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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신춘문예>
탈주중인 주체의 서술과 문채에 나타난 담론의 저항성
- 1980년대 천양희, 유안진, 허영자, 정영자 등 여성주의수필을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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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곧 그 사람이다.’ 불란스 언어학자 버폰의 말이다. 굳이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을 빌릴 필요도 없다. 언어는 의식을 대변한다.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에 의하면, 무의식도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문제는 여성언어와 남성언어가 상황에 따라 그 정체성을 달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물은 그것을 표현해 주는 언어를 갖고,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을 갖는다. 여성의 언어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육체의 언어를 지향하게 된다.언어는 이미 주어진 사회적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리얼리티 그 자체를 구성하며 또한 주체의 언어 속에서 구성되어진다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은 현재의 지배적인 남성의 언술 밑에 억눌려 잠재해 있는 여성의 언술에 대한 환기와 자각, 그리고 언어와 언술에 있어서의 혁명 없이는 여성해방이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하게 했다. 여성의 육체에 존재하는 특유한 리듬이나 여성의 무의식과 연관되는 언어의 형식들을 발견하자는 것이 여성 언어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글쓰기는 이론적 글쓰기와는 다른 형태의 글쓰기이다. 여성의 언어 자체가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가 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경험을 표현하는 모는 언어를 여성 언어라고 할 수 있기에 수필서사의 서술화자의 침묵을 포함한 ‘말’과 백지로 남겨둔 ‘글’이 모두 포함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현대여성수필은 ‘여류’라는 이름으로 ‘여성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아온 게 사실이다. 본고는 여성수필에도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전제로 출발한다. 여성적 글쓰기는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담보한 과정상의 글쓰기다. 아직까지 그 잠재력이 현실화되지 않은 하나의 이론이며 ‘남성적 글쓰기’를 대체하기보다는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안적 글쓰기인 것이다.때문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조건과 여성의 위치, 그리고 여성 주체성의 문제 등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며, 여성만의 특징적인 스타일이아 언어, 어조, 구문, 의미들을 담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페미니즘 이론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 전 70년대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여성수필들은 여성적 삶의 고발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했는데, 페미니즘 의식이 수필작가들 속으로 주입되기 시작하는 80년대부터는 여성 정체성, 여성의 언어에 대한 탐색과 물음에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의 영향이라 하겠다.
이런 언어로 여성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변인으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아프게 경험하는 주변인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여성들은 기존의 남성 언어로는 많은 것을 말할수록 오히려 자신의 언어를 더욱 잃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진 후 해방의 언어를 탐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의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글쓰기는 가부장적인 지배질서 안에서의 억압과 저항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기에 전략적 글쓰기가 된다.새로운 언어를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을 동시에 나타냄으로써 여성의 언어를 발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들뢰즈는 문학은 저항담론이어야 한다고 했다. 구조시학자들이 제기하는 이야기의 중층구조론에 의하면, 수필텍스트는 심층과 표층 그리고 담론층이 유기적으로 생성하는 입체구조로 설명된다. 여성적 언술의 전략은 담론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담론층은 서술과 수사의 방법론을 활용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담론층의 서술과정은 제재통찰과 미적 구조화 작업이 완료된 뒤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는 다양한 서술방법과 수사법을 활용하여 텍스트의 의미작용을 극대화하고, 독자의 감정이입과 감동력을 높이기 위한 서술전략이 동원된다.
이렇게 볼 때 페미니스트 언어이론이란 언어와 성을 두 가지 방법으로 관계 맺게 하는 이론이다. 즉 한편으로는 언어와 성 정체성의 관계를,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여성 억압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페미니스트언어이론은 다음의 4가지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첫째 언어에 관해서 말할 경우에 우리는 무엇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가, 둘째 여성의 언어라는 말로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즉 언어와 젠더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셋째 언어와 현실의 관계는 무엇인가, 넷째 언어와 화자가 놓여있는 불리한 입장, 특히 여성의 경우에서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언어는 소수집단의 문학과 연관 된다. 소수집단의 문학이란 지배집단의 언어권에서 소수집단이 지탱해 나가는 문학을 지칭하기에 지배 문학 또는 기존 문학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문학의 혁명적 상황을 말해준다. 여성들은 소수집단으로 존재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지배집단인 남성들이 사용하는 기존의 언어를 흔든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용되어 본 적이 드문 강밀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처럼 존재했던 자신의 언어를 다시 존재하게 한다. 때문에 이런 여성 언어로의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혁명적인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되는 것이다. 남성 언어를 빌어다 쓰지 않은 수 없는 불가능성, 남성 언어를 제대로 쓸 수 없는 불가능성이 여성 언어의 억압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여성수필은 남성중심주의적 사고가 어떻게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여성의 삶이 어떻게 제한적이고 억압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의 여성수필들은 과거에 비해 ‘여성됨’ 혹은 여성 정체성, 여성의 언어에 대한 탐색과 물음에 훨씬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 여성수필은 여성이 어떻게 억압되어 왔는가의 차원에서 억압된 여성으로서의 삶과 경험이 어떤 다양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를 생산해내고 있는가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성중심의 거대 담론 내지는 합리주의가 해체되면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타자로서의 ‘여성’과 ‘여성 몸의 언어’가 새롭게 부상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재를 선택하여 가치 있는 통찰 결과를 구조화한다고 해도, 남성중심 사회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들려주는 서술 전략이 동원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여성작가들은 저항적 서술기법을 동원하여 전달력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게 된다. 루카치에 따르면,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수필텍스트는 서술에 내포된 억압성과 저항성을 변증법으로 통합하여 창조한 언술을 통해 새로운 여성 정체성을 내보이게 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여성주의 수필의 정체성과 방향을 점검해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여성수필가들의 텍스트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적 언술의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점과 그러한 언술로 발화하는 여성 수필가들의 텍스트는 어떠한 현실 인식과 작가의 내면을 재현하며 어떠한 가치와 이상을 재현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둔다. 이런 여성의 언어를 ①침묵이나 독백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감금언어, ②편지와 자서전, 아이러니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경계 언어, ③다성적 언어 및 대화와 논쟁의 언어, 구술과 광기의 언어가 중심이 되는 탈출 언어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막힘․풀림․퍼짐의 여성 언어들은 남성들의 논리적인 언어 규칙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저항을 전략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여성의 언어들이 여성들에 의해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남성들도 독백이나 자서전적 언어를 사용하며, 아이러니의 언어나 다성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일차적으로 여성만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남성의 언어를 빌려와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여성들이 지배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억압적 상황을 환기시켜 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발전하여 여성 언어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여성만이 사용하는 여성 고유의 언어를 규명하려는 작업이 아니라 여성들이 그러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목적이나 빈도에 있어서 보여지는 남성과의 차이를 규명하려는 작업이 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남성의 언술 행위 안에서 작용하되 끊임없이 그것을 어떻게 해제하느냐와 남성의 언어를 가져오되 어떻게 ‘다르게’ 사용하려고 노력하느냐, 그리고 누가 더 많이 사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곧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고 ‘왜’ 그렇게 말하느냐 하는 점을 문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여성적 글쓰기의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서사와 서술 전략, 그 핵심 의미소
여기서 전략이란 서술 전략과 수사 전략을 의미하며, 서술 전략이란 서사, 묘사, 설명, 논증 등의 서술기법과 그 시간사용 전략을 의미하고, 문채란 문학적 설득과 감동 창조를 위한 모든 수사적 표현수단을 가리키는 말로서 담론차원에서 전개됨을 의미한다. 수필서사에서는 ‘과거의 나’인 초점화자와 ‘현재의 나’인 서술화자를 동일한 존재로 본다. 수필서사에서 화자는 실제 체험을 소재로 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통해서 의미있는 깨달음과 해석을 낳는다. 창작과정에서 여성작가가 감당해야 하는 난제는 언어와의 싸움이다. 인간의 언어는 대상을 의미로 인식하게 도와주는 유일한 도구이지만, 그 대상의 본질과 전모를 완전무결하게 의미로 대치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탈주중인 주체인 여성작가는 실존적 한계성 외에도 언어의 한계성과도 싸우며 살아야 하는 숙명적 존재다.
