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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6. 겸양의 덕
겸양, 조용하지만 강력한 목소리 내는 겸허한 태도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의 공채시험에서 문제 하나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언어논리 영역에서 최고의 난이도로 지목된 어휘였는데요. 바로 ‘겸양’이란 단어였지요. 놀라운 것은 많은 수험생이 난생처음 보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겸양’은 말 그대로 조용히 그림자처럼 뒷전에 겸손하게 머물러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겸손과 겸양, 비슷한 듯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겸손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잘 드러나지 않는 묵직한 내적 덕행이라면 겸양은 외적 태도에서 조용히 양보하고 너그러운 정숙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겸양의 덕은 말하지 않아도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평소에 성인께서 겸손은 물론이고 겸양이란 덕행에 대해서도 많이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겸양이란 단어조차 잊고 사는 저희에게 성인의 지혜를 들려주세요.
겸양의 덕을 배우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아주 반가운 질문입니다.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그윽한 향기를 풍겨주는 작은 덕행들이 많은데요. 그중에 겸양은 조용하지만 강력한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니까 겸양은 외적 태도만으로도 감동을 주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말없이 걸어가기만 해도 많은 젊은이가 그에게 배움을 청하려고 따라갔다고 해요. 그리고 설교도 하지 않고 정숙하고 겸허하게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한 수사 신부에게 감동하여서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고요.
참된 겸양은 무엇일까요? 겸양이란 이름을 지닌 4가지 미덕과 이를 방해하는 습관에 관하여 이야기할까 해요. 첫 번째는 적절한 외적 태도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습관은 문란함과 경박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언제나 어디서나 조용히 정숙하게 머물라는 것은 아니에요. 때와 장소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래방을 갔는데 조용히 앉아 양보만 하고 있다면 적절한 태도는 아니겠죠.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영적 대화를 나누거나 중요한 회의를 하는 상황에서 사적인 농담으로 분위기를 흐트러트려도 안 되겠지요. 존경을 받는 어떤 사람이 공적인 자리에서 삐딱하게 앉아 인상을 쓰고 있다면 불손하게 보이고 더는 존경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 물론 죄도 아닌데 가혹할 수는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아주 작은 외적 태도가 많은 것을 잃게 해요.
나이와 직업과 역할에 따라 또 다르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양보하고 너그러운 겸양의 태도였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불손할 수 있어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엄숙하고 단정하고 거룩한 행동을 할 수는 없겠지요. 아이에게 보여주는 겸양과 친구에게 혹은 노인에게 대하는 겸양의 태도는 다를 수 있잖아요.
두 번째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라는 내적 태도입니다. 여기에도 주의해야 할 습관이 있어요. 무모할 정도로 과다한 지적 호기심과 이로 인한 부주의함입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일에서 저 일로 옮겨가는 태도를 말해요. 그러다 보니 불안정한 상태에서 불안한 감정이 증폭돼요. 결국은 멈춰서 해야 할 독서나 기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질 거고요. 게다가 진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무기력증에 빠져 어리석은 상황에 빠지게 돼요.
세 번째는 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이웃과 소통하면서 겸양의 덕이 드러나지요. 주의해야 할 습관은 지나친 수줍음과 과한 잡담입니다. 가끔 우리는 조용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판단할 때가 있는데요. 이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요. 대화란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데 유독 한 사람이 수줍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신경이 쓰이죠. 물론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니 주의해야겠지요.
