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에게 작전을 설명하고 있는 故이수식 감독의 모습. (사진=포천시민축구단)
초등학교 감독이 된 무명의 축구선수
이수식 감독은 선수 시절 그리 촉망받는 유망주는 아니었다. U-17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됐고 1984년 안동대 재학 시절에는 잠실주경기장 준공기념 한일 대학축구 정기전 대표에 선발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하고 계약금 2천 3백만 원, 월봉 120만 원을 받으며 유공에 입단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입단 동기인 황보관만을 주목했다. 그는 프로 무대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한 채 결국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은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방황하던 그는 젊은 나이에 인천 석남서초등학교 감독이 됐다. 선수로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첫 감독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창단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했던 석남서초등학교는 이수식 감독 부임 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91년 인천시회장기쟁탈 초등 축구대회준우승을 시작으로 15년 동안 준우승 12회와 우승 15회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양상민(경찰청)과 방승환, 박용호(이상 부산) 등은 그때 이수식 감독이 길러낸 선수들이다. 이수식 감독은 “즐기면서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축구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15년 동안 석남서초등학교를 최강으로 이끈 이수식 감독은 이후 안산고등학교 코치와 세경대학교 감독 등을 역임했다. 비록 강한 팀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선수들에게 자신의 축구 철학을 확고히 심어줄 수 있었다. 공격 축구를 최우선으로 삼은 그는 이기고 있는 순간에도 더 공격적인 경기를 하다가 무너지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공격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비는 없다”고 역설했다. 파격적인 선수 기용도 이수식 감독의 특기였다. 경기가 시작된 지 10분밖에 안 된 시점에서도 전술 변화가 필요하다면 과감히 선수 교체를 단행했고 전반이 채 끝나기 전에 세 명을 모두 교체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늘 공격적인 축구를 위해 고민하는 감독이었다.
故이수식 감독은 좌절하고 있는 선수들을 이끌고 포천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 (사진=포천시민축구단)
“실패했을 뿐 패배한 것 아니다”
챌린저스리그 포천시민축구단에서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 해왔다. 전임 감독이 물러난 뒤 새로운 사령탑을 찾고 있던 포천은 이수식 감독의 공격적인 성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리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어요?” 제안을 들은 이수식 감독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껏 성인 무대에서 감독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수식 감독은 챌린저스리그에서 가장 선진적인 마인드와 목표를 갖춘 포천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이수식 감독은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를 하거나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며 축구를 하는 선수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2011년 11월 이수식 감독은 포천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하지만 포천에서 처음 선수들과 만난 이수식 감독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에게서 희망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군 생활을 대체하기 위해 이 팀에 입단한 것이라 시간이나 때우자는 식의 의미 없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명의 짧은 선수 생활을 접고 방황하다 다시 축구 지도자로 서게 된 그로서는 공감도 됐지만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선수들이 안타까웠다. 이수식 감독은 이때부터 선수들과 운동장에서 만나는 시간만큼 사석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일이 선수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희망을 심어줬다. 이수식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선수들은 다 축구를 하며 실패를 경험한 이들이다. 축구를 잘 하는 방법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다.”
부임 3개월이 지나자 선수들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훈련 수당이 1만 원뿐인 포천에서하루 하루 시간만 보내던 선수들이 스스로 몸 관리를 하기 시작했고 밤 늦게 개인 훈련에 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수식 감독이 선수들에게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거친 플레이를 하거나 불손한 행동을 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팀에서 퇴출시켰다. 꿈을 잃었던 선수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철저한 자기관리까지 신경을 써주자 포천은 놀라운 상승세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유소년 선수 육성 때부터 철학이었던 공격적인 축구에 대한 의지도 여전히 확고했다. 이수식 감독은 “젊은 나이에 포기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너희들은 한 번 실패를 했을 뿐 패배를 한 것은 아니다”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지난 2011년 FA컵 32강전 수원블루윙즈와의 경기가 끝난 뒤 악수를 나누는 포천 선수들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FA컵 32강, 포천의 ‘위대한 도전’
2011년 3월 FA컵 예선 1라운드에서 포천은 대학 최강이라 꼽히는 고려대를 만났다. 모두들 고려대의 손 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이수식 감독은 달랐다. 선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챌린저스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다. 우리가 좋은 모습을 보여야 사람들이 챌린저스리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사고 한 번 쳐보자.”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선수들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포천의 파이팅은 실력으로 나타났다. 올림픽과 청소년 대표 선수들이 즐비한 고려대를 상대로 융단폭격을 퍼부은 포천은 무려 네 골이나 넣으면서 4-1 완승을 거뒀다.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챌린저스리그 포천에 완패를 당한 고려대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려대는 90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2라운드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미 1년 전 FA컵에서 1-3으로 패했던 동국대가 바로 다음 상대였다. 2라운드 진출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성과였다. 모두가 포천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수식 감독은 달랐다. “오늘 이기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경기는 쉽지 않았다. 전반 12분 동국대에 선제골을 내주면서 끌려가기 시작했다. 지난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포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동점골을 뽑아내더니 후반 종료 직전 결승골과 쐐기골을 뽑아내며 3-1로 승리를 챙겼다. 1년 전 패배를 통쾌하게 설욕한 것이었다. 챌린저스리그 사상 최초로 FA컵 32강에 오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것도 이수식 감독 부임 5개월 만에 이룬 대단한 성과였다.
