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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Relationship)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 .1895~1986
「인도 남부 출생으로 철학자, 작가, 연사. 심리적 혁명, 마음 의 본질 , 명상을 통하여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혁명이 필요함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어떤 외부 실체에 의해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 모든 관계가 거울처럼
우리들 대부분에게 상대방과의 관계란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일종의 의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의존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소유욕의 원인이 되며 결국 불화, 의혹, 좌절로 끝난다.
비록 상대방에게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침범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욕망은 있다. 의존 없이, 불화와 갈등 없이 어떻게 사랑할까,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욕망이나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것이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이나 사회 또는 환경에 의존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된다. 그래서 그것들에 매달리게 되며, 우리는 자신의 심리적인 안전과 위안을 위해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강하게 거부한다.
삶이란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영고성쇠, 부침(浮沈)의 과정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나 감각적으로는 확고하고 위안을 주는 가치들에 매달리고 있다. 따라서 변화와 영속성에 대한 욕구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관계가 없는 삶이란 잇을 수 없지만, 우리는 자기만을 위해 소유욕이 강한 사랑에 바탕을 둔 나머지 관계를 너무도 괴롭고 끔찍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진정한 해답은 도피· 이상· 신념에 있는 게 아니다. 의존과 소유욕의 원인을 이해하면 찾을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상대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런 문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 사회와 우리의 관계라는 문제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제일 원인은 한결같은 갈망의 중심인 자기 자신, 즉 자아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행동과 반응을 본질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관계는 밑바탕부터 철저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내가 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관계의 복잡함을 파악해 가는 과정에서 이해가 생기기 때문인데, 이것은 이성과 감정을 초월한 이해다. 이성에만 바탕을 두고 이해하면 고립과 자만이 있으나 사랑이 없고, 감정에만 바탕을 두고 이해하면 깊이가 없다. 거기에는 금방 사라지고 말 감상적인 생각만 있고 사랑은 없다. 오직 이해가 있어야만 행동이 완전해질 수 있다.
탐욕의 작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자상하고 너그러워지려고만 하는 건 무지와 무자비함을 영속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자비와 용서를 기르는 것은 자기 고립을 가져오고 교활한 자만심에 빠져들게 한다. 갈망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자비와 용서가 생긴다. 갈고 닦은 덕은 덕이 아니다. 이런 이해는 늘 깨어 있는 자각과 유연하고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나름의 훈련이 필요한 단순한 억제에는 그에 따른 위험이 있는데, 그것이 일반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천박하다.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집중하게 되어 그 안에서 이해가 꽃피어난다.
많은 갈등과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파악하려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작가하지 못하게 방해하는가? 우리가 자각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견해, 우리의 두려움, 이상, 믿음, 희망, 전통들이 모두 베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 갈등과 고통의 뿌리를 찾아라.
질문: 만약 두 사람이 갈등과 고통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이걸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관계를 끝내야 할까요?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 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질문을 명확히 해주면 좋겠다. 고통과 갈등이 있는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뿌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함께 이 문제들을 알아보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과 관계있는 문제다.
관계가 화목하지 않은 원인은 아주 많을 것이다.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그 근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깊은가? 이건 꼭 물어봐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군가 즉 나 같은 사람이 대답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질문을 던져놓은 다음 문제가 스스로 씨 뿌리고 꽃피우고 움직이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할 수도 있다.~~~~내가 찾고 싶은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이런 갈등의 깊은 뿌리,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드러나기 시작하면 해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 관계란 무엇인가
삶이란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므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혼란과 다툼과 헛수고만 할 것이다. 따라서 관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실제 삶의 전 작용과 독립과 예속 사이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의 관계는 고립의 한 작용이며, 따라서 늘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가? 그대와 상대방 사이의 관계, 그대와 아내와의 관계, 그대와 사회의 관계는 이런 고립의 산물이다. 내가 말하는 고립이란 우리가 항상 안전, 만족, 권력을 얻으려 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진심으로 염려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기는 해도, 진심으로 염려하지는 않는다. 그 관계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동안에만,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어주거나 만족시켜주는 동안에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관계에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장애가 생기는 순간 그 관계를 저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만족스러운 동안에만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대의 삶을 아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관계를 관찰하면,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저항 즉 벽을 쌓아놓고는 그 너머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우리는 늘 그 벽을 간직하고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그것이 심리적인 벽이든, 물질적인 벽이든, 경제적인 벽이든 또는 국가 간의 장벽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가 그 벽 뒤에서 고립된 채 살고 있는 한 상대방과의 관계란 없다.
그게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벽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며, 그게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슬픔, 너무 많은 아픔, 전쟁, 파괴가 있고 비참한 이 세상은 너무나도 혼란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심리적인 존재인 안전벽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그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 따라서 우리들 대부분에게 관계란 하나의 고립작용이고, 그러한 관계는 결국 고립되어 가는 사회를 만들 게 뻔하다.