마지막으로 겸양은 외적 단정함과 청결함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결한 느낌을 주거나 과하게 허세를 보이는 의복도 피했으면 해요.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 또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요즘같이 자유로운 세상에서의 겸양은 참 불편하지요? 그렇기에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덕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자신을 구속한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것도 잠깐이 아닌 늘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한결같이 구속하니까요. 물론 잠자리에 들 때도 그러합니다. 어떤 위대한 성인은 말해요. 우리의 주님은 늘 우리 앞에 계시고 자는 동안에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경건하게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요.물론 겸양의 덕을 잘 살아내지 못한다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용기를 내어 완덕에 이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7. 너그러움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과 완전한 너그러움 본받아야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저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요. ‘지옥철’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 틈 사이에 겨우 몸을 싣고 끼어 갈 때가 많은데요. 조금만 한 걸음씩만 안쪽으로 들어가 주면 더 많은 사람이 탈 텐데요. 그 한 걸음을 움직여주지를 않네요. 지하철 안 입구에서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서 있게 되는데요. 그때 누군가 들어오려고 하면 참 당황스럽지요. 그때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봤어요. 그랬더니 한 사람이 쏙 들어오더라고요. 그저 몸의 방향만 틀었을 뿐인데요.사실 일상에서 타인에게 베푸는 배려란 이렇듯 아주 자잘한 것인데요. 언제부턴가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일에 무심하게 살아가는 저 자신을 보게 돼요. 그러나 또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을 보면 꽤 부담스럽고요. 현대 심리학에서는 지나치게 베풀고 양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존감이 낮을 수 있다고 해요.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에서 유능감을 맛보면서 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며 착한 사람 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 어느 때보다 배려하고 양보하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진짜 너그러움이 어떤 지점인지 헷갈리네요. 성인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인의 지혜를 구하는 김 수녀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너그러움은 필요하고 좋은 덕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 않느냐는 질문인가요? 글쎄요. 좋은 것은 넘쳐 흘러도 좋지 않나요? 아마도 지나쳐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 낮은 곳에서 작게 피는 제비꽃 같은 미덕, 너그러움에 관해 이야기할게요. 겸손은 온전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요. 너그러움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당당함인데요. 그런데 겸손과 너그러움은 연리지처럼 서로에게 영양분을 나눠주는 덕이에요. 다른 듯하지만 하나이죠.
너그러움의 본질은 겸손에서 나오고 겸손은 너그러움으로 표현돼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 여기서 끝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요.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는 너그러움도 여기서 끝나면 정말 오만한 거고요. 그래서 겸손은 말해요. ‘하지만 나의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야.’ 그리고 너그러움은 이어서 말하지요. ‘그래서 난 못할 것이 없어’라고요.
겸손은 과도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너그러움으로 자신감을 찾아요. 내가 지닌 것, 내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마땅히 존중받고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확신인데요. 제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이라도 아주 작은 흠집으로 손상되기도 해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뇌에 아주 작은 장애가 생기면 모든 지식을 잃고 말겠지요. 그런데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빌려온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는다면 소유할 때나 잃을 때나 달라진 것은 없겠지요.
물론 누구나 살다 보면 낙담과 슬픔에 시달릴 때가 있어요. 그리고 무기력증으로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하면서 자신에 빠지게 되는데요. 난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생각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어요. 반대로 ‘난 꽤 좋은 사람이야!’ ‘난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다 해줄게’라면서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해요. 거기엔 오로지 ‘너’밖에 없을 테고요.
사실 진실로 너그러운 사람은 의심이란 것이 없어요. 너그러움은 슬픔도 무거운 짐도 건조함도 달콤함도 부드러움도 모두 품을 수 있어요. 이러한 너그러움이 없는 겸손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거짓이에요. 물론 겸손이 없는 너그러움은 주목받고 싶은 자기과시에 머물 수 있고요. 관대함과 겸손의 결합만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성모님은 고백하는데요. 천사가 성모님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신다는 특별한 메시지로 상상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해 주었어요. 그런데 성모님은 즉시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신앙고백을 해요. 여기에서 성모님은 완벽한 겸손과 완전한 너그러움을 보여줘요. 나는 가난하고 부족해서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주님의 뜻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고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당당한 용기지요.
정리하자면 지나치게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착한 사람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내가 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었다’ 그러니 ‘너도 해줘’라는 무의식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서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해주셨어’라고 한다면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줄어들겠지요. 그러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진짜 너그러움은 겸손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줘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8. 단순함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함, 신뢰와 믿음으로 하나의 지향만 담긴 미덕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안녕하다는 인사말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저희는 안녕하지 못하거든요. 소식 들으셨겠지만, 최근 이태원 참사로 인해 많은 소중한 젊은이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장소,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불안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고, 막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 참담하고요. 전문가들은 이로 인해 온 국민이 ‘트라우마 고위험군’이 되었다면서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하네요.
