭇가지 보이는 6“ -이게 바로 백제에서 건너온 고도의
토목기술인 부엽공법이라는 것이다.
-부여나성 틸업 8“ -이 부엽공법은 백제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위에서 두사람 8“ -부여의 수도성인 나성을 쌓을때
부엽공법을 이용했다.
-습지 9“ 이곳은 백마강을 끼고있는 저지대여서
성벽의 견고성을 확보하기위해
부엽공법을 활용한 것이다.
-나성 성벽 단면 사진 9“ -성벽의 단면을 보면...지금도 나뭇가지가 묻혔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지도c.g. 풍나보성 부여나성 벽골제 12“ -부엽공법은 2C무렵부터 활용된 백제의
특수한 토목기술이었다.
*이너뷰 백제 풍납토성부터 보이기 시작하고 사비 나성에서는 저지대부분에서
정연하게 쌓은 게 기초부분에 확인 일본 사야메키 고대제방에
그대로 응용
-일본 협산지 풀 팬 13“ -
-물 중앙의 건물 6“ -제방이외에 당시 백제의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 또한가지
있다.
-박물관안의 파이프 10“ -저수지에 저장된 물을 인근 마을로 보내주는
지하수로다.
-C.G. 제방 올라오는 8“ -제방을 쌓고..저수지를 만든 뒤
물 막고 파이프 설치되는 13“ 그 바닥에 수로를 설치했다.
물안의 건물 물길 여는 8“
- 수로를 통해 물이 공급되면서 오사카 일대는 농경지로 탈바꿈한다.
- 물길로 들어가는 13“ 저수지의 물이 인근 마을로 이어진다.
이 물은 식수로도 쓰이고 논에 물을
대는데도 쓰였다.
-지도 불 들어오는 24“ -백제인에 의해 오사카는 고대일본의 경제적기반이 되는
핵심도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풀 팬 마을 13“
-백제인이 아니었다면
현재와같은 이런 도시의 모습은
-건물 5“ 존재하지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을 지하철 지나가는 10“
*이너뷰 616년 만들어진 뒤 줄곧 쓰여왔다 현재로 보면 1400년 사용된거다
일대의 생활은 일본과 백제의 관계 비로서 시작되다
-댐 팬 14“ -1400여년전 백제인이 만든 거대한 저수지-
그것은 오늘날 오사카라는 일본 제2의 도시의
기초가 되었다.
스튜디오 6 ...뒤의 지도 걸려있는...?
오늘날 일본의 국제 관문인 오사카의 도시기반이 백제인들에 의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5c이후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이동하게 되면서
일본고대국가의 탄생지인 아스카가 있는 이곳 오사카 일대에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과 문화의 전수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 일본고대국가 형성에 백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자 그러면 일본고대국가의 중심지로 가보겠습니다.
VCR 6
-일본나라현 팬 10“ -일본고대도시의 중심부엔 지금도
백제인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동대사 풀 4“ -동양최대불상을 가지고 있는 동대사..
-사람들 기둥에서 4" 사찰건축에서부터
-대불 5“ 대불에 금을 입히는 작업까지 -
백제인들의 기술력이 동원됐던 절이다
-나무 ..아스카사 9“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사 역시
백제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절이다.
일본의 소가씨세력이 사찰을 지으려하자
-불상 4“ 백제에서 불사리와함께 승려 사공,와박사등
-사리함 6“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지닌 사람을 보냈다
-두사람 걸어가는 돌로 설명하는 11“ -이곳은 탑이 있던 자리다.
탑에 사리를 안치하는 행사가 거행될때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있다
-돌 타이트 자막 ...
“소가노우마코를 비롯해 -이 사찰을 지은 소가씨가
거의 백제 백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백제옷을 입고.
백제옷 기뻐하다..부상략기 14” 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이너뷰 소가노우마코의 집이 여기로부터 남쪽 이시부타이 고분 근처
백제에서부터 백여명의 사람이 모두 백제옷을 입고 머리모양
하고 행렬로 여기까지 불사리를 운반 지하의 기둥돌이 있는
곳에 봉합하다.
-나무 틸다운 이시부타이 고분 11“ (틸다운해서 보이면)
-그렇다면 소가씨는 누구인가?
나라현의 이시부타이고분은 소가씨가문 중 한사
-고분으로 들어가는 14“ 람인 소가노우마코의 무덤이다.
“ 무덤의 규모만으로도 그의
권력을 짐작할 수 있는데
천황을 세 번이나 교체했던
-돌 ...지붕석 9“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가씨가
백제계의 인물로 알려져있다.
