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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요일날도 뵈니 반갑습니다.
오늘은 남성 교우들이 특별히 더 참여해 주셔서 더 빛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을 이렇게 아주 세밀하게 살펴보는 가운데 있는데요. 오늘은 권능을 바꾸라고 하는 그 부분에 집중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793년 인도 선교를 위해서 영국의 윌리언 캐리라고 하는 선교사가 인도에 첫 발을 내딛은 이것이 선교의 근대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영국이라는 나라가 선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초기지 역할 종주국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당시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해가 저물지 않는 나라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있었고 그 식민지를 이제 두고서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 선교의 가난한 이때에 이 영국이 가지고 있는 그때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경험과 자산 그것들은 아주 대단하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꽤 많이 흐른 근래 영국의 선교 단체들이 지난 2세기 동안 그들이 범한 잘못을 자성하는 그러한 내용의 글들을 만들고 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범한 큰 잘못은 무엇이냐면 바로 자격과 자질이 없는 선교사들을 너무 많이 파송했었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자성했습니다.
영국이 굉장히 번성한 나라가 되었지만 중간중간에 어려울 때가 있었거든요. 경제적으로 근데 그런 경제적인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각 선교 기관에는 지원자들이 막 넘쳐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만 하면 선교사로 파송이 받기만 되면 생활비도 받고 또 자녀 양육비도 받고 여러 가지 걱정할 것들이 없을 정도로 선교지에 가서 그 대부분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곳에 이 선교를 갔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도 영국식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배경들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큰 불편이 없이 선교를 갈 수 있는 그런 환경들이 조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배경 속에서 불경기가 되면 불황기 때마다 선교사가 지원하는 사람들이 막 급증하는 거예요. 그런 과정에서 그 당시에 영국의 이 기독교 단체들은 선교사들이 막 지원이 늘어나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여기고 그들을 조금의 교육을 한 다음에 바로 파송했습니다.
그때 선교사가 이게 진짜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사명을 가지고 가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옥석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 결과 이 영국인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은 많은 나라들, 제3세계에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역할을 역설적이게 누가 했다고요?
그 땅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 굉장히 솔직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그들의 자성의 목소리입니다.
근데 이게 과연 예전에 영국의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었을까 하는 이야기죠. 우리나라는 1985년 4월 5일 미국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이제 첫 발을 내딛은 그 뒤에 우리나라에 이제 성교의 물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암울하고 너무나도 정말 무너져 있었던 이 나라의 이 땅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들은 정말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땅에 발을 내디뎠던 선교사들이 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런 선교사님들처럼 자질이나 자격이 제대로 갖추어진 분들만 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작은 예를 보니까요. 자기 과수원에 과일을 몰래 훔쳐 먹은 소년을 잡아다가 버릇을 고쳐준다고 질산은으로 이 소년의 이 밤에 도적이라고 하는 글씨로 글씨를 새겼대요. 안에 옛날에 노예 상인들이 하던 행동들입니다. 이마에 등에 글씨를 새겼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버젓이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했었다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교인들의 어깨에 지운 가마를 타고 심방을 다녔던 선교사도 있습니다. 심방을 갈 때 성도들이 가마를 태워가지고 심방을 가는 거예요. 조선을 사랑하겠다고 온 선교사가 마치 조선 사람들을 종부리듯 그렇게 대우했던 그런 예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50년 전 부산의 대신동이라고 하는 곳은 주택지 중에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대요. 근데 부산시의 각급 기관장들이 공관이 거의 대부분 이 대신동이라고 하는 동네에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신동 안에서도 가장 고급 주택 단지의 큰 주택 단지는요. 공관들 공관장이나 갑부가 아니라 그곳에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한 예를 들어보니까 어린아이들이 그 당시에 가장 좋은 집에 한번 들어가보고 싶은 거죠.
근데 이제 선교사가 자리를 뜨고 자리가 비웠을 때 그 집을 관리하는 아이, 어린아이가 좀 친한 친구가 있는 친구가 있어서 그 집 안에 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구경을 하는데 너무 정원도 너무 크고 그리고 모든 것들이 막 집기류나 이런 것들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 당시에 수세식 화장실이 이미 만들어져 있고 막 근데 신기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방마다 1달러짜리 집회와 그 당시에 100칸짜리 동전이 구석구석이 흘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선교사는 돈이 얼마나 많길래 이렇게 구석구석에다 돈을 흘리면서 다닐 정도가 되는가라고 말을 했더니 그 집을 지키는 아이가 말합니다.