기도하면서도 복잡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SNS에서 누군가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비방들인데요. 앞으로 또 얼마나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할지 미리 걱정되고 착잡합니다. 이럴 때 ‘단순함’에 대한 생각을 해요. 바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거든요. 생각과 판단을 멈추고 그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함의 덕을 청하게 되네요. 죽은 모든 영혼과 살아있는 저희의 영혼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성인의 지혜를 청합니다.
단순하고 싶은 김 수녀 드림.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우선 비극적으로 숨진 많은 희생자께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참사로 인해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충분히 기도하고 애도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단순하지가 않아서 애도하면서도 많은 걱정과 불안으로 스트레스가 높아지는데요. 그렇기에 전문가들이 정신건강에 주의하라고 하겠지요. 안전하다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까지 걱정하고 불안이 높아지겠죠. 희망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상상을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고요. 이럴 때일수록 단순해지고 싶다는 김 수녀의 바람이 무척 공감이 가네요. 누구나 큰일을 당하게 되면 불안 증상으로 걱정과 우울로 감정조절도 어려워지는데요. 그렇게 되면 단순하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도 어렵고요. 사실 많은 문제의 원인은 복잡함에서 비롯되는 거 같아요.
단순함이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속임수가 없는 오로지 하나의 지향이 담긴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간교하고 이중적인 교활함과 결코 손을 잡지 않는 신중함이기도 하고요. 살다 보면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해요. 그리고 예기치 않은 말도 안 되는 참사를 맞이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감정이 폭발하죠.
그런데요. 단순한 사람은 생각보다 고요한 감정을 유지해요. 그럴 때 사람들은 그에게 말해요. “속은 분노로 가득한데 겉으로 평온한 척, 위선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단순한 사람은 이런 공격에도 크게 동요를 보이지 않아요. 단순하기 때문인데요. 물론 왜 화가 나지 않겠어요. 모욕을 당할 때는 자존심도 상하죠. 그런데요.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빛나는 신뢰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넘어져서 정말 많이 아픈데도 울지 않는 아이처럼요. 아이 앞에 두 손을 크게 벌리고 활짝 웃어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죠. 아이는 아픔보다 엄마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단순함을 지니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주변 사람들의 불안감이 전달되어도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을 지닌 사람은 단순하기 때문이지요. 이 단순함은 뭘 몰라서가 아니에요.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의 현존이 더 크게 머물기에 굳이 변명하거나 해명할 이유와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비방이나 불평이 단순함의 미덕을 지닌 사람의 마음은 흔들어 놓지 못해요.
단순한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않아요. 자기 한 일에 대해 누군가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생각하니까요. 사실 불안하고 우울할 때를 생각해보면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것까지 반응하고 근심하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런 걱정은 에너지와 시간 낭비거든요. 나를 괴롭히는 것들에 일일이 다 대응하려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전체 인생에서 작은 한 점인데, 너무도 많은 것을 허비하게 돼요. 단순함의 미덕은 이런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기보다 하느님께 위탁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죠.
그래요. 예기치 않은 참사 앞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런데 단순한 사람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더욱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사랑의 법칙에 따라 그분의 섭리에 의존하면서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얻게 돼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미움이란 감정이 올라올 때 단순함의 미덕으로 고요한 슬픔을 지니고 애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9. 죽음을 잘 준비하려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매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를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성인께서는 물론 안녕하시겠지요? 아무 탈이나 걱정 없이 편안하냐는 ‘안녕’이란 이 소중한 인사말, 그동안 참 많이도 습관처럼 내뱉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주 드는 생각이 있어요. 주님의 날이 갑자기 밤의 도둑처럼 찾아온다는데, 저에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이별이란 불청객이 불쑥 찾아오리라는 것을요.
