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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시리아#엘리 코헨
전설의 이스라엘 스파이, 엘리 코헨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적 중 가장 난공불락의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시리아는 시리아 점령지 골란고원에서 아래 갈릴리 상류의 유대인 정착촌을 향해 박격포탄을 발사했습니다. 19년 동안 북쪽의 유대인 정착촌은 시리아군의 지속적인 총격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오늘날 골란고원에는 1967년의 시리아의 벙커와 1973년도 탱크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여 년 동안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간헐적인 영향을 제외하고는 골란고원의 북쪽 국경을 조용히 지켰습니다.
내전 이전에는 시리아군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을 이용해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1992년부터 골란고원은 평화 회담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골란고원은 자연적인 아름다움 외에도 역사적,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6일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67년 골란고원이 이스라엘에 점령되자, 북쪽의 정착민들은 마침내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골란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최고의 스파이였던 엘리 코헨의 공이 컸습니다.
골란은 군사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골란은 이스라엘 수자원의 30%를 공급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르단강 상류의 3대 지류인 단, 바니야스, 하츠바니는 모두 골란에서 발원합니다. 겨울철 눈이 녹으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내려 골란은 늦겨울과 봄에 아름다운 녹음이 우거진 지역이 되고, 그 아래 훌라 계곡과 요르단 계곡으로 흘러갑니다. 골란의 물은 갈릴리 바다(키네렛)로 흘러 들어가 남쪽의 사해로 흘러갑니다. 키네렛은 이스라엘에 필요한 물의 대부분을 공급합니다.
1960년대에 이스라엘은 키네렛의 물을 파이프라인으로 전환하여 이스라엘의 많은 지역, 특히 건조한 남부 지역을 관개하는 국가 수자원 운반선을 개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계획을 위해 아랍 이웃 국가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노력했고, 미국이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해 이 계획을 추진하려 해도 아랍 국가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랍인들은 오히려 "아랍이 점령한 영토에서 발원한 요르단강의 발원지를 우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랍은 이스라엘이 국가 성장에 필요한 물을 박탈하고자 했습니다. 시리아는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유압 엔지니어와 전환 장비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시리아 국경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침투조가 계속 유입되고 소련이 시리아에 기술 지원을 계속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방 계획가들은 물 전환 프로젝트의 범위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엔지니어링 계획, 도면, 지도 및 기타 데이터)와 시리아 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에 대한 최신 평가, 시리아 군의 현대화, 장비 및 재교육 계획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시급히 필요했습니다." 엘리 코헨은 그 일을 맡을 적임자였습니다.
엘리 코헨은 1924년 12월 26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번성했던 알레포의 시리아 유대인인 그의 부모는 교육열이 높은 아들에게 유대 민족의 전통, 시오니즘, 특히 시리아 유대인 커뮤니티의 문화를 항상 심어주었습니다."
1949년 그의 부모와 세 형제는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엘리는 이집트에 남아 시오니스트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당시에 “수잔나 작전”이라 불리는 이집트계 유대인 스파이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953년 이스라엘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일부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상당수는 14년 후인 1967년 전쟁이 끝난 후에야 풀려났습니다.
엘리는 수잔나 작전 스파이 활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친이스라엘 활동에 연루되어 이집트 정보국으로부터 잔인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작전 실패로 수잔나 스파이 작전이 무산된 후에도 엘리 코헨은 1955년 여름 이집트를 떠나 이스라엘로 가서 강도 높은 첩보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1953년 운명을 달리한 수잔나 동료들이 머물렀던 바로 그 시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1956년 이집트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의심받아 감시받게 되었습니다. 1956년 이스라엘이 시나이지역을 점령한 전쟁이 시작되자, 엘리 코헨은 이집트 당국에 구금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나머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과 함께 이집트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1957년 2월 8일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29세의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자원했지만 두 번이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정규군에 징집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 공군 예비군 부대에 병참 서기로 배치되었습니다.
정보기관은 코헨이 높은 IQ, 뛰어난 용맹성, 경이로운 기억력, 비밀 유지 능력이 있다고 결론지었지만, '겸손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과장된 자기 중요성'과 '내적 긴장감‘이 많고 '항상 위험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평가하였습니다.
