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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삼상7:12-14, 눅5:36-39
한 해를 보내면서 하는 말들이 지난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고 말합니다. 돌이켜보면 누구에게나 세월은 참 빠르게 지나가고 지나고 보면 참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난해에 발생했던 러시아가 우크라아나를 침공한 전쟁은 벌써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큰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외 경제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연말이면 증권회사는 연말 배당을 바라보고 상승장면으로 마감하지만 정반대 현상으로 마감했습니다. 1년전 출발할 때만 하여도 코스피는 2900으로 출발했는데 2022년을 마감하는 날에는 2250선으로 마감되면 시가총액 430조가 날아갔다는 기사가 전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경제상태를 알려주는 것은 주가지수와 부동산 가격의 동향인데 주식은 일년 중 연초가 제일 높았었고 연말이 제일 낮았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경제지표인 부동산시장도 불황기가 지속되며 전국 아파트 매매·전셋값 하락세가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가 이렇게 안좋다는 것은 바로 금리인상때문인데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세계 모든 나라가 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지구촌의 모습이다. 금리인상이 전국민의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데 한국은행발표에 의하면 올해에도 기준금리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부동산 시장 한파가 더 심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금리 부담에 집값 하락까지 겹치면서 물가는 어떨까 ? 연초부터 전기 가스요금과 버스 지하철 대중교통요금이 인상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참으로 지난해도 다사다난하였던 한 해 였는데 새해는 지난해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우리를 힘들게 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셨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만약 새해가 없고 매일 똑 같은 날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한 세상일까 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각자 꿈과 소원이 있어서 올해에는 뭐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지만 성경은 해아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인생들이 헛된 일에 분요하다고 하면서 새해를 맞이한들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한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새것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떴던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왔던 계절이 올해에도 다시 오리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새것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고 죽었던 자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새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씀드리면서 그래도 우리의 생명을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올 한해에도 우리들과 함께 하여주실 것을 믿으면서 새로운 한 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풀이 풍부하여 목동들이 그곳에서 양을 치는데 목동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습관이 있는데 하루 종일 목동들은 양들이 풀을 뜯는 동안에 낮잠을 자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합니다. 때로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양들을 급히 나무 아래로 피신시키기도 하며 어떤 때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와 싸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낭떨어지기에 떨어진 양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를 지내는 동안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해질 무렵이면 산 위에 있는 목동은 산밑에 있는 목동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다고 합니다.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으니 주님을 찬양합시다” 이 소리는 조용한 공기를 타고 산 아래로 널리 퍼지게 되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다른 목동들도 그 소리를 듣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주께 감사합시다” 화답하면서 하산을 한다고 합니다. 알프스 목동들에게 다사단하였던 하루를 마감하는 구호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목동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나 우리들이 한해를 마감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하루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동들을 생각하실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우리들도 지난 한 해동안 우리들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를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 합니다.
1.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2022년의 한 해도 코로나가 발생한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코로나가 종식될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마스크를 쓰면서 외출하던 한해가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다행인 것은 윤석렬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대면 예배도 대면 에배로 바뀌고 코로나와 함께 생활하면서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을 빼고는 코로나 이전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아직도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서 하루동안 확진자가 200만명 정도이며 사망자도 10000명 정도라고 한다. 주님오시기 전 이 세상은 기근 지진 가뭄 전염병 등이 세상을 휩쓸 것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치명적인 코로나가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코로나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어느 덧 한해를 보내면서 우주만물을 창조 운행하시고 한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파멸케도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한국과 한국교회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을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삼상7:12)
BC 1050년 경만 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사람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땅도 뺏기고 추수를 하면 곡식도 뺏기고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는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마음을 다해 주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주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으로부터 고난받는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배반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이나 아스다롯(아세라) 같은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농사의 풍요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남신이며 아스다롯 즉 아세라는 다산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여신이다. 주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농사풍요도 자녀의 생산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부족들이 믿던 신들을 믿어야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이와 같은 우상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블레셋을 일으켜 징계하신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된 사무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우상을 없애는 일인데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20:3-5) 3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네 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사무엘 선지자는 그동안 은밀하게 섬겨왔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미스바 성회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만 믿고 경건하게 살기로 다짐하자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삶에서 우상을 버리는 생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성회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으나 이번에는 그들이 전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7:8)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기도하였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가 오는 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치면서 우박이 떨어지니 아무리 강한 블레셋 군대라 하더라도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추격한 그 곳에 돌로 기념비를 세웠고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였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뜻은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7:12)는 뜻입니다. 