이 선교사 부부가 그 집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정직성을 실험하기 위해서 이건 뿌려놓으면 덫이니까 절대 손대지 마라.
여러분 지금 이 선교사의 집을 본 이 아이는 이 집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선교사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이거는 공관장보다 갑부들보다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선교사구나라고 여겨질지 모릅니다.
근데 왜 그때 선교사들이 그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들을 종부리이 부렸을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 지금 1885년 이래 우리나라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고 갔거든요. 근데 그 가운데는 정말 자기의 온몸을 바쳐서 내가 천 번 죽어도 나는 천 번 이 땅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던 그런 선교사도 있을 정도로 자기의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사람들도 있지만 또 그 과정 속에서는 자질과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선교 대국인 거 아시죠?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가 1980년대 이후에 우리나라도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를 받았던 우리나라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선교사들을 내보내는 일에 우리가 열심을 했는지 2010 2021년 12월 통계를 보니까 167개국에 2만2210명의 선교사를 지금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이후의 통계는 제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코로나 이후에 약간 이 선교하는 게 꺾였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긴 하지만 아무튼 어마어마한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근데 이렇게 외형적인 성장을 했는데 중요한 건 선교의 그런 여러 가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선교도요. 지금 우리나라의 한국 선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교단들이 여러 개다 보니까 막 그 나라에 들어가서 교단들이 경쟁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현지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오히려 사고를 쳐가지고 선교의 밑거름이 사라지게 만들기도 하고요. 선교사의 자질 문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보고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청소년이나 청년 연합집회 같은 데 아주 큰 규모 몇천 명 모이는 규모의 연합집회를 요즘에는 별로 갈 일이 없는데 예전에 제가 청소년들 사역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대형 집회에서 꼭 선교사들이나 아니면 그런 선교적인 마인드가 있는 분들이 실수하는 게 뭐냐면 마지막에 아이들한테 선교 나가는 걸 너무 강요해 마치 손을 들으라고 표현하는데 손을 안 들면 선교 나가겠습니다. 손 안 들면 왠지 죄 짓는 것처럼 막 분위기를 만들어가지고 애들이 막 그것 때문에 되게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손은 들었는데 나 선교사로 나갈 수 없는 환경인데 어떻게 하냐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이런 어떤 파악된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과정 속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해외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들 그들을 이렇게 4등분으로 분류를 할 수 있어요. 선교사님들도요. 다 똑같은 선교사님들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요. 파송이 된 지 수년이 지나도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고 또 그를 후원해 줄 사람도 없어서 그냥 그곳에서 삶을 살고만 있는 그런 선교사님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 두 번째 부류는 선교와는 무관하게 살면서 자기 홍보가 탁월한 분들이 계세요.
그래서 자기를 후원하게끔 하는 것들은 아주 탁월한데 선교적인 마인드는 별로 없어 세 번째 부류는 현지에서 아주 괄목할 만한 선교 사업을 추진하면서 또한 자기 홍보에 등에서 막강한 후원을 받고 있는 선교사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셋째 부류를 이상적인 선교사로 이게 주목을 하는데 이런 분들에게 부익부 빈익빈 선교사님들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어요. 지원을 많이 받는 선교사님들을 아주 그냥 막 이렇게 풍성하고 그렇지 못한 분들은 정말 열악하고 막 그렇단 말이에요. 근데 이런 분들 가운데 좀 더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어려움을 만드는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류는 선교지에서 정말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선교를 감당하는데 자기 홍보에 미흡한 까닭에 좀 어려움을 당하는 케이스의 선교사님들이 있어요. 어쩌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이 네 번째 부류의 선교사님들에게 좀 관심을 갖고 이런 사람들을 발굴해서 이런 사람들을 좀 지원해 주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올해 제가 대만 선교여행을 갔다 와서 그 선교사님이 약간 네 번째 부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처음에는 소통이 너무 안 돼가지고 내가 경험했던 선교사님들하고 너무 다르고 이분은 좀 뭔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막 이상한 거예요. 뭔가 소통도 안 되고 그리고 스케줄을 주라고 그랬더니 온갖 기도하는 거 목사님들도 거기 가서 좀 같이 이렇게 보기도 하고 좀 같이 뭔가 이렇게 교제하기도 하고 해야 되는데 온전히 그냥 자기 교회 성도들만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는데 막상 가서 교재를 하다 보니까 이분이 어떤 마음이었는지가 이해되니까 나중에는 우리가 막 더 해주고 싶고 막 뭔가 더 거기에서 우리가 힘이 되어주고 싶고 그 이후에도 더 기도해 줄 있고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더라고요.