수필창작 과정 특히 담론층에서도 언어와의 한계성과의 싸움은 지열하게 전개된다. 다양한 서술방법을 동원하거나 파토스, 에토스, 로고스, 의식 등의 공명구조를 설정하여 독자를 공감시키는 노력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사건이 발생하는 시공간을 제시하기도 하고, 인물의 행동이 서사기법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이는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키고 작품에 대한 이입욕구를 높여준다. 대화기법을 활용하여 인물의 언행과 실제 행동을 유사한 속도로 서술함으로써 사실성과 현장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인물의 성격, 심리, 가치관, 윤리관 등을 함축할 수가 있다. 사건현장의 자연배경 묘사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묘사는 시간착오의 감속기법을 활용하여 사건이 발생하는 환경을 치밀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연상력을 증폭시킨다. 때로 자연배경은 인물의 행동을 동기화하기도 하면서 후경화의 메커니즘을 형성하기도 한다. 사건의 발생원인과 그 과정을 관찰 서술하기도 한다. 인물의 윤리적 판단에 따른 인과적 대응방식이 심리적 행동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서술 전략은 숨겨진 여성 인물의 내면심리에 대한 독자의 연상작용을 활성화한다.
이뿐만 아니다. 서술과 사서의 핵심 의미소는 언술구조 속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인물간 이념대결을 낳은 심리적 갈등요인에 대한 서술자의 분석적 설명이 가해지기도 한다. 서술자는 이러한 주석적 설명을 통해서 인물의 인과적 추측을 비판적 어조로 나타낼 수도 있다. 서술자는 이러한 이념적 대치상항을 감속기법인 분석의 방식으로 설명함으로써 독자의 연상 작용을 돕기도 한다. 다음은 서사적 행동묘사를 통해 행동철학에 대한 작가의 정서를 들려줄 수 있다. 수필에서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수사적 성과는 대조법의 문채에서 확인한다. 여러 가지의 대립관계의 구조화는 작품의 상호텍스트적 울림을 통해 작품을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크게 기능하게 된다. 서술과 수사 전략의 힘에 의해 생성된 문장의 미덕은 작중 인물의 인성과 정체성을 개성있고 격조있게 그려낼 수 있는 데 있다. 이러한 문채적 효과는 함축적 담론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자연배경 묘사, 그리고 인물의 갈등 원인에 대한 심리 분석적 추론 등이 유기적으로 생성해내는 힘으로 작동한다.
3. 여성 서술화자의 언술구조의 저항성 양상
여성수필의 담론층에서 평자가 고려해야 할 과제는 여성작가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저항전략을 점검하는 일이다. 텍스트의 저항전략은 표층의 구조화 단계에서 설계하고, 담론의 서술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여성작가는 텍스트의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독자의 감성과 작가의 인성, 텍스트의 저항논리, 작가의 의식 등을 활용하여 공감을 획득할 것인지 살펴야 한다. 이러한 저항전략은 이야기 구조와 유기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서술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저항 전략은 전체 이야기의 구조와 흐름 속에서 부분과 유기성을 고려하면서 실현시키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서는 텍스트를 분석할 때, 다음 네 가지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첫째, 독자의 감정과 감각을 깨워줄 부분은 어디인가? 둘째, 여성작가의 윤리를 보여줄 부분은 어디인가? 셋째, 독자를 설득하는 저항논리가 존재하는가? 넷째, 작가의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가? 등이다.
이 네 가지 수사학적 질문은 독자를 설득할 저항적인 서술전략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여성작가의 저항적 사유와 깨달음을 담은 수필텍스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호소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성작가는 의식을 가지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독자의 세계인식을 깨우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필이 비판인식을 깔고 있는 정신문학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저항전략이 조화롭게 담론화되어 소통될 때, 작가의 의식이 언술 속에 녹아든 만큼 감동적 울림 또한 증진될 것이다. 여성수필작가가 창작의 구조화 과정과 담론의 서술 과정에서 이 네 가지 저항전략을 자문하면서 성실하게 보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감금언어와 내적 분열의 언술
페미니즘 언어이론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분야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성차’의 문제로서, 여성과 남성의 언어 사용 방식이 과연 서로 다른가, 다르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룬다. 둘째는 언어 속의 ‘성차별’의 문제로서, 그로 인한 영향이나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연구한다. 셋째는 ‘소외’의 문제로서 기존의 언어로는 여성의 경험을 표현할 수 없다는 억압성을 다룬다. 이렇게 볼 때 페미니즘 언어이론이 다루고 있는 세 가지 분야는 성차․성차별․소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여성들의 언어가 소외되는 상황은 곧 여성의 언어가 막혀 있어서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감금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언어로부터의 소외는 언어가 전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해 이미 선택되어 있으며, 자신을 적대시하는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소외 속에서 여성들에게 ‘침묵’과 ‘망설임’의 언어만이 주어지게 되고, 그 언어들은 묵종․의존․힘없음을 상징하게 된다.
1) 침묵의 단절성과 ‘고임’
불가시적인 존재로 취급당해 왔던 여성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언어는 말없음, 곧 침묵이다.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채 남성들의 언어를 가져다 쓸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그러한 언어로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입을 다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상처받기 쉬우므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들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끊어버려 여성들이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남성들의 언어이기 때문에 침묵의 언어는 싸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1다. 또한 침묵은 언어 자체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억압 상황을 환기시키는데, 내부에는 외침의 언어가 숨어 있지만 그것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언어로 공식화되는 것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이처럼 여성들의 언어를 자신의 내부에 감금시키도록 만든다.
“그 동안 한국 여성은 표현의 욕구불만 속에서 살아왔다.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이란 인내심의 극치를 살아오도록 사회구조는 여성에게 명령하였다. 생활규범도 그렇게 하였거늘 문학적 표현도 금기시 하였으니, 고대문학 속에 전해지는 극히 소수의 여성작가 시인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영남 지방의 부녀 가사를 비롯하여 기생 이외의 여성에게서 전해지는 시조도 찾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표현의 금기 시대를 이조 5백년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1)아! 나는 그대의 영토에 헌신하는 종신서원이 될 수 없는 비탄에 잠겨 오늘도 여전히 한계의 막막함에 말조차 잃습니다. 나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귀결되고 무의미한 삶의 반복으로, 무력한 권태와 자폐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대와 나의 운명의 굴레는 그대와 나의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끈입니다. 조금씩 나는 그대의 삶의 중심으로 다가갑니다. 나는 이제 혼자 떠돌며 소속없는 신분으로 은신처에 몸을 숨기는 형벌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칼날처럼 가슴을 찌르는 예리한 한 줄기 비애 같은 것이, 빗물처럼 고여 마음의 방둑을 무너뜨리는 슬픔을 떼어내고 싶습니다.
- 천양희, <바위에게> 중에서 -
남성의 배신에 삶의 의미를 잃은 작가는 (1)에서와 같이 할 말을 잃어버린다. 무력한 권태와 자폐증에 이를 정도로 황폐해진 정신을 지킬 방도는 침묵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신처에 몸을 숨기는 형벌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은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불만과 억울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다. 전부 상징으로 표현될 뿐이다. 저주의 언어로 나타날 수 없는 언어는 몸 속에 숨어있을 뿐이다.
가슴에 와 닿는 적막감을 누를 수 없어 이 글을 씁니다. 처서도 지나고 며칠 후면 백로이니 계절은 가을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창밖에 와 부딪히는 바람소리에도 가을이 묻어오고 있습니다. 밤을 새워 울어대는 가련한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 순간마다 차라리 그들의 신세가 부럽기까지 합니다. (1)누구에게 못다 한 한을 울고 있는진 모르지만 세상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슬픔을 호소할 수 있는 용기와 처지가 부러운 것입니다.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슬픔을 내색하거나 울음을 터뜨릴 수 없는 못난 성격을 가진 자신이 밉기만 합니다. 어쩌면 하찮은 미물보다 못한 인간의 모습인 듯하여 한심스럽게 생각되기까지 합니다.
