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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무너뜨린 훈(한)족은 고구려고,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다?
((아달라는 고대 독일어에서
"고귀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남정에서 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원하였을때,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왕의 이름도 아달라왕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고대 갈리아 지방이였던 독일이 훈족의 영향아래 있었던 역사가 분명히 있었다.
근대,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연의 일치일진 모르지만,
독일의 고어에 "아달라"라는 단어가 있었다.
아달라는 고귀하다는 뜻이므로,
최상류층의 왕족이나 왕을 가리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달라를
서양인들이 읇조리면 아달라 ---> 아탈라 ---> "아틸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에 훈족이 고구려 군벌이라면
((등자,편자,편두,찰갑갑옷, 고구려 형식의 뿔달린 투구,맥궁,
49제 장례제와.......
고구려 무용총 사냥하는 벽화와,
이탈리아 교회 벽화에 승마자세 상태서 뒤돌아 활쏘는 모습과
아달라 어휘등 유사성이 매우 많다)) ,
아틸라는 고구려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광개토태왕일 가능성이 있을것 같다.
광개토태왕일 가능성이 짙은 이유는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4세기경 고구려가 아무리
강성하고 강력한 나라라 하더라도,
40만명 내외의 기병+보병을 거느리고
그 먼 장정을 국내성---> *1((중국의 시안(장안),
역사 교과서엔
국내성 위치가 압록강 유역으로 되어 있지만,
구글 어스 위성 지도를 땡겨 압축해서 시안을 살펴보면,
고구려 무덤 양식이 무더기로 보인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의 경우도
왕족의 무덤이 무더기로 있고,
마찬가지로 백제의 수도인 공주에도
왕릉이 다수 있는것은
시안이 고구려의 수도임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마치 피라미드처럼 200~300 높이의
거대한 무덤 양식으로 명백한 동이족 형태의 무덤인것이다.
지나족인 한족은 흙무덤 방식의 특성이 있다.
중국에선
처음엔 자기네 조상들의 묘인줄 알고 흥분하며,
고고학 전문가들이 흥분의 도가니속에 발굴작업을 하였으나,
발굴하면 할수록
고구려 양식의 토기며,건축양식,귀금속 들이 계속해서 발견되자,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사진 촬영도 금지시켰으며,
심지어는 그 무덤에 나무를 심고 산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임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꾸준히 진행하였지만,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1 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헝가리 지역까지 10여년의 세월을 통해서 진격한다는건
황제 말고는 행동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여타의 군벌이 아닌,
고구려 태왕이 직접 친정하여 진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측되는 것이다.
물론, 서양에 대한 정복 전쟁이기때문에, 당연히 아들인 장수왕에게
태왕의 자리를 양위하고 떠났을 것으로 사려된다.
왜냐면, 그당시 광개토태왕은
삼국을 사실상 통일하였고
바다건너 왜도 정복하였으며,
중국의 북조도 영향력 아래에 두었고,
더 나아가 토번(지금의 티벳지역)까지 영향아래 두었다면,
아시아에서는 더이상 이룰게 없었을 것이다.
정복욕과 성취감에 취해있었던 광개토태왕은,
더이상 이룰게 없자 의기소침해 있다가,
다른데로 눈을 돌린게 서양쪽이 아닌가 예측된다.
원나라 기마대가 거의 전세계를 정복하였는데,
그 보다 훨씬전인 4세기때
강력한 철갑 기마대인 개마부대를 보유한, 고구려 군벌이,
맥궁과 찰갑갑옷,
그리고 편자와 등자도 없었던 로마기병대를 무찌르지 못했다면
더 이상한게 아닐까?
게다가,
시간적인 측면에서도
광개토태왕은 출생 연도와 사망연도를 포함하여
375~412년(38살)이고
아틸라는 출생일은 알 수가 없고 사망연도는 453년이다.
같은 생존 시기인 아틸라와 광개토태왕은 동일인물로 상정하면,
375년도에 태어난 광개토태왕은
서방에서 78살에 해당하는 45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 <== 여기까지 필자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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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로 제안하며..
로마를 무너뜨린 훈(한)족은 고구려고,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출생 연도와 사망연도를 포함하여 375~412년(38살)이고
아틸라는 출생일은 알 수가 없고 사망연도는 453년이다.
같은 생존 시기인 아틸라와 광개토태왕은 동일인물로 상정하면
375년도에 태어난 광개토태왕은
서방에서 78살에 해당하는 45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유럽에 출현하기 전까지
먼나 먼 유라시아 초원의 행로 때문이 아녔을까?
