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瓦也 정유순
“까치까치 설 날은 어저께고요/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섣달 그믐날은 까치설날이리고 하여, 어린아이들은 미리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들은 서로 찾아보고 인사하는데, 이것을 과세(過歲) 또는 ‘묵은세배’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초에 바쁘기 때문에 미리 세배(歲拜)를 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밤에 눈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한 해의 첫날 전후에 치루는 의례와 놀이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설 차례상-두산백과 캡쳐>
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 첫 아침을 맞는 명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갖고 명절을 맞았다. 한편 그믐날 밤에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여 밤을 새우는데, 이를 수세(守歲)한다고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집에 와서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고 가면 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어, 신을 감추고 일찍 잔다고 한다.
<설 전 서울역 귀성인파-네이버 캡쳐>
어른들은 설날 아침에 설비음[세장(歲粧)] 위에 예복을 차려입고, 사당이나 대청에서 4대 조상의 신주를 내어 모시고 차례(茶禮)를 지내고, 조부모 부모 등 어른께 차례대로 세배를 드린 후 아침 식사를 떡국으로 한 살을 더한다. 어른들은 세배를 받으시며 새해 덕담과 함께 약간의 세뱃돈을 주시기도 한다. 그리고 성묘를 한 다음 마을의 어른들과 친척 집을 방문하여 새해 인사를 드리며 덕담과 함께 한 해의 풍요를 다짐한다.
<설 차례-네이버 캡쳐>
설은 시간 적으로는 한 해가 시작되는 새해 새달의 첫날인데, 한 해의 최초 명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설날을 원일(元日)·원단(元旦)·원정(元正)·원신(元新)·원조(元朝)·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수(年首)·연시(年始)로도 부르는데 이는 한 해의 첫날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일(愼日)·달도(怛忉)라고도 하는데, 이는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설 떡국-넨이버 캡쳐>
설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법(曆法)체계가 갖춰져야만 지낼 수 있는 명절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내던 명절 같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자부(紫府)선생이 윷놀이를 만들어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집 또는 마을마다 가족 단위로 또는 마을 사람들끼리 모여 점을 치며 놀던 유서 깊은 놀이로 기록하고 있다. 자부선생은 치우(蚩尤)천황 때 신선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윷놀이가 처음 등장한 단군조선 이전인 배달조선 때부터 설 명절을 지내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윷-네이버 캡쳐>
달도는 <삼국유사(三國遺事)>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조에 “신라 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 때 궁중에서 궁주(宮主)와 중의 간통 사건이 있어 이들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후 해마다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上午)일에는 만사를 꺼려 근신”하였다 하여 달도(怛忉)라 했다. 달도는 설의 이칭이기도 하므로 설의 유래로 보는 것이다. 또한 상해·상자·상오일은 정초 십이지일(十二支日)에 해당되는 날로 이때의 금기사항이 풍속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온다.
<십이지신상-네이버 캡쳐>
설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수서(隋書)에 전해지는데 “신라인들은 원일, 즉 새해 첫날에 서로 문안을 드리고 왕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군신들을 격려하며 일월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 고이왕(古爾王)이 정월에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고, 책계왕(責稽王) 때 정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설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전통도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와 조선조까지 쭉 이어지며 설 명절 기간에는 빚 독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 세배-네이버 캡쳐>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전통인 설명절은 일제강점기에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강제적으로 금지 하였으나, 오랜 전통에 의해 별 실효가 없었다. 이러한 정책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도적으로 양력설에 3일씩 공휴일로 삼았으나, 오히려 2중과세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하여 1985년 ‘민속의 날’로 정하여 휴일이 되었다가 사회적 여망에 따라 본격적인 설날로 다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양력설을 신정(新正)이라 하고, 음력설을 구정(舊正)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설을 폄하(貶下)하는 의미가 강하다.
<윷놀이-네이버캡쳐>
특히 일제는 음력설에 명절을 보낸다거나 세배를 하게 될 경우 즉시 엄벌에 처한다거나 해당자들에게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또 각 지방 떡방앗간 등에도 음력설에 떡을 치거나 돌릴 경우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을 내렸다. 더욱이 음력설에 세배를 하거나 귀성을 하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오징어 먹물이나 검은 물로 된 물총을 발사하여 세배 길을 방해하였다. 그중 소복(素服)을 입은 조선인들은 가장 먼저 표적이 되었다. 이는 백의민족(白衣民族) 정신을 말살하려는 흉계가 더 강했다.
<복조리-네이버 캡쳐>
한편 설이란 용어를 나이를 헤아리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첫날인 ‘설’을 쇨 때마다 한 살씩 더 먹는다. 설을 한 번 쇠면 1년이며 두 번 쇠면 2년이 되는 이치를 따라 사람의 나이도 한 살씩 더 늘어난다. 결국 ‘설’이 사람의 나이를 헤아리는 단위로 정착하여 오늘날 ‘살’로 바뀌게 되었다고도 하며, 설이 새해 첫 달의 첫날, 그래서 아직 낯설기때문에 ‘설다’, ‘낯설다’ 등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연날리기-네이버캡쳐>
설 명절은 하루에 그치지 않는다. 설이란 용어 자체는 정월 초하룻날, 하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실제 명절은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설을 설 명절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거의 다달이 명절이 있었다. 그중에서 설날과 보름 명절을 크게 여겼다. 설날은 한 해가 시작하는 첫 달의 첫날로서 중요하며 보름 명절은 농경성(農耕性)을 그대로 반영하여 중요하다.
