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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귀향대붕행로 원문보기 글쓴이: 관목
[세계의 수행자 - 아찬 문 (Ajahn Mun, 1870-1949) 스님]
맹수 들끓는 정글서 수행해 아라한과 얻어
[ 아찬 문 스님 (1870-1949)]
약 100 여년전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레디 사야도와 밍군 사야도(마하시 스님의 스승)와 같은 고승들이 미얀마 불교의 수행전통을 대중화시키는데 초석을 다졌고,
마하시 사야도, 순룬 사야도, 모곡 사야도, 우 바 킨 등의 훌륭한 2세대 스승들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를 이루었다면,
현재는 우 판디타, 우 자나카, 고엔카지와 같은 3세대 스승에 의해서 위파사나 수행법은 미얀마는 물론 전 세계에 수행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위파사나 수행을 말 할 때, 미얀마의 수행전통이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스승들에 의해 법의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고, 활발한 지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관심을 태국으로 돌려보면, 100 여년 전, 부처님 당시 때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수행전통이 동북지역에서 유명한 두 고승에 의해서 부활하고 있었다.
두 분은 바로 아찬 사오(아짠 사오. Ajahn Sao, 1860∼1942)와 아찬 문(아짠 문. Ajahn Mun, 1870∼1949)이었다.
아찬 사오는 아찬 문의 스승이자 도반이었으며, 아찬 문은 금세기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또 큰 영향을 끼친 선정과 위파사나 수행의 대가이다.
그의 지도에 힘입어 숲 속의 수행 전통은 다시금 불교 수행의 중요한 전통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최근에 입적했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태국의 위대한 수행자 중 대부분은 아찬 문의 직계 제자이거나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 '아찬 문'의 스승이자 도반 '아찬 사오(1860~1942)' 스님]
아찬 문(아짠 문)의 전기(傳記)로... 직제자인 마하부와 스님의 『Acharn Mun』(『위빠싸나 성자 아짠 문』, 김열권 옮김, 서울: 불광출판사, 2000년)있다.
이 책에 의하면, 아찬 문은 15세에 처음 사미가 되어 2년 동안 사원에서 교학을 공부한다.
2년 후 아버지에 의해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가 22세가 되던 해에 다시 출가하여 비구가 된다.
법명은 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의 부리닷따(Bhuridatta)였다. 비구계를 받고 난 후에 아찬 사오와 함께 수행 생활로 들어섰다.
아찬 문은 처음에는 “붓도 Buddho”(부처님)이라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반복하며 수행하는 부처님에 대한 마음챙김(buddhanussati 佛隨念)을 하면서 수행을 했다.
처음 부처님에 대한 마음챙김을 수행의 주제로 삼았을 때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고, 그 현상들을 쫓으며 수행을 했으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외면적으로는 검소한 수행자의 삶을 사는 숲 속에서의 두타행의 실천을 하면서 선정 수행의 주제에서 내면적으로 주로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을 중심으로 한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수행을 지도해주는 스승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닦아가는 길은 종종 8정도에서 어긋나는 곳으로 들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위파사나라는 올바른 길을 발견한 후에는 확고한 정진력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였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위파사나 수행을 계속 이어나갔다.
잠이 오면 걷기 수행으로 잠에서 벗어났고, 오랫동안의 경행(걷기 수행)으로 몸이 피곤해지면 좌선을 이어 나갔다.
수행의 경계에 부딪힐 때 스승이자 도반인 아찬 사오에게 질문을 하였지만, 아찬 사오의 대답은 자신도 경험하지 못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으니, 혼자서 잘 해결해보라는 충고만 들었다.
아찬 문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 되기를 결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숲 속에서 수행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결심을 버렸다.
이러한 결심을 완성하려면, 길고 긴 시간 동안 생사를 거듭하여야 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결심을 버린 후, 아찬의 마음은 부담이 줄어들었고, 정진은 더욱 빠르게 향상되었다.
['아찬 문'은 제자들에게 "고통에 맞서지 않고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고 가르쳤다.]