고립 작용은 권력을 추구하는 작용이며, 자신을 위해 권력을 얻으려하든 인종 집단이나 민족 집단을 위해 얻으려 하든 고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권력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 자체가 곧 분리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지위에 대한, 권위에 대한 욕망 없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보다 좀 더 큰 무언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보다 큰 무엇, 즉 정당, 국가, 인종, 종교, 신 등과 자신을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이 권력 추구이다. 그대는 스스로 자신이 텅 비어 있고 둔하고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언가 더 큰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좋아한다. 이렇듯 자신을 무언가 더 큰 것과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권력의 한 형태이며, 그것이 고립과 더 나아가 갈등을 초래한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관계를 관찰하면,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저항 즉 벽을 쌓아놓고는 그 너머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우리는 늘 그 벽을 간직하고 무너지지 않게 받치고 있다. 그것이 심리적인 벽이든, 물질적인 벽이든, 경제적인 벽이든.... 말이다. 우리가 벽 뒤에서 고립된 채 살고 있는 한 상대방과의 관계란 없다. 그 벽이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 벽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며8, 그게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슬픔, 너무 많은 아픔, 전쟁, 파괴가 있고 비참한 이 세상은 너무나도 혼란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심리적인 존재인 안전벽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그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
따라서 우리들 대부분에게 관계란 하나의 고립 작용이고, 그러한 관계는 결국 고립되어가는 사회를 만들 게 뻔하다. 이것이 곧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여전히 고립 작용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을 아주 자세히 조사해보면, 권력욕은 그 성격상 스스로를 폐쇄시키는 작용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지위와 자신만의 안전을 찾고 있으며, 그런 동기가 존재하는 한 사회는 곧 고립 작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권력에 대한, 지위에 대한, 권위에 대한 욕망 없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보다 좀 더 큰 무언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권력의 형태는 다양하며, 그건 단순히 지위와 부를 얻는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권력의 한 형태이며, 그것이 고립과 더 나아가 갈등을 초래한다.
자기 자신을, 내면의 갖가지 움직임과 흔들림을 자각하게 되면 동기, 의도, 감춰진 위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 안에서만 변형이 일어난다. 이런 권력 추구가 멈출 때에만 다시 태어남이 있고, 오직 그때야만 우리는 갈등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 행동, 활동, 그리고 관계
들려오는 것을 거부하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고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활동과 행동을 구별하고 싶다. ~~~만약 관계가 단순히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관계에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겠는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대는 활동하기를 멈춘 순간 초조하고 불안한 느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긴장도 풀려 있는 것 같아서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홀로 있게 되면 어쩌나, 혼자 산책하러 나가게 되면 어쩌나, 책 한 권 없이, 라디오도 없이, 말할 사람도 없이 혼자만 고립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고, 손으로 마음으로 머리로 뭔가를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관계를 기분전환이나 무언가 다른 것으로부터의 탈출구 정도로 취급한다면, 관계는 단순히 활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관계 대부분은 기분 전환이며, 그래서 관계에는 일련의 활동들만 있는가? 전에도 말했듯이, 관계가 자기를 드러 내는 작용일 때에만, 관계라는 바로 그 작용 안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에만 관계는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관계 안에서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관계를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걱정근심, 불확실성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라 관계는 단순한 움직임, 단순한 활동이 되고 말았다.
관계란 몹시 고통스럽다는 것, 그리고 관계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드러내는 작용이 아닌 한 관계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수단일 뿐이라는 것에 주의해본 적이 잇는지 모르겠다.
행동은 관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행동은 생각의 작용에 말려들지 않는, 곧바로 직접 그리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관념 위에서 행동하면 그것은 활동이 되며, 만일 우리의 관계를 어떤 관념 위에 둔다면 그런 관계란 단지 활동일 뿐이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관념이란 어떤 필요와 욕망과 목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만일 내가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대가 필요해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분명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그대에게 뭔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념에 바탕을 둔 그런 관계가 자기를 드러 내는 작용일 리가 없다. 그것은 다만 타성, 활동, 단조로움일 뿐이며, 그 안에서 습관이 형성된다. 따라서 그런 관계는 항상 긴장, 아픔, 다툼, 몸부림이며,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관념 없이, 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맺는 게 가능할까? 만약 우리가 어떤 욕망에 의해, 육체나 심리의 어떤 필요에 의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서로 마음의 교류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의식에 겹겹이 쌓인 모든 차원에 있는 진짜 관계다. 필요에 의해 생겨나는 이런 조건으로 제약되지 않은 관계는 없을까?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다. ~~~아주 고요하게 논의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말다툼, 살기 위한 몸부림, 아픔, 또는 단순한 습관이다.
아주 깊이 알아보려면, 자기 앎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상대방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관계는 우리가 허락한다면 자기를 드러내는 작용이 될 수 있지만,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만족을 주는 활동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그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는 한, 그 관계는 혼란과 반목을 만들어낼 게 뻔하다. 욕구라는, 필요라는, 만족이라는 관념 없이 관계 안에서 산다는 게 가능할까?