그리고 아틸라와 형 블레다
(불내다=불을 지르다/ 해와 관련한 이름=해 씨 성을 붙이면 해 불내다)가 이어받은
한 고구려(한 고리=헝가리)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 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형과 함께 고구려를 떠났던 것인가?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대왕은 98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불리게 된다.
장수왕이 100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아버지 광개토태왕이 장수하는 DNA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출생년도 불분명한 아틸라가
동방에서 이주해 온 광개토 태왕이라는 추정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게 되며,
아틸라가 로마 궁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한국에 열등감을 느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우 월시 하고 서이. 동호. 동이.
남한 등의 표현으로 주변 한국민족을 비하한 기록과 동일한 방법으로,
아탈라에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아틸라는 로마 교육을 받은 유럽인이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로마인들이나
유럽인들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1.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안安(알:해)이다
땅을 크게 평정하고 평안케 한다는 <광개토경평安=호태왕>은
순 우리말로 사방의 땅을 비추는 해라는 의미의
'아(알:해) 달(단:땅) 라(평정)=아틸라'가 된다.
"광개토 경호 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양심 전/하느님 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환단고기/고구려 국본기]
유럽인들이 유럽사에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로 비하할 정도로
최고의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인물이
코리아족인 칭기즈칸 이전에는 아틸라다.
아틸라는 최고의 왕이지만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군림하지 않아 왕 같지 않았으며,
전투에서는 용맹했고 협상의 귀재였다."라고 로마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 거란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을 구해낼 만큼 애민적이었고,
인자하면서도 항복한 적국 백제의 아신왕에게도 관대했던
우리의 코리아 태왕의 기질과 품성과 똑같이 닮아 있다.
정말 유럽을 떨게 했던 아틸라는 광개토 경 평안 호태왕이었던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광개토의 이름을 '담덕(談德)'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광개토태왕의 이름을 <안>이라고 적혀 있다.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현도의 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그의 아우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
두 군(郡)을 다시 회복하였다.
모용수가 죽자 아들인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대방(帶方) 2국의 왕으로 봉하였으며,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요동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
(後略有遼東郡)." - 양서(梁書)』권 54 고구려전과 『북사(北史)』권 94 고려 전(高麗傳
'국강상 광개토경평 안 호태왕(國岡上 廣開土境平安 好太王)'이라고 비석은 적고 있다.
비록 시호이지만
이 시호 속에 광개토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국강상은 무덤 지역. 광개토경평은
땅을 크게 넓히고 경계를 정하여 평정했다.
안(安)은 이름.
호태왕은 고구려 태왕 중에서도 제일 높은 태왕이란 뜻이다.
(호태왕이란 건 왕 중의 왕이라는란 의미)
담덕보다는 안(安)이 태왕비 같은 고구려의 금석 비문에서 자주 쓰이고
그리고 중국 사료 같은 대외적 사료에서도 광개토의 이름은 안安이라 나오므로
안安이 더 직접적 이름이라 보고 역사추적을 해 보자.
2. 고구려의 최대 굴욕-모용 선비(연)에 털리다/
모용 선비의 고구려 공격은 멸망의 근원이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써 고국원왕 시기인 서기 4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방어 전술이 빗나가는 바람에
수도가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에게 국내성까지 털리고
5만 인구가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구려 고국원왕의 태후와 고국원왕의 왕비도 볼모로 끌려갔다
.(전연前燕은 후연後燕 이전의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다)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 사초'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이련이
이 당시 모용씨에게로 인질로 끌려갔었다가 후에 풀려 났다는 내용과
모용씨에게로 끌려 간 왕비의 아들이 고이련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帝:고국양왕)는 이름이 이련,
또는 어지지이고 수림의 동복 아우이다.
해 태후가 꿈에 용산龍山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 하는 모습을 보고파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 족 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으로 추정)이 해 태후의 승은을 입고 나서 생겼다.
이에 점을 보는 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더니
주 태후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이련)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모용황 도적의 난리 중에 제(帝:고국양왕)는 해 태후를 따라서 연燕으로 끌려갔었다.
모용황은 해 태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帝는 높이 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나라>의 다른 사람들은
모용황에게 제(帝: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으나
"천명은 억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어찌하려다 보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라 말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보냈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봄 정원에 해 씨가 왕자 이린을 낳았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주 태후를 포로로 사로잡은 후)
주 태후의 조서로써 아군과 백성들이 막아서지 못하게 하였다.
상 또한 잡혀 있는 모친이신 주 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도 없었고
이리하여 적들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갔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3.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찰갑과 활(맥궁)로 무장한 아탈라인가?
