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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왕의 태평성대의 비결!
(대하 14:1-8)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분열된 르호보암은 분열된 유다왕국의 일대 왕이고 이대는 아비야, 삼대가 아사 왕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통일왕국의 왕이었고, 아사는 분열된 남쪽 유다 왕국의 세 번째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비야와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지 않은 왕이었습니다만 아사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 윗대의 할아버지 다윗을 본받아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왕이 되자말자 종교의 개혁을 하고 예배를 회복시키고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해서 그 땅에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평화가 있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1절에도, 5절에도, 6절에는 두 번이나, 7절에 한번해서 평안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나라에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경제적 부흥도 좋지만 가난한 사람도 평안하고, 노인들도 평안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평안함을 누리는 나라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하고, 모든 백성들이 바르게 설 때 그 땅에 평안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할/
그렇다면 이 평안히 어디서 오는가? 다 평안을 원하지만 평안은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6절에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7절 끝에도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땅에 평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은 돈으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권력으로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평안은 사람의 머리로써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귀한 선물입니다. 평안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요14:27절에서 예수님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모조품입니다. 잠시 평안한 것 같은데 그것은 끝이 안 좋아요. 모조품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평안은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시4:8절에서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할/
나를 안전히 거하게, 나를 평안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언제 이 시편을 지었느냐면 사울 왕에게 쫓겨서 온 광야를 헤매고, 때로는 토굴에서 자고, 때로는 빈들에서 잠을 자면서 정말 생명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그런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지켜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다윗을 쫓고 있는 사울의 마음에는 평안히 없었습니다. 좋은 장막 속에서 잠을 자지만 그 기름진 것을 먹으면서도 사울의 마음에는 평안히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아사는 남북왕국의 왕들 가운데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의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아사 왕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사 왕의 신앙 인격은 무엇인가?
왕상15:11-13의 증언을 보면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고 했으며, 14절에서는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요약해 보면 아사 왕의 신앙의 인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⑴정직하여 선과 정의를 행한 사람이며, ⑵자기 어머니라도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태후의 위를 폐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하며 우상숭배를 타파한 왕이며, ⑶백성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을 찾게 한 왕이며, ⑷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지켜 행하게 한 그런 왕입니다. /할/ 이런 아사를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흡족해하셨으며 그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 평안을 누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아멘!/
①1절에서 말하는 평안이란 무엇인가?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 년을 평안하니라’
남 왕국 유다에 아비야가 죽고 그 아들 아사가 왕이 됐습니다. 그리고 아사가 왕이 되고 난 뒤에 십 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평안이라고 번역한 말은 히브리어로 ‘솨크타’인데, 이 말의 뜻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사 왕은 남 왕국 유다의 세 번째 왕이었습니다. 두 번째 왕 아비야 때까지 남과 북의 분열의 후유증으로 남 왕국 유다는 계속해서 북 왕국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사가 왕이 될 때 북 왕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라가 혼란해졌습니다. 십 년 동안 왕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남 왕국과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 덕에 남 왕국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남 왕국 유다에는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습니다. 르호보암 시절 애굽과의 전쟁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과 아비야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고통을 겪던 시절이 다 지나고 전쟁 없는 시절을 정말로 모처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남 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이 평안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되었습니다. /할/
그러나 이 평안도 10년을 넘지 못하고 구스 사람 세라의 침입으로 깨지게 됩니다. 저들이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로 여기 이 ‘솨크타’의 한계가 있습니다. 진정한 평안히 아니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평안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이 ‘솨크타’ 말고 평안을 말하는 단어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샬롬’이 있습니다. 이 샬롬의 의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⑴‘샬롬’은 ‘온전함’입니다.
샬롬은 그 본래 뜻이 ‘완전성’, ‘총체성’, ‘통합성’입니다. 동사형인 샬렘은 ‘완전하게 하다’, ‘끝마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샬롬은 부분적인 평안히 아니고 온전한 평안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평안히 아니고 항구적인 평안을 말합니다.
▶‘솨크타’와 ‘샬롬’을 다시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인이 고된 시집살이로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한이 되어 가슴에 응어리져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어머니 편만 들었던 남편에 대한 분노도 한으로 가슴에 사무쳐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설상가상으로 바람을 피웠습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 한이 폭발해서 화병이 생겼습니다.
