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세요?
말 씀: 요한복음14:27
설교일: 2026. 4. 26 (주일 낮 예배)
어느 의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의사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환자가 들어오면 이렇게 인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느날 한 환자가 진료가 다 끝나자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 별건 아닌데요, 아까 제가 들어올 때 ”안녕하세요? 하셨지요?
아파서 온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물어보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인사말을 바꿨습니다.
“어디가 나빠서 오셨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또 황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디가 나빠서 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하니까
환자의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선생님, 그 말은 제가 물어볼 말이 아닌가요?
이 의사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인사말을 “어떻게 오셨습니까?”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한 여학생이 진료실에 들어 오길래
“학생은 어떻게 왔지?”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여학생 하는 말이
“저는 지하철 타고 왔는데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의사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의사는 마침내 새로운 인사말 찾는 것을 포기하고
본래 사용하던 인사말 “안녕하세요?”로 되돌아와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이 말은 “평안하세요?”하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평안하세요?”입니다.
“여러분! 평안하세요?”
사람이면 누구나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중동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늘 하는 인사말은 “샬롬”입니다.
이 말은 “주 안에서 평안하기를 빕니다”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샬롬! 샬롬!”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가장 많이 하면서 가장 평안하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전쟁하면서 불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사람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지만,
인사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다 안녕하다고, 평안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할까요?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참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기 때문입니다.
참 평안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기 때문에 참 평안을 얻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평안을 위하여 일하셨고, 우리의 영원한 평안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무서워 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하셨습니다.
여기서 “끼치노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잠깐 주는 것이 아니라
유산처럼 남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십니다.
그것은 재산도, 지식도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아멘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평안”은 어떤 평안일까요?
예수님의 평안은 폭풍 속에서도 잠드실 수 있었던 평안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입니다.
사람들의 배신과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평안입니다.
즉 모든 상황을 초월한 평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처럼
“문제가 해결되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떻게 다를까요?
세상이 주는 평안은
어떤 문제나 불편한 상황이 없어야 되는 조건적 평안입니다.
그 문제나 상황이 다시 생기면 사라지는 일시적 평안입니다.
그리고 물질이나 건강이나 인간관계 같은 외적인 것에 좌우되는 의존적 평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문제나 불편한 상황과 상관없는 무조건적 평안입니다.
환경이 좋아져서 생기는 안정감이 아니라, 상황과 상관없이 유지되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내적 평안으로 사라지지 않는 지속적인 평안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무서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명령형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평안을 주셨기 때문에 근심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미래가 불안할 때나 건강이나 경제적 문제가 있을 때
또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보통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문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모든 염려를 예수님께 내려 놓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아멘
여기서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나를 돌보신다는 믿음 위에 나의 염려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안은 “문제가 없어져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맡길 대상, 내려놓을 대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에는 쉬지 않고 파도가 밀려오고, 때로는 폭풍이 불어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하”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예화입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느 할머니가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그 할머니를 자기 차 뒷자리에 태워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보니까 이 할머니가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왜 그 무거운 짐을 아직도 이고 계십니까? 내려 놓으세요!” 그랬더니
“아이고 선생님 ! 나만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이 짐까지 내려 놓을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짐을 내려놓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혹 우리 중에는 이 할머니 같은 분은 안계십니까?
“아이고 주님, 저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주신 것만 해도 황송한데, 어떻게 저의 사소한 문제까지 내려 놓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차를 타고도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할머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 내 짐을 예수님께 내려 놓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하시라고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내려 놓는다는 뜻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멘
우리 모두 모든 마음의 근심을 내려 놓고,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여기서 말씀의 진행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염려 → 기도 → 감사 → 평강입니다.
그러니까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평안을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그러면 왜 감사가 평안을 가져올까요?
감사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없는 것”에 집중하지만 감사는 “이미 받은 것”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중심이 흔들림에서 안정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려면 마음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면 근심, 걱정 불안이 자꾸 쌓일 뿐입니다.
그러면 감사가 무엇입니까?
감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함께 따라 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을 은혜로 받자”
어떤 사람이 방안으로 급히 들어가다가 벽에 박힌 못에 이마를 부딪혔습니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그가 이마의 피를 닦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이웃집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아니 이마를 다쳐 피가 나는데, 감사는 무슨 감사입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잘못해서 고개를 위로 올렸다면 눈이 찔렸을 것인데,
이렇게 이마만 다친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사람이 바로 주어진 현실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일이 조금만 잘못되고 틀어져도 낙심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수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수도 없이 굶주리고, 헐벗었습니다.
서른 아홉 대에 해당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이 한마디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아멘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억지로 감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적인 감사는 힘든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가 있었기에 그는 춥고 습기가 가득한 감옥에서도 평안했습니다.
불평 불만이 아니고, 두려움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여러분 !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는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감사를 빼앗기면, 평안이 없고, 평안이 없으면 행복도 없습니다.
그저 주신 현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주신 평안으로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주님이 주신 평강을 누리려면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평안은 감정 조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을 ‘지켜 주시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염려되고 불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어차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무풍지대가 없습니다.
인생의 비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옵니다.
그러므로 환경에서 평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람은 불어 오고,
그 속에서 염려와 불안이 쉴새없이 자리를 잡는다면
그 염려와 불안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비결을 찾아야 합니다.
* 그 비결은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맡기는 것입니다.
*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 나에게 주어신 현실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5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평안을 누리고 싶어도 여전히 염려되고 불안해요?”
그렇습니다. 염려와 불안은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렇지만 평안은 염려와 불안이 사라져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예수님께 내려놓고, 맡기고,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평안은 점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 예수님의 평안으로 우리의 삶을 다스리며
항상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