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 40:11~17
제목: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 기독교는 믿음이 충만해 보이는 성숙한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하심을 간구하고, 겸손한 믿음의 자세로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시40:9.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
시편 40편을 읽어보면, 1~10절의 분위기와 11절 이하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10절에는 믿음이 충만하고 뭔가 자신만만하지만 11절부터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한탄하며 읍소(泣訴)하는 애틋함과 겸손함이 나타납니다. 9~10절에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의 사역을 행하던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 낙심을 하기까지 합니다(12절). 성도들이 봉착하는 난처한 사례를 들면 욥처럼 심히 힘들고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하고 의롭게 살았던 성도가 불행해지고 시험에 드는 것인데요. 믿음으로 잘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악하게 살던 자가 고난을 받으면 시험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선하게 살던 자가 억울하게 받는 것이 시험입니다.
욥29:1.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중략) 11.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
묵상자가 보기에 성경은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 영화 같습니다. 각본가와 감독은 하나님이시고 성도와 악인은 배역을 맡은 자들입니다. 감독이신 하나님은 배역을 맡은 성도와 악인에게 앞날을 알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자는 성도이며 구원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독하는 자는 악인이며 심판을 받고 지옥에서 영벌(永罰)을 받을 것이라는 핵심 정보는 늘 공개하고 제공해 주십니다. 욥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살고 빈궁한 자를 돕던 성도가 왜 시험에 드는지? 그것은 어떠한 목사도 신학자도 심지어는 성령 충만한 자도 다 파악하여 속 시원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동일한 한 명인 믿음의 성도가 시40:1~10처럼 멋지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시40:11 이하처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해 보이는 성숙한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하심을 간구해야 하고 그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이 지상에서 어느 누구도 안심하고 자신(自信)하고 방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自身)을 믿고 자신(自信)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도조차도 자신(自信)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 거듭난 성도의 속에는 신앙 양심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위축되고 하나님을 마주할 신앙의 용기도 상실됩니다.
시40:12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my heart fails within me). |
재앙만 찾아왔더라면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죄악이 덮치니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도 없고 낙심할 뿐입니다. 시40:12의 낙심하다는 눈앞이 캄캄하고(공동번역) 희망을 잃으며(새번역) 기가 꺾이는(현대인의성경) 것입니다. 시40:1~10에서 신앙의 패기가 있던 성도가 12절처럼 믿음의 기가 꺾일 때에는 다른 것 다 필요 없습니다. 그때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낙심(落心, heart fails)하신 분이 있나요? 그렇다면 다른 불필요한 시도나 기도를 옆으로 치우시고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may your love and your truth always protect me).”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자(仁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신 결정적 증거는 성경에 많지만 아래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현대인의성경은 더 부드럽고 긍정적인 어투로 번역을 했습니다(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집중되고 한정됩니다.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예수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이러한 유일성은 곧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진리가 주는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오는) 길(道)인 것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성도들이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 주기도문을 보면 언제라도 어려울 때나 기도할 때에 큰 도움이 됩니다.