- 오승희, <어느 날의 독백> 중에서 -
침묵의 언어는 반항의 의미로 파악될 수도 있다. 기존 언어에 대한 의심을 나타내면서 언어 이전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언어는 왜곡되거나 부패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원하는 직접성과 순수성을 위협할 수 있다. 이런 훼손된 언어는 협상이나 자아의 포기에나 필요한 것이 된다. 때문에 침묵은 진실을 표시하거나 사회적 의사 소통이라는 타협된 세계를 거절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여성수필 속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침묵은 이러한 반항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한 언어 같지 않은 언어이다. 폭력적인 남성과 억압적인 주변 상황에 억눌려 있는 상태, 그래서 자신들의 할 말이 내면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 독백의 유보성과 ‘주저’’
여성은 흔히 자신이 바라는 이상과 실제로 처해 있는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 속에 존재한다. 때문에 애매한 어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인식에 자신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간극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기제가 될 수 있다. 흔히 집단에서의 권력 서열은 그들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을 수 있는가 하는 횟수에 따라 정해진다. 때문에 여성처럼 하위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는 망설임을 통해 자신감의 결여나 자기 비하를 나타내는 내용이 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망설임의 언어는 심리적 사건의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데에 적합한 양상인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언어화 이전 단계의 비논리적이고 자유 연상적인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나타내 주므로 여성적인 감수성이나 의식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즉 여성의 언어는 철학적 주장이나 극적인 사건보다는 심리적 사건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므로 그것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수향 선생, 1996년의 가을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지나가고 있소. 언제나 떠나가는 계절이 새침해서 쓸쓸하게 나이를 헤아리게 되는 요즘 자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면서 흔들흔들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게 되지요?
평생을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렸고, 저것은 정의고 요것은 부정이고 하면서 살아온 여유없고 편협한 삶이 이제와서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는 수향 당신에게 미소로운 마음으로 이글을 쓰오.
이런 것이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당신은 혼잣말하게 됐어요. 사람! 참으로 복잡하고 정묘한 기계지요. 인생! 참으로 슬프고도 재미나는 연극이지요.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있고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사람마다 각자의 인생여로가 있는 것을 이제사 허허로운 마음으로 인정하게 된 늦배기 수향, 당신과 오늘은 어쩐지 마음 편하게 인생의 한 자락을 논하고 싶구려.
- 김문숙,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자기 만족적이고 득의양양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전지적인 언어는 남성적 언어에 가깝다 남성적 언어는 고매하고 오만하며 확신감에 차있고 잘난척하는 태도를 은연 중에 드러낸다. 이와는 달리 여성적 언어는 가부장적인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나 여성이 만들어 낸 것의 부적절성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낸다. 모든 열등성에 관계된 인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망설임의 언어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망설임의 언어는 여성들이 처한 딜레마와 그것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여성들은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공적으로 표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기에 자신의 견해에 단서를 붙이거나 어떤 대상에 대해서 상호 모순된 평가를 하면서 분열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또한 여성들이 이처럼 망설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종적이고 산만하며 혼돈스럽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와 의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여성들이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타인 지향적인 의식을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망설임의 언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언어화되기 이전 단계의 의식이다.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혼미한 의식을 두리기에 적합한 양식이 내적 독백이나 의식의 흐름이고, 이 때 사용되는 이성의 검열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언어, 논리적인 배열이 무시된 언어가 바로 망설임의 언어인 것이다. 때문에 망설임의 언어는 한 생각이 다른 생각에 의해 번번히 차단되면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변이의 요소를 강조한다.
이렇게 볼 때 망설임의 언어를 통해 여성들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의 고통이나 진실이 외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외부적인 사건에 있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외부 세계에서 증명할 길이 없었던 여성들에게 내면적 갈등의 표출은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조건이다. 여성인물들은 이러한 갈등을 드러냄으로써 ‘투명한 마음’ 이나 ‘마음의 분위기’를 보여주게 된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불확실함을 망설임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 경계언어와 통합 지향의 언술
침묵이나 독백, 망설임을 통해 언어의 감금성을 경험했던 여성들은 서서히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체험을 풀어내는 다양한 언어를 찾아내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작업을 추적해 봄으로써 그동안 여성들에게 있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왜 그렇게 억압적이었는지, 또 이와 반대로 어떠한 글쓰기가 해방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삼을 수 있다.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굳어진 혀를 풀어주는 언어, 즉 ‘막힘’과 ‘퍼짐’의 경계에 있는 ‘풀림’의 언어를 살펴봄으로써 여성들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서간의 고백성과 ‘살핌’
일반적으로 서간 쓰기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행위로 여겨졌기에 남성 위주의 문학 전통에서는 주변적 장르로 인식되어 왔다.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공적인 글쓰기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편지라는 사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의사소통을 해온 것이다.때문에 편지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관성 있게 엮어 나가기 어려운 여성들의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삶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측면에서 자아표현을 강조하면서 자아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데에 효과적인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지의 언어는 사건이 발생되는 즉시 보고 됨으로 편지의 수신자나 독자에게 현장감을 제공하면서 그 현장감으로 인해 인물의 심리와 감정에 더 많이 공감하게 한다. 때문에 여성들은 자아의 발견이나 직접적인 접촉에의 욕망을 이런 편지의 언어를 통해 표출한다.즉 사건에 대한 직접성과 밀접성, 자기 확증으로 인해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행동의 고백이나 정신적 경험의 강조에 유익한 것이 편지의 언어인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편지의 언어는 주로 내면적인 감정이나 정서, 비밀의 고백, 미결적인 사건이나 원인의 해명, 자기 변명 등의 내용을 담은 언어가 된다.
여성 수필가 중에서도 특히 천양희는 이런 편지의 언어 형식을 선호한다. 작가는 편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남에게 이해시키려는 욕망을 보인다. 편지 쓰기 자체가 인식이나 경험의 중개자 구실을 함과 동시에 자기 표출성을 많이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수신자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점이다. ‘거울’, ‘물’, ‘바람’, ‘바위’, ‘소나무’에게 자신의 심경을 말하는 형식을 취한다. 천양희의 수필집 「사랑보다 소중한 행복은 없다」는 전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부 ‘약속 없는 사랑’은 전부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대를 통해 나를 바라보기 위하여 날마다 나는 그대 앞에 섭니다. 나와 동일한 내가 보이기도 하고, 나와 반대인 내가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많은 잘못 투성이의 삶이 비치기도 하고, 진지하고 순열한 사랑이 비치기도 합니다. 언제나 가시적이고 불변의 존재, 그대는 나의 마주봄이며 끝없음입니다.
때때로 내 마음은 숨이 막혀, 얽혀진 운명의 그물들을 찢어 버리려고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칩니다. 그럴 때마다 그대는 나와 그물 사이를 구석구석 비추면서 견제합니다. 견제와 균형을 지키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과 혼돈에, 그대는 묻고 또 묻습니다. “누가 너를 송두리째 너의 바깥으로 밀어내는가?”라고.
단순한 자기 만족으로부터 벗어나라, 마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라고 외치는 가혹한 그대 목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은 다시 상처를 입고 쓰러집니다. (1)모든 희망을 잃고, 거대한 공포에 휩싸여 내 스스로 사슬에 묶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순간마다 나를 만나며, 순간마다 나와 작별했습니다. 순간순간 밤이나 낮이나 밤이나, 나날의 모든 삶 가운데서 내가 해야 할 일, (2)나의 부르짖음과 갈망을 그리고 내 절망을 그리고 내 절망의 몸을 일으켜 세워 줍니다.
