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여름밤(夏夜)」 무더위 속에서 초연한 정신세계를 읊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연일 찌는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현재 강원 산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 중에 있으며, 밤낮없는 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가족은 지난 90년대부터 2020년까지는 대구시 아파트에서 선풍기 3대로 한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이젠 낮이나 밤이나 에어콘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숨 막히는 여름날을 보내면서 옛사람들은 무더위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번 지면에는 1689년부터 약 5년간 거제면 동상리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오언고시(五言古詩) 20구(句) 「여름밤(夏夜)」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한시는 마음이 고요하면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인에게 주는 핵심 교훈이다. 김진규의 「여름밤(夏夜)」은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외부의 자극보다 내면의 태도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실천적 가치를 제안했다.
① 내면의 평정심(마음 챙김)을 유지하라. 저자는 쇠를 녹일 듯한 폭염 속에서도 가슴속을 고요히 가라앉히며 더위를 이겨내었다. 현대인의 일상도 업무 스트레스, 인간관계, 불안감 등 '정신적 폭염'으로 가득하다. 감정을 자극하는 외부 환경을 탓하기보다, 명상이나 호흡을 통해 내면의 중심을 잡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② 외부 자극에 대한 의연하라. 저자는 한시 내용에서, 가슴이 고요하다면 바깥 사물(외물)이 어찌 나를 침범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우리는 매일 수많은 SNS 알림, 뉴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의 시선이나 주변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벽을 세워야만 나를 지킬 수 있다.
③ 물질적 집착 내려놓기 또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라. 시인은 수정 돗자리나 가을 박덩이 같은 일시적인 피서 용품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현대인들도 더울 때 에어컨을 찾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쇼핑이나 자극적인 소비에 의존하곤 한다. 시인은 이러한 물질적·조건적 해결책은 일시적일 뿐이며, 근본적인 치유는 내면의 초연함에서 온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 다음 ‘侵’ 운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 20구(句) 「여름밤(夏夜)」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의 거제도 유배 중(謫中)에 지은 작품으로, 『죽천집(竹泉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이 한시는 무더운 여름날의 열기를 극복하는 선비의 초연한 정신세계를 노래한 작품이다. 저자는 유배라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 원망과 분노에 침잠하기보다, 여름밤의 자연을 통해 정치적 핍박에 굴하지 않고 내면의 순결함과 의연함을 지키겠다는 뼈저린 자기 수양의 의지를 이 시에 투영했다.
○ 내용인즉, 이 시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반부(1~10구)]는 낮 동안의 숨 막히는 무더위가 밤이 되면서 서서히 식어가고, 달빛이 비치는 고요한 여름밤의 정취로 변화하는 과정을 시각적·촉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후반부(11~20구)]는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통해 깨달은 철학적 다짐이다. 작가는 물리적인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시원한 물건을 찾기보다,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더위라는 외부 자극을 이겨내겠다는 선비의 굳은 내면과 기상을 보여준다.
김진규는 숙종 대의 문신으로 정치적 격변과 유배 생활 등을 겪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의 '더위(축융의 권세)'는 단순히 계절적 무더위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가혹한 정치적 상황이나 시련을 중의적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마음을 고요히 지키겠다는 지조가 잘 드러난 명시다.
**「여름밤(夏夜)」** / 김진규(金鎭圭, 1658~1716)
畏日長如年 무서운 해는 길기가 일 년 같고
朱陽可流金 붉은 태양은 쇠라도 녹일 듯하네.
遅遅夕陽下 지루하게 뉘엿뉘엿 석양이 지니
庭除始有陰 뜰과 섬돌에 비로소 그늘이 지는구나.
入夜生微凉 밤이 되니 미미하게 시원한 기운 생기고
皓月上前林 밝은 달은 앞 숲 위로 떠오르네.
流光入踈牖 달빛 흘러와 성긴 창문으로 들어와
耿耿照我襟 반짝이며 내 옷깃을 비추는구나.
物幽煩抱洒 만물이 그윽해지니 가슴속 번뇌가 씻겨 가고
夜閴衆籟沉 밤이 고요해지니 모든 소리 잦아드네.
