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준 시인의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푸른사상 시선 124)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유신체제 말기부터 1980년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옥고를 치른 두 친형과 가족의 고통을 비롯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현장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현대사를 기록했다. 힘들고 불안했지만 역사 정의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엄숙하고 순수한 정신이 깊은 감동을 준다. 2020년 5월 25일 간행.
■ 시인 소개
1958년 광주 계림동에서 태어나 칸나와 장미꽃이 피는 정원에서 놀며 부유하게 살았으나, 지금까지 너무 가볍고 허약하다.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의 파산, 대학교 1학년 때 형들의 수감으로 돈을 벌고 빚을 갚아야만 했다. 섬으로 복직하여 고독해서 37세 때부터 자서전 『내 시절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1999)을 썼다. 빚을 다 갚고 60세에 명예퇴직했다. 시집으로 『카페, 가난한 비』 『거짓 시, 쇼윈도 세상에서』를 발간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E-mail : poorrain@hanmail.net)
■ 시인의 말
나는 자유를 바라고 피폐하지 않는 삶을 바라지만,
사람이 말을 차단하고 통제하고, 사람을 가두고 구속하고 소외시키고
자본주의의 힘이 지역마다 사람마다 돈과 문화, 교육의 향유의 차이를 만든다.
통제하여 단절시키는 것은 부조리하여 아픔과 상실을 낳는다.
위치를 잃은 소외된 것, 말을 잃은 것, 통제된 것, 못사는 것, 색깔을 잃어가는 시간은 어둡고 슬프다.
사람들은 욕망이 있어 돈과 문화를 따라 도시가 집중된 서울 쪽으로 떠난다.
의미 잃은 과거는 꿈과 같으며, 의미 잃은 현재도 꿈과 같다.
시간의 색깔은 자신이 지향하는 빛깔로 간다.
■ 작품 세계
박석준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을 담아낸 시인으로 기록 및 평가될 것이다. 물론 김남주 시인이 남민전 사건의 가담자로서 옥고를 치르면서 겪은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었고, 박석률 운동가도 자신의 남민전 체험을 담아내었기에 박석준 시인이 선구적인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두 친형이 남민전에 가담함으로써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을 겪어야 했던 상황을 한 권의 시집으로 담아낸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독재정권이 조작한 공안 사건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증명해주는 것은 물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간첩 및 공산주의자로 조작한 역사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아울러 반인권적인 공안 사건이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사람들을 대변해 희망하는 것이다. (중략)
화자는 큰형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끝까지 남민전 전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주주의 진전과 조국 통일을 이루는 데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속보, 나의 길–존재함을 위하여」)라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준 큰형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지향하는/색깔로 시간을 만들어가”(「국밥집 가서 밥 한 숟가락 얻어 와라」)고자 시인의 길을 걷는다.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바뀐 세상과 바뀔 세상을 내다보며 앞서 걸어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욕망들 속에서 우리들의 이성과 감정도 무뎌져 그 시간을 잊은 지 오래다. 우리들의 뜨거웠던 가슴과 열정은 식었고, 민청학련, 남민전, 전교조도 이미 과거의 사건 속으로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폭압의 역사가 민낯으로 살아서,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버릴 수 없는 지금으로 있다. 온몸으로 새겨온 발걸음, 숨죽여 안으로 삭이고 녹여낸 그날들이 시 속에서 살아나고 있다.