- 천양희, 「거울에게」중에서 -
위 수필에서 작가가 거울에게 자신의 심정을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수필가라는 운명과 수필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가는 자신의 내면의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할 운명을 태고난 사람이다. 그리고 수필은 자기 성찰의 문학으로서 처절한 자기 고백을 그 기반으로 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은 더 이상 가슴에 담아 둘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거울에 비추어 내는 것이다. 결국 ‘막힘’에서 ‘풀림’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편지를 씀으로써, 즉 거울에게 말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밀한 슬픔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특히 다른 사람에게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은 넋두리나 푸념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거울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자기를 투시한다. 격앙된 감정과 억압적인 주의 환경이 소통의 어려움을 가중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힘들게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쏟아낸다. (1)에서의 ‘막힘’이 (2)에서는 ‘풀림’으로 전개됨으로써 서간의 역할이 소통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작가는 ‘보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그대의 길을 따라 나의 행진은 계속될 것입니다’는 다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자기 해명의 좋은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양희의 수필 중에서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이해받기 위해 의사소통 구조를 취하는 수필이 ‘물에게’, ‘바람에게’ 등이다. 이 수필들에서는 ‘사랑’이라는 내용적인 내밀성이 ‘편지’라는 형식적인 내밀성과 맞물리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술자에 의한 일반적인 서술의 언어에 비해 편지의 언어는 보다 직접적이고 친근하며 감정의 유로에 적당한 언어다. 특히 80년대 여권의 확립과 결부된 자유 연애관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과 직접 연결시켜주는 편지 언어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기에 사랑이야기와 편지의 언어가 융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대여. (1)나는 아직도 남은 내 생명을 그대에게 맡기며, 죽음처럼 완전한 사랑 하나 피워보려 합니다. 방대한 황야를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랑이 되지 않고, 제도와 도덕으로 황폐해진 사랑이 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앞산, 뒷산처럼 살펴주고 지켜주는 큰 산의 사랑이 되어 삶의 친근한 동반자, 유일한 위안자가 되어 보려 합니다.
그대여. (2)이제 나는 죄도 없이 죄인 같은 사랑은 거두고 싶습니다. 그대의 순수한 세계인 절대순수, 그대와 나의 절대조화의 사랑으로 절망과 자학에서 헤어나려 합니다. 그대여, 나는 이제 내가 죄인이라는 원죄의식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습니다. 그대가 보여주는 한의 매듭이 없는 그대의 세계 속으로 나도 순수의 쪽배를 타고 흘러가려 합니다. 그대 해탈의 경지 속으로 순수한 영혼의 물살을 헤치고 뛰어들고 싶습니다. 내 영혼이 거덜나기 전에 쓰라린 현실에서 해방되어 그대의 자유와 친화하고 싶습니다.
- 천양희, 「물에게」 중에서 -
이 작품은 ‘사람에 대한 기피와 혼란과 충돌로 소용돌이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작가가 수신자인 ‘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견딜 수 없는 세상일들이 파헤쳐놓은 척박한 땅 속으로 내 개인사의 비극도 스며들고 날마다 가슴 속에 갈던 날선 비수도 그대의 창고 속에 녹슬고’, ‘그것은 어쩌면, 끝없이 좌절당하고 패배한 나 자신에 대한 질책과 자괴감’, ‘생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들, 현실에 대한 우위의 삶을 갖지 못했다는 억울함 같은 것들이 선연한 아픔으로 다가올 때’, ‘나는 삶과 사랑의 평행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중 충돌하는 상반된 구조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충격은, 고통스런 한 인간이 받은 고문이며 억압이었습니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소리치며, 사랑의 상실로 왜소해진 나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던 나에게’, ‘가짜의 것들에 포박당한 채,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헛된 발을’,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ㅁ 상처, 돌연한 사고에서 얻은 처절한 충격’ 등의 어구를 통해 분석해 볼 때,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쓰라린 배신을 당했고, 이런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절규를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런 언어를 빌려왔다고 하겠다. 편지의 주고받은 자체가 이 세상의 수많은 남녀가 겪는 사랑의 고통에 대해 “동정의 눈물”을 주고받는 것이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때 공감이나 이해를 위한 소통의 형식이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와 물이라는 제재의 용해성이 잘 맞물리게 된다. 사랑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물의 덕성을 통해 해소하기 있는 작가는 이 작품에서 사랑으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데 편지 형식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막힘’에서 벗어나 ‘풀림’을 지향하고 있다.
위의 예문에서 드러났듯이 편지의 발신자는 수신자인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단절에서 자신의 잘못은 없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작가는 ‘물’에게 그러한 버림의 부당성과 자신이 받은 충격, 삭여지지 않는 분노를 전달하고, 들끓는 내면의 갈등과 혼돈을 해소하기 위해 (2)에서 보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따라서 이때의 언어는 곧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신호이자 상대방과의 접촉을 꿈꾸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작가’로 하여금 소통의 언어를 발화하게 한 것이다. 천양희에게는 이제 사랑의 대상은 없다. 그러나 그녀는 (1)에서와 같이 ‘죽음처럼 완전한 사랑을 피워보려 한다’.
이처럼 천양희의 수필은 사랑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을 주로 다루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수필은 단편적인 감정에 치우치게 됨으로써 주제의식이 약해졌지만, 수신자를 사람이 아닌 상징체로 해서 주제의식을 의미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그러한 내적 감정을 다루기에 적당한 편지의 언어를 도입해서 주변 장르였던 수필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간 자체가 수필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수필을 서간체 형식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서간문은 서간체 수필과 달리 서간문으로 불려왔다. 주제나 제재 중심의 수필문학과 서간문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천양희는 그러한 서간문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여성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이바지하게 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중심과 주변으로 분리시키는 이분법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으로 여겨졌던 장르의 언어를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략적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양희 이외에도 유안진, 허영자, 이해인 수녀 등도 편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전략적 글쓰기를 행하고 있다.
친애하는 J씨!
(1)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나의 기본 자체는 우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나의 친구 J씨라 하더라도, 나의 이 기본 자세를 흔들려고 할 때는 장미의 가시가 자신을 지키듯이, 나도 그렇게 나를 지킬 것입니다. 비록 J씨 당신이 나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더라도, 나는 그것을 아파하고 슬퍼하며 비탄에 빠질지언정 나를 지키는 가시는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쉬운 여자를 경멸합니다. 아무리 우정이나 사랑에 눈먼 여성이라도 자기 성깔로서 자신을 지침에 허술하지 않는 가시를 지닌 여성을 더 좋아합니다. 진정 우정이나 사랑이 서로의 확인과 믿음이라면, 장미의 가시란 바로 확인과 믿음의 수단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장미는 그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 여성다운 품위와 기질을 지녔다고 봅니다.
영국의 국화가 장미라 했는데, 영국 역사상 엘리자베드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이 있었고, 또 여왕들의 통치 시대에 영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의 엘리자베드 2세도 여러 역대 국왕보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 국민과 세계의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여왕들이 아무리 여성이라 해도 무작정 사랑에만 눈이 멀었다면 어찌 왕국을 지켜낼 수 있었겠어요. 하물며 작은 섬나라에 불과한 나라를 태양이지지 않는다는 거대한 왕국으로 키울 수가 있었으리오.