‣ 우리의 문제는 갈등, 관계 안에 있는 갈등
실체는 마음이 잠잠할 때에만 생긴다. 잠잠해질 때가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잠잠하게 하려고 훈련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훈련할 때, 그것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상태에 있고자 하는 투사된 욕망일 뿐이다. 그런 상태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종교란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에 대한 이해이며, 다시 말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행동에 대한 이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해가 종교지, 어떤 관념에 대한 숭배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관계 안에 있는 행동의 아름다움, 깊이, 광범위한 의미에 대한 이해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결국 관계이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다. 그대는 친구들과, 가족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되어 있다. 설사 산으로 들어간다 해도 음식을 가져다주는 삶과 관계되어 있다. 자신이 투사했던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존재는 살아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이 관계이며 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실체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관계는 고통스럽고, 방해를 받아 어지럽고,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관계에서 도망쳐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게로 가는데, 그것을 우리는 현실 추구라고 생각한다. 추구하는 자는 진짜를 추구할 수 없다. 그는 오직 자기 나름의 이상을 추구할 뿐이며, 그것이 곧 자기투사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계와 그것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종교이며, 다른 어떤 것도 종교가 아니다. 그 관계 안에 존재의 모든 중요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든, 자연과의 관계든, 나무와의 관계든, 별과의 관계든, 관념과의 관계든, 국가와의 관계든 간에, 그런 관계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 전부가 밝혀진다. 그것이 인간이며, 그것이 마음이다. 자아는 갈등이라는 초점을 통해 생겨나며, 갈등에 초점을 맞추면 마음의 자의식이 생긴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는 없다. 그대가 아무리 자아를 높은 위치에 올려놓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만족을 바라는 자아일 뿐이다.
그러므로 관계에서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 그대 자신을 알라
갈등, 아픔, 혼란, 불행을 이해하려면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에 반대해서 외돌토리로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대와 내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가 한 지도자를 따르고 그가 하는 말에 의해 최면에 걸릴 때, 우리는 대중이 되어 착취당한다. 따라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고립되거나, 수도원이나 산이나 동굴 속에 숨어살아서는 찾을 수 없고, 관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문제 전체를 이해해야만 찾을 수 있다.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관계인데,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고, 불행과 끊임없는 골칫거리를 만든다. 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끝없는 고통과 다툼의 근원일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 즉 자기 앎은 지혜의 시작이다. 그런데 자기 앎을 책에서 배울 수는 없다.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책은 없으니까.
그대 자신을 알라. 일단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들 각자가 매일 직면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 앎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직 그때에만 진리가 찾아올 수 있다. 진리는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리는 미지의 것이며, 그대가 찾으려 애쓰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선입견이 없을 때, 우리 자신의 전 작용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진리는 청하지 않아도 찾아온다.
‣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위해
자기 앎은 책에서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랜 기간 고된 수행과 훈련 끝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각이다. 매 순간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그대로의 모든 생각과 느낌에 대한 자각이다. 관계는 추상이나 이념 차원에 있지 않고 실제이며, 재산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관념과의 관계이다. 관계에는 존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고립 속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 없으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갈등은 관계 안에, 즉 우리의 존재가 있는 모든 차원에 있다. 이 관계를 완전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진짜 문제이다.
종교란 신앙이나 교리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매 순간 발견되는 진리에 대한 이해다. 신앙과 교리인 종교는 관계라는 실체에서 달아나 숨는 것일 뿐이다. 종교라고 부르는 믿음을 통해 신이나 또는 그대가 뭐라 부르든 간에 그것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사람들을 떼어놓고 붕괴시키면서 오직 대립만 만들어낼 뿐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조직 종교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사람과 사람이 대립하게 하는 특정한 패턴으로 묶어두기만 한다.
‣ 올바른 생각과 올바르게 생각하기
만일 우리의 생각이 배경 즉 우리가 가진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게 무엇이든 그건 틀림없이 한낱 반응에 불과할 것이며 따라서 더 큰 갈등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생각이란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에, 자기 앎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자기 앎이란 단순히 어떤 특정한 생각을 배우는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자기 앎은 관념에, 믿음에, 또는 결론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자기 앎이 아니라 단순한 정보일 뿐이다. 정보에도 차이가 있는데 지식과 지혜가 그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의 작용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부분 정보, 즉 겉핥기식 지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문제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생각해볼 수가 없다. 자기 앎의 전 작용을 이해하려면 관계 속에서 자각해야 한다.
관계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거울이며, 왜곡하지 않을 거울이고, 우리의 생각이 스스로 펼쳐 보이는 것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고립, 즉 많은 사람들이 얻으려 애쓰는 고립이란 관계에 맞서 남몰래 쌓은 은밀한 저항이다. 고립은 관계를, 즉 사람들과의, 관념과의, 사물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틀림없다. 자신과 소유물, 자신과 사람들, 자신과 생각들 사이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한, 분명 혼란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순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인지 관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올바른 생각이 펼쳐지도록 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관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의 깊게 보고, 나아가 각각의 생각, 각각의 느낌이 정말 어떤 것인지 발견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관계란 이러저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이나 선입견이 들어가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게 뻔하다. 그게 우리의 어려움이다. 우리가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이미 마음을 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관계란 곧 안락함, 만족, 안전이라는 말이며, 그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소유물, 관념, 사람들을 이용한다. 우리는 믿음을 안전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 한다. 관계는 단순히 기계적인 조절장치가 아니다.
