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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95)/종
제목 : 지극히 존귀하나 비천한 종
성경 : 사 52:13~53:6
찬송 : 45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1227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사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사 52: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지금까지 소개된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본문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성격이 무엇인지, 여호와의 종에게 주어진 백성의 언약의 사명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가 어떻게 이방의 빛으로 세워질 것인지, 그가 겪었던 멸시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의 신원을 구하는 종의 순종의 결과가 무엇일지, 왜 ‘여호와의 종’이란 명칭이 메시아와 이스라엘에게 함께 사용되었는지 등의 내용들이 본문을 통해 비로소 명확해집니다. 여호와의 종이 감당했던 사명은 자기 백성을 대표해 그들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는 것이고,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그 사명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사역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고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성공하는 종(52:13~15)
여호와의 종은 ‘형통하는’ 즉 성공하는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 52: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네 번째 ‘종의 노래’로 알려진 본 단락은 “보라”(힌네)로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소개합니다.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여호와께서 화자로 등장하는 본문은 53장의 서론 역할을 하는데, 이 부분은 종의 고난과 영화를 요약해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먼저 ‘지혜롭게 행하리라’고 소개됩니다. 개역개정은 ‘형통하리니’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말씀에 완전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손상된 의로우심과 사랑을 다 채워드리고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가십니다. 바로 이 종의 순종이 하나님의 모든 분노를 사랑으로 바꾼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세 개의 동사 구문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종이 누릴 영화를 점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 33: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
사 52: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사 52: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이 하나님의 종은 천사보다 더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었고 침 뱉음을 당해서 얼굴이 더러워졌으며 채찍에 맞아서 온몸이 다 찢어졌습니다. 천사들과 사람들은 이분이 왜 이렇게 상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랬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 상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두 번 놀랍니다. 한 번은 그가 모든 통치자 위에 있다는 사실로 놀랍니다. 이 세상의 왕이나 군인이나 독재자나 재판관의 상사가 바로 이분입니다. 그런데 세상 에서는 백성이 고통을 당해 왕을 구원하지, 왕이 고통을 당함으로써 백성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놀라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 방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온 세상이 아직 모르는 진리를 말씀하셔서 놀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이 고난당한 하나님의 종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지 돈이나 세상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죽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큰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종(53:1~3)
유다 백성들은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크게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날 터인데 과연 누구를 통해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큰 정치인을 쓰실지, 아니면 위대한 학자를 쓰실지, 용감한 장군을 들어 쓰실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기에 믿지도 않았습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1절에 보면 복수 ‘우리’가 등장합니다. 53장 전체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종이 자신들의 죄를 위해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보고 깨달을 것이라는 언급(52:15)을 근거로 그들을 ‘우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만약 종의 고난을 바벨론 유수에 대한 은유로 보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의 고난과 죽음을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대속적 행위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본문은 선지자가 그들을 대표해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1절을 수사학적 질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탄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누가’와 ‘누구에게’는 모두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즉 종의 고난에 대한 메시지, 그를 통해 드러내신 여호와의 능력을 믿은 자가 그들 중 적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에서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이 모인 정치적인 단체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아주 연한 싹과 같은 사람은 통해서 위대한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는 남을 구원하기는커녕 자기도 구원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높게 평가하는 권력이나 능력을 전혀 갖추지 않았을 뿐더러 인간적인 매력조차도 없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멋있게 생기지도 않으셨고 풍채가 좋은 분도 아니었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참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실제로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빈민가 출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기반이나 가문의 배경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모조차도 별로 볼 것 없었습니다.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 출신도 아니었고 빈민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사야의 예언대로라면 예수님은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았고 키도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모로 본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아주 싫어하는 혐오인물을 대하듯이 했습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다.’는 것은 그가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했다는 표현입니다. ‘질고를 안다.’는 것은 질병과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질병을 잘 아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병을 많이 앓았든지 아니면 가족 중에 환자가 있든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별명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입니다. 이것저것 다 앓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상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 가난이고 질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나 사역 기간 중에나 늘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지만 수입이 별로 시원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는 바람에 예수님은 소년 가장 노릇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강하고 인기가 많은 사람에 의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사람에 의해 일어납니다.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그리 대단하지 못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치료하시는 종(53:4~6)
남의 고통을 내가 대신 당하게 되었다면 몹시 억울할 것입니다. 더욱이 남 대신 기꺼이 매를 맞아 줄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그 모든 고통을 자신이 즐겁게 당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게 하셨고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종의 고난의 의미는 부사 ‘실로’라는 말을 통해 강조됩니다. 종이 감당한 질고는 ‘우리의 질고’이고, 그가 당한 고난은 ‘우리의 간고/슬픔’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바이나흐누)은 이스라엘의 오해를 효과적으로 도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까?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해인 것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리셨습니다. 못에도 찔리고 창에도 찔리셨습니다. 찔리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산 채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는 상하셨습니다. 마음도 상하고 외모도 상하셨습니다. 너무 울이서 눈이 부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쓴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는 유죄 선언을 받아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존경받던 위치에서 멸시 천대를 당하는 죄인이 되셨습니다. 무지막지한 채찍질까지 당하셨습니다.
수동형 분사 “찔리다”(메홀랄)와 “상하다”(메두카)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와 함께 쓰이면서 종의 고난의 이유가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두쌍의 대조 즉 ‘징계’와 ‘우리의 평화’, ‘그가 채찍으로 맞음으로’와 ‘우리는 나음을 얻었다’는 종의 대속적인 고난이 이룬 유익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호와의 종은 고통당하는 사명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질고, 슬픔, 징벌, 맞음, 고난, 찔림, 상함, 징계, 채찍 등 고통이 떠오르는 단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다른 이들의 이해나 연민을 얻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종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계속 사용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통은 모두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고,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다면 당연히 그의 잘못 때문이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 받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의 참된 지도자를 세우셔서 수많은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시고, 한 사람의 중보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죄와 어리석음을 용서하시는 모습으로 구원 역사를 진행해 가셨습니다. 이 예언은 참된 백성의 지도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가르침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역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은 고집이 센 짐승입니다. 어떤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하면 기를 쓰고 갑니다. 그 길로 가면 틀림없이 낭떠러지인데도 고집을 부리면서 갑니다. 우리 인간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고집스럽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기에 낭떠러지가 있고 무서운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셔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다 뒤집어씌우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셔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합니다. 상하고 고통 받는 모습으로 세상 가운데 나아가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동참하기를 바라십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