翛然對淸景 유유자적하게 맑은 풍경을 마주하니
何事久沉吟 무슨 일로 오랫동안 깊은 시름에 잠겼던가.
念此祝融權 생각해 보니 불의 신(축융)의 권세도
亦不病吾心 내 마음을 병들게 하지는 못하네.
胷中倘自靜 가슴속이 마냥 스스로 고요하다면
外物詎相侵 바깥 사물이 어찌 나를 침범하겠는가.
水玉與秋葫 수정 자리와 가을 박덩이(시원한 물건들) 같은 것은
區區不足尋 구차하여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네.
蹈火尙不熱 불을 밟고도 오히려 뜨거워하지 않으니
至人古所欽 지인(至人)을 옛날부터 공경해 온 까닭이로세.
[주1] 주양(朱陽) : 여름의 붉고 뜨거운 태양을 뜻함.
[주2] 류금(流金) : 쇠나 돌을 녹일 만큼 극심한 더위를 비유하는 표현.
[주2] 축융(祝融) : 중국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火神), 여기서는 '여름의 맹렬한 더위'를 상징한다.
[주3] 흉중당자정 외물거상침(胷中倘自靜 外物詎相侵) : 이 시의 핵심 주제를 담은 구절이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외부의 환경(더위나 역경)이 나를 흔들 수 없다"는 뜻으로, 흔히 말하는 '심두멸각(心頭滅却)이면 화자량(火自凉)' 즉, “마음을 비우면 불도 시원하다”의 경지와 통한다.
[주4] 수옥(水玉)과 추호(秋葫) : 당시 선비들이 더위를 식히기 위해 사용하던 수정 돗자리나 시원한 가을 박(또는 죽부인 같은 대나무 요) 등을 뜻한다. 시인은 마음이 고요하면 이런 인위적인 피서 용품조차 필요 없다고 말한다.
[주5] 지인(至人) : 장자(莊子) 사상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외물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존재를 말한다. 불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는 정신적 초연함을 뜻함.
⇨ [시구(詩句)의 상세 해설과 감상]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 선생이 거제도 귀양살이에서 겪었던 유배객의 처지에서 이 시를 바라보면, 겉으로 말하는 '여름날의 무더위'는 곧 '가혹한 유배 생활의 시련과 정치적 탄압'으로 치환된다. 이 관점에서 그의 내면 심정을 가슴 아프게 그려낸 고백이다. 시구(詩句) 20구(句) 모두 하나하나 유배객의 입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무서운 해는 길기가 일 년 같고, 붉은 태양은 쇠라도 녹일 듯하네.(畏日長如年, 朱陽可流金)’ : 임금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이곳 유배지의 하루는 마치 일 년처럼 길고 지루하다. 나를 짓누르는 저 불타는 듯한 태양은 살을 태우는 더위이자, 동시에 나를 이 외딴곳으로 내몬 조정의 서슬 퍼런 공격이자 권세가들의 서슬 퍼런 핍박이다. 그 뜨거운 열기 앞에 내 몸과 마음은 마치 녹아내리는 쇠붙이처럼 흐물거리고,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극도의 고통을 느낀다.
② ‘지루하게 뉘엿뉘엿 석양이 지니, 뜰과 섬돌에 비로소 그늘이 지는구나.(遅遅夕陽下, 庭除始有陰)‘ :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시련의 시간도 붙잡을 수는 없는지, 지루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마침내 좁디좁은 적소(謫所)의 앞마당과 섬돌 위로 거뭇한 그늘이 드리워진다. 이 작은 그늘만이 온종일 세상의 독한 기운에 노출되어 있던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숨구멍이자 휴식의 공간이다.
③ ’밤이 되니 미미하게 시원한 기운 생기고, 밝은 달은 앞숲 위로 떠오르네.(入夜生微凉, 皓月上前林)’ : 세상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마침내 그 지독하던 열기가 조금씩 식어간다. 그리고 저 멀리 숲 위로 서늘하리만치 하얗고 둥근 달이 떠오른다. 저 달은 내가 한양에 있을 때나, 이곳 귀양지에 와 있을 때나 변함없이 밝다. 저 달을 보며 비로소 낮 동안 가슴을 옥죄던 억울함과 슬픔을 잠시 가라앉혀 본다.