<연>
곧 농경 국가에서 보름달, 곧 만월은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 초하루는 천지가 개벽(開闢)될 때의 그 순간에 비유되어 최대의 날이 된다. 보름 명절 가운데서도 정월 보름과 8월 보름인 추석은 특히 각별하다. 정월 보름은 첫 보름이라는 점에서 보다 중시되어 대보름 명절이라고 하고, 8월 보름은 우리나라와 같은 농경 국가에서 여름내 지은 농사의 결실을 보는 시기로 수확을 앞둔 명절이어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농경의례는 크게 약해졌다.
<설빔 입은 어린이들-네이버 캡쳐>
설날 차례상과 세배 손님 접대를 위해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 음식들을 통틀어 세찬(歲饌)이라고 한다. 세찬에는 떡국, 세주, 족편, 각종 전유어, 각종 과정류, 식혜, 수정과, 햇김치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있는데 준비는 가세에 따라 가짓수와 양이 다르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며 어느 집에서나 만드는 대표 음식은 떡국이다. 그래서 떡국 한 그릇을 더 먹었다는 말은 설을 쇠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설 차례상-네이버 캡쳐>
한편 설 전에 어른들께 귀한 음식을 보내는 일, 어른들이 아랫사람들에게 보내는 먹을 것들도 역시 세찬이라고 하였다. 그때 보내는 음식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쌀, 술, 담배, 어물(魚物), 고기류, 꿩, 달걀, 곶감, 김 등이었다. 그리고 설명절 기간에는 새해에 개인의 신수를 점쳐 보기 위하여 오행점을 보거나 윷점을 치고, 토정비결을 보기도 한다.
<정초 지신밟기-네이버 캡쳐>
또한, 일반적으로 설명절 기간에는 어린아이들이 연날리기를 하다가 14일 날 저녁에 줄을 끊어 날리면 그해의 액을 날려 버린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을 ‘액막이연’이라고 불렀다. 설을 지내고 3일째 되는 날에 일반 농촌이나 산촌에서는 마을고사, 또는 동제라고 하는 공동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풍악을 울리는 ‘지신밟기’를 하였다. 지신밟기를 할 때에는 조금씩 쌀을 내아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삼는다. 이는 새해를 맞아 공동의 생활공간을 새롭게 만들기 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액막이연-네이버 캡쳐>
첫댓글 감사합니다. 39.49.59.69.79.89.99. - 끝에9자가든해에 보통불길한일들이 일어나곤하는데 이것을 요즘[액땜]
한다고 하지오.물론미신이라지만 가끔씩은 신통하게 맞기도하지오. ...여하튼 우리 동문들께 이모-든 불길한사안들은
다물러가고 금년한해동안 건강하고, 하시고저하는 모-든일들이 뜻과같이 채워넘치는 한해가되어
주시도록 칠성님께 빌고 또비나이다....
아홉수~!
산을 가거나 길을 거닐 때
마지막 넘겨야 하는
마지막 고비가 아홉수 같아요.
산에 가서도 마지막 숨이
가파오를 때가 9부 능선을 넘을 때고
머떤 일을 할 때도 9할을 달성하고
마지막 1할을 남았을 때
가장 힘 들다고 하더군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긍정의 힘으로 무난히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至誠이면 感天이죠~~~
양상규 선배님의 사진을
올리셨네요^^.
어찌보면 추억의 사진입니다.
동창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었는데...
@22회 정유순 선배님!
주옥같은 글 고맙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설날조차도
구정이라고 핍박받던 시절이
있었고 설날을 돌려받는데도
반대하던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새삼스럽습니다.
@28회 최충현( 百濟本鄕 ten2s cafe)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따라
겪어야 했던 민속 뿐만 아니라
글과 언어 지명 성(姓)씨까지
말살하려는 음모가 자행되었죠.
해방 후에는 일제 잔재 때문에
二重過歲라는 이유로 냉대를 받았고…
이제야 겨우 설명절로 자리를 굳히는데
그 옛날 화려했던 본 모습은
形骸化되어 버린 것 같아요.
가는 세월 탓 할 수 없고
세상 변하는 것 나무랄 수 없지만
溫故知新의 마음으로
옛 것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28회 최충현( 百濟本鄕 ten2s cafe) 양상규 - 동창회관 2층에 의자200개 회관개관시 기증하셨을뿐만아니라, 이공발전시까지 보내주시어
우리동문들을 기쁘게 해주셨던 고마운 선배님이시지요...감사합니다...(선배님은 이미고인이되셨고,사진은 선배님께서 대전 모요양병원에 계실때 동문들이 병문안가서 기념사진 남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