그 후 블레셋은 사무엘이 사사로 있는 동안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였고 그 후에는 빼앗겼던 에그론에서부터 가드까지 회복하였습니다(삼상7:14) 우상숭배를 제거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우상을 얼마나 숭배할까요? 아니 교회다니면서 우상을 숭배한다고? 네 맞습니다. 숭배하고 말고요. 교회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우상은 섬기지 않더라도 어느 때보다 정말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우상입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쾌락을 더 사랑하면 쾌락이 우상이 되고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고 자식을 더 사랑하면 자식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만약 아내나 남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 아내나 남편이 우상이 되고 하여간 성도들이 예수님보다 그 무엇을 더 좋아하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속에 위와 같은 우상들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나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들은 결국 “나”인 셈이다. 즉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기쁘게 하면 결국 내가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알고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어도 이런 “나”라는 우상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런 우상숭배자들은 결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토색(속여서 빼앗는)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날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자들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도 거의 다 자기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우상숭배자들로 만들어 주님의 교회가 마치 막장 드라마 보다 더 못한 강도의 소굴, 범죄의 집단으로 까지 타락했다는 참으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고 주구장창 외치는 그 목사나 그 교인들은 이제 자신들은 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날마다 주여 주여 할지라도 빛 좋은 개살구처럼 막상 그들의 삶속엔 주님을 위한 삶은 온데 간데 없고, 모두 하나같이 주님보다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중 시내산 밑에서 아론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다 하고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사셨으므로 우리 몸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진짜 믿는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지금 한국교회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교회들 마다 가득차서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불신자들조차 교회가 이렇게 타락한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살리고자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멸시천대를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런 망극한 은혜를 잊고서 우리가 그 분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히 멸망 받을 불신자들과 같이 산다면 우리들은 배은망덕한 자요 그 분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망령되게 하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인이 아닐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분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늘 울어도 그분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므로 이제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런 성도들에겐 조심할 것이 몇 가지 있다.
(2) 지난해의 불순종했던 것들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으로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받으면서 많은 기적들을 보면서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하였을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들을 수장 시켰습니다. 광야에서 목이 말랐을 때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먹게 하셨고 또 르비딤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기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날마다 만나를 주셨고 옷이 헤지거나 신발이 닳도록 하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가 불만인지 입에서 나왔다하면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광야 40년 생활은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만을 일삼던 세월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 마음에서 원망과 불평에 대한 불순종을 제거하는데만 40년이 걸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을 베푸셔서 그 백성들은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고 오히려 원망하는 데만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만을 한 번 들어보실까요.
(민14:2-3)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랴!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랴! 3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 아내와 자녀들이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우리는 이런 불순종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슨 일이 있든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와 같은 불평과 불순종으로 얼룩진 40년의 세월을 싯딤 땅에 묻어 버리고 정결한 심령이 되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옛 구습을 그대로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역시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배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강 물속에 있던 돌들을 취하여 길갈 땅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2023년의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를 깨긋이 청산하고 다시는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되풀이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각오하고 요단강 돌을 가져다 마음속에 기념비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시간 지난해의 잘못된 습관들을 2022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버리고 다시는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되풀이 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생활로 시작하는 한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제까지 지켜주셨던 것을 감사하자
지난해에는 코로나 인한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나 금리인상으로 인한 부동산 하락이나 이자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말 우리 모두들 엄청난 고생을 하였음에도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을 지켜주셨고 가정을 지켜주셨고 믿음을 지켜주셨고 또 각종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은 세상은 험악하게 변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도 도우실 것이고 내일도 도우실 것이고 올 한해에도 도우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도 도우셨고 광야에서도 도우셨고 물이 없을 때 물을 주셨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셨고 더울 때는 구름기둥으로 추울 때는 불기둥으로 여기까지 도우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이 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 말씀인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은 고난중에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리 레빈이라고 하는 50대의 미국 해외 특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에서 취재를 하다가 회교도들에게 잡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독방에 가두었는데 대개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은 한 달이 채 못되어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이 사람도 역시 독방에 감금된지 며칠이 지나자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났는데 아내는 평소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니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래서 그는 혼자 생각하기를 “그렇지. 