④ ‘달빛 흘러와 성긴 창문으로 들어와, 반짝이며 내 옷깃을 비추는구나.(流光入踈牖, 耿耿照我襟)’ : 허름하고 낡은 유배지 방의 성긴 창살 틈으로 은은한 달빛이 흘러 들어온다. 그 차갑고 맑은 빛이 홀로 앉아 있는 나의 초라한 옷깃을 빤히 비춘다. 마치 멀리 계신 임금님께서 나의 결백함과 충성심을 알아주시고 온화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시는 것만 같아, 달빛을 마주한 나의 옷깃을 다시금 단정히 여미게 된다.
⑤ ‘만물이 그윽해지니 가슴속 번뇌가 씻겨 가고, 밤이 고요해지니 모든 소리 잦아드네.(物幽煩抱洒, 夜閴衆籟沉)’ : 낮 동안 나를 괴롭히던 세상의 소란스러움과 유배객을 향한 따가운 시선들이 밤의 고요 속으로 모두 가라앉았다.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억울하게 쫓겨나 이곳에서 썩어가야 한다는 분노,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 조정의 정세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내 가슴속의 복잡한 번뇌들도 달빛 아래 차분히 씻겨 내려간다.
⑥ ‘유유자적하게 맑은 풍경을 마주하니, 무슨 일로 오랫동안 깊은 시름에 잠겼던가.(翛然對淸景, 何事久沉吟)’ : 홀로 이 맑고 깨끗한 밤풍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문득 한 가닥 깨달음이 스친다. '나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한숨지으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던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이 몸이 갇혀 있다고 해서 내 영혼까지 갇힌 것은 아니지 않은가.' 비로소 마음을 얽매던 유배객의 쇠사슬을 스스로 풀어놓고 유유자적해진다.
⑦ ‘생각해 보니 불의 신의 권세도, 내 마음을 병들게 하지는 못하네.(念此祝融權, 亦不病吾心)‘ : 그렇다. 나를 파멸시키려 했던 반대파들의 무소불위의 권세(축융의 권세)가 아무리 서슬 퍼렇고 맹렬하다 한들, 그것은 고작 내 육신을 붙잡아 두고 괴롭힐 뿐이다. 그들이 내 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내 올곧은 절개와 군자로서의 당당한 마음(吾心)까지 병들게 하거나 꺾을 수는 없다.
⑧ ’가슴속이 마냥 스스로 고요하다면, 바깥 사물이 어찌 나를 침범하겠는가.(胷中倘自靜, 外物詎相侵)‘ :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거울처럼 맑고 고요함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유배지라는 열악한 환경도, 세상의 온갖 모함과 비난이라는 외물(外物)도 감히 나를 침범하여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바깥의 더위가 아니라, 환경에 흔들렸던 내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⑨ ’수정 자리와 가을 박덩이 같은 것은, 구차하여 굳이 찾을 필요가 없다네.(水玉與秋葫, 區區不足尋)‘ : 세상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겠다고 수정 돗자리나 시원한 물건들을 구차하게 찾아 헤맨다. 권력을 쥐었을 때 누리던 부귀영화와 안락함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얻은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속세의 사치스러운 피서 용품들은 대수롭지 않으며, 더 이상 미련을 두고 찾을 이유도 없다.
⑩ ’불을 밟고도 오히려 뜨거워하지 않으니, 지인(至人, 덕이 높은 초월적인 사람)을 옛날부터 공경해 온 까닭이로세.(蹈火尙不熱, 至人古所欽)‘ : 타오르는 불길 속에 서 있으면서도 뜨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옛 지인(至人)들의 초연한 경지를 비로소 마음으로 우러러보게 된다. 나 또한 이 지독한 유배의 불길(시련) 한가운데 서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다스려 저 지인들처럼 어떠한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선비의 기상을 지켜내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