타심통으로 제자 지도
아찬 문은 많은 수행법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한 수행법도 있었지만, 타인을 위한 수행법도 많이 있었기 때문 후에 많은 후학들을 지도 할 수 있었다.
선정수행과 위파사나 수행으로 얻은 여러 가지 신통의 힘으로 악마를 제압하기도 하고,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타심통을 얻은 아찬은 위파사나를 닦고 있다는 한 노스님이 밤새 수행을 못하고 가족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노스님에게 그런 사실을 좋은 의도로 말해주었으나, 결과는 노스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그 절에서 떠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후 아찬 문은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알게 되어도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적절한 때를 살피게 되었다.
아찬 문은 수행도중에 선정 속에서 부처님의 직제자인 아라한들이 나타났고, 직접 수행법을 지도받았다.
이런 이야기는 대승불교 유식학파의 거장 무착 스님이 선정 수행 중에 미륵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이야기를 상기시켜준다.
아라한들의 자세한 설법을 들으면서 올바른 수행을 하던 아찬 문은 불환과(不還果, 아나가미)를 성취하여 다섯 가지 번뇌를 끊어 버렸다.
이 후 많은 출가자들이 스님의 지도하에 수행을 하게 되었고, 수행의 힘으로 많은 육체적 정신적인 병을 치유하는 이적을 행하기도 하였다.
타심통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제자들은 스님의 지도하에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었다.
제자들에 대한 지도로 잠시 답보상태였던 위파사나 수행에 더욱 박차를 가해서 아찬 문은 12연기를 관하여 모든 번뇌의 근원인 무명(無明, 진리를 모름)이 끊어진 아라한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이 때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인 오상분결(五上分結)이 모두 끊어져 버린 것이다.
즉, ⑥색계에 대한 욕망, ⑦무색계에 대한 욕망, ⑧아만, ⑨들뜸, ⑩진리를 모름[無明]이었다.
깨달음은 정확한 현실인식과 그 해결법을 이룬 상태이다.
즉, 괴로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을 따라서 괴로움의 소멸을 직접 체험한 내적인 사건이다.
깨달음은 따라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자유(不動心解脫)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이루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貪瞋痴)이라는 번뇌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도달한 이가 아라한이다.
부처님이 지니신 9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라한이며, 부처님의 제자들도 아라한이 되는 것을 최상의 목적으로 수행한다.
고타마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법을 듣고 수행을 해서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한 깨달음에 도달하였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아찬 문은 불굴의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이 됨으로써 그 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너희들은 목숨을 걸었느냐!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아찬 문은 아라한이 되면서 직접 체험한다.
열반의 법을 체험한 아찬 문에게 부처님과 아라한의 제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경전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아찬 문의 깊은 선정체험 속에 나타난 부처님과 아라한을 보면, 우리도 법을 체험할 때 부처님과 아라한 제자들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생기게 한다.
아찬 문의 마음에 떠오른 한 아라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도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여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사람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존경받는 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라한이오.
이 윤회의 세계인 삼계에서 보기 드문 성취를 이룬 그대의 깨달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왔소.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지요. 그대는 그 경지를 이루었소.”
부처님이라는 한 분의 스승 아래에 각기의 능력과 특성에 맞는 많은 수행법이 실천되고 있었다.
밝은 보름달이 뜬 숲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있다. 달빛이 이 숲을 밝게 비추듯이 어떤 수행자가 이 숲을 비출 수 있을까!
즉, 어떤 수행자가 이상적인 수행자인가라는 주제로 아누룻다, 마하가섭, 목갈라나, 사리불 그리고 부처님께서 각각 이상적인 수행자란 이런 비구다라고 말씀하신 이야기이다.
제 각기 각자의 이상적인 수행자에 대해 말하자 부처님께서 모두 인정하신 후 부처님께서도 당신이 고행하시던 시절의 용맹정진하던 모습을 말씀하시며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아찬 문 스님의 아라한과의 성취는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불굴의 정진력을 지니고 탐진치 삼독을 모두 제거한 수행자의 모습에 가깝다.