32강 상대는 K리그의 빅클럽 수원이었다. 주위에서는 “일단 잠그고 보자”고 했다. 승부차기까지 갈 생각으로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치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수식 감독은 챌린저스리그에서 주로 쓰던 전술을 그대로 들고 나왔다. 4-1-3-2 포메이션이었다. “절대 수비 위주의 경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는 어느 팀을 상대하건 우리의 방식대로 싸운다.” 실제로 경기가 펼쳐지자 수원은 챌린저스리그 팀의 공격적인 플레이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전반전을 0-0으로 마쳤다. 후반 들어 체력 저하로 결국 1-3 패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빅클럽 수원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골까지 성공시킨 포천의 도전 정신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새겨질 수 있었다. 포천은 실패를 겪고 좌절했던 원창승과 함석훈을 태국으로 진출시키는 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포천은 故이수식 감독과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축구를 했다. (사진=포천시민축구단)
‘닥공’ 포천, 챌린저스리그를 삼키다
2012년 시즌은 2011년보다 더 찬란한 한 해였다. 개막전부터 승리를 따낸 포천은 27라운드 동안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우승을 차지했다. 압도적인 경기력이었다. 27경기에서 101골을 넣어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고 최다승(20승)과 최소패(3패)도 포천의 몫이었다. 안방에서는 챔피언결정전을 포함한 15경기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서울 마르티스와의 경기에서는 무려 17-0이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10골을 넣은 서동현은 31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K리그에 ‘닥공’ 전북이 있다면 챌린저스리그에는 더한 ‘닥공’ 포천이 있었다. 포천은 챌린저스리그에서 개인상도 독식했다.
이수식 감독은 여러 구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내셔널리그 팀에서도 그의 영입을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나는 아직 성인 무대에서 경험이 부족한 감독이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다. 그리고 지금 함께 꿈꾸는 이 선수들과 작별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수식 감독은 향후 승강제에 대비해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하나 하나 미래를 위한 투자를 시작했고 챌린저스리그 사상 최초로 U-12 유소년 축구단도 창단했다. 이수식 감독은 매주 월요일이면 직접 훈련장에 가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며 포천의 미래를 그렸다. 챔피언결정전에는 무려 5천여 명의 관중이 몰려와 포천의 우승을 지켜봤다. 포천은 챌린저스리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팀이 됐다.
이수식 감독에게 지난 2012년은 최고의 한해였다. 시즌이 끝난 뒤 열린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최우수 지도자상까지 수상했다. 압도적인 성적으로 챌린저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수식 감독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여기저기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또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조성환이 싱가폴 1부리그에 진출하는 경사까지 이어졌다. 이수식 감독은 안주하지 않고 더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싸매던 심영성과 강준우(제주유나이티드), 안성남(광주FC), 이상돈(강원FC) 등이 이수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팀에 합류했다. 압도적인 경기력을 자랑하는 포천은 더 강해져 있었다. 이수식 감독은 “2013년 FA컵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며 포부를 내비쳤다. 점점 이 꿈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한 줌의 재가 돼 포천종합운동장에 돌아온 故이수식 감독. 선수들도 고인의 마지막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포천시민축구단)
그가 생전 전한 희망의 메시지
하지만 그는 결국 포천이 다시 FA컵을 밟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됐다. 지난달 31일 밤 집에서 샤워를 하던 이수식 감독은 갑자기 쓰러진 뒤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심근경색에 의한 혈관 파혈이 사인이었다. 평소 고혈압이 있던 이수식 감독은 그렇게 다가올 시즌을 위한 1차 전지훈련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3일장을 치른 뒤 지난 2일 한 줌의 재가 된 고인은 그토록 사랑하던 포천종합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영면에 들어갔다. 한 번 실패를 경험하고 방황하다 챌린저스리그에서 고인과 함께 또 다른 꿈을 꾸던 제자들이 마지막 고인이 가는 길을 지켰다. 선수들은 “모든 사람들이 실패를 경험한다. 지금 포기하기에 너희들은 너무 젊다”며 다독이던, ‘최강’ 수원과 맞붙을 때도 그렇게도 당당하던 고인을 생각하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고인은 그리 유명한 축구인은 아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도 아니고 빅클럽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한 번 좌절을 겪은 선수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고 막연할 것만 같았던 꿈을 현실로 이룬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는 지난 시즌 챌린저스리그 챔피언에 오른 뒤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포천을 1부리그 팀으로 올려 놓겠다. 이 선수들과 함께 이 세상에 즐거움과 감동이 있는 경기를 보여주고 싶다.” 비록 더는 그를 경기장에서 볼 순 없지만 지금껏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수식 감독의 축구는 충분한 즐거움과 감동이 있었다. 이제는 하늘에서 편히 쉬기를 바란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준 고인의 명복을 빈다.
footballavenue@nate.com
첫댓글 늘 웃음을 잃지않고 당당하던 감독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