-백제산ㄱ성함락 화면 8“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백제한성이함락되던해
-기록 4“ 소가씨로 추정되는 백제인의 기록이
나오고 2“ 있다.
자막 11“ (자막 뜰때)
-목협만치라는 인물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쪽이란 일본을 말한다
-일본서기 책장 넘겨지는 7“ (좀 보다가)
-같은 시기
-글자 조명 목만치 나오는 4“ 일본서기에 비슷한 이름의 인물이 등장한다.
-책장 넘겨지고 4“ 목만치-
-글자 나오고 소가 만치 두 개 나란히 4“- 그리고 소가만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등식 표시 4“ 이들은 같은 인물일까?
*이너뷰 소가씨 일족이 도래인이라는 설은 일본학회에서도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소가씨중에서 가장 오래된 선조중의 한명인
소가노마치가 있는데 이 사람이 도래인이 아니었나 여겨지고 있다
이나메 에미시 이루카와가이 소가씨 일족이 이어지지만 에미시의
아버지인 우마코는 당시 정계에서 큰 실력을 발휘한다.
-소가 이미지 12“ -백제인이었던 소가씨가
어떻게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
-책 넘겨지고 3“
-자막 나오는 삼장의 건교 맡기다 3“
고어습유 -단서는 고어습유라는 일본사서에 있다.
여기서 삼장의 건교란 일본정부의
창고관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나니와 궁터 14“ -소가씨가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터가 나니와궁터 옆에있다.
-발굴 사진 대형창고유적 3“ -유적발굴결과
-대형창고유적 2“ 창고하나의 크기가 90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창고 복원해놓은 것 6“ 이것이 소가씨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나니와항 상상도 7“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이 들어오면
그것이 집결되는 창고.
상상도 타이트 5“ 소가씨의 권력은 백제로부터 들어오는
선진문물에서 나온 것이다
*이너뷰 소가씨 백제와 파이프 역할 소가만지 등장할 때 예를 들어 재정 관리하는
호적 관리하는 관료로 등장 이런 걸 보면 백제 호적..기술 가져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이마키라고 해서 당시로선 현대적인 기술 가져온 집단을
소가씨가 관장 하다 그런 집단을 그런 걸 보면 백제와 일본과 파이프역할
하며 선진문물 소가씨 관장 유력한 호적들에 분배 그런 점에서 소가씨
발언권 높아지다
-팬...연못있는 12“ -1999년 나라에서는 대규모의 발굴이
있었다.
-지금은 연못가로 변해있는 이곳에서
-사람들 서있는..취재진 3“ 고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집들 4“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 나온 것이다.
-발굴 사진..백제대사터 발굴 1999년 5“ -이곳에선 아스카시대의 대규모 절터가
-팬 바닥... 7“ 발견되었다.
-바닥 줌인 6“
-나온 유물들 3“ -그런데 이 절의 이름이 백제대사다.
-우물 타이ㅡ 2“
*인터뷰윷ㅌ 죠메이 천황 639년 백제 대사 백제대궁. 궁저이 있었다
-기록 9“ -일본서기는
639년 천황이 백제대궁과 백제대사를 짓게했다고 전한다.
-풀팬 10“ 죠메이 천황은 왜 백제대궁을 지으라고 명한 것일까?
자막 나오는 백제대궁으로 옮겼다 6“ 일본서기 -천황은 거처를 그로부터 1년뒤 백제대궁으로 옮긴다.
다른 자막 북쪽에 빈소 마련하다.. 5“ -천황이 스스로 머물렀던 모든 곳에
대빈이라 한다 6“ 백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인터뷰 백제라는 마을에 당시의 조정이 대왕의 명령으로 큰 절을 세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백제에 대한 동경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배경화면에 자막.. 10“ -그 해 죠메이천황은 백제대사에 구층탑을 세우도록 명했다. 발굴당시 탑의 기단 너비로 보아 구층탑의 높이는 80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일본에 불었던 구다라열풍. 그것은 문물의 전래를 넘어 고대일본인의 정신문화에 이르기까지 강하게 불고 있었던 것이다.
스튜디오 7 - 클로징
(백제대사..탑 한바퀴 돌고..엠씨 등장하면)
정말 높고 웅장하죠.
이러한 웅장한 탑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더구나 천황이 머무는 궁의 이름까지도 백제궁이라고 했다니
고대 일본사람들이 백제문화와 문물...그리고 더 나아가 백제라는 나라에
얼마나 매료되어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러니 백제를 그냥 일본식 발음으로 부르거나..