이 때 남편이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사죄하면서 바람피우던 것을 정리하고 여인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화병의 표면적인 원인이었던 바람피우는 일은 해결이 됐습니다. 일단 사태가 진정됐습니다. 이런 상태가 ‘솨크타’입니다.
남편이 그 동안의 모든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여인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남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했습니다. 남편이 어머니께도 말씀드려서 시어머니도 여인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여인이 그 손을 잡았습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샬롬’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다시 번역을 해 보면 솨크타는 ‘편안’이고, 샬롬은 ‘평안’입니다. /할/
암 환자가 밤에 열이 오르고 통증이 극에 달했습니다. 간호사가 달려와서 해열제 주사를 놓고 진통제를 주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열이 떨어졌습니다. 통증도 멈췄습니다. 이것이 편안입니다. 의사의 올바른 처방으로 수술이 잘 돼서 암세포를 다 제거했습니다. 더 이상 암세포 때문에 열이 오를 일도 통증이 생길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솨크타 즉 편안은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처리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샬롬 즉 평안은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속에 감춰져있던 문제의 원인을 다 제거하고 그래서 증상도 나타나지 않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편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평안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⑵샬롬은 관계 회복에서 옵니다. 샬롬은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관계가 회복되어질 때 이루어집니다.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때 샬롬은 없습니다.
창3:8절을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심령 속에 이미 샬롬은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눅8:36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한 동네 바리새인의 집에 계실 때 그 동네에 죄 지은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여인이 주께 나와서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샬롬이 회복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진정한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것이 다 좋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있으면 샬롬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않다든지 서먹서먹하다면 샬롬은 회복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웃과 관계가 깨져있다면 진정한 샬롬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방을 쓰고 있는 부부에게 샬롬은 없습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몇 년째 대화를 하지 못하는 가정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목회자와 교우 사이에 관계가 삐걱거리는 교회, 교우와 교우 사이에 관계에 문제가 있는 교회 그곳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샬롬은 상대적입니다. 부부가 싸웠습니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문제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그 문제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못합니다. 이 때 남편의 편안함은 샬롬이 아닙니다. 그저 평안이 아니고 편안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랑으로 화목해서 피차가 함께 샬롬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평안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 왕 아사가 어떻게 평안을 얻게 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있습니다.
⑴샬롬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함으로’ 임하게 됩니다(2).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다는 말은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권력을 가진 자로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왜 세우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습니다. 백성을 정말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게 되기를 위해서 그는 힘을 쓰는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할/
사명을 다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 나라는 평화가 깨어지고, 그 나라는 모든 면에서 어려움과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도자가 좋아야 합니다. 가정에도 부모가 좋아야 됩니다.
선과 정의를 행할 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평안의 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⑵샬롬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깨끗하게 제거’하므로 임하게 됩니다(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5절에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산당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말합니다.
아사는 하나님이 권력을 주실 때 그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그 주신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얼마나 아사 왕이 우상을 철폐하려는 열정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온 백성에게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고 이제 실행하는데 아사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 태후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만히 안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했지만 왕은 어머니로 하여금 태후의 위를 패했습니다. 얼마나 과감합니까? 얼마나 단호했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제거함에는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이런 결단이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아멘!/
⑶샬롬은 ‘여호와의 말씀을 행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4).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의 샬롬을 얻기 위해 아사 왕이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기도로 주어졌으면 이제 그 하나님의 샬롬이 우리 삶 속에 누려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믿/아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고 지킬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심령 속에 채워진 하나님의 샬롬이 그 형제와의 관계 속으로 퍼져가게 됩니다. 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 기도하며 충만케 된 여호와의 샬롬이 이 세상의 삶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
⑷샬롬은 ‘여호와를 찾을 때’ 임하는 것입니다(7).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또 4절에도 아사 왕은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구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아사 왕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여호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기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9절부터 살펴보면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 때 아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저들을 물리쳐 주셨고 그로 인해 유다에 다시 샬롬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안히 찾아옵니다. 기도의 우선적인 응답은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기도하는 그 시간에 먼저 응답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⑸결론적으로 참된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그 무엇을 통해서도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믿/
욥22: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롬5: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진리 안에서 평안의 축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