해는 동방에서 떠서 서방으로 지니, 나는 서방에서 죽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사망했다는 서기 413년으로부터 21년 후인 서기 434년에
동유럽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아틸라.
물론 그전부터 태어나 그 땅에 살고 있다고 전승들이 말하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아틸라에 대한 건 적국에서 적은 기록들만 있는지라 명확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런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후 삽시간에 빠르게 영토를 확장시켜 간다.
아틸라가 동유럽을 초토화하고,
독일 정복하고 로마 본토까지 진격하여
로마 황제가 보낸 특사인 로마 교황을 통하여 로마 황제의 항복을 받아 낸다.
로마황제의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고 미련 없이 쿨하게 돌아가는 모습이나,
로마에 다다르기까지
수십개가 넘는 성들을 빠르게 돌파하며 무너 뜨리는 건
마치 백제 58개성을 점령하고 백제 도성을 포위한 후
백제 아신왕의 항복만 받아 내고
백제를 멸망 안 시키고 쿨하게 돌아 가는 광개토태왕의 위용과 매우 비슷하다.
훈족은 고구려의 예맥 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스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 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아틸라와 로마 전투 자료]450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 Theodosius>가 죽고,
새로운 황제 마시안(Marcian)이 등극했다.
새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마시안(Marcian)은
지금까지 훈족에게 매년 바치든 조공을 거절했다.
화가 난 아틸라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의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451년 4월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틸라(Attila) 대군은
현재의 독일과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수많은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서유럽의 중심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452년 다시 서로마 제국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직접 쳐들어 갔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Aquileia )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아 ( Padua ), 베로네 ( Verona ), 밀란 ( Milan ), 피비 등
이탈리아 북부 전역을 휩쓸었다.
훈족을 피해 정착한 난민들이 건설한 도시가 오늘날 이탈리아 베네치아이다.
이탈리아 북쪽 지역을 완전히 파괴당한 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교황인 레오(Leo)를 특사로 보내어
아틸라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상의 조건은
아틸라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침공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서로마 제국에서는 엄청난 보물(황금)을 아틸라에게 받치는 것이었다.
협상이 성공하여
아틸라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교황 레오(Leo)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대제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
452년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초토화하여
약탈한 보물들과 서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황금을 챙겨 들고
아틸라 군대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돌아왔다.
453년
아틸라는 게르만족 제후의 딸인
<일디코- Ildico>와 결혼을 했는데,
아틸라는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아틸라의 무덤은
테이스(Theiss - Tisza ) 강을 막아 물길을 돌린 후에
강바닥에 무덤을 만들고 강물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두었기 때문에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강은 유럽의 우크라이나 ( Ukraine )에서 출발하여
루마니아, (Romania), 헝가리(Hungary),
슬로 바키나(Slovakia), 세르비아(Serbia)를 지나가는 강이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 기지 크 : Dengizich >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구심점을 잃은 훈제 국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들어갔다.
454년 로마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아에티우스>가
로마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에게 살해되었다.
455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가
자신의 군사들이 활쏘기 시합을 참관하고 있던 중에
훈족의 장수 2명에 의해 살해되었다.
469년 훈족은
동로마 제국과 합세한 게르만 민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 졌다.
476년
게르만 민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
훈족이 유럽을 지배한 시기는
아탈라 광개토태왕이 생존한 시기에서 사망한 469년 까지였다. [끝]
결국 동방에서 유럽지역에 갑자가 출현하여
게르만족을 로마로 밀어 넣은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가 멸망했으니
결국 한-고구려(한 고리=헝가리)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의 그림들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아틸라의 모습.
머리에 소뿔 장식을 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것은 4~5세기 고구려 개마무사의 투구에 달았던 소뿔 장식과 똑같기 때문이다
. 이는 배달국 황권에 도전한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 헌원과의 10년간 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 대륙을 차지한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소뿔 투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틸라와 광개토왕의 이름 '안(安)' 이 둘은 과연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
결론 : 광개토 태왕 = 아틸라 대왕
<깨끗이 땅을 평정하다.땅을 크게 넓히다>의 의미를 가진 광개토는
고대의 우리말로 아달라가 되는 것이며,
이는 광개토태왕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전에 동방을 깨끗히 평정하고
광개토 호태왕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에
아틸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할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서는
광개토(廣開土:크게 땅을 넓히다)라고 적혀 있고,
<사방을 깨끗히 청소>하고 싶다는 포부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광개토 경 평안 호태왕의 고대 우리말 이름이
바로 '아달라'(아틸라)였던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
모용 선비에 흡수된 흉노족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고구려에 패한 일부 흉노 기마군이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유입하여
박혁거세 사로왕조를 무너뜨리고
흉노 선비 왕조를 탄생시켰고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한 신라 진흥왕 시기에
광개토왕의 이름 아달라를 따와
서기 2세기경 자신들의 가상 선조인 아달 라이 사금을 만들어
신라 부흥의 에너지로 삼았다고 추정된 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 제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신앙이 강했던 '아달라'는
18세의 나이에 광명전(양심 전/하나님 전)에서 고구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올라 모용 선비와
백제의 공격으로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고구려 전통적인 찰갑 기마군을 조직적으로 강화하여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낸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은 쿨하게 고구려로 돌아가서 백제에게 자비를 베푼다.