‣ 창조적으로 알기
우리의 주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다.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 반드시 훌륭한 건축가나 뛰어난 작가가 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건 다만 능력일 뿐이며, 능력이란 창조적으로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창조적인 행위는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만 생겨나고, 관계란 다른 사람과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낡은 것을 가지고서 새것을 만나고 있으며, 그게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 창조적으로 사는 것은 그런 배경 없이 사는 것이다. 새것을 새것으로 만나면 더 이상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새것으로 만나야 하며, 그때 가서야 비로소 모든 작용과 재앙, 불행, 기아, 전쟁, 실직, 불평등, 이념의 충돌로 일어나는 전쟁 등 늘어만 가는 모든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정말로 선입견 없이 종교적 편견 없이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더 큰 문제들을 보게 될 것이다.
‣ 모든 관계는 고립이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뭐든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다.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올바른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아주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따라서 관계 안에 있는 갈등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작용을 이해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관계 안에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만드는 사회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관념과 견해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건 더 많은 해악과 더 많은 불행을 일으키기만 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와의 관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의 모든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 갈등이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다. 자기 앎은 지혜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곧 세계이며, 그대는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대와 상대방과의 관계다. 그대가 그것을 만들어냈으니, 그 관계 그리고 그대와 사회와의 상호 작용을 그대 나름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해결책이 나온다.
자기고립 작용은 간단하다. 즉 그대는 언제나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될 길만 찾고 있다는 말이다
‣ 단 하나의 혁명
이념에 바탕을 둔 행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이념은 좌파나 우파의 이념일 수도 있고, 종교나 세속의 이념일 수도 있지만, 관계에 대해서는 한 결 같이 파괴적이다. 관계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행동이다.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투쟁과 반목, 전쟁과 혼란이 불가피하다.
관계는 접촉, 교감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념으로 나뉘어 있는 곳에서는 교감이 있을 수 없다. 신념은 그것 주위에 사람들의 무리를 모을 수 있겠지만, 그런 무리는 어쩔 수 없이 대립을 낳게 되며, 그러면 다른 신념을 가진 또 다른 집단이 형성될 것이다.
관념은 문제와 직접 관계를 가지는 것을 뒤로 미룬다. 문제와 직접 관계가 있을 때에만 행동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모두 결론과 해석, 그리고 우리가 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서 문제에 접근한다. 그런 것들은 행동을 뒤로 미루는 수단이다. ~~~관념은 언제나 사람들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모든 이념과 모든 편견에서 비롯된 자유를 가지고서 이해해야 한다. 즉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의 편견뿐 아니라 지식에서 나오는 편견에서도 말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문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하나하나가 새로운 것이다. ~~~~문제를 항상 새롭게 보아야 하며 과거라는 스크린을 통해서 보면 안 된다.
지금의 투쟁은 그대와 상대방이 만들어놓은 과거의 산물이다. ~~~~상호 필요에 바탕을 둔 관계는 갈등만 일으킨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에게 상호 의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목적과 목표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꾀하고 있는 목적이 있다면 그건 관계가 아니다. 그대가 나를 이용할지도 모르고, 나도 그대를 이용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용하면 우리는 접촉할 수 없다. 상호 이용에 바탕을 둔 사회는 폭력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존재, 생각, 활동이라는 작용 전부가 관계를 가로막는 고립을 만들어낸다. 야심으로 가득 찬사람, 교활한 사람, 신념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과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상대방을 이용할 뿐이며, 그것이 혼란과 적의를 만든다. 이 혼란과 적의가 우리의 현 사회구조 안에 존재한다.
‣ 관계와 두려움
질문 :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관계이며 따라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어떨지를 묻는 것은 마치 고립 속에서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게 분명하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관계를, 즉 마음 그리고 마음이 가지고 있는 관념, 특정한 가치들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인간과 그가 가진 재산 사이의, 인간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만약 내가 그대와 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은 관계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할까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관계는 어떤가, 올바른 관계란 무엇인가를 무엇보다 먼저 알아내는 것이다. 올바른 관계를 수립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다름 아닌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올바른 관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 나는 관계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의 관계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관계는 의존하는 상태라는 말이다. 나는 어떤 관념을 믿는다. 그 믿음이 나에게 위안을, 안전을,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 모든 관계를 이해할 때
진리는 알려지는 게 아니다. 알려진 것은 과거의 것이며, 그건 이미 죽었다. 진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정적인 게 아니다. 따라서 진리를 알 수는 없다. 진리는 끊임없는 움직임이며,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다.
자기 앎은 지혜의 시작이다. 이 자기 앎은 책에서 주워 모은 게 아니라, 그대 자신이 아내나 남편과, 자녀들과, 사장과, 버스 기사와의 일상적인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 안에 있는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을 제약하는 조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마음이 몹시 고요해지고, 정말로 침묵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그대 무얼 찾고 있는가
‣ 완전히 다르게 산다는 것
그대 자신을 살펴보라. 그대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인가. 그건 그대가 아주 많은 장벽과 관념, 특유의 기질, 경험, 불행, 염려,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행동이 늘 그대를 고립시키고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대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움직이고 행동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닌, 딸과 사위 등등의 사이에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의 삶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끊임없는 전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대는 사회사업가로서 또는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을 잊은 채 사회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잊은 게 아니다. 자신을 보다 큰 것 즉 공동체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잊을 수는 없다. 그건 나, 즉 자아를 없애는 행동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보다 큰 것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며, 그래서 싸움은 계속된다.
