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하도 좋아서 심장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가을 하늘이 이리도 높고 구름은 희던지.
십여 년 전쯤부터 국문학의 인연으로 맺어진 언니에게 주말여행을 가자했더니 마침 젊었을 적 친구와 오이도에 가기로 했다면서 함께 가자했다.
친구 사이에 끼는 게 미안해서 잠시 망설였지만 긍정적인 셋 모두 가을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다.
시월치곤 꽤나 쌀쌀해서 두꺼운 옷을 베낭에 구겨 넣고도 갈색 긴치마와 긴 니트 가디건에 부츠를 신고 역에 갔다. 역전 택시들 사이에서 손을 흔들며 내리는 언니를 만났다. 무슨 택시 기사님께도 손을 흔드냐고 했더니 남편이라고 했다. 잠깐 속으로 부러웠다. 나는 누가 데려다준다거나 데리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둘 다 음주문화를 즐기는 우리는 역사 안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 긴 거 두 개와 안주를 조금 사서 기차에 올랐다. 불쑥 김밥과 삶은 달걀을 건네는 남자분이 있었다. 함께 활동하는 시 카페의 시인을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정이 오가는 잠깐 사이에 잠깐 또 즐거웠다.
시작부터 즐거운 걸 보니 이번 여행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청량리 역에 도착하였다. 언니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삼십분 가량 타고 전철역에 도착했다.
청바지에 억새풀 빛깔의 니트를 입은 날씬한 언니가 우리를 기다고 있었다. 소개를 마치고 악수를 하고 여러 번 웃다가 어색해하다가 또 웃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오이도에 금세 도착 했다.
전철역에서 내려 셋이니 택시를 타자고 했다. 택시 기사님이 어찌나 세세하게 오이도와 시흥시에 대해 안내를 해주시는지 관광 가이드라도 만난 듯했다.
오이도는 오이가 아니라 까마귀의 귀를 닮아서 오이도라고 말하고 나니 갑자기 엄청 유식한 동생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오이도에 도착하니 바닷물은 어디 갔는지 온통 뻘밭이었다.
점심 때를 조금 넘긴 시간이라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다. 바지락 칼국수는 어디나 있지만 바닷가라 그런지 훨씬 시원하고 쫄깃하고 칼칼하고 맛있었다.
배도 부르고 슬슬 둑방을 걸어 한바퀴 돌기로했다.
저 멀리 오이도의 상징인 새빨간 등대가 보였다. 새우깡을 던지는 사람들과 날아가면서 받아먹는 서커스 단원 같은 갈매기 떼와 우리.
가을 여행의 멋진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빨간 오이도 등대에 얼굴을 비벼대며 사진을 찍고 부둣가 어시장으로 향했다.
지금 석화 철인지 시장 안에 석화 껍데기가 쌓여 있고 평소 먹던 굴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굴이 대야에 가득가득 담겨 있었다.
입담 좋은신 아주머니께 굴을 만 원어치 사니 돗자리와 초고추장을 챙겨 주시면서 마트 가서 소주와 야채를 사야 한다고 친절하게 오이도 해물을 맛있고 저렴하게 먹는 팁을 알려주셨다.
둥생인 내가 자진해서 심부름을 했다. 종이컵과 참이슬 세병과 앙증맞게 담아놓은 청양고추와 쌈장까지 사서 부둣가로 갔다.
언니들은 뻘 젤 가까운 부둣가에 돗자리를 폈다. 가에는 쇠창살이 길게 둘러 쳐있었다. 쇠창살 사이사이로 보이는 뻘과 가을 해와 장화 신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보기에 좋았다. 우리도 어서 몇 잔 먹고 갯벌 체험을 해보자고 했다.
오이도 석화는 조갯살 처럼 쫀득하고 시원하고 풍부한 굴맛이었다. 당연히 소주도 달고 맛있었다.
두 언니는 오랜 우정과 한동안은 못보고 살았는데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말과 다시 친구 해주어서 고맙다며 서로의 긴 우정을 다지고 나는 뻘과 해를 감상하며 조금씩 분위기에 스며들어갔다.
안주가 모자라 석화 오천 원어치와 고동 칠천 원어치를 더 사왔다.
잠깐 뻘을 못봤는데 그새 뻘은 온 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바닷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차오르는 바닷물에 내려앉는 가을 해의 저녁노을은 가히 애처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일몰을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내 눈에도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퐁경인지 눈물이 났다.
해는 저물어 어둡고 약간의 취기도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 언니도 옆에서 울고 있었다.