몇 년 전,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전 부산에 있었답니다. 흔들림을 강하게 느꼈지요. 그때 너무 놀라 정신이 멍해지면서 ‘어떡하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지?’ 하며 무서운 공포가 밀려오고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그런데요. 똑같은 그 시간에 대구에 계셨던 한 사제는 바로 무릎을 꿇어 십자성호를 긋고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고 해요. 그 사제가 참으로 위대하게 보였어요. 반면에 저 자신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고요. 똑같은 상황과 같은 시간에 누구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 대피할 생각에 정신이 없었고요. 또 누구는 고요히 마음을 다독이며 두 손 모아 주님을 맞이하려 했던 거지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산대로 죽는다고 하더니 나는 여태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 죽음을 두려움 없이 편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성인의 지혜를 나눠 주세요.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만남도 이별도 모두 ‘안녕’이라고 말하지요? 만나면 이별하고 이별하면 또 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으니 만남과 이별은 닮은 듯합니다. 그래요. 누구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구도 ‘이 정도면 됐어’하면서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사람, 있을까요? 아무도 완벽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고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죽음은 두려운 거지요.
우리 주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셨어요. 인간의 본성을 지닌 주님께서는 부활할 것을 아시면서도 죽음의 고통 앞에 두려움에 떨며 처절하게 절규했지요. ‘이 잔을 제발 거둬달라고, 왜 나를 버리셨냐’고 외치면서요. 그런데요. 이 외침은 절망인 것 같지만 희망이었어요. 두려움은 절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요. 교회의 교부들이 “죽음을 무서워하지(afraid) 말고, 두려워(fear)해야 한다”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김 수녀는 죽음을 무섭게 공포로 받아들였고요. 조용히 두 손 모아 기도한 그 사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지요.
죽음을 두려워하되, 무서워하거나 놀라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두렵지요. 두려워해야지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좋지 않은 삶의 여정을 걷게 되고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어요. 사실 진짜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장소는 죽음이 아니고 그 이후의 세상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거나 혹은 잃을 수도 있어요. 그렇기에 많은 성인도 이 마지막 단계의 여정에서 구원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거지요.
그런데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아래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그 이후도 잘 돌봐주시리라 믿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주님께서 보내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하느님께 그 어떤 것도 구하지 말고 동시에 그분에게서 오는 그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니까 죽음을 구하지도 말고 죽음이 왔을 때 거절하지도 말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영혼의 평화를 잃을 정도로 무서워하지는 마세요.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는 공포에 굴복하지 말아요.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지금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아 가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살아있는 이 소중한 순간을 잃어버려요.아무것도 구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 좋겠습니다. 이것만이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착한 일상의 삶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은 우리는 매일 소소한 일상 안에서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매 순간 높은 불확실성과 위험 그리고 상실을 경험하며 사는데요. 예고 없이 찾아올 죽음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맞이합시다.그러나 죽음의 공포나 무서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덮치도록 허락하지는 마세요. 어떻게 하느냐고요? 매일 매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기록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죽음의 리허설을 하세요.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그렇게 눈을 감아요.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서 행복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세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0. 인내의 미덕을 살려면
“인내의 덕 원한다면 모든 통제권을 하느님께 넘겨주세요”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매일 아침 오가는 수많은 군중 틈 사이에 껴서 출근하는데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조급한 발걸음, 그 뒤를 바쁘게 쫓아가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빠도 바쁘지 않아도 우린 프로그램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로봇처럼, 늘 바쁘다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한 약속도 없으면서 보행자 신호가 깜박이면 마음이 바빠지고 자신도 모르게 잰걸음으로 쫓기듯 허겁지겁 길을 건너갑니다. 시간이 있는데도 전철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안해지고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 안으로 헤집고 들어갑니다. 누군가 대화 도중에 할 말이 생각나면 언제 껴들어 말해야 할지 타이밍을 재고 있고요. 전화를 늦게 받거나 문자메시지 회신이 늦어지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누군가에게 질타를 받기도 하고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을 더 빨리 성과를 내는 데에 익숙해진 반복 학습 탓일까요? 기다린다는 것, 참아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오래 참아야 한다면 점점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기다리는 일은 초조하고 불안하고 짜증까지 나는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기다림의 연속이 바로 우리네 삶일 텐데 말입니다. 참고 버티고 인내하면서 결정적 삶의 전환을 이루어 내는 소중한 삶의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미덕을 살고 싶은 김 수녀 드림.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사도 바오로가 말씀해주시고 있다고 생각해요. 참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지요.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영민하지 못해서도 게을러서도 아니에요. 오로지 나 자신의 영적 성장을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단순한 일상에서 기다리며 참아내는 인내의 덕은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되니까요.