우리의 관계에 근본적인 혁명이 없으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그런 식으로 계속되면 해결책은 없다.
관계 안에서 살고 잇는 내가 어떻게 해야 나의 관계 속에서 철저한 변화를 일으킬까? 나는 관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 수도 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하고, 달아나서 수도승이 되고, 이런 저런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나는 관계 안에 인간으로 존재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곧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추구와 쾌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말고, 그게 진짜 문제다.
넌 욕망이 없어져야 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으니까, 욕망을 억제해서 좋을 게 없다. ~~~따라서 욕망을 이해해야 하고 쾌락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내적 가치는 쾌락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쾌락을 거부하고 억눌렸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모두 잃었다. 우리의 삶에는 아름다움이 없다.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쾌락을 이해해야 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것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그 본질을, 그 구조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쾌락을 이해하려면 욕망을 조사해봐야 한다.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무엇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무엇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그리고 욕망이란 도대체 끝날 수 있는 건지 어떤지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연속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게 도대체 끝이 날 수 있는지 없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욕망이 없다고 자부하고, 욕망 없이 살겠다고 발버둥치는게 아무 의미도 없다.
알다시피, 욕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건 사실은 아주 쉽다. 나는 저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본다. 거기에는 봄(seeing)이 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그것의 빛깔을,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뭇잎들의 가냘픈 떨림, 검게 보이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으면, 계속 보고 싶은 욕망을 그것이 일깨운다. 그것은 곧 지각, 감각, 접촉, 욕망이다.
욕망에 지속성, 연속성을 주는 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그걸 이해할 수 있으면 욕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욕망이 지속성을 가질 때 말썽이 시작된다. 그 욕망을 채우려고 싸우고, 그러고 나면 더 많은 욕망을 원한다. 욕망의 시간 소요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할지도 알게 될 것이다.
쾌락에 바탕을 둔 생각이 욕망에 끼어드는 순간 갈등, 좌절, 싸움이라는 문제가 시작된다. ~~~~아름다운 짐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뭐가 잘못인가? ~~~~ 그러나 생각이 저 집을 갖고 싶다, 저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생각이 끼어들어서 문제를 만들어내는 게 잘못이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면 갈등은 멈춘다. 그대가 의도적으로 끝낸 게 아니라 갈등이 멈춘 것이며, 그렇다고 그대가 식물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욕망을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매일 작용하는 것을 관찰해야 하며, 생각이 간섭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데, 그것이 욕망에 시간 요소를 준다. ~~~~그렇게 귀 기울여 듣는 그 행위 자체가 훈련이다.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종교적인 마음뿐이다.
‣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실제로 무엇인가?~~~~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쾌락, 성적 쾌락, 또는 상대방을 지배하는 쾌락, 상대방을 자게에게 맞추고 억누르는 쾌락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단 한 사람의 사랑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부인하는 건지 어떤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 전체를 사랑할 수 없고, 인류를 사랑하면 도저히 어느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사랑은 이러저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인류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종교계의 성자들은 한 여인을 사랑하는 건 완전히 잘못된 거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구축해놓았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도저히 그들이 만들어놓은 신이라는 관념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브하가바드 기타, 성경, 예수, 크리슈나, 모든 사람들, 모든 책들은 말한다. “너는 이러저러하게 되어야 한다. 되어야 한다. 되어야 한다.” 그런 건 모두 철저하게 버려라. 그건 모두 관념과 이념이다. 그러면 실제를 볼 수가 있다.
사랑은 쾌락이고 욕망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행위는 쾌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나무들 사이로 난 경계선을 따라 언덕과 그 꼭대기에 있는 바위 하나가 보인다. 그건 마치 언덕 위에 성채와 마을이 있는 이탈리아의 시골과 비슷한 데가 있다. 눈부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가 달린 꽃들도 볼 수 있다. 그건 커다란 기쁨이고 커다란 쾌락이다. 그 광경은 참으로 가장 아름답다. 그 안에는 지각이 있고 엄청난 기쁨이 있다. 그건 쾌락이겠지?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내가 그것을 바라보자 마음이 말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걸 언제나 바라볼 수 있다면 더러운 도시에서 살지 말고 여기서 조용히 살며 침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생각이 들어와서는 “와우, 진짜 멋지다. 다시 되풀이되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인식은 욕망의 시작이며 내일을 위한 쾌락 찾기다. 그때 내일의 쾌락은 기계적인 것이 된다. 생각은 언제나 기계적이어서, 생각은 그 언덕에 대한, 그 나무들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며, 내가 반복해야만 했던 쾌락이다. 그 반복은 생각에 의해 강화된 욕망의 연속성이다.