- 유안진, 「장미를 보내면서」 중에서 -
유안진의 「장미를 보내며」는 사랑을 고백하는 이성 친구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서간체 수필이다. 문맥으로 보아서 자신의 남성관의 예를 들어 요즘 여성들의 가벼움을 질타하는 성격을 지닌 글이다. 마지막에 주제의식이 놓여 있는데, ‘비록 나는 여왕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는 아낙에 불과하지만, 내 기질과 성깔은 장미를 닮고 싶어집니다. 내 비록 외모는 초췌하게 늙어가는 보잘것 없는 여성이나, 여왕도 능가할 그 어떤 품위 한 가닥을 지니고 싶습니다’.는 진술로 볼 때, 이 작품은 쉽게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가벼움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장미의 가시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자신이 가시 돋힌 장미가 되려고 하는지를 알리는 내용의 편지 글을 통해 여성적 삶에서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이 품위를 지니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소통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는 구구한 하소연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라도 자신의 사랑관을 들려줌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1)에서와 같이 어떠한 경우에도 남녀 간에 있어서 우정 자체의 틀을 벗어나지 않겠지만, 상대가 나의 마음을 흔들려고 할 때는 장미의 모순을 사랑하겠다는 의지 표출을 통해 결코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여성이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잃고 만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품위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본 의지를 단호하게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편지의 언어는 곧 자아를 대변하는 장치가 되고, 타인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알리는 적극적인 표현기제도 된다. 유안진은 이처럼 당대 여성들의 가벼운 사랑놀이를 질타하려는 의도로 자신의 사랑관을 통해 남성들이 여성을 쉽게 정ㄹ복의 대상으로 보려는 시도에 저성들이 대처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전략적인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수필보다 더욱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상호 소통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수필이 허영자의 ‘상심하는 젊음에게’이다. 다른 수필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수신자의 목소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들려온다.
(1)“선생님! 젊음이란 축복받기만 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렇게 아프고 슬플 수가 있습니까?”
아득한 지하에서 길러올려진 물처럼, 혹은 몇 만 리 머나먼 허공을 날아온 바람처럼 그렇게 절절한 음성으로, 그렇게 숨가쁜 기세로, 젊은 친구여 그대가 이렇게 물어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진정 젊음이란 축복이요, 환희요, 기쁨입니다만 그것은 슬픔, 고뇌, 괴로움을 동반한 축제입니다. 젊고 푸르른 나무를 보십시오. 그 가지가 넓게 뻗어 가고 그 잎새가 무성할수록 그가 거느린 그림자 또한 웅장합니다. 우리의 젊음도 혹 저런 것은 아닐까요.
꿈이 찬란할수록, 결백할수록, 심성이 맑을수록 고민도 많고 아픔도 크지 않겠습니까.
젊은 친구여.
- 허영자, 「상심하는 젊음에게 」 중에서 -
위의 예문은 서두에 해당하면서 작가가 제자인 젊음이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밝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서 젊은이가 먼저 작가에게 편지 내지는 질문을 했으며, 그에 대한 답장이 곧 이 수필의 주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젊은이의 목소리는 (1)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젊음에 대한 회의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발화를 통해 독자들은 이전에 한 젊은이가 교수인 작가에게 쓴 편지의 내용 또는 질의가 젊음에 대한 아픈 체험임을 확인하게 된다. 서간체수필의 마지막쯤에 수신자의 목소리가 다시 직접 노출되기도 한다. “선생님, 젊음이 한 번뿐인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어요. 청춘이라니, 무서운 홍역이에요.”가 수신자의 목소리다. 이러한 참여적 수신자의 목소리는 수필의 진행에 촉진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계속 진전시키는 방아쇠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편지의 언어가 일반적인 일기체수필, 자전적 수필, 회고록 등의 언어와 다른 점은 수신자의 존재가 수필의 서술에 관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이때의 수신자는 독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러한 수신자가 수필의 서두에 ‘에게’ 라는 명시적 형태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신자가 수동적이거나 명목상의 존재여서 수필의 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수신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없는 것이 바로 편지의 언어가 가진 특징이다.편지의 언어는 수신자를 향해 발신자가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기에 발신자는 수신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게 된다. 때문에 편지의 언어는 거리상 떨어져 있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시키는 매개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리고 이런 공간적인 연결을 통해 서로 간의 소외, 고립, 고독 등의 감정도 상호 소통시키기도 한다.
물론 편지의 언어는 반복성이나 장함함으로 인해 서술의 전개를 지연시키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노정시킴으로써 비객관적인 인식에 빠지게 하는 한계점이 있다.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 때문에 내면 생활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거나 자기 변호를 하는 데에 효과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 보편적인 언어로는 반영되기 어려운 여성의 내면적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바로 편지의 언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언어가 실어나르는 내용은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의 진행”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굴곡을 수신자와 함께 나누려는 상호 소통의 욕망이 중요한 발화의 목적으로 작용한다.때문에 이러한 소통의 언어를 통해 여성들은 자아 발견 및 자아 성찰의 주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페미니즘과 문학의 접합점을 여성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의식에서 찾으려고 할 때 자서전적 요소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다.삶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체험이자 절실한 인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서전적 양식은 페미니즘과 문학 사이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그리고 자서전적 양식은 타인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편지의 양식과는 달리 순전히 자아의 표현 욕망에서 출발하여 지나간 삶의 경험을 회상하는 언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회상 주체로서의 ‘나’가 주관적 감정이나 경험적 사건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물론 서간의 언어도 회고적 성격과 고백성을 지니기에 작가와 서술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주는 데에 적절하지만, 그보다 더욱 고백적 성향이 강조되는 것이 바로 자서전적 에세이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적 수필의 언어는 발신자가 작가이며 발화 내용이 작가 자신의 생애와 연관되는 언어이다. 그리고 고백적 글쓰기는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시도와 연결된다.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행위자체가 주로 ‘당위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사이의 불연속성에서 출발해 타인의 이해를 구하거나 판단․용서․동정을 얻기 위해 행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엇보다도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주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내성적인 ‘살핌’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소설이 허구적인 이야기로 전달될 때는 작가가 그 이야기의 내용에서 비껴설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이 실제 자신의 삶과 연관되는 장면으로 제시되거나 새로운 삶의 창조로 인식될 때는 작가가 소설의 한 가운데 서 있게 된다.
이러한 자서전적 소설에 나타나는 ‘살핌’의 언어는 여성들에게는 “억압받는 자의 행위 모델을 내면화한 글쓰기의 유형”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내성법에 기초해서 신변적이고 체험적인 서술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살핌’의 언어가 이러한 서술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인 자아와 서술적인 자아가 거의 일치되어 1인칭으로 나타남으로써 경험의 핍진성과 서술의 신뢰성을 모두 높여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것을 살펴보는 자서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주체적 자아를 억압하는 것이 가부장제 사회이기에 자서전의 언어는 남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즉 남성의 자서전적 언어는 사회적 자아를 강화하기 위한 내적인 자아 성찰의 결과로 쓰여진 것이 많지만, 여성의 자서전적 언어는 가부장적 문화와 개인적 자아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의 결과로 쓰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그리고 여성들은 자서전에서 남성들에 비해 덜 전형적이고 덜 통일적이며 연대기적인 질서로부터도 좀 더 자유로운 언어를 주로 구사한다. 소설적인 진실과 삶의 진실이 거의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없다는 것,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체험이 절실하다는 것, 기법상 특별한 방법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것 등에 의해 고무된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내려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처럼 내면에 널리 퍼져 있는 자아의 편린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이 때에 유효한 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보여주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여성의 체험이나 그것의 육화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자서전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적인 언어를 살펴보는 것이 곧 자아의 표현을 강조하는 여성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인물 같은 소설’인 자서전적 소설은 작품 속에 나오는 발화자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작가의 모습을 알게 해 주는 소설이다. 이 때 책은 지면에 인쇄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 표면은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껍질을 벗기면 자서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껍질을 벗기면 자서전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소설이 바로 자서전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보통의 소설보다 자서전적인 소설의 언어는 작가의 마음을 훨씬 더 많이 알려준다. 작가가 느낀 마음의 분위기 그 자체가 잘 표현되므로 독자들은 자서전적 소설의 언어를 통해 작가의 ‘마음의 질’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서전의 언어는 실존적인 진지함이나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들과의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리면서 여성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주로 자신들이 힘들게 견디어 온 고통의 이야기들이다. 때문에 자서전의 언어는 여성에게 자아 말살과 수동성을 요구해 왔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도전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자서전의 언어가 내면성․직접성․투명성․정직성 등의 특성을 지닌다면 이러한 성격이 곧 여성들이 처한 문제를 푸는 데에 필요한 기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사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꾸미려 하지 않고 단지 기억을 뒤져 그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때문에 이 때의 언어는 바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고백하는 ‘살핌’의 언어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직접 ‘자서전’을 쓰지 않고 자서전적 ‘수필’을 쓰는가가 의문시된다. 이 질문에는 여성들의 마음 속에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심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이해 받거나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욕망이 그 한쪽을 차지한다면,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그 때문에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른 한 쪽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감정들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의 타협점이 바로 자서전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한 자서전적 소설의 언어로 나타날 수 있다. 자서전적 소설의 언어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실제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중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처한 한계 상황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출 의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존재론적인 상실감과 결핍감이 여성들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했기 때문에 그것을 고백하는 글쓰기만큼 현실과의 치열한 직면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성들에게는 현실이 오히려 생활적이기에 수필쓰기 자체가 현실을 직시하거나 그것을 곱씹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여성의 삶이 텍스트라면, 여성의 글쓰기는 그 텍스트를 해설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숨은 의미를 찾고 일상에 파묻힌 부스러기를 복원하는 일이 곳 여성들의 의무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의 글쓰기가 자서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여성적 자아의 재발견이라는 내적 성찰의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이므로 여성들의 고백적인 자서전의 언어는 도피나 환상을 중심으로 하는 도상 실험이나 모의 실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 실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비판의 풍자성과 ‘비틈’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저항과 폭로로 전복적 언술을 구사하는 일련의 수필 작품이 과거에 비해 80년대에 유독 많이 보인다. 이들의 언어는 가부장적 권위에 의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경험하지 못한 채, 늘 가부장적 질서의 주변을 겉돈다. 주변을 맴돌던 여성 언어는 아이러니칼한 풍자적 진술과 쉽게 공모하여 주변화된 여성의 소외를 고발하고 중심을 공격한다. 이 같은 전복성은 하나의 규범, 진리, 이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성논리에 대한 저항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부장적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에 위치해 있는 여성들의 반격으로 읽힐 수 있다.