백제의 지원세력인 왜가 백제와 야합하여
고구려의 지원세력인 신라를 침략하여
신라 수도를 함락시키자 5만 보기병을 보내 같은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대마도)에 임나연 정을 설치하고
고구려인인 안 라인으로 총독을 삼고 열도를 통제 관리하였다.
후연 왕 모용희가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자,
모용 선비 정벌을 철저히 준비했던 광개토태왕 아달라는
거란. 말갈을 동원하여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사방으로 포위하여 모조리 분쇄하고
북경일대인 유주 지역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연나라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여 쳐서
후연 개갑 중장기병 1만여 명을 깡그리 다 죽여 버려
고구려 침공과 약탈의 죄를 물었다.
그러나 후연은 멸망시키거나 고구려 땅으로 만들지 않고
고구려 유민 고운(모용운)에게 후연을 도로 주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고구려에 반항하며 시비를 계속 거는 동부여도 모조리 복속시켜
고구려의 평화를 이루어 낸다.
만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초원,
그리고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제 어떠한 나라도 고구려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고구려였다.
더 이상 왕위에 있을 필요를 못 느낀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아들인 장수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의 업적과 유언을 담긴 비문을 세우고,
가짜 왕릉(태왕릉)까지 만들어
한반도(한인-예인)인들에게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1만 년이 넘어도
세계 최대의 자연석 비문을 보면서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알릴 것을 명한 후에
유라시아 최강의 찰갑 기마군을 거느리고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서쪽으로 나갔다.
몽골의 칭기즈칸처럼.
더 이상 고구려의 적이 사라진 광개토태왕은
해가 뜨는 동방에서 숨을 거두기보다는
해가 지는 서방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또한 서방 최강의 제국이라는 로마와 맞짱을 뜨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리고 충분히 고구려는 로마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등자가 없고
무거운 철갑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성이 약했던 로마 기마군에 비하면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등자가 있고
가볍고 방어성이 강하고
싸울 때도 유연성이 강한 찰갑 옷을 입은 고구려 기마군은
그야말로 동서방을 통하여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서진은 그래서 가벼웠고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고구려의 기마군도
동방을 제패한 자랑스러운 아달라 광개토태왕을 따르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성덕이 세상 어느 왕보다도 높아
유라시아 모든 나라에서 열제로 칭송받은 광개토태왕을
추앙한 많은 초원 집단이 뒤를 따랐고 대적할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 강군으로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 버리면서
로마제국의 북쪽까지 이주해 왔다
. 아달라 광개토태왕은
자신들의 뿌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한-고리라 칭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한>은 해민족의 뿌리인 한 땅(서남해 중심의 한반도)을 의미하고,
고리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 훈족이 세운 유럽의 헝가리의 어원이 그래서 <한-고리>다.
고구려가 유럽에서는 무쿠리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명성을 일찍이 듣고 있었기에
차마 아달 라에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제발 물러나 주기만을 빌었다.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이름 아달라를 계속 쓰며
'아틸라'로 로마인들에게 불리며 크게 명성을 떨쳤다.
동로 마군의 연합 공격도 다 물리치고 로마로까지 향하며
가로막는 수십 개의 성들을 쾌속으로 돌파하여 점령해 버리고
로마에 당도하니 로마 교황이 떨며 항복한다.
그러자 로마교황 항복만 받고
쿨하게 돌아가는 아달랴의 모습은
고구려의 상징인 불새문양은
십자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무참히 살육하는 악랄한 로마의 죄를 묻고
그냥 돌아 가는 시원한 모습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아달라의 아들 장수대왕이
아버지 아달라의 이름의 뜻이 서방까지 '크게 땅을 넓히다'이므로
그 뜻에 맞게 '광개토 태왕'이라는 시호와
동서방을 모두 평정하여 평안케 한다는 의미로
'영락'이란 연호를 추증하며 최고로 예우하게 한다.
[출처] 로마 무너뜨린 훈(한)족은 고구려고,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다?(국민뉴스님,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