시40:14.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
성경을 보면, 신앙생활 잘 하는 성도에게 사탄(마귀)이 영적인 공격을 하지만, 현실에서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육체를 가진 사람(악인)이 성도에게 악을 행합니다. 악인(the wicked)은 사탄에게 사로잡혀 성도를 괴롭히는 하수인의 역할을 합니다. 제 아무리 성령충만한 성도일지라도 그런 악인으로 인해서 일이 꼬이고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욥기∙시편∙잠언 등 지혜문학을 중심으로 ‘악인’이 개역개정 기준 246회나 등장합니다. 악인에 반대되는 ‘성도’는 90여회 정도만 등장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악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신약교회 성도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13)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인 다윗을 보면 혈육 중에 악한 자가 있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악을 제거하실 것을 믿고 즐거워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함은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성도들을 사랑하고 관심 가지고 계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시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현대인의성경: 주께서 항상 나를 생각하시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my deliverer)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태이고, 처한 현실을 냉정히 파악한 성도의 객관적인 겸손입니다. 우리 모두 참되고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신속한 도움을 간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묵상 본문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한편,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기타 댓글과 주석을 올리오니 참고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시편 40:11-17) <-- 『매튜 헨리 주석』
시편기자는 지금까지 구속 사업에 대해 상고해 왔고 메시야라는 인물로 그것에 관한 언급을 해 왔지만 이제는 더 나아가 우리와 하나니 간에 그의 중재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께서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그의 사업을 완성 하셨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 전도의 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용기를 얻어 자비와 은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Ⅰ. 이것은 우리를 격려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며 우리 자신을 그 자비의 보호 하에 투신할 수 있도록 해 준다(11절).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를 잡아두시지도 않으셨나이다. 주의 긍휼을 그치지마소서. 당신은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 자비를 저축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당신이 아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주실 게 아닙니까?(롬 8:32)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가장 선한 성도들이라고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계속하여 보호 받지 않을 때에는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이 파멸당하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와 진리는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도록 보존되기 위하여 의존해야 하는 것들이다(시 61:7).
Ⅱ. 이것은 죄악에 관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얻도록 해 주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와 예물이 해 주지 못하는 일, 즉 죄인 비행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하여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그가 죄악에게서 보았던 소름끼치는 광경(12절). 그가 은총으로 인해 구속주를 발견하게 된 것을 감지덕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불의를 악으로 보았으며, 그것도 악한 것들 중에서 가장 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그 불의가 "자기를 둘러싸고"있음을 보았다. 자기 생애에 대한 모든 검토와 매 단계 단계에 대한 회고에서 그는 잘못된 점을 발견하였다. 자기 죄의 위협적인 결과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사면팔방 어느 쪽을 둘러 보아도 그에게는 여러 가지 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것이 자기 죄의 당연한 대가라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집달리가 가난한 채무자에게 하듯 그 재앙들이 자기를 붙잡으며 체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것들이
"그의 머릿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 확신을 얻는 양심과 깨우쳐진 양심은 약한 죄라도 무수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데 그런 죄는 비록 머리카락처럼 작게 보이기는 하나 수가 많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누가 자기 과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헤아릴 수 있으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셈할 수가 없다(마 10:30). 이와 같이 그는 우리 죄를 회계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회계하지 못한다. 죄의 모습은 그를 너무나 강박하여 그는 자기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나는 우러러볼 수도 없나이다." 그러하니 그의 마음을 쳐들어 유지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만약 구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에 본색을 드러낸 죄를 목도하게 되면 우리는 혼비백산하게 될 것이다.
2. 죄의식 하에서 그가 하나님께 품었던 신중한 의지심(13절). 자기 죄로 말미암아 멸망의 벼랑, 즉 영원한 파멸의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자신을 보게 된 그는 얼마나 거룩한 정열로 부르짖고 있는 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13절) 나를 장차 닥칠 진노하심에서 구하여 주시며
그 진노에 대한 우려 때문에 내가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공포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신속한 구원이 없다면 나는 파멸하고 죽게 됩니다. 나는 멸망하게 됩니다. 영원불사하는 영혼의 지복이 관계된 이런 성질의 문제에 있어서 지연이라는 것은 위태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Ⅲ. 이것은 우리를 격려하여 영적 원수들에게 대한 우리의 승리를 희망하게 해 준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멸하려고 찾아다니는 자들이며(14절), 삼킬 자를 찾아 끊임없이 돌아 다니는 우는 사자와 같은 자들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승리하셨다면 우리는 그를 통하여 정복자 이상으로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저들로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다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다(14절). "저들로 황폐케(놀라게)하소서"(15절). 죄인의 전향과 성도의 영화는 이 양자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권세와 간계로써 최선을 다하는 사탄에게는 코나 큰 실망이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아직 예수께서 자기가 택하신 모든 자들의 구원을 완수하시겠다고 단언하셨으므로 이 두 가지 길에서 저 큰 대적이 낭패케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14절). "저들로 황폐케(놀라게)하소서"(15절). 죄인의 전향과 성도의 영화는 이 양자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권세와 간계로써 최선을 다하는 사탄에게는 코나 큰 실망이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아직 예수께서 자기가 택하신 모든 자들의 구원을 완수하시겠다고 단언하셨으므로 이 두 가지 길에서 저 큰 대적이 낭패케 되도록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질 때 사탄은 자기의 노린 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하!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는 타다 남은 그을린 나무가 불에서 끄집어 내어지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격분할 것이며"그의 수치로 인하여 황폐케(놀라게)"될 것이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형제를 참소하는 자는 추방을 당하리라.'
