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2월 5일,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인가하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김법린 문교부 장관에게
"한국의 MIT를 세우라"고 지시한다.
보나마나 휴전이 될 전망인데, 휴전하면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하고, 그러려면 공업기술을
닦아야 한다. 마침 하와이 이민50주년이므로 이를 기념하여 첫 이민이 떠난 제물포 인천에
미국의MIT 같은 공과대학을 세우도록 주문하였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라 지었다.
인천과 하와이에서 첫 글자를 딴 합성어다.
하와이는 이승만의 제2의 고향이다. 독립운동 33년,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짓고 '기독교공화국'
실험을 한 곳. 사탕수수 이민 노동자 자녀들을 교육시키던 '한인기독학원' 건물을 처분하여
그 돈으로 인하공대 설립 종잣돈을 만들었다. 독립운동 때의 꿈을 새 조국에서 펼치려는 이승만의
공업기술학교, 공산당 전쟁으로 늦었기에 더욱 전력을 기울여 추진한다.
1년 넘는 준비 작업을 끝내고 1954년 4월 24일 인하공대가 개교할 때는 이승만도 직접
참석하여 첫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인하공대는 4년 후 1958년 한국 최초의 원자력학과를 설치한다. 원자로를 도입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대 공대 원자력공학과와 함께 원자력 기술자
양성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때 배출한 원자력 엘리트들이 오늘의 원자력 최선진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인하공대 개교보다 4일 앞선 4월 20일엔 한국외국어대학이 종로 한 빌딩에서 문을 열었다.
그 전해 1953년,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 나흘 후인 7월 31일 이승만은 대학 설립을 원하는
김홍배에게 학교 이름을 '외국어대학'으로 바꾸도록 설득하였다.
"자유통상 시대를 활짝 열어야 나라도 국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가 필수 아닌가. 외교관이 되고 무역업자가 되고, 외교관이 무역을
하고 기업인이 외교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해 보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자유무역 부국'을 위해 손을 잡고 '수출입국'의 미래를 활짝 열었다.
이 한국외국어대학 역시 이승만의 오래된 꿈의 하나였다. 성리학의 원리주의, 전체주의 나라
조선왕국, 스무 살에 영어 배우러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미국을 발견한 순간 첫눈에 홀딱
빠져 버린다. 영어보다 중요한 자유, 민주, 평등, 법치, 이런 것들이 곧 기독교 정신이요 미국
독립정신임을 깨닫고, 미국이라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미국에 미쳐 자유와 공화주의와 자유통상에 미쳐 버렸다. 그의 프린스턴 대학 박사논문 「미국의
힘에 의한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United States)」은 바로 '한미동맹과 자유통상을
위한 미국 역사 연구' 그것이었다.
- 인보길 저,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