사랑이란 생각의 연속성인가, 아니면 생각은 사랑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가? 누군가 생각은 사랑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쾌락, 욕망, 시간, 생각이라는 이 문제 전체를 정말로 이해했을 때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오직 자유 안에서만 즉각 행동할 수 있다. 보라, 어떤 패턴에 따라 반복해서 행동하는 건 기계적이고 반복되는 관계뿐만 아니라 무질서까지도 일으킨다. ~~~~따라서 자유는 행동하는 순간에 있으며, 그것이 행동이다. 그것은 어제나 내일과 관계가 없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보라. 사랑은 어제와 내일에 뿌리를 내리고 잇는가? 어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므로, 만약 사랑이 단순히 기억이라면 분명 그건 진짜가 아니다. 그대가 어제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아니면 그대가 나한테 이런저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생각의 한 형태이다.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 안다고 하지 않는 것
만약 우리 둘 다 같은 이상에 끌리고 있고, 같은 곳으로 함께 가고 있다면 , 그게 관계일까? 각자가 고립되어 잇을 때 거기에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저 나무를 볼 때 나는 나무와 관계가 있는가? 관계란 관찰자로서의 나와 나무와의 거리다. ~~~~내가 결혼해서 아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아내도 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그 이미지는 거리 요소다. ~~~우리는 뭔가를 하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뭔가를 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로 합쳐주지만, 나는 나만의 걱정이 있고, 그녀는 그녀만의 고민이 있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지만, 설사 같은 관념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관계가 있을까?
내가 나무를 볼 때, 나와 나무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나는 나무와 아무 관계가 없다. 거리가 만들어졌다. 물리적인 공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거리다. ~~~~나는 아내를 보고 있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질문: 말이나 이미지가 모든 것을 방해하고 있나요?
목표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 그대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다르고, 각각의 목표 때문에 우리는 갈라졌다. 목표가 협력은커녕 우리를 갈라놓았는데, 그건 목표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어떻게 같은 목표도 없이 그대와 함께 일할 수 있느냐고. ~~~~나무와 동일시하라. 가족에게 헌신하라. 자신을 버리고 목표에 내맡기고 함께 노력하라.
‣ 관계를 관찰하라
‣ 이미지를 가지지 말라
내가 이미지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와 그대 사이의 관계, 나와 아내, 남편, 딸, 아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내가 그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대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 그대는 이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냥 대답만 해선 안 된다.
나는 그대와 모든 고생, 괴로움, 근심을 함께 하면서 살아왔고,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해놓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대에 대해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나의 관계는 무엇이겠는가? 그대가 정말로 솔직하다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이미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즉 산에 대해, 상대방에 대해,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해, 그런 저런 모든 것들에 대해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것, 나라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단 하나의 이미지도 갖지 않는 것 말이다. 이미지란 견해, 관념, 결론, 상징, 그리고 온갖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그대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나한테 대답하지 말라. 이것은 그대가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건 사랑이다. 다른 것은 사랑이 아니다. 맞지?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기억이 필요하다. 영어로 말하고 그대들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나는 기억이 필요하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그대가 관심이 있다면 말이다. 공장, 회사 등등에서 일하려면 기억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계 안에 있는 그런 기억은 이미지이다. 나는 그대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구축해놓았고, 그대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구축해놓았다. 따라서 우리의 관계는 이 두 이미지들 사이에 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 즉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에 대한 이미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하며, 우리는 이 이미지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이 관계가 사랑이라고 불리고, 이 관계 안에는 집착과 그런 모든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그것에, 이미지에 매달린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은 뭔가를 가지고 있고,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매달린다고 말한다. 마음에 이미지가 전혀 없으면 마음은 텅 비게 되고, 우리는 텅 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가 꼭 되고야 말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이 현재를,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과거에 대한 기억, 이미지, 결론, 견해, 판단, 평가 없이 관찰할 수 있을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냥 관찰하기만 하라. 돌려서 말해보겠다. 더 깊이 들어가라, 아주 깊이 들어가라. 나는 내 동생을, 아들을 아내를, 애인을 사랑하는데, 그는 죽는다. 사실은 그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맞지? 마음은 생각, 즉 과거의 것인 생각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까 이해하겠나?
보라. 내 아들이 죽었는데, 그건 사실이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몇 년 간에 걸쳐 내가 아들에 대해 구축해온 이미지 때문에 마음이 텅 비고, 외롭고, 슬프다고 느끼고, 자기연민에 빠진다. 그러자 다음 생에서는 아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희망이 생기고, 그래서 나는 무당한테 가고, 아들과 접촉하려고 어떤 강신술 모임에도 나가고, 이런저런 온갖 것들을 한다. 다시 말해, 마음은 이미지 없이는 관찰하지 못하고, 이미지 없이는 실재상황 그대로로 완전하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해하겠나? 자기연민이 없다면, 내가 아, 내 아들이 살았더라면, 그 아이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나에게는 생각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 오직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만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간다. 이렇게 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가, 아닌가?
