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추수와 연단 (계 14:17-20)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본문은 이스라엘의 두 종류의 추수가 그 배경으로 알곡 추수에 이어 포도추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교해 보면 알곡추수의 추수꾼이 예수님이시라면 포도추수는 천사입니다. 두 방향에서의 성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전자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후자는 훈련이나 징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럼 훈련을 통한 성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1. 거룩한 성전을 기본으로 이루어집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천국에는 성전이 없다는데(계21:22) 천사가 성전에서 나온다 한 것은 환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알곡이든 포도든 성전에서 나온 천사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전은 밤낮 하나님 섬기는 곳입니다(계7:15). 그런데 15절에는 “성전으로부터” 나왔다 했는데 여기서는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의어이지만 본 절은 거룩한 성전임을 강조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성전이 거룩한 것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또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우리 몸과 마음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고전3:16-17). 그러므로 성도는 성화를 추구하기 전에 이미 거룩한 자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엡4:3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신 것처럼 성화는 예수 안에서 이미 거룩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고후5:17). 이 진리에 대한 확신이 두렵고 떨리게 하며 이 경건한 믿음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나아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벧전2:1-5, 히12:9-13), 이 경외함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셔서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거룩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고전3:17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짐승들을 내어쫓으셨듯이 더럽히면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계11:2에 "마흔 두 달"은 악이 지배하는기간을 가리키는데, 그 끝나는 때가 3년 반의 제자교육과 같은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양육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17절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절과 흡사한데 공통점은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예리한 낫을 가진 자가 여기서는 천사라는 점입니다. 예리하다는 표현이 3번이나 강조됩니다. 포도 추수에 예리한 낫이 강조되는 것은 깨달음이 없는 징계는 의미가 없고, 징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지만 복음의 내용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율법을 연구하고 예배하는 일에 힘썼던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예리하게 알지 못해서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 쉬운 '믿음으로' 라는 낱말을 이해하지 못해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고 체험되지 않더라도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혹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 역시 참 좋은 말씀인데 따라서 행하라니,,,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자동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혹은 진리를 붙든다고 열심히 붙들어 가장 복음적인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만족한 결과가 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복음의 내용을 믿는다 해도 그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영화롭게 해드리지 않는다면 체면술에 가까운 허상적 믿음이 됩니다.
롬8: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한 것처럼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생명의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정지된 자동차의 운전대를 움직인다고 운전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완전히 정지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이미 이겼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도 승리가 누려지는 면이 없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더욱 경배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영의 지배라는 점에서 악한 마음이 지배할 때 사탄의 시험으로 보고 물리쳐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하면서도 성령충만 받지 못했다고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은사나 체험도 있지만 그 때만이 성령충만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름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정밀한 표현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과 힘을 드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만큼 성령충만한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오순절 같은 성령의 부흥을 위해서는 더 많은 힘과 시간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도 기도생활의 부족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리한 말씀으로 이런 관계들이 정립되지 않으면 불 같은 훈련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경성하게 하는 성과 외에는 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의 최고의 기본은 예리한 말씀입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말씀과 기도이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고 설교가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도가 되고 영적으로 적용 가능하도록 예리하냐가 중요합니다. 고난 역시 행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깨닫기 위해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1:5).
3. 열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스랍천사입니다. 이 천사의 등장은 열심에 대한 교훈입니다. 열심이 없으면 마음의 제단불이 꺼집니다. 성전에 제단이 번제단과 분향단 두 곳인데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번제단과 분향단을 오가는 천사입니다(레16:11-12). 이 불은 이사야를 거룩하게 하던 정화의 불이요, 성령의 불입니다(사6:6-7, 사4:3-4).
그러므로 성전에서 기도했던 이사야처럼,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던 120문도들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연단의 내용 중에 신앙생활의 열심함도 주요 목표입니다(딤전4:5, 롬12:11, 계3:19).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거룩해집니다(롬6:13-16).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인들이 성경을 배우고 다니엘이 목숨 걸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것처럼 말씀 기도 찬송 순종 섬김 등 성화의 방편을 내용으로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말씀 안에서 열심해야 합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불 다스리는 천사가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불, 낫, 큰 음성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천사의 외침입니다. 예리한 낫은 말씀의 분별력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열심이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고전4:20). 말씀 없는 열심처럼 두려운 건 없습니다. 사람의 제일된 목적과 같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 모든 것을 다 가진 하나님을 구하며 온전히 사랑하고 기뻐하고 순종함에 힘써야지(대상22:19, 빌3:9) 능력과 신비만 추구하다가 악령이나 이단으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높인 만큼 성령의 충만과 능력을 받기 때문입니다.
5. 진실로 회개함으로 알곡이 됩니다.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땅의 포도라고 한 것은 하늘과 반대 개념인 세상이나 죄나 육신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 포도송이는 죄의 열매입니다.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스’ (άμαρτίας)인데 포도송이처럼 복수형입니다. 땅의 포도송이가 익었다는 것은 죄가 처리 받기 위해 나타난다는 의미와(창15:16), 아울러 자신의 처리해야 할 죄가 많음을 깨닫는 현상입니다. 자아의 처리에도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본 절에서 강조하듯 이를 위해서도 예리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죄이고 죄가 아닌지 그 경계를 몰라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때는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믿음의 큰 틀에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6. 고난이 연단의 손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시지만 죄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롬1:18, 골3:5~6, 시7:11-13). 아간과 같이 우리 안의 숨겨진 죄까지도 처리하시길 원하십니다. 포도주 틀을 큰 틀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예수 믿고 성령 받아 변화되라고 밟는 것이지 달리 밟는 것이 아닙니다(신8:2-6, 욥19:21, 욥23:10, 슥13:9). 그리고 "던지매"는 지옥에 던진다 했을 때 쓴 용어입니다. 이처럼 포도주 틀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고, 농부의 거친 발에 짓밟힐 수밖에 없듯이 연단의 목표인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시139:7-12, 벧전5:6).
7.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여기 성 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을 연상시킵니다. 그 틀을 죽으심의 상징인 성 밖에서 밟았다는 것은 죽으라고 밟는다는 의미입니다. 밟혀서 포도 알갱이가 보이지 않듯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고후4:10-11, 빌1:20-21). 그런데 성 밖이란 거기 도착하기까지 군병들이 십자가를 지우고 채찍을 휘두르듯 일련의 강제적 과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때 가장 아픈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의도에 맞게 순종할수록 쉬워집니다. 순종 여부에 따라 이 과정이 야곱처럼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삭처럼 거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8. 내 주관대로 사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문자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났다는 말도 그렇거니와, 얼마나 피를 흘렸으면 그 피가 1m가 훨씬 넘는 말굴레 높이로 1,600 스타디온 즉 300km나 퍼져나갔겠습니까? 말굴레는 말을 어거하는 도구로 연단이 자아를 제어하는 훈련임을 보여줍니다(시32:9, 약3:3). 그러니까 온전히 순종하기까지 연단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9. 철저히 훈련받으시기 바랍니다.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1,600은 히브리적 사고로 보면 연단수 40을 제곱한 (40×40) 수로서 철저한 연단을 의미합니다. 40도 두려운데 40을 제곱했다는 것은 철저한 연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평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일들도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이 훈련소에 입소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중대사로 여기고 훈련시키고 계시므로 어설프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모본 삼고 그 믿음에 이르도록 자라시기 바랍니다(벧전2:21, 마10: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히12:11-13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교회의 양육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의 진리를 더 깨닫고 더 믿고 더 순종하고 경건생활의 항목들을 더 열심히 훈련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