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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33-34
이 일이 죄가 되어 / 김영주 목사
1. 서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한 전직 고문 기술자의 목사 안수 문제로 한국 사회가 시끄러웠습니다. 사회만 아니라 교계도 시끄러웠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느냐? 는 논란이 제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 안수를 취소함으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웠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자격 없는 자를 안수했다는 점.
2) 전혀 회개한 증거가 안 보였다는 점.
3) 아무나 목사안수를 줌으로 해서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교회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이중에서도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죄에 대해 회개한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때 뉘우쳤지만, 후에 전혀 잘못한 게 없다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의 몸과 인생을 망친 사람, 법으로 금지되어있는 고문을 전문적으로 했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회개한 증거가 있다면 몰라도 아니라면 문제가 됩니다. 이와 거의 동일한 문제를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이 만들었습니다.
2. 여로보암의 문제
33절)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여로보암의 문제는 도대체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참 강팍합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열왕기상 13:1~6절의 사건을 말합니다. 산당에서 제사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왕상13:1~6)1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2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3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4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5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6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2절에 보시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여러보암에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3절에 예언의 징조가 임하였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저 놈 잡아라“ 하고 손을 가르킬 때, 편 손이 말라서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황한 여로보암이 잡으라 했던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고, 기도해 주니까 손이 나았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정도 일을 겪었다면 돌이키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적어도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지어내거나 꾸며낼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 일 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하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불순종하면 자기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떨려 더 이상 못하고 바로 회개 했을텐데 여로보암은 회개치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 죄를 행했습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데도 살 기회를 망할 기회로 바꾸어 버립니다.
여로보암이 행했던 죄는 2가지 였습니다.(33절)
첫째,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둘째, 누구든지 자원하기만 하면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3. 이것이 왜 이렇게 큰 죄일까요?
1)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은 것
일반 백성(왕상 12:31 ‘보통 백성’으로 되어 있습니다.)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아무나 마구 되는’이라는 뜻입니다. 단어 자체가 이미 냉소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모세가 정한 규정에 보면 제사장은 오직 레위인들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28:1~4)“1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2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3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4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이렇게 제한을 둔 이유가 뭘까요?
첫째, 제사장 직이 인간에 의해 세워진 직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직책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정해진 사람이 예배를 인도함으로 예배의 거룩성과 진정성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21:4)"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
그러므로, 그만큼 준비되고 훈련되고, 인정받은 자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살고, 백성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종교가 타락하고 성공한 나라는 인류역사에 없었습니다. 여로보암도 이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일반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무나 되게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인도하는 예배’를 거룩한 예배가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예배’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예배에 사모함을 갖고 참여하겠습니까?
누가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로보암의 죄는 예배의 거룩성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거룩한 예배의 품격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여로보암처럼 할 때가 있습니다.
예) 가끔 교회에 올 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커피숍 가듯이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장이 영 아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불신자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아닙니다. 그런 복장으로 교회 가는 것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대통령 만나러 가도 그렇게 안 갑니다. 절에 가도 그런 식으로 안 합니다. 좀 갖추고 입고 옵니다. 이것은 예배에 어떤 규정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전과 커피숍은 다릅니다. 커피숍은 그냥 가지만 예배는 준비하고 와야 합니다. 복장, 마음, 시간 지키기, 일찍 와서 기도하며 기대하기, 적극적으로 참여할 마음(비평, 거부, 거절, 냉소적 태도가 아니라)을 갖고 와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는 교회에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신학도 하지 않고, 신앙 훈련도 받지 않고, 예배도, 말씀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예배에 가겠습니까? 설령 간다 해도 기대감을 갖겠습니까? 신령한 예배가 되겠습니까? 여로보암은 신령한 예배를 평범한 예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2) 누구든지 자원하기만 하면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본래 제사장은 ‘자원제’가 아니라 ‘선택제’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른 사람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 족속 중에서도 아무다 다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반열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훈련, 영적 지도자가 되는 훈련, 말씀 훈련, 하나님의 일을 하는 훈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 등 여러 훈련을 해서 택하심에 합당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훈련 했다고 다 되는 것 아니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위에서 불러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특별한 일을 인간이 누구나 자원하기만 하면 다 할 수 있는 자원제로 격하시켰습니다. 제사장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우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왕이 세우는 것입니다.