질문: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아니다, 선생. 나는 지금 고요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보라, 선생.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죽음이 거기 있다. 단 하나의 이미지도 없이 그 사실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난 말해줄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함께 살고, 존재하라. 거기에서 벗어나지 말고, 달아나지 말고, 생각이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 관계 안에서 지성의 작용은
문화 안에서 마음이 자라나고 길러지고 교육받는 문화는 혼란을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마음은 생각의 움직임이 없을 때에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적 지각은 언제나 자기가 지각하는 것에 대해 무너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 관계에서 이미지 없애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의존이, 외로움에서 생겨난 집착한다는 느낌이, 혼자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홀로 설 수 없다는 느낌이 있으며,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라. 모든 관계는 상대방이 그대에 대해 만들어놓은 이미지와 다른 사람이 그대에 대해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관계와 영속성
‣ 호랑이의 꼬리를 꼭 잡고 놓치지 마라
‣ 의식, 인간관계 그리고 자비
사람은 어떤 종류든 투쟁, 모순, 분노, 질투 등의 문제가 잇을 때 자기 자신의 그런 의식을 자각할 뿐이다. 오직 그때에만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의식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땐 “나”란 것에 대한 의식이 없다.
만약 우리가 사회구조를 바꾸고자 한다면 단순히 밖으로부터의 변화는 의미가 없고, 반드시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개혁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도들이 어땠는지를 관찰하면 할수록 아주 분명해질 것 같다. 그들은 사회와 환경의 구조를 개선하고 바꾸면 인간은 근본부터 변화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대 인도에서, 그리고 최근 중국에서 행해진 갖가지 실험들을 검토해 보면, 아무리 환경이 변화해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고, 인간의 마음과 의식이 근본부터 변형될지,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겨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사회의 철저한 변형은 오직 인간 의식의 철저한 변형이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 서로 간의 인간관계, 인류 전체에 대한 인간관계, 전 세계적인 관계는 어떤 것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실제로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우리는 자각하고 의식해야 한다. 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무엇이든 간에 말에 사로잡히지 말고 표현이나 결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며, 그보다는 차라리 일상생활 속의 우리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 관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려면 이러저러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상하지 말고 철저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는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지식에? 경험에? 갖가지 형태의 지적이고 감정적이며 감상적인 결론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더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상하거나 상상의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계란 반응한다는 뜻이다. 관계라는 말의 근본 의미는 상대방에게 완전히 감응한다는 것이다. 책임감처럼 말이다. 서로에게 전체로 감응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단편적인 반응, 부분적인 반응만 하는가?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반응만 한다면 왜 그럴까?
우리의 관계는 기억에, 즉 갖가지 감정적이고 불합리하고 또는 성적인 반응들을 거치며 쌓인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관계는 감각 더하기 생각이라고 했다. 즉 욕망과 생각이 그 욕망에 따라 빚어낸 이미지이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이미지, 여러 가지 다양한 이미지, 또 사회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내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집착하며, 그 이미지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우리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투사된다.
그런데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 매우 편리하다. 그 여자 또는 그 남자를 살펴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만 책임을 느낀다.
우리는 전통의 노예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현대적이고 매우 자유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몹시 전통적이다.
관계를 이해하면 거기서 사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이해하면 사회 구조를 바꾸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 슬픔이 끝난다. 오직 자비가 있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 관계와 사랑
‣ 관계와 생각
생각은 관계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관계가 생각 즉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반드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 사랑이 없으면
‣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
‣ 순응과 자유
‣ 그대는 인류의 이야기다
[Review]
연말이 다가오면 늘 마음이 불안하다. 해결하지 못하고 미루던 일상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들 때문이다. 그런 일 중 가장 힘든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단절이다. 꼭 만나야 할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무심하게 지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낸다는 아쉬움에 불안하다.
고든 올포드는 <편견>이라는 저술에서 인간의 편견은 생존전략과 함께 진화 했으며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편견은 과거 정보에 근거하는 인간 본능으로 인간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은 사물을 범주화하여 편견을 만들고 또 저장된 범주들을 떠올리며 보낸다는 것이다.
편견은 과거의 정보로 인해 한 방향으로 치우친 마음이다. 공평하지 못하고 편협한 마음이다. 편견은 완고한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분화 범주를 거부한다. 정신세계를 쉽게 바꾸지 않으며 과거의 추론 방식을 고수한다. 편견은 명확성에 대한 뚜렷한 욕구가 있으며 모호한 계획을 참지 못한다. 범주를 형성할 때는 참된 정의를 추구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속성도 지나치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고수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고 편견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문제로 편견은 인간관계를 해치고 갈등을 유발하지만, 누구도 편견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관계>라는 책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저자인 ‘지두 크리스나무르티(1895~1986)’는 인도 태생으로 철학자이자 작가이며 평생을 세계를 여행하며 강연으로 보내며 후세에 많은 정신 유산을 남겼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테마 에세이 세트(13권)’ 중 한 권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초래하는 이유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일종의 의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존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소유욕의 원인이 되며 결국 불화, 의혹, 좌절로 끝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제일 원인이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둔, 갈망의 중심인 자기 자신, 즉 자아(*편견)이기 때문에 어떤 외부적 지식이나 종교적 또는 사회제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앎‘은 이 책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멕이다.