물론 처음부터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시련을 참고 견디라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사소한 문제와 성가시게 느껴지는 아주 자잘한 것들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오히려 참된 인내의 덕을 산다고 할 수 있어요. 매일 만나는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인내가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게요.
사실 인내의 덕은 어떤 특정한 것만을 참고 견디는 것은 아니에요.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을 참아 받는 것인데요. 심지어 조롱과 비난과 괴롭힘을 당할 때도 흔들림 없이 참아내는 것이 인내의 덕이겠지요. 그런데요. 세상이 악인이라고 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면 인내하기가 조금 수월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세상이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친구 가족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정말로 참아내기 어려워요. 그렇기에 가족이나 이웃에게 받은 오해나 모욕을 참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야 할 진정한 인내의 덕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참고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주고 참아주기를 원하면서 남이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에 쉽게 실망하고 화를 내는데요. 남이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나의 불완전함을 참고 기다리면 어떨까요? 부모의 열정 넘치는 분노보다 부드럽고 참을성 있는 동반이 오히려 아이에게 훨씬 더 큰 힘이 되어주는데요. 나 자신에게도 다그치지 않고 부드러운 동반으로 인내해줘요.
진심으로 인내의 덕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 원하는 시간에 얻으려는 모든 통제권을 하느님께 넘겨주세요. 사실 조급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욕구에 있는데요. 그렇게 되면 불안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져요. 역설적이게도 마음대로 원하는 시간에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통제권을 내려놓아야만 통제가 되는 것이지요.
통제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분노하기보다 용서를 선택합니다. 설사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거나 남이 동정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동정을 받을만한 처지라면 받고, 그렇지 않다면 겸손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그것은 아니라고 말하지요. 자신의 불행을 말하면서도 불평하지는 않아요. 그렇기에 진실과 인내 사이에서 평온하게 머물 줄 알지요. 이는 통제권을 주님께 넘겼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세상이 바쁘게 몰아쳐도 우리는 절대 서두르지 말아요. 비록 온 세상이 혼란스러워 보여도 우리 영혼과 내면의 평화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내심을 가질수록 행복은 더 커져요. 그만큼 나의 영혼을 지킬 힘이 세졌기 때문이지요.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1.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찾으려면
“성모님의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다준다”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며칠 전 지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내의 지병이 악화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요. 그의 울먹임이 가슴 시리게 들려왔지요. “수녀님, 전 아내 없이는 못살아요. 어떡해요.” 이때 제 입에서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말들, “희망을 놓지 마세요. 힘내요. 기도할게요!” 그 순간 제 말이 왜 그렇게 공허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마치 메마른 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잎새처럼요.
그가 어찌 희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찌 힘내고 싶지 않겠어요? 누구보다 기도하고 희망하고 싶겠지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희망의 말 하나를 꺼내기 위해 깊은 고뇌와 공감이 함께 따라 나와야 한다는 것을요. 희망을 위한 행동을 취하겠다는 진심만이 희망을 말할 수 있다고요. 너무 가볍게 희망과 긍정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데도 희망은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언어 하나가 정말 희망이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희망을 찾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에게
안녕하세요. 김 수녀는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말하는 순진한 낙관론자처럼 느껴져서일까요? 죽음이 절망이고 삶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긍정과 낙관 그리고 희망은 어떻게 다를까요? 지난 편지에서 우리가 희망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요.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할까 해요.