여기까지 내가 지낸 것은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내가 왜 외롭게 지내는가?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정말 살아 계시다면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 감옥 안에서도 저를 돌봐주시고 나가게 하옵소서” 무신론자가 독방에 갇히니까 비로소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있던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마음속에 평강이 넘쳐났고 기쁨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가둬 놓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없어지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년 후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무신론은 완전히 떠나버렸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은 지금 막 주께로 돌아온 자들에게도 변함없이 도와주시는 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미스바에서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은 그 후 에그론, 가드까지 땅을 빼앗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인데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로 이스라엘 땅 중에 가장 기름진 땅에 속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상 두 사람의 잊지 못할 사건을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시나무 불꽃속에서 모세를 만나주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고래뱃속에서 요나를 구원해 주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실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가시떨기나무 불꽃속에 있었지만 불붙은 가시나무가 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불이 이스라엘에 떨어져도 이스라엘을 태워 없애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 요나가 고래뱃속에 3일간 있었으나 고래는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토해내듯이 누가 이스라엘을 삼켜도 토해내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굳건한 신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나 요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반드시 구원된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모세와 함께 하셨고 요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올 한해에도 우리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우리를 삼키려는 자들로부터 막아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돕고 내일도 도울 것이고 영원토록 도우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들을 도우실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에 우리는 하루를 마감하는 목동들과 같은 감사의 찬양을 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매일 누구에게나 86400원을 공짜로 주시는 하나님
올 한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매일 하루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1년은 365일 이고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3600초이다. 하루 24시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다. 이 하루를 초로 환산하면 86400초인데 돈으로 환산하면 86400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돈이 매일 자기의 통장계좌로 입금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쁠까? 그러나 그 돈은 저축할 수 없으며 그날 밤 자정이 지나면 남은 돈은 자동적으로 소멸된다고 생각하자.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누구든지 그날 선물로 받은 그 하루를 함부로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고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말이 나와서 그렇지 시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present)이므로 현재(present)를 선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소중함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를 것이다. 누가 일년의 소중함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재수하는 학생에게 물어본다면 일년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달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미숙아를 낳았던 산모에게 물어보면 한달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주간의 소중함을 알까? 선데이 주간지를 내는 편집자에게 물어보면 한주간의 소중함을 말하여 줄 것이다. 누가 하루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일용근로자에게 물어보면 하루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누가 한 시간의 소중함을 알 것인가? 이별을 하는 연인들에게 물어보면 그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일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방금 출발하는 기차를 놓친 그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시라. 누가 1초의 소중함을 알까? 스피드스케이트에서 은메달 딴 선수에게 물어보라. 이처럼 사람마다 시간의 소중함이 다 다를 것이다.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처럼 시간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지난 한해도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금년 한해에도 해와 달이 우리들을 상치 못하게 할 것이고 재앙이 해치 않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거짓없이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를 가리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의 왜 금식하지 않고 이런 자들과 먹느냐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만들 때 양가죽 부대에 담아서 자연적으로 발효시키위해서는 새 포도주는 발효 과정에서 가스를 내뿜고 팽창하기 때문에 신축성이 없는 헌 가죽부대에 담아두면 부대가 찢어지게 되고 술도 쏟아지게 되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새 술은 새부대에 넣으라는 의미
양가죽의 기름기를 제거하면 물이나 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되므로 사람들은 양가죽으로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 삼았습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되는 과정에 가스가 발생되는데 그 때 새 부대는 신축성과 탄력성이 있기 때문에 팽창하면서 그 가스를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그 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나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속에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란 예수님의 복음과 새 언약을 가리키는 말이며, '낡은 부대'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대표로 하는 당시의 유대교의 형식주의와 위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형식주의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만 '율법'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
둘째는 자신들만 '할례의식'을 한다는 자부심.
셋째는 자신들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
이런 선민의식이나 교만심이 바로 낡은 부대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이스라엘인 중에 주님을 메시야로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몬과 84년 동안 과부로 살아오던 안나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은 전통에 사로잡힌 낡은 마음으로는 그 누구도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으며 마태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눅5:32).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의사로서 병자인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에 형식이 매우 중요하지만 형식을 잘 갖추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고 나는 죄인이라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야 된다고 예수님은 의미있는 말씀을 하시면서 새로운 교훈을 주셨는데 바로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낡은 가죽부대가 새 술의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터지는 것처럼, 유대교의 율법적 신앙은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 준수나 도덕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새 사람답게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 부대는 무엇일까요?