“관계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제일 원인은 한결같은 갈망의 중심인 자기 자신, 즉 자아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행동과 반응을 본질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관계는 밑바탕부터 철저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본문)
오늘날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심화하게 나타난 적은 없다.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가족 간, 부부간뿐 아니라 직장에서 학교에서 또 우정을 나누는 관계에서 우리는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어떤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앎’을 통해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약간은 모호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서 조금은 답답하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는 중에 이 모든 갈등의 근저에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인 ‘경쟁심’, ‘자기 확신 결여’와 ‘공명심’이라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고전이라서 오늘날처럼 자극적인 서술이 아닌 답답할 정도로 지극히 보수적인 문체로 되어 있어서 여간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도중에 책을 덮어버리기 쉬운 책이다. 곁에 두고 생각날 때 다시 책장을 열어보고 두고두고 깨달아가야 할 책이다. ■
(본문)
“우리들 대부분에게 상대방과의 관계란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일종의 의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의존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소유욕의 원인이 되며 결국 불화, 의혹, 좌절로 끝난다. ”
“따라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관계를 관찰하면,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저항 즉 벽을 쌓아놓고는 그 너머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 것이다.”
“비록 상대방에게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침범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욕망은 있다. 의존 없이, 불화와 갈등 없이 어떻게 사랑할까,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욕망이나 갈등의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것이 관계에서 복잡한 문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이나 사회 또는 환경에 의존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된다. 그래서 그것들에 매달리게 되며, 우리는 자신의 심리적인 안전과 위안을 위해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강하게 거부한다. ”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올바른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아주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따라서 관계 안에 있는 갈등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작용을 이해해야 한다.”
“관계를 이해하면 거기서 사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이해하면 사회 구조를 바꾸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 슬픔이 끝난다. 오직 자비가 있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자기 앎은 책에서 주워 모은 게 아니라, 그대 자신이 아내나 남편과, 자녀들과, 사장과, 버스 기사와의 일상적인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 안에 있는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을 제약하는 조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마음이 몹시 고요해지고, 정말로 침묵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
“행동은 관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행동은 생각의 작용에 말려들지 않는, 곧바로 직접 그리고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관념 위에서 행동하면 그것은 활동이 되며, 만일 우리의 관계를 어떤 관념 위에 둔다면 그런 관계란 단지 활동일 뿐이니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
“관념이란 어떤 필요와 욕망과 목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만일 내가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대가 필요해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 관계는 분명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그대에게 뭔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념에 바탕을 둔 그런 관계가 자기를 드러 내는 작용일 리가 없다.“
“두 사람간의 갈등의 문제는 그 원인이 피상적인 것만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두 사람 서로의 내면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단순한 문제만 가지고는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스스로 삶의 문제 인간 존재 의식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깨달음이 없는 해답, 즉 다른 사람이 주는 해답만으로는 부족하다.”
“관념(목적)이 없는 관계는 가능할까? 관념에 바탕을 둔 관계는 요구하게 되고 소유하게 되는 관계로 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관념이 없는 관계는 순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하는)관계이며 이것이 올바른 관계이다. 그러므로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앎이다.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 때 문제(갈등)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사회의 철저한 변형은 오직 인간 의식의 철저한 변형이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각하고 의식해야 한다. 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무엇이든 간에 말에 사로잡히지 말고 표현이나 결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며, 그보다는 차라리 일상생활 속의 우리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 관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보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우리의 관계는 기억에, 즉 갖가지 감정적이고 불합리하고 또는 성적인 반응들을 거치며 쌓인 기억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관계는 감각 더하기 생각이라고 했다. 즉 욕망과 생각이 그 욕망에 따라 빚어낸 이미지이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한 가지 이미지, 여러 가지 다양한 이미지, 또 사회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내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에 집착하며, 그 이미지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우리들이 서로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통해 투사된다. ”
“우리는 전통의 노예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현대적이고 매우 자유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몹시 전통적이다. ”
“관계를 이해하면 거기서 사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이해하면 사회 구조를 바꾸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 슬픔이 끝난다. 오직 자비가 잇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권력에 대한, 지위에 대한, 권위에 대한 욕망 없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자신보다 좀 더 큰 무언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보다 큰 무엇, 즉 정당, 국가, 인종, 종교, 신 등과 자신을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이 권력 추구이다. 그대는 스스로 자신이 텅 비어 있고 둔하고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언가 더 큰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좋아한다. 이렇듯 자신을 무언가 더 큰 것과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권력의 한 형태이며, 그것이 고립과 더 나아가 갈등을 초래한다.”
“자기 자신을, 내면의 갖가지 움직임과 흔들림을 자각하게 되면 동기, 의도, 감춰진 위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각 안에서만 변형이 일어난다. 이런 권력 추구가 멈출 때에만 다시 태어남이 있고, 오직 그때야만 우리는 갈등에 바탕을 두지 않고 이해에 바탕을 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
“쾌락을 이해하려면 욕망을 조사해봐야 한다. 욕망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무엇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무엇으로 그것이 지속되는지, 그리고 욕망이란 도대체 끝날 수 있는 건지 어떤지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것은 어떻게 해서 연속성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게 도대체 끝이 날 수 있는지 없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욕망이 없다고 자부하고, 욕망 없이 살겠다고 발버둥치는게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므로 관계에서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