지금보다 더 괜찮은 내일을 믿고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낙관하고 긍정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낙관과 긍정의 태도는 우리 삶을 인식하는 방향에 영향을 주니까요.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무엇이 옳고 좋은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부정적으로 보면 무엇이 나쁜지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여기에 함정은 있어요. 긍정적 삶의 태도가 마치 실제 행동과는 무관할 수 있어요. 우리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그저 바라고 또 희망하지만, 희망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예를 들어 어떤 젊은이는 이제 막 직장에 들어갔는데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도박하면서 출세하기를 바라고, 또 어떤 이는 단칸방에 살면서 강남의 건물주를 꿈꿔요. 그러니까 지금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동경해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최고의 대학을 바라거나 꼴찌를 하면서 늘 일등을 꿈꿀 수도 있고요. 나에게 없는 것을 소유한 사람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칭찬해요.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누리면서 관상 수도회 수도자들처럼 은둔생활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해요. 지금 당장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못 견디면서 더 큰 십자가를 달라고 해요. 일상에서 겪는 작은 불편함도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가난한 나라에 가서 선교하겠다고 하고요. 작은 모욕을 참아 받지 못하면서 순교하겠다고 해요. 우리는 용감하게 거대한 괴물이나 악마와 싸우는 것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작은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작은 존재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탈이 나듯이 무엇이든 나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도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긍정이고 낙관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것도 노력 없이 원하니 불행하겠지요. 반대로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겠죠? 그렇기에 난 적게 원하고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원한다면 어떨까요? 행복하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덕이 있을 겁니다. 친절한 사람은 친절을, 성실한 사람은 성실을, 인내하는 사람은 인내를 원한다면요? 더 충실하고 더 깊이 자신의 미덕을 촘촘하게 실현해 나가겠지요. 이것이 진짜 긍정하고 낙관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희망은요? 희망은 긍정이나 낙관과 달리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어요. 삶도 죽음도 내가 선택해서 희망하지 않으니까요. 희망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십자가와 성모님의 순명이 잘 설명해주고 있어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희망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2.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려면
“구체적으로 이유 성찰하고 진심어린 뉘우침 선행돼야”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누군가 물어왔습니다. “죄가 없는데 그래도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요?”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있구나.’ 물론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하기야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자극적 범죄뉴스 속에 묻혀 살다 보면 평범한 사람들에겐 죄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긴 해요. 반면에 죄의식에 갇혀 사는 사람도 있어요. 노숙인들을 무심히 지나쳐서, 집안일을 도와주지 못해서, 불친절해서, 기도를 못 해서. 사는 것이 다 죄가 돼버린 셈이죠.
그러고 보면 저 역시 살아가면서 제가 하는 많은 행동이 죄라고 못 느낄 뿐, 죄일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죄의 경중이 죄 자체에서 온다기보다 죄에 대한 인식에서 올 수도 있겠네요. 소소한 것도 모두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 타인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죄라는 인식보다 실수나 잘못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겠고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영혼 단장을 위해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고해성사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기야 수녀인 저만 해도 성사를 할 때마다 어렵긴 합니다. 자주 해서 그런지 습관적으로 가볍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는 저 자신이 싫을 때도 있습니다. 이번엔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고 싶어요. 성인의 지혜로 참된 치유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세요.
고해성사로 영적 성장을 하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에게
성탄을 기다리면서 고해성사에 대한 질문을 받아 무척 반가워요.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누구나 성덕과 반대되는 악덕들이 있고 또 유혹이 있지요. 있다는 그 자체로 죄가 되진 않아요. 유혹을 느끼는 것과 동조하는 것과는 분명 다르니까요. 그렇다고 우리 인간이 유혹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잖아요. 교만으로 질투로 나태로 분노로 누군가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 예기치 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받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소소하다고 생각하는 죄가 있어요. 대죄는 아니지만 자잘한 잘못들이 하나둘 쌓이면 영혼을 손상시키고 신심 생활에 생기를 잃어요. 그렇기에 잦은 고해성사를 할 것을 권해요. 그런데 김 수녀는 자주 하다 보니 형식적으로 하게 된다고 했어요. 사실 진짜 원인은 따로 있어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심 어린 뉘우침이 있다면 습관적으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고해성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우선 고해성사를 통하여 진심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으면 해요. 단순히 용서받고 치유 받는 차원을 넘어 죄로 인해 잃은 것을 선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요. 죄를 고백하는 행위는 신심 생활에서 훌륭한 덕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도 기억하고요.