1959년 8월 31일, 그는 이라크 출신 미모의 유대인 나디아 마잘드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회계사로 일했습니다. 고용이 항상 안정적이지는 않았고, 곧 자녀를 낳게 될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디아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 이스라엘 정보국은 엘리 코헨을 다시 살펴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는 아랍 국가에서 태어났고 동양적인 외모에 이타적이고 대의를 추구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시리아와의 국경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1960년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 정보부로부터 다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이스라엘 정보국에서 연락이 왔을 때 그는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훈련은 광범위하고 철저했습니다. 고속 회피 운전 기술, 무기 숙련도(특히 다양한 소형 무기), 지형과 지도 읽기, 사보타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무선 전송 및 암호화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그의 위장 인물인 카말 아민 타벳(Kamal Amin Ta'abet)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엘리 코헨에게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시리아 아랍어의 복잡하고 틀림없는 발음을 익히는 것이었는데, 정보 훈련을 받기 전에는 이집트 억양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트레이너는 이라크 태생의 유대인으로 아랍어와 무슬림의 전통과 관습에 대해 요원들을 교육한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정보기관은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엘리 코헨은 카말 아민 타벳(일부 자료에서는 타바스라고도 불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시리아 무슬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이름은 아민 타벳, 어머니의 이름은 사디아 이브라힘이었습니다. 그의 가상 전기에 따르면, 1948년 "가족은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성공적인 섬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카말 아민 타벳(엘리 코헨)의 시리아 귀환은 표면적으로는 평생의 애국적 꿈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1961년 초, 군사 정보국장이자 훗날 이스라엘 대통령이 된 하임 헤르조그는 코헨을 스파이로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코헨은 공항으로 차를 몰고 갔고, 아내 나디아가 그를 배웅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그가 국방부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에서 어떤 직책으로 일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안전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1965년 체포될 때까지 그렇게 믿었습니다.
엘리 코헨은 시리아 이민자로 위장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처음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곧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리아계 커뮤니티에 자리 잡았고, 관대하고 팁을 잘 주며 밤 문화를 즐기는 부유한 사업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곧 인정과 호감, 존경을 받으며 시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정치인, 외교관, 군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세속 좌파 바트당의 지지자인 아민 알 하파즈 대령이었습니다.
호화로운 디너 파티, 사교 모임, 고위층과의 친분을 통해 쌓은 코헨의 인맥은 다마스쿠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사업체를 설립하라는 초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았고, 그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막대한 현금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 '기름'을 공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도덕한 사람들과 시리아 국가에 외국 자본이 유입되기를 희망하는 애국적인 시리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1961년 말, 시리아는 불과 3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이집트와의 수교를 정리했습니다. 당시 바트당이 집권하고 있었고 엘리 코헨은 바트당이 정권을 잡을 때 그곳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군사 무관인 아민 알 하파즈 장군을 비롯한 바트당 지도부와 조심스럽게 인맥을 쌓았습니다. 그는 카페에서 정치 가십을 들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교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또한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었는데, 이 파티는 시리아의 고위직 장관, 군 관계자, 사업가 등을 위한 난교 파티로 바뀌었고, 이들은 항공사 스튜어디스, 시리아 가수 등 다양한 여성들과 함께 엘리의 아파트를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파티에서 고위급 관리들은 "자신의 업무와 군사 계획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한 엘리는 항상 모든 내용을 주의 깊게 경청했습니다. 그는 정부 관리들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열렬한 호스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제공하는 술에 취한 정부 관리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남자 사냥꾼'들은 아몬드 눈, 비잔틴 외모, 올리브색 피부와 부와 권력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잘생긴 타벳에게 몰려들었고, 그는 시리아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성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는 명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는 열일곱 명의 연인이 있었는데, 모두 눈부신 미인이었고 상당한 가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는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마찬가지로 이 여성들이 "위기 상황에서 탈출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최고 권력층의 신뢰를 더욱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보부 고위직인 조지 사이프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1963년 바트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엘리는 시리아 상류사회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며칠에 한 번씩 방에 숨겨둔 무선 송신기를 통해 이스라엘 담당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송했습니다. 또한 엘리는 주기적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이스라엘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모두 세 차례 이스라엘로 돌아갔습니다.
요르단강 상류의 물을 이스라엘에서 멀리 돌리는 시리아 프로젝트에 관하여, 엘리는 육군 고위 장교인 하툼 대령과 달리 대령의 친구였는데, 그들을 통하여 이 계획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1964년 초, 엘리는 요르단의 주요 수원중 하나인 바니야스 강을 우회하여 요르단 영토로 유입하기 위해 시리아 고원 전체를 따라 수로를 파고 있다는 사실을 텔아비브에 무전으로 알릴 수 있었습니다. 엘리는 프로젝트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신중하게 설명하여 이스라엘 정보부에 전달했습니다. 이 정보 덕분에 이스라엘 공군은 1964년 초에 이 계획에 사용된 불도저와 기타 장비를 포격하고 폭격하여 시리아의 우회 계획을 무력화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의 인맥 덕분에 그는 1948년부터 67년까지 시리아의 주요 전략 자산이었던 골란고원으로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리아군은 1948년부터 67년까지 이스라엘의 북부 정착촌을 지속적으로 괴롭혔습니다. 골란고원 방어는 일급 기밀이었으며 군 고위층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말 아민 타벳(엘리 코헨)은 모든 지점을 방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위 참모 장교들이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엘리 코헨은 기념비적인 규모의 심층 정보 브리핑을 제공받았습니다.