수타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성자들은 자신의 경지에 이른 후 다시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끊어진 번뇌가 무엇이며, 아직 남아 있는 번뇌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아찬 문의 경우는 이러한 번뇌의 소멸과 함께 아라한과 부처님에 의한 아라한과의 성취에 대한 인증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덤벼라 후퇴는 없다
아라한이 된 아찬 문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규칙적인 경행과 좌선을 하였고, 자신을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타심통과 천안통의 지혜가 있었던 아찬 문은 가까이서 지도하는 제자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제자들의 마음 상태나 수행의 정도도 알 수 있었고, 그 제자들이 전력을 다해서 정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지도했던 것이다.
아찬 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격심한 아픔과 고통을 세 차례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살아남아서 이렇게 스승이 되었다.
그대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 목숨을 건 노력 없이는 결코 법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법은 법을 실천하는 이를 보호한다.
아찬 문은 마음챙김(sati, 念)과 지혜라는 법에 의해 고통의 원인인 번뇌와 고통과 죽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법을 실천하는 수행자는 일단 진리를 깨닫게 되면, 어떤 번뇌의 적이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아찬 문 스님이 다시 부활시킨 숲 속 수행, 즉 두타행을 닦는 스님들에게 수행이 필요한 것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괴로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고통이란 수행의 좋은 대상이다.
고통에 맞서지 않고 고통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찬 문 스님은 제자들에게 강조해서 가르쳤다.
“무엇이든 덤벼라, 그러면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다하는 순간까지 싸울 것이다. 절대로 후퇴나 철수는 없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부처님께서 6년간의 고행을 마치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정진하신 일을 연상시킨다.
아찬 문과 그 제자들이 밟아온 숲 속 수행의 전통은 부처님의 수행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두타행 전통 이은 대스승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찬 문은 ‘붓도’라고 마음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반복하는 염불 수행과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의 위파사나를 수행할 것을 가르쳤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덕을 반복해서 상기하는 ‘붓도’ 수행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마음챙김 수행의 전통은
바로 자신을 보호하고, 수행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아찬 문 스님이 밟았던 길이었고, 그것은 곧 제자들로 이어지는 수행 전통이 되었다.
'아찬 문 스님의 수행경책' 중에서 한귀절 ...
- 번뇌를 근절하는데 전심 전력하라.
나의 유일한 목표는 오직 해탈일 뿐.
아무리 바쁜 생활속에서도 구상하는 사념이 마음에 자리잡는 것을 한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 졸음이 오면 즉시 일어나 세수하고 좌선하든가, 아니면 경행(산책명상같은것)을 하여 잠을 쫓아라.
잠이 오면 평소보다 빨리 걸어라
- 식사시에도 음식 맛에 집착하지 않도록 항상 씹는 동작과 느낌, 동작의 움직임을 관찰하라.
맛에 탐착하면 마음 계발이 되지 않는다.
- 어떠한 역경이나 어려움이 오더라도 변명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수행으로 극복하라.
- 활동하거나 걸어 다닐때에도 관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동작을 하기 전에는 마음챙김(주시)를 먼저 하여 그 의도부터 관찰하라.
그러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악습이나 고정관념을 쉽게 찾아내어 개선할수 있다.
- 지식의 산은 인간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시킨다.
붓다는 칼라마 사람들에게 추측,소문,전통,교리에 의존하지 말고 체험으로 확인하라고 하셨다.
- 삼계(三界)는 모두 무상,고,무아의 윤회 현상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은 오직 마음챙김(주시) 반야관이다.
- 자신의 스승은 자신이다.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코구멍으로 숨을 쉬어야지 ,남의 콧구멍으로 숨을 쉴 수는 없다.
- 개발된 마음은 멀리 가지 않는다.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항상 돌아온다.
- 자신의 결점을 찾아 내부를 들여다 보라.
자신을 계발하거나 고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패나 성공을 발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어떠한 수행자도 자신의 진실한 정도에 비례해서 진리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
* 아찬(Ajahn, 아짠) : 스승을 의미하는 팔리어(Pali 語) '아짜리아' 에서 온 태국어이다>
* 다음 호에는 '아찬 문'의 대를 이은 선지식 '아찬 차' 스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김재성 경전연구소 소장 metta4u@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