두 번째는 악의없는 거짓말, 부주의한 말들, 재미로 한 말들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그런 다음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 교정하려는 원의와 변화하겠다는 결심까지 이어졌으면 해요. 대죄든 소죄든 변하겠다는 굳은 결심이나 의지 없이 죄를 고백하는 것은 고해성사를 남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백하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성찰하세요. 동시에 상처를 주거나 받은 상대를 위해 기도하세요. 그와 더 깊은 사랑으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마지막으로 주의할 것이 있어요. 자칫 의미 없는 형식적인 고해를 할 수 있는데요. 고해할 때 뭉뚱그려서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온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이웃에게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등 이런 고백으론 양심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워요.
구체적으로 그러나 간결하게 그리고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예를 들어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때, 왜 요청을 거절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세요. 혹시 그 친구를 평소에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정말 바빠서 혹은 단순한 무관심이었는지를.
사실만 고백하기보다 그렇게 한 이유를 성찰하고 고백하세요. ‘거짓말을 했다’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거짓말을 한 이유가 허영심 때문인지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것인지 혹은 그저 농담이었는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죄와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이유나 동기를 밝히면 자신이 진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게 돼요.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좋지 않은 습관과 성향, 그리고 무의식에 있는 죄의 뿌리까지 투명하게 밝혀야 치유와 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고요. 그러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할 때 영혼이 정화되고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3.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면
“아기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대단한 학자나 재벌로 오시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혹은 정치인으로 오실 거 같지도 않고요. 굳이 가난하게 오신다면요.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마구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시기도 어렵고요. 목수라는 직업도 엄연한 전문직이니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도 가난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10명 중의 8명은 스스로 빈곤층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옛날처럼 먹지 못하고 머물 곳이 없어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아닌가 봅니다. 자신을 스스로 패배자라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질지 몰라 위기감 속에서 불안에 떨며 산다고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증에 시달리며 사는 세상이기도 하지요.
어쩌면 이 시대의 가난은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와의 극심한 차이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고통이라고 할까요?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닌, 더 가지지 못해서 가난한 것일까요? 방도 없어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님, 오늘날 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떤 가난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지 궁금합니다.
가난한 자로 태어나셨고 가난한 자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지금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이 오신다면 역시 똑같이 가난한 자로 가난한 자에게 오실 거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초라하고 어두운 내면에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마구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우리들의 마음일 테니까요.
이 시대의 가난은 옛날과 다르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역시 이 시대의 부도 단순히 재물을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부유한 것도 아니겠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단지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닐 거예요. 재물을 모으는데 정신없이 사는 사람, 오로지 물질에 빠져 더는 이웃을 보지 못하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불행하겠지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재물을 소유하지 않아 가난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지요.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 가난하다고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간다면 그 역시 마음속에 재물을 묻고 살아가는 불행한 부자일 테니까요.
예를 들어 독약을 가지고 있다 하여 문제가 될까요? 독약을 약으로 적절하게 처방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지요. 잘 관리하지 못하면 약도 독이 되고 잘 사용하면 독도 약이 되는데요. 재물도 소유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쌓아두는 순간, 불행해집니다.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부족함을 얼마나 인내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은 결정되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스스로 재물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들은 할 말이 참 많아요. 부양할 자녀가 있고 노후도 준비해야 해서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인정받고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그 ‘어느 정도’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지요. 그렇기에 계속 재물을 쌓는 일에 마음을 주고, 결국 제대로 다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해요.
이상하게도 재물을 향한 욕심은 불처럼 타올라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탄산음료처럼 마실 때만 시원하고 늘 목이 마르고요. 중독성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먹을 때는 좋지만, 영혼의 비만과 각종 마음의 합병증을 가져오고요.