박석준 시인이 이제야 우리들의 심장을 강렬하게 무겁고 아프게, 그러나 담담하게 우리들을 그 시간 안으로 데려가는 것은 시간의 체로 걸러내 언어로 빚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시인이 체화한 건조한 언어들과 담담한 어조의 사이를 지나다 보면 그 건조한 언어와 담담한 어조는 가슴을 찌르고 감정을 뒤흔드는 통증이 된다. 시인이 세세하게 그려놓은 사람과 사람들, 장면과 장면들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 절망과 분노를 견디며 삭이며 속으로 속으로만 울었을 통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아프게 살아온 생의 처절한 고투를 감정의 폭로 없이 다만 켜켜이 쌓인 시간의 주름들과 함께 견고한 자세로 서 있을 뿐, 안으로 차올랐을 슬픔과 분노와 설움과 울음을 결코 꺼내놓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이 지켜온 정신의 엄숙함이며 숭고함이자 끝까지 지키고자 했을 순수다. 그 순수한 생의 정원 앞에 무슨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그러므로 불경스러운 일이다.
― 이동순(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 시집 속으로
속보, 나의 길
― 존재함을 위하여
박석준
가지 않으면 길이 생기지 않는다.
5월 14일, 16명이 먼 곳에서 전남대까지 왔는데,
장학사와 교장과 교감이 정문 봉쇄로 길을 막았다.
나는 기어이 광주·전남 지역 노조 발기인 대회장으로 갔다.
5월 28일, 아침 7시경 대절 버스가 목포에서 떠났다.
오후 1시에 전교조
결성대회가 개최될 한양대를 향해서.
결성대회를 원천 봉쇄할 거라는 뉴스를 들었기에,
더욱 한양대로 가야 한다는 심정이 절실해서.
일로에서 전경이 10시를 넘길 때까지 길을 막아
광주 진입로에서도 길을 막아 12시를 훨씬 넘겨버렸다.
전남대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결성대회를 가졌다.
가야 하는데, “만세! 결성됐어!” 소리가 났다.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뇌리에 ‘속보’라는 말을 새겨냈다.
6월 9일 김성진 등 전날 식당에 모였던 선생들은 모두
8시가 아직 안 된 이른 시각에 현관 앞에 도착했다.
결의를 굳히기 위해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곧 윤보현 선생이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를 결성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이 되자 한 사람씩 조용히 4층 강당으로 갔다.
1시 20분경, 4층에서 교원노조가가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흐르는 전주에 감흥이 일어나 나는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왼쪽으로 가, 팔을 흔들며 솟구치는 희열에 젖어
“살아 숨 쉬는 교육 교육민주화 위해 가자, …….”
대중에게 처음으로 노래를 선동하며 목소리를 쏟아냈다.
“교장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교직원노조
먼 곳 분회가 발전되기 바라는 바입니다만…….”이라고
아리송한 발언으로 우리들의 일에 끼어들어 왔는데……,
하루 뒤인 6월 10일에 전교조 전남지부가 결성되었다.
6월 17일 토요일, 학교 앞 삼거리에서 나왔을 때에,
1시 20분경에, 건너편 인도에 모여드는 선생들을,
그 20미터쯤 아래 전문대 쪽엔 차도의 전경을 보았다.
전문대가 목포지회 결성대회장인데.
밀고 밀리고, 어느 결엔지 내가 제1열에 서 있었다.
막기만 하던 전경이 교사들의 턱밑에 방패를 들이대고
뒤에서는 공권력을 무너뜨리려고 밀어붙이고,
견디다 못한 1열의 4인 스크럼이 풀어졌는데,
나는 방패에 오른쪽 손등을 찍혀버렸다.
피가 나고 등 뒤가 허전한데, 돌연 전경들이 내려갔다.
집회 예정 시간인 2시를 20분이나 지났는데.
교사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집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전문대 정문 앞에서 ‘더불어’와 ‘자고협’ 소속
낯익은 학생들의 “전교조 사수!” 하는 외침이 흘렀다.
6월 19일 월요일 오전 휴게실에 있는 나에게
“지회 결성 상황으로 미루어보니까 단위 학교에도 탄압이
올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하고 가야 할 길을 김성진 선생이 물었다.
“일단 미술실로 거점을 잡읍시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김 선생에게 설명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1층 교장실 다음다음 교실에서
일이 진행된다고 선생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