첫째,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모두가 '새 부대'를 준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잠언 4장 23에서 무롯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마음에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인데 새 부대는 주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낡은 부대'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곧 새 언약이요 새 포도주이니 그분을 믿는 우리 각자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의미합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자기 갱신의 노력을 끊임없이 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에는 'if'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if가 있다면 역사란 것은 이루어지질 않았겠지요. 그러므로 과거에만 얽매어 사는 인생은 발전이 없습니다. 과거를 토대로 새로움을 개척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키며 윤택하게 해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모든 사람마다 정해진 시간이 부여된 것이지요. 그 짧은 세월도 이미 반은 써버린 상태라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입니까? 명예입니까? 부와 명예는 왔다가도 사라지는 한낱 신기루와 같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정력을 거기에 쏟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부모를, 내 식솔들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사랑해야 하고 또 우리의 삶 자체를...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고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감사하고, 많은 이웃과 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오늘도 내가 일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 하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늘 이웃을 사랑하면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엔돌핀도 솟아나서 건강과 젊음도 유지할 수 있고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혼자 무인도에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말도, 웃음도, 기뻐할 일도 별로 없고 다시 사회로 복귀해도 그는 외톨이 신세를 면키 힘들 것입니다. 내 주변에 나에게 말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것처럼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이제껏 살아 오면서 나의 취약점들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내 독단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오지 않았는가를! 남에게 누가 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를! 우리 의식의 모든 것들을 바꾸었을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확언컨대 생각만 바꾸어도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2023년엔 우리 더욱 서로 사랑하고 우리의 공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꾸며 나가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3. 새해에는 영육간 건강하기를 소원합니다
현대의학은 예방 의학입니다.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들이 벌써 35000정도입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누가 이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사망에 이르는가요? 폐에 기저질환이 있다면 이런 병에 걸리면 정말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 폐가 건강하다면 코로나병균은 몸에 들어오더라도 곧 낫게 될 것입니다. 폐를 건강하게 위해서는 한방에서 말하기를 은행이나 무우를 먹으면 폐가 튼튼해진다고 하니 이럴 때일수록 건강관리를 잘해서 건강한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몸은 영과 육과 혼이 한 몸으로 되어 있으므로 육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외형이고 실은 영혼이 우리 몸의 실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읽고 전하고 지킬 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현대인에게 건강을 해치는 것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온다고 해도 믿음으로 찬송과 기도로 얼마든지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예배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육을 위해서는 식사도 거르지 말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영혼을 위해서는 예배생활을 통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말씀과 기도로 호흡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 속에는 ‘죄악의 쓴물’이 들어왔습니다. 죄악의 쓴물로 인한 고통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죄악의 쓴물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망의 독이 가득하여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죄의 쓴물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죄악도 해결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59:1-2) 1 주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므로 인간들이 죄로 인하여 쓴물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쓴물은 인간의 힘이나 지식이나 수고로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로만 쓴물을 달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표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하기 위하여 한 나무를 던지라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한 나무를 쓴물에 던지자, 쓴물이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이 나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나무의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만이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다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게 길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은 인간에게만 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고통을 받으신 다는 것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쓴 물들도 단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쓴물인 미움과 분노는 자기를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움과 분노의 쓴물이 사람 마음속에 항상 있어 그 미움과 분노의 쓴물을 토해내며 자신도 죽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토해낸 독이 퍼지면서 죽게 만듭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음의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9살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토스카니니는 음악적 재능으로 위대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할 때 어떤 연주자가 실수하면,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합주 연습을 할 때 한 연주자가 눈에 띄는 실수를 하자 즉시 얼굴이 분노로 굳어졌고 그는 갑자기 지휘대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비싼 시계를 집어서 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시계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의 분노는 자기의 값비싼 시계를 망가뜨리게 하여도 고쳐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존 헌튼은 말하기를 “분을 내는 자는 자살하는 사람이다. 분과 노는 남을 괴롭히기 전에 자기를 죽인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해부학회의에 참석했다가 다른 의사가 존 헌튼 박사를 비평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존 헌튼 박사가 분노해서 상대에 대항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분을 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누누이 가르쳤던 그가 스스로는 분을 품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는데도“화를 내는 것도 죄가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므로 화를 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까? 