아이러니는 주로 내면과 외면 사이에 벌어진 틈을 연결시키고, 특히 내면성의 과도한 열망을 상대화함으로써 그것을 교정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 언어는 외면과 내면, 추상성과 구체성,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원적 세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언어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여성들에게 아이러니는 남성중심적인 질서를 비판하는 데에 쓰이므로 주로 ‘비틈’이라는 풍자적 기능의 중심이 됨으로써 현실적인 억압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는 언어가 된다. 즉 풍자적인 아이러니의 언어가 남성중심적인 세계의 위선․자만․자신감에 찬 우행․합리화․허영을 폭로하려는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와 풍자와의 연결이 가능한 것은 아이러니가 이러한 풍자의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그리고 처벌하는 힘”을 빌어와 보다 긍정적인 미래를 건설하려는 여성의 욕망에 부합될 때이다. 풍자적 아이러니를 통해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날카롭게 인식할 수 있기에 전적으로 여성만의 언어는 아니지만 남성의 허점을 비판하거나 여성들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낼 때 유용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아이러니의 언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남성적 아이러니의 언어와 그 목적과 밀도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러리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의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뜻하고자 하는 것과 그와는 반대의 말을 하는 것, 어떤 것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비난하기 위해서 칭찬하고 칭찬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이 바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인데 이러한 언어가 여성의 모호함이나 양면적인 복합성과 연결되면서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를 폭로하는 데에 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언어는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하는 ‘풀림’의 언어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른 여성의 언어와는 달리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해야지만 가능한 비판성을 보이기에 비판적으로 쳐다보거나 뒤집어서 이야기하는 발화자의 언어가 중심이 된다.
(1)하늘에는 별도 많다 휘황찬란 별잔치/ 땅에는 인물 많다 잘난분네 말잔치/ (2)세상사 용광로라 기기묘묘 형형색색/ 인간의 몸 소주우라 골골육육 절절묘묘 요지경이 따로없다 이 몸이 요물단지/ 누우면 세 평차지 일어서면 탐욕일색/ 고상한 분네들은 만물의 영장 섬겨대고/ 마이크로 코스모스 잘났다고 흠모하고/ 유명타는 조각가 로댕과 미켈란젤로/ 해부학 기하학에 미학철학 곁들여서/ 인속 간의 인간입네 모양내서 빚어놓고/ 고타마 싯달타는 룸비니에 우뚝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장엄하게 외쳤어도
- 이옥자, 「인간계곡」 중에서 -
여성 수필에 나타나는 말장난이나 유머, 재담, 비속어 등은 흔히 남성 질서가 강조하는 단일한 의미나 동일성의 논리를 교란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허위의식과 폭력성을 웃음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할 때가 많다. (1)의 ‘하늘의 별’ ‘땅에는 인물’ ‘잘난분네 말잔치’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남성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것이며, (2)의 ‘세상사 용광로라’ ‘요지경이 따로없다’의 언술은 남성중심주의 우리 사회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풍자적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 작품은 우선 문학의 형식면에서, 기존 수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3.4.4.4조의 내재율을 선택하고 있어 모든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회 현실 속에서 타락의 가능성이 높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글에는 우두머리가 되려는 인간과 눈치를 살피느라 자기 모습을 잃고 있는 기회주의자, 당리당략에 매여 허수아비가 된 군상과 한탕주의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고, 그 소중한 가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가능하다.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불행한 일이나 우리 모두에게 가능할 수도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기에 이 작품을 통하여 스스로에게까지 경고장을 보내고 있다.
풍자는 악의 교정을 일차적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까람림’이고, 적나라한 공개다. 위정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점이며, 이것을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정치는 암흑의 베일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비극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대중들의 공감이다. 개인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를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를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 모순을 비판해야 한다. 풍자의 주요 대상이 정치적 행태와 사회현상으로 집중되는 이유는 민심의 뿌리를 근원으로 하여 형성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어지러운 정황 속에서는, 이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지경 속 열두 마당> 중 ‘물림굿’에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12 불티나니 교육이 고육됐네/ 이판사판 엎어가며 막판까지 가다못해/ 불문곡직 스파이전 엎어치기 묘지국회/ 의사당 로비는 로비스트 사교장/ 힘겨루기 돈겨루기 입신재며 입법하네/ 검은 싱글 조폭두목 취객꼴이 정객귀신/ 나죽는데 네가사니 무고라도 상관없네/ 신의도리 헌신짝 물고늘어지기작전 물귀신/ 20세기 막차타고 잡귀들아 물러가라/ 부정한자 물러가고 새바람아 불어대라
- 이옥자「물림굿」중에서 -
우리 정치 풍토를 경멸에 찬 어조로 야유하는 작품이다. 세태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오늘의 실상이 얼마나 암울하고, 비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를 쉽게 감지케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풍모가 출현하여 희망이 솟구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흐르지 않고 멈춰져 있는 물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썩은 물이 어떤 계기에 새로운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것은 기대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우리 정치 수준은 상식 이하에 머물러 있다. 일체의 기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상황이다. 이 사실을 ‘20세기 막차타고 잡귀들아 물러가라/ 부정탄자 물러가고 새바람아 불어대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흔히 남성들은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들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남성들은 자만심이 강한 허위자로서의 ‘알라조네이아’이고, 여성들은 자기 경시의 허위자로서의 ‘에이로네이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결국 기만적인 용어가 되어 칭찬으로 비난하거나 비난으로 칭찬하는 ‘비틈의 언어가 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인 ’비틈‘의 언어에는 비웃음․조소․우롱․희롱․조롱․경멸․모멸․야유․놀림 등의 언어가 포함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비틈’의 풍자나 아이러니의 언어가 소용되는 것은 그러한 언어가 균형잡힌 넓은 시야를 성취하는 것, 인생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것, 직설법으로서 가능한 것보다도 더욱 광범위하면서도 풍부한 의미를 표현하는 것,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독단적이 되기를 피하는 것 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여성들에게 있어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인생의 복잡성과 가치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양가적이고 동적인 세계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비틈’의 언어는 모든 진리를 부분적으로만 인정하고 불변성과 안정성을 불신하는 개방적이고 비결정적인 여성의 언어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는 여성들에게 보호색의 언어가 된다. 남성들의 언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를 숨겨야 하고, 그렇게 숨긴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야 한다. 보임/숨김, 공격/순응, 앎/모름 등을 동시에 나타내는 이런 이중적 언어가 바로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인 것이다. 이처럼 보호 기능과 해방 기능을 동시에 획득하려는 것이 곧 풍자적 아이러니의 언어이기에 여성들은 이러한 언어를 빌어와 이 세상이 이성을 중심으로 한 남성의 원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때문에 아이러니적인 ‘비틈’의 언어는 우월함의 기호가 아닌 투쟁의 형식으로 자리매김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저항과 폭로의 전복적 언술을 구사하는 일련의 여성 수필가들은 이들의 언어가 가부장제적 권위에 의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상을 경험하지 못하자, 늘 가부장적 질서의 주변을 겉돈다. 주변을 맴돌던 여성 언어는 아이러니컬한 풍자적 진술과 쉽게 공모하여 주변화된 여성의 소외를 고발하고 중심을 공격한다. 흔히 화산처럼 폭발적인 것으로 비유되는 이 같은 전복성은 하나의 진리, 규범, 이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성 논리에 대한 저항의식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부장제적 중심으로부터 밀려나 주변에 위치해 있는 여성들의 반격으로 읽힌다.
