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8] 임규문(林奎汶) - 나의 지주되신 하나님 5. 죽을 고비를 넘긴 순회노정 - 2
9 벌써 농구화 속으로 눈이 녹아내려 질퍽질퍽하고 바지 가랑이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덜그럭덜그럭 거린다. 코밑으로는 흰 서리가 수염처럼 돋아나고 털모자 위에는 백발노인처럼 흰 서리가 맺혀졌다.
10 눈이 쌓인 구릉(丘陵)에 빠질 때면 포복(匍匐)을 하여 빠져나와야 했다. 갈 길은 먼데 해는 서산에 기우니 시장기가 돌았다. 발바닥에서 질퍽대던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산속에서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11 어둠이 깃들면서 반달이 길을 인도라도 해 줄듯이 어슴푸레 비춰 주니 추위는 더해졌고 비행기재(飛行機岾)를 감돌아 흘러가는 강줄기에서 세차게 불어대는 강바람과 휘몰아치는 눈발에 눈을 뜰 수가 없고 손과 발의 감각은 점점 없어져갔다.
12 하체는 못 견디게 시린 통증에 견딜 수 없어서 눈 위에 쭈그리고 앉았더니 긴장이 풀어지고 순식간에 피로가 엄습해 왔다. ‘이대로 잠이 들면 죽고 말 것이다’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눈 위를 반 이상 굴러서 마을로 내려왔다.
13 그때만 하더라도 오대산 준령을 타고 공비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인기척을 들었는지 마을의 자치 대원들이 길을 막으며 행방을 물었다. 심장은 뛰고 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아서 대답을 못했더니 부축을 해 주어서 내려오는데, 연락을 받은 경찰이 카빈총을 메고 깜깜한 노상에서 신분증을 보자고 하였다.
14 가느다란 분노가 일어났으나 들어가서 말하자고 손짓으로 표시하고 여량 파출소(餘糧派出所)에 들어갔다. 턱이 떨려서 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더운물을 한 모금 얻어 마시고 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15 무장한 순경은 공비(共匪)가 눈 속에 파묻혀 있다가 하산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의 도민증과 계몽 대원 신분증을 보고 나더니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며 모두들 혀를 찬다.
16 여기서도 20리를 더 가야 목적지에 당도할 수가 있다. 몸의 사정을 봐서는 가고 싶지 않았으나 외로운 개척지에서 전도 대원이 애써 모아 놓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가야만 했다. 더 이상 가다가는 큰 변을 당할 것이라고 극구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파출소 문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