Ⅳ. 이것은 하나님을 찾고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모든 자로 하여금 그를 기뻐하며 찬양하도록 격려한다(16절).
여기서 다음 사실을 눈여겨보라.
1. 선량한 사람들의 특성. 자연 종교의 법에 순종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은총을 갈망하여, 모든 위급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찾듯이 그들도 그에게 조력을 청한다.
또한 계시 종교의 법에 따라 그들은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선지자들이 묻고 열심히 찾았던 큰 구원이었다. 구속주께서 "보라! 내가 왔느니라"고 말하셨을 때 그는 이것을 성취를 하셨던 것이다. 구원받을 자는 모두 구원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구원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기도 하다.
2. 이 예언적인 기도로 인해 선량한 자들이 획득할 행복을 보라.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할 것"이며 또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질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며 저희에게 후한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며 "여호와는 광대하시다고 항상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땅 위에서 하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계속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는 복될 것이다.
Ⅴ. 이것은 고통과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에게서 스스로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17절). 다윗 자신도 이러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아마 임금이었고 보좌에 앉았었을 테지만 마음의 곤비 때문에
그는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자처하였고, 결핍과 고통 중에 있으며 구세주가 없는 길 잃은 자요, 파멸한 자로 여겼다) 주께서는 중보자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나를 생각하시며 우리는 열납되나이다." 인간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잊으며 별로 생각지 않으나,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들은(그는 5절에서도 언급하였다) 저들의 후원과 위로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저희 환난시의 도움이시오, 때가 되면 저희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오해 지체치 않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정해진 때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이 지체되더라도 기다릴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 것이다. 그것은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장코뱅 성경의 어느 곳이나 예수님께 대하여 쓴 내용인데, 역시 시편 40편도 그렇습니다.
탄식의 간구(시40:11-17) <-- 『호크마 주석』
27편에서와 같이 중간 부분에서 내용이 갑자기 일신(一新)되고 있다. 시인은 앞 부분(1-10절)에서 환난 중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음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탄식과 저주의 내용이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내용의 부자연스러운 연결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iggs). 그러나 시의 흐름이 그들이 우려하는 바와는 달리 매우 자연스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다고 해서 원수들로부터 완전히 놓임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직 건재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구원을 노래하고, 이어서 또 다른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를 하게 된다. 그의 기도는 죄로 말미암아 맞게 된 영적 침체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와(11-13절), 원수들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도(14-17절)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로서 그 구원의 은총이 계속 이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11-13절).왜냐하면 셀 수 없을 만큼의 재앙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하심과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여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시인은 죄로 인하여 위험과 곤경에 처해 있다. 그가 수많은 재앙에 쌓여 있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받아야 할 형벌 이상의 것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죄는 강하므로 사람의 힘으로 제어하기가 불가능 할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사람의 영혼을 내려앉게 만든다. 시인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13절).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듯이 그는 심각한 고통과 마음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간구는 더욱 간절할 수 있었고, 여러 고통 때문에 괴로우므로 조속한 구원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마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42:1)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애타게 소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죄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생은 만인의 죄값을 이미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고후 5:21;히4:15, 16;9:28;요일 1:9).