여성 수필가들의 텍스트에 빈번히 나타나는 말장난이나 유머, 재담, 비속어 등은 흔히 남성질서가 강조하는 단일한 의미나 동일성의 논리를 교란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허위의식과 폭력성을 웃음으로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할 때가 많다. 분노와 눈물을 대신하는 웃음은 억압 주체의 권위를 파괴하고 전복시킨다. 웃음을 통한 이와 같은 의미의 해체는 여성 주체의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
80년대 여성 수필가들이 보여준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담한 노출과 능동적인 인식은 풍자적 목소리를 높이는 데 한몫을 했다. 암묵적으로 여성수필에 금기시되었던 섹스에 얽힌 단어들은 선정적이었고, 또 그만큼 통쾌한 것이기도 했다.
현실적 불평등 앞에 무기력하기 만한 여성 자아의 공격적인 자기 폭로는 웃음의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성을 수치스런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통렬한 신랄한, 코믹한 비판을 특성으로 하는 아이러니칼한 풍자의 언술전략은 근본적으로 여성 정체성을 이 사회 속에서 모색하고 찾으려한다는 점에서 외부 지향의 통합 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 탈출언어와 열림 지향의 언술
자아정체성의 확립 과정에서 여성들이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상처를 마음 속에 두지말고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즉 그동안 억눌려 있던 언어의 물꼬를 과감하게 트이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임은 언어의 범람으로 이어지면서 전염성과 확산성을 지닌 교체와 혼합, 대화와 논쟁, 구술과 광기 등의 언어를 형성함으로써 여성 언어의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남성의 언어는 가능한 한 이성에 바탕을 두고 논리정연한 규칙에 따르려 하기 때문에 구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여성의 언어는 임의성과 비종결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에 원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구심적 언어는 단일성과 통일성을 중시하는데 비해 원심적인 언어는 다원성과 상대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여성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퍼짐’의 언어를 통한 감금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먼저 교체와 혼합의 언어는 작가가 전지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전부 설명해 주는 권위적이고 단성적인 언어에 반대할 때 발화된다. 억압적이고 질서 정연하며 단성적인 남성의 언어를 깨뜨리는 것이 바로 다성성에 기초한 여성의 언어이기에 이런 언어를 통해 여성들은 복수적인 시점이나 개방성을 확보하려고 한다.이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이어서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여성의 언어는 ‘열린 언어’에 접근하면서 모호하거나 긴장을 유지하는 언어가 된다.
대화와 논쟁의 언어는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나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 독백의 언어를 거부하면서 부재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욕망을 나타낸다.자신의 내면을 폭로하는 이런 대화와 논쟁을 통해 여성들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멀리 퍼지는 언어를 형성한다.
그리고 구술과 광기의 언어는 앞뒤가 맞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쓰인다. 잘 정돈된 ‘글’은 이성에 바탕을 둔 ‘중심’에 바탕을 둔 ‘주변’의 언어이다. 이런 구술적인 ‘말’의 언어를 통해 화자는 청자에게 직접 말을 걸면서 그의 응답을 적극적으로 유발시킨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수단이 없어서 억눌린 분노와 고통을 광기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흔히 여성이 ‘남성이 아닌 존재’로 정의되어 온 것처럼 광기도 ‘이성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도덕적 제약이나 남성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성에 대항하는 힘이 바로 광기라는 새로운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이 때 광언은 자유로움과 본능, 솔직함을 드러내는 여성의 언어와 보다 쉽게 결합된다.
이러한 언어들은 모두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언어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들의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남성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불충분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언어를 풀어 놓아 널리 퍼지게 한다. 이런 ‘퍼짐’을 통해 자아 자체가 외부로 열리는 체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갑자기 많은 이야기를 하는 여성들의 언어는 그동안 그것이 얼마나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눌려 왔는지를 역으로 드러내 주는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대화의 생산성과 ‘다툼’
언어는 서로 다른 세계관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와 논쟁의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그리고 타자의 언어가 중요해지는 것은 주로 자신과 의견이 대립될 때이므로 흔히 대화와 논쟁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물들은 흔히 삶의 전환점 및 기로에 놓여있거나 위기의 순간에 직면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화와 논쟁의 언어가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통해서 타자의 말과 관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호성에 토대를 두기에 인간은 타자와 접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자아가 될 수 있고 그러한 만남을 통해 상대방의 언어를 유발시킬 수도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방의 언어에 귀 기울이거나 상대방과 다른 주장을 담은 언어를 적극적으로 발설할 때 언어가 풍부하게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나는 이러한 남자를 만났다. 차를 몰고 광안리 이면도로를 가고 있을 때 깜빡이 불 없이 느닷없이 끼어든 코란도를 몰고 있는 남자였다.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크락숀을 몇 번 울려 경고를 하자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아침부터 재수없게, 여자가 빵빵 거리네”하고 고함을 치는 모습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불을 밝혀 잘못된 행동임을 다시 경고하자 “무슨 잔소리야”다. 빨리 달리고자 했으나 그는 신호등에 걸려 정지하고 말았다. 끼어들고 죽을 판에 살 판 달려본들 정지 신호에 막힌 그의 차 뒤에 나는 정지하면서 분노를 가졌다. 오너인 그의 옆에는 부인인 듯 여자도 앉았다. 자신의 분명한 잘못을 가벼운 손 신호나, 혹은 조용한 태도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홀대하고 박대함으로써 가볍고도 무지한 권위주의를 확립하고자 하는 기존 남성의 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정영자, ‘가족법 위의 관습법’ 중에서 -
위의 예문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남성 중심주의를 대화를 삽입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자 자가 운전자의 사고 방식은 여성을 육아, 결혼, 내조의 틀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이런 틀 속에서는 여성은 남성의 종속적 존재다. 왜 여자가 남성들한테 감히 대들 수 있느냐는 남성의 의식은 우리 남성들의 의식에 내재된 유교적 가치관이며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다. 이러한 남성에게 작가는 여성도 사람이고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평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시각으로 깨어있는 여성작가가 구시대적 발상에 사로잡혀 여자를 집 안에만 있어야 하고 운전 따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남자와 갈등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도 여성의 두 번이나 남성에게 직접 경고를 하였으니,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여성작가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와 서로 침범하고 침범당하는 관계를 맺으면서 대화와 논쟁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의 내부와 외부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대화와 논쟁은 독백적인 권위 대신 대화적인 진리는 발견해 가는 언어를 형성하게 해준다. 소크라테스식의 대화나 논쟁을 하고 있는 인물들은 어느 한 쪽이 마치 뚜장이나 산파처럼 상대방의 언어가 풀려 나오도록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부추긴다. 혹은 어느 특정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병치시킴으로써 시점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인정하게 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인물들이 언어가 그 인물이 소유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런 언어의 교환은 곧 가치관과 세계관의 ‘나눔’이 된다.