근데 여러분 지금 정말 많은 선교사들이 나가 있는데요. 그런 선교사 중에 이 네 번째 부류의 선교사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우리가 발굴되는 대로 더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어요.
근데 여기서 이제 네 번째 부류 말고 1 2 3번의 부류는 그렇게 그 먼 타향까지 선교라고 하는 엄청난 비전을 가지고 나간 사람들이 왜 그곳에 가서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8절이 명확하게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지난주에 이 말씀을 다루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과 더불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라고 하는 명령이라고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라고 드렸죠.
그런데 여기서 대전제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근데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오직이라고 하는 말이 성령과 연결이 돼 있어요.
그런데 원어를 보면 오직이라는 말은요. 권능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어를 보면 오직 이 권능과 연결돼 있어요. 그러니까 오직 권능을 받음으로 너희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오직 권능을 받으므로 주님이 증인이 될 수 있다. 권능을 받지 않고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받을 권능이 무엇일까요?
이 권능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두나미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능력을 표현합니다. 보통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신 하나님께서 보이신 능력을 보통 표현하기도 하는 단어이긴 한데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 단어를 이렇게 착각해요.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병도 고치고 또 뭔가 방언을 행하고 예언도 하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어떤 능력을 행해야 증인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이단 사이비들이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그런 겁니다. 그런 외적으로 보이는 어떤 은사들을 가지고 막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그쪽으로 오게 하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 말한 권능은 좀 더 본질적인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이 능력의 참된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행하신 게 무엇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겁니다. 여러분 세례는요. 우리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그러한 하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인데 세례요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바로 이 모습은 인간에 대한 이 땅에 오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의 공포 행위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헌신인데,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 사랑과 헌신을 이 세례를 받는 과정을 통해서 또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셨다는 거예요.
그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기 위하여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는 섬기러 왔다. 헌신하러 왔다는 거예요. 세례를 받으신 이후에 하늘로부터 이게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하는 분명한 확증이 내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받는 권능이 눈으로 보이는 어떤 은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고 헌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왜 영국의 선교사들이 그리고 또 수많은 잘못하고 있는 그 선교사들이 그렇게 자질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서 그런 사역을 감당해서 오히려 선교의 문을 닫는 역할을 했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 헌신의 훈련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냥 외적 능력으로만 그거를 인정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자리에 들어가면 뭔가 사람들의 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들을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헌신하거나 자기들은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이런 부분에서 연약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의 말씀 속에서 이런 말씀이 있죠.
사람이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여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 사랑에 귀한 헌신이 없이는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외적인 능력이 드러나도 진정한 선교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2천년 전에 오순절 다락방에서 오신 예수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향하여 헌신하는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땅끝은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현장 가운데 내가 지금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곳이 바로 땅끝이고 또 선교지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가운데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품고 사랑해야 될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가 땅끝 내가 선교해야 할 대상자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든지 여러분들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을 통하여 선한 영향력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삶과 성교는 연결되어야 합니다.
120년 전 우리나라의 최초의 선교사가 온 이후에 100년이 되지 않아서 우리나라는 4분의 1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런 빵빠레를 울렸습니다. 2천년 교회 역사에서 우리나라같이 복음이 폭발적으로 부응한 적이 없습니다. 전무후무한 일이에요.
근데 여러분 어떻게 전 세계적으로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했을까요? 만일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나 태국으로 갔다면 그 땅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를 보면 120년 전 선교사들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의 성도들이 그 누구보다도 더 헌신적이고 더 사랑하고 더 삶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복음은 확장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외래 종교 믿는다고 서양 귀신을 믿는다고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예수님 믿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그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육체적으로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헌신했던 그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 가운데 온전한 부흥이 임한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원금 각처에서 우리 하늘의 소망 공동체를 불러서 모아주셨습니다. 작은 인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이곳에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여러분 우리에게 무언가 사명을 주기 위해 우리에게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길 원합니다.
또 하나의 교회 단지 하나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이곳에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그 배경에는 우리 앞에서 헌신하였고 사랑하였고 정말 그 권능으로 살아갔던 수많은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이 지난 7년 동안 흘렸던 땀방울, 눈물방울,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앞으로 우리 공동체 가운데 더욱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의 가정,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선교의 자리가 되셔서 더욱더 여러분들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헌신을 온전히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드러냄으로 여러분들이 바로 이 땅 가운데 파송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