언니는 바다의 석양을 보고 아름다워서 운다는 네가 더 아름다워서 운다고 했다.
언니 친구는 당황해하고 있는 듯했지만 풍경을 폰 사진에 열심히 담고 있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당황해하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쓰는 우리 둘은 감성에 젖어 여운이 잠잠해질 때까지 울었다.
찰나에 석양은 바닷물로 사라져갔고 흔적만이 옅은 감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어두워지니 사람들도 하나 둘 부둣가를 떠나 환하고 따스한 곳으로 가고들 있었다.
우리 셋도 아쉬움을 떨쳐내고 조개구이 집을 찾아 들어갔다. 누런 목장갑을 끼고 노련한 솜씨로 조개를 구우니 언니 두분이 연방 감탄을 하셨다.
그렇게 서서히 오이도의 밤이 익어가고 있었다.
밤늦게 까지 다니는 전철 덕분에 서울로 돌아와 언니 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피곤했고 음주 탓에 잠이 금세 들 줄 알았는데 쉽사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 늦게 까지 오이도 뻘과 가을 해와 저녁노을과 새우깡을 찾아 사람 곁으로 날아오는 갈매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들의 진심과 개인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와 미래의 걱정을 나누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검정 니트 롱 원피스를 차려입은 나에게 지적으로 보인다며 칭찬을 해주시는 언니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립서비스를 들으며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로 향했다.
가마솥밥이 일품이었던 주변에 있는 부대찌개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거리로 나섰다.
연극 공연 티켓 예매를 해야 해서 여기저기 벽에 붙은 연극 포스터를 스캔하고 있는데 남학생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와 연극 예매를 도와드리겠다는 것이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하는 여러 연극 소개와 티켓 가격과 극장 위치까지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었다. 아직 아날로그 세대인 우린 흔쾌하게
젊은이가 추천하는 영화를 선택하고 돈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어디나 그렇듯이 현금 지불 시 받을 수 있는 할인 혜택을 50%씩이나 받고.
우리가 예매한 연극은 로맨틱 코미디 시트콤. ( 한 뼘사이 )였다. 서연 아트홀 지하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였다. 다섯 명의 출연자들이 각기 다른 삶을 살았지만 집은 한 뼘 사이에 살고 있으면서 격는 에피소드와 사랑의 밀땅과 각각의 아픈 사연들을 연기했다.
관객과 아주 가깝게 소통하는 연극은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남성 연기자 한 분이 일인 다역을 우스꽝스럽게 리얼하게 능숙하게 해내는 걸 보니 코미디의 진정한 웃음의 본질을 구경하는 것 같아 즐겁고 내게는 이 연극이 여러 의미가 남았다.
언니는 연극 구경을 즐겨하고 사셨지만 언니 친구는 처음이라며 많이 기뻐하고 흐뭇해하고 있었다. 참 다행이었다. 모두 다 이리 즐거우니 말이다.
많이 웃고 사진도 많이 찍고 거리를 쏘댕기다 보니 배가 또 고파왔다.
유럽식으로 노상에도 테이블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바비큐와 해물스파게티와 생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마무리를 준비했다.
인간미 넘치고 통 큰 언니가 멋진 저녁을 쐈다. 언니 친구는 카푸치노를 쏘고 나는 넘치게 먹고 마시고 받기만 했다. 친구인 언니들사이에서 동생이라 좋은 점이 훨씬 많은 나였다.
잠깐씩 정지된 시간 속에서 두 언니의 지금까지의 삶도 그 삶 속의 외로움도 엿보았고 진심도 미래에 대한 꿈들도 보았다. 물론 내 안의 나도 들여다보면서 말이다.
일박이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길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큰 의미와 즐거움과 여행의 행복을 맛본 탓이라 그리 길게 여겨지겠지.
두 언니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서로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나와 언니는 다시 청량리로 향했다.
청량리역은 어두웠지만 야경은 화려하게 우리를 반겨주었고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어 행복했고, 또한 낭만 가득한 가을 여행을 가득 담은 벅찬 가슴과 함께 추억을 공유하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언니가 옆에 있어 더욱 행복했다.
제천역을 경유해 강릉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도 그 기분을 아는지 철로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댓글 강릉까지 더 가셨더라면~
강릉은 9월에 다녀왔지요 ^^
가을여행~~~~
좋아겠네요
오랜만에 낭만있고 외롭지 않은 여행이었지요^^
강시인님도 멋진 가을 보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