이런 숨겨진 내적 논쟁이나 대화, 그에 대한 응답은 곧 타자에 대한 인식과 인정, 다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 되기에 관계 지향적인 여성의 본질에 부합된다. 때로는 저항으로, 때로는 지지로 나타나면서 언어를 생산해 내는 능동적인 힘이 바로 이런 대화와 논쟁의 여성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작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독자나 사회가 전적으로 찬성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스토리를 전개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 여성들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대화와 논쟁의 언어로 ‘지나치게’ 말하게 된다.
2) 구술의 확산성과 ‘흐름’
여성들은 말이 글로 되었을 때부터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시작된 것처럼 느끼기에 그런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이 때 말을 하기 위한 글, 글보다 우선시되는 말,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글 등이 부각될 수 있는데,이러한 양식이 곧 구술과 광기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구술과 광기의 언어는 ‘몸으로 글쓰기’의 전형으로서 이야기와 경험이 유리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이다. 여성은 ‘중심’으로 상징되는 권위나 이성을 부정한다. 잘 정돈된 ‘글’은 하나의 ‘중심’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정돈되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것 같은 ‘말’은 ‘주변’에 해당한다. 따라서 ‘글’을 쓰면서도 ‘말’을 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여성들은 ‘글’을 ‘말’처럼 하고 싶어하고, 이 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구술과 광기의 언어가 된다.구술과 광기의 언어는 앞뒤가 분명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난다. 때문에 거침없이 흘러가는, 그래서 멀리 퍼지는 언어를 형성하게 된다.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해 이야기를 풀어내게끔 만드는 언어, 살아남거나 살리기 위한 언어가 바로 이러한 ‘흐름’의 언어인 것이다.
먼저 구술의 언어는 단순히 사고를 표현하는 기호가 아닌 행동의 양식을 의미한다. 말하기 자체가 역동성과 내면성을 확보하는 목소리의 문학과 연결되면서 자연스러움과 직접적인 전달 가능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구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곧 타자와 직접 연결되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기존의 남성중심적 ‘쓰기’의 언어에서 도외시되었던 ‘말하기’의 언어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코끼를 먹은 뱀 생각이 났지만, 말을 끊지 않으려고 가만히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 대학’, ‘확신 학교’, ‘성공 대학’… 다 외우지를 못했어. 졸업 때 쓰는 검은 사각모를 쓰고는 부드러운 흙길을 두꺼운 장화 같은 신발을 신고는 쾅쾅 걸어갔어. 나는 앞만 보고 성난 듯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시 없는 꽃을 보라고 소리를 질렀어. 앞만 보고 성난 듯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시 없는 꽃을 보라고 사리를 질렀어. 앞만 보고 걷다가 중간 줄에 어느 한 사람이 나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볼 수가 없었어. 네모 난 검은 모자들은 줄을 똑바로 맞춰서 간격이 없이 걸으니까.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서로 부딪치고, 모자 끝에 달린 노란 술들이 달랑거리다가 서로 엉키고 난리가 났어.
나는 너무 놀랐어. 그 사람들도 당황해서 삐뚤어진 모자를 바로잡고, 넘어지려는 사람은 안 넘어지려고 허우적거렸어. 그러다가 행복 대학의 검은 모자를 쓴 사람과 잠깐 얼굴이 마주쳤는데 전혀 행복해 보이지 낳았어. 굳은 표정에 입술은 꽉 다물어 성난 것 같고, 눈은 불안해 보였어.
먼지를 내며 행렬이 지나갔는데 아무도 이 동산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은 없었어. 돌길에 부딪는 쇳소리 같은 여운만 남았지.
_ 조재은,「어린왕자 패러디․1」중에서
말을 하는 듯한 어투로 현대인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술은 잘못하면 강기의 노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를 ‘어린 왕자’의 모작-패러디로 처리하고 있다. 현대인은 ‘행복’과 ‘편리’라는 개념을 혼동한 채 어떠한 확신도 없이 발등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잡는 데만 급급하는지도 모른다. 불편한 삶보다는 편리한 생활이 근접된다. 그러나 편리함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는 보다 정신적인 것을, 후자는 신체적인 것에 부여된 가치이기에, 이를 대비하는 자체가 잘못일 수도 있다. 현대인은 행복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공간에 투입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인다. 그들은 일련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보장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들뜨게 된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한정된 시간밖에 살 수 없는 숙명적 존재고, 모든 일에는 상대적 상황이 존재하는 사실을 무시한 채 서둘러 자신의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절망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술과 광기의 여성언어는 질서 정연하고 진지한 남성의 언어에 비해 하찮고 수준 낮은 언어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처럼 비논리적이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남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쏟아냄은 곧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의미한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여성들의 억압된 자아가 해방의 활로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억압되었던 현실의 응어리가 갑자기 터지면서 “상처에 바람쏘이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언어들일 것이다.
4. 로그아웃
여성수필가들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언술의 저항적 특징들은 어떠한 여성 현실과 내면을 재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어떠한 여성적 가치나 이상들을 제시하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여성 자아 정립 양상과 현대여성수필가들의 언술 전략의 저항성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사회, 자연, 신화와 같은 외부적 현실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려는 통합 지향의 언술 전략과 욕망, 무의식, 공포 등으로 가득 찬 여성의 내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해 내려는 내적 분열의 언술 전략으로 그 특징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성이 놓인 현실을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 동일시를 지향하는 전자의 언술 전략이 의미를 고정시키면서 여성 주체의 동일성을 회복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내면을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 내적 분열을 보이는 후자의 언술 전략은 가능한 의미를 비고정화시키고 지연시키면서 분열된 주체의 다중성과 복잡성과 인접성을 실험적으로 고무시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언술 양상이 비단 여성수필가에게만 발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여성수필가들이 남성수필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표현하거나, ‘전혀 다른 상상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근 중심적 언술을 대체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언술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타자화된 이러한 언술들을 여성수필가들이 즐겨 구사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언술적 전략은 남성 수필가들의 언술적 전략과는 다른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전략들은 대체로 비결정성, 변동성, 가장과 모방의 유희를 주된 무기로, 남성중심의 지배적인 질서를 교란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성적 글쓰기의 실체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남성적 질서를 분열시키고 수정하는 작업으로서의 여성적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 여성들이 스스로를 재현할 수 있는 여성수필의 저항적인 언술전략을 모색하는 이러한 작업은, 여성의 경험을 여성의 눈으로 복권시키면서 여성의 창조적인 상상력과 전복적인 에너지의 근원들을 드러내 언어, 성, 정체성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여성의 정체성이나 여성적 글쓰기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를 향해 움직이는 ‘탈주중’인 과정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고에서 살펴본 다양한 언술들이야말로 남근 중심적인 상징계에 해체적인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여성적 글쓰기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저항적인 언술 전략을 고안해내기 위한 현대 여성수필가들이 다양한 노력으로 이루어낸 소산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 경남 남해 출신, 수필가, 문학평론가, 문학박사(동아대) 88년 월간 <동양문학>으로 수필 등단, 94년 월간<문예사조>로 문학평론 등단, 국제펜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본격수필학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제2회 한국바다문학상 본상 수상, 제5회 문예시대 작가상 본상, 제2회 부산수필문학상 본상 제1회 정과정문학상 수상, 2016년 한국을 이끄는 혁신리더 대상, <현대수필창작론>, <현대문학의 비평적 성찰>,<누가 수필을 함부로 말하는가> 등 저서 다수, 현)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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