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과, 해방의 소식을 듣자 박헌영은 일행과 함께 곧바로 목탄차를 얻어타고 전주에 들려서 막 출감한 김삼룡을 태운뒤 함께 경성부에 도착했다. 광복 직후 그는 소감에서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라고 밝혔다. 8월 17일에 건준 전남지부의 트럭을 타고 상경했다는 설도 있다. 8월 17일 오전 11시 광주극장에서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건준 전남지부 사무실은 고광표(전남건준 재무부장)가 운영하던 광주 동구 대인동 창평상회였다. 이곳에서 모인 건준간부들은 임시 대표단을 구성, 신임장을 받기 위해 이날 밤 8시쯤 트럭을 타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 이 트럭이 서울로 갈 것이란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김성삼(본명 박헌영)이 찾아와 동승했다 한다. 박헌영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공산조직인 '경성콤그룹' 조직책의 도움으로 광주 백운동 벽돌공장에서 신분을 완전히 숨긴 채 3년 동안 은신해왔었다. 1945년 8월 15일 밤, 이승엽을 비롯한 서울의 명망있는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청년회관(YMCA) 왼편에 있는 장안빌딩에 모여들었다. 다음날 아침 장안빌딩 건물에 조선공산당 현판이 내걸렸다. 8월 18일에는 우미관에서 외곽조직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재건립하며 조직확대를 꾀했으나 박헌영 일파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창당을 선언하자 8월 24일 자진 해체한다.
8월 테제 발표 해방일보, 박헌영은 대표이자 필진으로 편집에 참여하였다. 8월 20일 저녁 박헌영은 경성부 종로구 명륜동에서 '8월 테제'를 발표했는데, 일단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수용, 유산계급과의 통일전선을 통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훈련함으로써 장차 사회주의혁명 내지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준비한다는 마르크스의 정통이론에 따른다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이어서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박헌영은 건준에 참여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소련이 진주할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건준은 사회주의 계열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건준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8월 16일 여운형 등이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자 그 역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건준의 간부직을 맡으라는 요청을 사양하고 평회원으로 있었다. 건준에는 여운형 계열 외에도 안재홍, 김준연 등이 있었는데 김준연은 뒤에 전향선언을 하고 한국민주당으로 건너갔고, 안재홍은 박헌영과 친박헌영 세력을 건준내에서 축출할 것을 수시로 여운형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건준 접수 기도와 실패 박헌영과 여운형은 해방 정국 좌파의 거두로 서로 협력과 경쟁의 애증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공산당을 이끈 박헌영은 중도 좌파의 지도자인 여운형을 발판으로 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그 전위세력이 공산당 내 소위 ‘재건파’였다. 그런데 재건파, 나아가 공산당이 해방 직후 국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자신의 세력으로 접수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재건파에 의해 철저하게 견제당했고 의문의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20일 전후하여 건준 조직에 들어오기 시작한 재건파는 건준을 자파 조직으로 접수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에 대한 1차 테러가 발생하는데 그 계기는 일제의 요구로 건준이 치안위원회의 명칭으로 변환된 것을 이유로 재건파가 노골적으로 여운형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면서부터다. 박헌영은 이들을 통해 건준의 접수를 계획했지만 안재홍 계열의 맹렬한 반발로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안재홍은 김병로, 이인, 송진우 계열을 일부 끌어들여 그를 견제하려 하였다.
9월 3일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만났는데 '건준의 간부들 속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경화할 위험이 있으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여운형은 '이 문제는 혼자 결심할 일이 못되니 토론해야 한다'고 대응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장악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사람을 들여보내 건준 조직의 장악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 세력의 건준 장악에 반발한 안재홍, 김병로 등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들은 박헌영 계열인거나 박헌영과 친분이 있는 건준 간부의 해임 또는 교체를 여운형에게 강하게 요구해왔고, 그들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하였다. 박헌영은 역으로 안재홍과 김병로가 자파들의 사람들을 건준에 심으려 한다고 항변하였다.
인공 내각 수립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조봉암을 배제하였는데, 이때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이론가였다가 전향한 고경흠도 함께 배제하였다. 고경흠은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여운형을 추종하였고, 여운형이 죽는 순간까지 그의 비서로 있었다. 또한 박헌영은 1932년 이전부터 조봉암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추측된다.[84] 이러한 일련의 갈등에 대해 조선공산당의 원로인 김철수는 박헌영이 개인적 추종자 중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김철수는 1932년 옥중의 그에게 전향이라도 해서 살아남으라고 권했다가 그에 의해 심한 비판과 미움을 받게 되었다. 1946년 5월,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5년 9월 6일 박헌영은 일부 인사들과 함께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 선언을 하고 내각명단을 기초했는데 초대 주석은 이승만을 지목했다. 이무렵 이때부터 박헌영은 여운형을 경시했는데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반목불화하게 된다. 1945년 9월 7일 여운형에게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났다. 여운형은 20여 일 간 치료를 받았으며 그가 정치활동에 나서지 못한 동안 인민공화국의 기반은 박헌영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여운형에게 여러 수차례의 테러가 있었는데, 극우단체 외에 여운형의 암살 배후로 박헌영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조선공산당 위원장 겸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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