제사장직, 소위 말하는 성직의 고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부르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셨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해도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 ‘제사장’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의 종’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셨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부로 하면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면접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부르심’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르시지 않았는데 신학교에 오면, 도중에 그만 두거나, 과정을 마쳤어도 목회자가 되지 않거나, 변질되어 오히려 교회의 장애물, 목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 자신도 사역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셨다면 감당할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필요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부르심’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주 다양합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부르심 이후 그 사역을 감당할 힘, 능력,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예:
모세- 80세에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넉넉히 감당했습니다.
아브라함-75세에 부르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 40代 청년과 같은 때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 태중에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대개 30代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 회심 후 몇 년 지나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부르심의 나이도 다르고, 사역도 달랐지만 일단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볍게 여기지 못합니다. 부르심은 너무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내가 되고 싶어도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아 못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의 청년을 여 전도사님이 열심히 가르치고 키웠습니다. 사람 만들어서 신학교 보내려 무지 애썼습니다. 부모같이 돌보고, 엄마 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도 인정할 만큼 잘 돌봐줬습니다. 신앙도 자라고 삶도 무척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려고 했는데 번번히 길이 막혀 못 가고 결국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당만 되려 해도 신 내림을 받아야합니다. 무당도 아무나 되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데 위로부터 부르심 없이 되겠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사역자로 하나님께서 불러주시지 않길 바라고, 안 가고 싶어 합니다. 쉽지 않은 길이요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통상 10년 준비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학 4년, 신대원 3년, 인턴쉽 2년,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안수를 받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대, 법대, 신학대는 특수 대학원에 속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어서 제사장이 세워져야 그 사람이 인도하는 예배에 권위가 있고, 신뢰가 있고, 믿음이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야 할 제사장을, 부르심도 없이 ‘자원하기만 하면’ 세워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격하시켜 버린 것입니다. 종교 국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서는 파격을 넘어 충격적이 일입니다.
예: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랍비’가 됩니다. 아주 혹독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랍비가 됩니다. 그래서 이 랍비들의 말, 행동은 나라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대접을 합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랍비가 첫째요, 법대, 의대생 순으로 서열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4. 여로보암의 죄의 결과
여로보암의 죄는 이런 소중함과 고귀함을 다 깨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낮춰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34절 上)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이것을 한 사람이 지은 죄가 아니라 가문의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문이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여로보암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집단 책임을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분열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이렇게 잘못된 기초를 놓음으로 인해서, 북 이스라엘 역사상 제대로 된 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북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잘 믿어 보고, 잘 살아 보려 했어도 제대로 된 모델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본 게 그것 밖에 없으니 그렇게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모델의 원조가 누굽니까? 바로 여로보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 개인의 죄를 개인의 죄로 다루지 않고 가문의 죄로 다뤄서 가문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2)(34절 下)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여기 ‘끊어져 멸망한다’는 말은 완전히 ‘완전히 잡아 꺾는다’는 말입니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조였던 여로보암 왕조는 그 대가 다 가기 전에 멸절되고 맙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어 즉위 2년 만에 살해당하면서 가문이 멸망한 것입니다. 예배를 우습게 알고, 하나님의 일을 우습게 안 여로보암이 잘될 수 없죠. 하나님도 그 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높이 쓰십니다.
삼상 2:30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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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이 왜 이랬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안타깝습니다. 가능한 설명은 사단이 씌었다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많은 기회들을 그냥 넘기고 있습니다.
5. 결론
그래서 처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 중 처음 예수 믿은 사람, 가문에서 처음 예수 믿은 사람, 타 종교에서 처음 기독교로 옮긴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가문의 흥망성쇠가 결정됩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를 보고 후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기왕 믿을 거면, 좋은 믿음의 모델이 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본받고, 따르고 싶은 모델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나만큼만 믿으면 안심입니까? 나같이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가문의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기초를 잘 닦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