인내와 온유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는 화, 격노, 신경질과 같은 감정과 함께 맺힐 수 없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실험을 했답니다. 개를 묶어놓고 4시간 동안 마구 때렸더니 개는 바짝 독이 올랐습니다. 만약 그 개를 풀어 놓으면 누구든 죽일 듯이 덤벼들 정도로 약을 올렸을 때 주사기로 피를 빼보니 피 속에 ‘시안’이라는 독이 생겼는데 한 마리 개에서 나온 독은 보통 개 80마리를 죽일 양의 독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독이 오르면 개보다 시안이라는 독이 1.3배나 더 나온다고 하니까 혈기를 부리고 미움을 품으면 몸에 독이 생겨 일찍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십자가에서 극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했을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속에서 나오는 미움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쓴물을 단물로 만드는 비결이 곧 예수를 믿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불안과 공포의 쓴물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음의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생기게 됩니다. 아담이 범죄 하자 두려움 마음이 생겨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이 발달해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쓴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솟아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보다 더 많은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의 ‘존 도널드’ 교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분석했더니 대부분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요, 자기 약점에 대한 두려움이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그것뿐 이겠습니까? 경제적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수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을 읽어 보기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죽은 미국의 청년의 수가 30만 명인데, 그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낸 후, 염려 불안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미국 시민은 백만 명이 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죽은 군인 수보다 그들을 보내놓고 염려와 불안으로 심장마비로 죽은 가족이 세배 반이나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워싱톤 디씨에 가면, 링컨이 애용하던 성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 속에 손때에 눌린 손가락 자국이 있습니다. 여러 번 같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생긴 자국입니다. 그곳은 시편 34편 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였습니다. 링컨은 전쟁과 관련된 모든 두려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받았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산 소망 때문에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벧전1:3-4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던 ‘위르게 몰트만’ 박사는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배경을 잠깐 소개 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때, 그가 17세 되던 해, 그는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영국인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좌절과 모욕과 고통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자기의 고향 함부르크가 완전히 폭격으로 다 무너지고 자기 가족들이 폭격을 당해 다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어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멸시와 모욕을 당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목을 매어 자살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목사가 성경책 한 권을 주었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 땅에 와서 숱한 은혜를 베풀었건만, 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인정하지 아니하고“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제자들은 다 도망쳐 버리고, 가장 외롭고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장면을 보고 자기의 절망적인 상황과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던 그 장면이 몰트만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보며‘ 아! 나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가 있구나! 나의 가슴속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이 절망에서 부활이 일어나고, 다 파멸된 우리 독일이 다시 부활하고, 무너진 함부르크가 부활할 수가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겨서 그는 소망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게 된 후 몰트만의 삶은 광명한 빛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새해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공급되는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3)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야 영육간이 건강합니다
육신의 건강은 하루 밥 세끼를 잘 먹고 소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여야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고 각자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적 체력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보약먹더라도 운동부족이면 육체적 건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신앙생활도 내 몸이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무조건 기도만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적용하고 암송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의 제물입니다. 찬양은 이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부를 것인데 한 주에 한곡씩이라도 외우며 부른다면 일년이면 적어도 오십여곡은 머릿속에 입력시킬 수 있다. 이러한 말씀 암송과 찬양 외우기는 뇌의 운동을 촉진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치매 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2023년에는 건강을 지키는 것은 내 몫이니 각자가 건강관리를 잘하여 하루하루 죄로 만연된 이 세상을 선으로 싸우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서 미지의 2023년을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족속들과 싸워야 가나안에서 살 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들도 이 한해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심정으로 죄악의 가나안 일곱족족을 내마음에서 몰아내야 내가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앙생활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노력하고 이전보다 더 노력하고 마귀세력과 싸워서 승리하였을 때 오는 결실입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약속하신 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누릴 날이 올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과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쓴물, 미움과 분노의 쓴물, 불안과 공포의 쓴물, 좌절과 절망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줄 원동력으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세가 가까워지면서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함으로 날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