마지막 간구에서 시인은 두 종류의 '구하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14-17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들'(14절)과 '주를 구하는 자들'(16절)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로 구분되는 자들이다. 다윗은 이 불경건한 원수들이 자기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들은 다윗의 영혼, 즉 그의 생명을 죽이려고 찾아다닌다고 한다. 이것은 다윗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는지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원수들은 다윗을 단순히 왕위에서 쫓아내려는 것 뿐 아니라 죽이려고 찾아 나서고 있다. 일례로, 아히도벨이 일만 이천 명을 이끌고 다윗 왕을 죽이고 모든 백성을 압살롬에게 돌아오게 하겠다고 자신의 모략을 압살롬에게 보고한 것을 볼 때, 그들이 노린 것은 왕위뿐만 아니라 후한을 없애기 위해 다윗을 처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삼하17:1-3). 그리고 다윗은 자기가 육체적 질병과 위험 중에 처해 있을 때 원수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하'하면서 다윗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다윗의 아픔을 즐기고 있었다
이 구절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많은 조롱을 예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마 27:40-44). 시인은 이렇게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들을 도말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간구하고 있다(14, 15절).
하나님자의 백성을 모욕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악한 계획이나 음모는 반드시 실패로 끝난다(시 37:2;129:6;사 40:7). 그들은 모두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며 자신들이 당하는 수치로 인하여 스스로 놀라게 될 것이다(15절). 예수님을 향해 야유하고 조롱하던 입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물어지게 된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간구를 들으시고 원수를 쳐서 그들의 입을 닫게 하시며 성도에게 온전한 승리를 선사하실 것이다(롬 8:31, 37;고전15:55-57;요일 2:13).
반면에 시인은 '주를 찾는 자들;에 대하여는 원수들과 완연히 다른 결과에 이르게 해달라고 간구한다(16, 17절). 주를 찾는 자들이란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항상 바라는 자들이다. 다윗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기를 기원하고
그들의 입에서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게서 만나 주실 것이며(렘29:13;마 7:8),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여 입술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매일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바라야 한다. 성도는 주님께서 몸을 드려 피흘려 죽으심으로 베풀어주신 사죄의 은총을 늘 기억하는 동시에 그 은총의 복을 마음껏 누리는 자유자들이어야 한다(70:4;105:3; 눅 4:18;롬 8:2;고후 3:17).
이런 와중에서 시인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며 이 시를 끝맺고 있다(17절). 그는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이 한없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을 자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자기를 구원하시며 배려해 주실 것이라고 되새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임을 알고 있기에 장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 않고 더욱 절대적인 확신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도움이신 하나님께서 속히 자신을 구해 달라는 간구로 이 시를 마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을 확신하며 곧 회복될 것을 바라고 있는 기도라고 할 수있다.
그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 왔다. 비록 그가 심각한 위기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곧 구원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면서 장래에 대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시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와 지금 펼쳐지는 상왕에서와 장래에 있어지게 될 고통에서의 구원을 바라며 확신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신뢰하는 백성들에게 가장 큰 관심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성도는 구원이 요구되는 상황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때가 차면 반드시 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어 건져 주신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는 그 구원을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게 된다. 또한 성도들은 구원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하게 확신하게 된다. 지금까지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의 구체적 상황에서도 구원하실 것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은 그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복종뿐이다. 또한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이유를 찾게 되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장코뱅 늘 겸손한 마음으로 탄식의 간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성도가 하나님께 항상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과 진리라는 것을 배웁니다.
인생에서 재앙은 언제나 다가오며, 악한 자들, 원수들의 조롱과 훼방이 있으며, 거기에다 죄악으로 영혼이 짓눌리게 되기 때문에 긍휼과 인자로써 재앙과 불행,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구하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스스로가 상심하고 짓눌리며 낙심하게 되기 때문에 진리로써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윗과 같이 훌륭한 임금의 표상이고 은혜를 받은 자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사명을 수행했던 자도 진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널뛰기를 했던 인생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며 어떠한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따라서 주님 앞에서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절망하지도 말거니와 자고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분별과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