고구려신라처럼 한국발음을 그대로 살려 부르지않고
특별히 구다라,...즉 큰 나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백제를 동경하고 백제것을 최고로 여기고, 그래서 백제를 큰 나라라고 생각한 고대일본-
지금 일본에서 부는 한류열풍보다 더 거센 구다라열풍이
고대 일본에서 불고 있었습니다.
[HD 역사스페셜] 제19편 최초의 한류 구다라 열풍!
◈ 방송일 : 2005. 9. 16 (금)밤 10:00-11:00(KBS 1TV)
◈ MC : 고두심 ◈ 연출 : 최필곤 PD ◈ 작가 : 빈선화
일본열도를 휩쓴 욘사마 열풍!
1400년전 ‘구다라열풍’이 그 원조였다!!
일본 최대의 관문! 국제항구 오사카의 도시개발이
고대 백제인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백제의 첨단공법으로 축조한 300미터 거대제방 산협지 최초공개!
백제식 건물이 일으킨 주거혁명!
백제풍 옷의 패션혁명! 그리고 음식혁명!!
1400년전 일본열도를 휩쓴 구다라열풍을 추적해본다.
1. 일본은 왜 백제(百濟)를 <햐쿠사이>가 아닌 <구다라>라고 하는가?
백제는 ‘구다라’다. 그런데 백제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햐쿠사이’다. 일본은 왜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는가? 일본국사사전에는 ‘구다라’가 고대한일관계를 암시한다는
설명이 실려있다. 과연 '구다라'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다는 것일까? 우에다 마사하키 교수는 구다라는 ‘큰 나라’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인도를 아우르는 세계적 교역망을 갖췄던 백제! 고대 일본에 있어서 백제는 각종 선진문물의 창구이자 선망의 나라요, ‘큰 나라’ 였던 것인데...
2. 사야마이케(협산지)!! 그 곳에 오사카 도시개발의 비밀이 숨겨져있다!
문헌상으로도 확인되지 않는 고대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밝혀주는 고고학 유적인 사야마이케! 사야마이케는 616년에 당시의 고대 일본이 국가형성의 인프라정비를 위해 만든
저수지다. 당시의 일본은 고대국가형성의 태동기로서 사야마이케라는 관개시설을 축조하여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마련하여 국가건설을 추진중이었다. 이 국가적 사업인 제방축조에 백제의 첨단
토목기술인 부엽공법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사야마이케 유적은 고대 일본이 백제를 모델로 삼아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사야마이케를 통해 당시 불모지였던
오사카를 고대국가의 핵심지역으로 개척했던 백제의 기술력을 살펴본다.
3. 백제식 대벽건물! 고대 일본의 주거혁명을 예고하다!
일본의 긴키지방 일대에 집중 발굴되는 독특한 형태의 백제식 대벽건물! 대벽건물은 ‘도랑을 파서 그 안에 기둥을 세우고 흙벽을 주변에 바르는 건물’로 백제에서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물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백제식 대벽건물에서는 온돌도 함께 발견된다. 온돌은 습기가 많은 일본풍토에 맞지않아 곧 사라졌으나 온돌과 함께
들어온 부뚜막과 시루는 일본전역에 급속히 전파된다. 부뚜막과 시루의 보급은 고대 일본인의 조리방법과 식문화, 나아가 일상문화자체를 크게 변화시키는데...
4. 최초로 소개되는 옷의 신사인 ‘구레쯔히코신사’ !!
일본 아스카에는 백제에서 건너와 백제식 옷을 만들었던 ‘쿠레쯔히코’를 기념한 ‘옷의 신’이 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방직 기술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방직의 거점을 만들었던
백제인을 기념한 신사다. <부상략기>에는 ‘아스카땅에 법흥사를 세우면서 찰주를 건립하던 날 소아대신을 비롯하여 백여명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으며 보는 이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풍의 옷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쿠레쯔히코신사’로 대표되는 고대 일본의 백제옷 열풍을 추적한다.
5. 천황이 머무는 곳을 왜 ‘백제대궁’이라고 했을까?
일본인들이 백제것을 얼마나 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이 일본도처에 남아있다. 나라 중심에 흐르는 하천은 백제천, 639년 죠메이천황 11년에 지은 절은 백제대사...그뿐 아니라
죠메이 천황은 자신이 거주한 궁의 이름을 ‘백제대궁’이라 하였다. 천황이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이름을 백제대궁이라 붙일만큼 고대 일본인에게 백제는 선망의 대상이요 동경의 나라였던
것인데...백제를 동경하고, 백제것을 최고로 여겼던 고대 일본에서의 구다라열풍의 실체를 만나본다.
▲ 제18편 진흥왕 순수비, 무엇을 새겼는가
▼ 제20편 미스터리 추적! 신라탑에 백제금강경이 들어있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