어떤 이는 떳떳하게 정직하게 벌어 자수성가해서 모은 재물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죄냐고 따져 물어요. 하지만 그 재물을 지키느라 온통 마음이 재물 속에 갇힌다면 탐욕의 죄를 범하게 되지요. 게다가 혹시나 쌓은 재물을 잃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것도 역시 탐욕입니다. 자신이 탐욕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요? 간단합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잃었을 때 자신을 잘 보세요. 물론 힘들게 모은 재물이 부당하게 사라졌다면 고통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 생명을 빼앗긴 듯 낙심하면서 오랜 세월 원망하고 애통해 하면서 슬픔 중에 살아간다면 그것은 탐욕이고 이미 그는 불행합니다.
손해를 입더라도 크게 상심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나누면 부유해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그는 이미 축복을 받았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가난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4 · 끝) 아기 예수님이 오신 의미
성탄의 은총과 선물, 오로지 우리 의지로만 받을 수 있어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성탄절이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가 잇달아 열리면서 들썩입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전 세계가 행복하게 즐길 수 있다면 예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요즘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제법 흘러나옵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그런데요. 그러면서 은근히 죄책감이 느껴지고 불안하기도 해요. 성탄의 참뜻에 맞게 살기보다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문화적인 소비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서요. 하느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도대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면서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가난한 곳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또 오셨구나.’ 딱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때가 되면 해야 하는 의무로 전례에 참여하고 고해성사 보면서 성탄 축제의 달콤함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 무한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머릿속에만 묻어 둔 것은 아닌지?’, ‘아기 예수님은 머나먼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신 분, 그래서 영화를 보듯 관객처럼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묻고 또 물어보면서 성탄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아기 예수님이 사랑으로 오셨고, 사랑 때문에 오셨는데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 성인의 지혜를 듣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성탄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낸 가장 완벽하고도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태양의 품에서 나온 광선을 태양과 같은 물질로 이해하지요. 태양은 빛의 근원이니까요. 하느님의 아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왔고 같은 분이지요. 언어의 한계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천사라면 훨씬 더 적절하고 탁월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어머니가 없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고, 지상에서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성모님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성모님을 덮고 그 몸에서 태어나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인데요.(루카 1,35) 주님의 신성과 우리의 본성이 합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어요. 이 방법만이 하느님과 우리가 온전히 한가족이 될 수 있고, 완전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던 거지요. 하지만 완벽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강압적으로 받아주라고 요구할 수 없어요.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성탄은 무한한 사랑의 은총이고 선물이지만 오로지 우리의 의지로만 받을 수 있어요. 의지는 사랑에서 힘을 얻고 사랑이 없는 의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발 없는 새’가 있어요. 물론 발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다리가 매우 짧아서 발이 있어도 유명무실하기에 발 없는 새라고 해요. 이 새는 일단 땅에 앉게 되면 다시 날 수가 없어요. 새에게는 죽음과도 같지요. 그러다가 부드러운 바람이 충분히 불어주면 힘겹게 몸을 가누어 날개를 펄럭이며 겨우 날아갈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바람이 분다 하여 발 없는 새가 저절로 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바람의 속도와 시간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해요.
우리도 바로 이 불쌍한 새와 같아요. 바람이 불어와도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어요. 우리에게 있어 미풍은 하느님의 은총이지요. 이 은총의 바람에 기대어 우리의 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어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받기만 하고 삼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은총의 바람이 불어와도 의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바람이 감지될 때 바로 몸을 움직여야 하고 자발적인 의지로 선택하여야겠지요.
김 수녀는 지금 딱 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예기치 않게 하느님의 은총은 갈망과 함께 찾아오는데요. 때론 갈망이 소진되어 상처도 입고 깨지기도 하면서 자책하고 불안해할 수 있어요. 그때 찾아온 불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현대인들은 불안한 감정을 자신들의 본질인양 여기는 경우가 있어요. 잘 참아내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사랑의 활동은 원래 늘 부족하게 느낄 뿐이니까요.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평화만은 잃지 마세요. 내적 평온함을 느낄 때 바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순간이니까요. 물론 완전한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성탄의 참뜻대로 살지 못하고 믿음이 흔들린다고 느낄 때 이렇게 기도하세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이 기도의 의미는 저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믿을 수 없지만 희미하게 빛이 보이니까요. 그러니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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