그의 첩보 활동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골란고원으로 떠났던 여행이었습니다. 시리아군 장교가 엘리에게 시리아군이 구축한 요새를 설명할 때, 엘리는 시리아군이 그곳에 나무를 심어 이스라엘군을 속이고 그곳에 주둔하는 군인들에게 그늘과 아름다움을 제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시리아 장교는 흔쾌히 동의했고 엘리는 즉시 이 정보를 이스라엘에 전달했습니다. 유칼립투스 나무를 통해 이스라엘은 시리아 요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민 알 하페즈>
엘리와 아민 알 하페즈의 우정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하페즈가 시리아의 총리가 된 후 엘리는 시리아 국방부 차관으로 지명될 가능성까지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에서 엘리를 놀라게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리아 정보국 사령관 아메드 수에다니 대령은 아무도 믿지 않았고 엘리를 싫어했습니다.
엘리는 1964년 11월 이스라엘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시리아에서의 임무를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보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시리아로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수년간 제공한 정보는 포기하기에는 너무 좋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시리아로 돌아갔지만, 그의 행동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두 번씩, 그리고 거의 항상 같은 시간에 이스라엘로 전화하였고, 훨씬 덜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전송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964년 11월에 그가 표현했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권력의 최고위층과의 인맥과 여유로움으로 인해 자만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부주의함을 거의 자살에 가까운 행동이라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너무 오랫동안 비밀리에 활동을 해왔고, 본인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당시 그는 모든 위장 생활에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시리아인들과 그들의 러시아 군사고문들은 시리아에서 유출되는 정보에 경악했습니다. 이에 매우 민감한 기술 정보 수집 장비를 갖춘 러시아 보안 전문가들이 시리아 수도에서 정보전송의 출처를 찾아냈고, 그곳은 바로 엘리의 집이었습니다.
1965년 1월 24일, 시리아 정보기관은 송신 도중 그의 집에 침입했습니다. 침입을 주도한 인물은 시리아 정보부 수장인 아메드 수에다니 대령으로, 엘리의 숙적이었습니다. 엘리는 범행 중에 붙잡혔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문당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의 심문자들은 끔찍한 심문 방식을 겪어 낸, 그의 높은 인내와 용기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후 그는 12년 전 이집트에서 수잔나 작전 스파이들이 받았던 것처럼 형식적인 가짜 재판을 받았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판결은 미리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러 국가의 지도자들, 부유층, 이스라엘 정부, 교황 등이 모두 그를 구하기 위해 개입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1965년 5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후 발판 위에 올라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 섰습니다. 처형 장면은 시리아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처형 후 그의 몸에는 반 시오니스트 글귀가 적힌 하얀 양피지가 씌워졌고, 그는 6시간 동안 교수형에 처해진 채로 방치되었습니다.
엘리 코헨은 3년 동안 이스라엘 군에 엄청난 양의 정보 데이터를 제공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틀 만에 골란고원을 정복할 수 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가 제공한 정보 덕분이었습니다. 메이르 아밋 정보국장이 말했듯이, 엘리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엘리 코헨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시리아 최고 지도자들로부터 진정으로 호감을 받고 심지어 존경까지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시리아 국방에 관여하고 영향을 미쳤으며, 거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리아 수도에서의 생활에 진정으로 적응했고, 거의 마지막까지 스파이로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엘리 코헨은 이스라엘 최고의 스파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8년 7월 5일 이스라엘 총리실은 정보기관 모사드가 53년 전 시리아에서 처형된 이스라엘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1924~1965)의 손목시계를 '적의 손'에서 되찾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스라엘 언론은 "모사드가 코헨의 무덤 위치를 백방으로 찾고 있으며 이 손목시계는 이러한 유해 수습 작전의 일부"라고 보도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모사드는 그간 엘리 코헨의 체포부터 재판, 처형에 관여했던 시리아인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코헨이 찼던 오메가 시계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후 18개월 동안, 이 시계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모사드는 스위스에서 코헨의 시계 구입 기록을 확인한 후 그가 생전에 이 시계를 차고 찍은 사진과 확보한 시계에 대한 정밀 감식 등을 통해 이 시계가 코헨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모사드는 “코헨의 무덤도 찾고 있지만, 시리아 정부가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엘리 코헨의 유해를 찾으러 침투해 올까, 봐 여러 차례 시신을 옮겼기 때문에 정보당국조차 그 소재를 알지 못한다”라고 전했습니다.
2019년 넷플릭스는 샤샤 바론 코헨 주연의 드라마 “스파이 시리즈”를 제작하여 그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엘리 코헨의 이야기는 그의 전설적인 스파이 활동과 국가에 대한 헌신 못지않게, 50여 년이 지나도록 그의 유품과 유해를 추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들에 대한 예우와 보답으로, 우리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전해집니다.
출처: The Pedagogic Center, The Department for Jewish Zionist Education,
The Jewish Agency for Israel, (c) 1992-2007.
Fiyaz Mughal, “Eli Cohen’s body must be returned to Israel,” The JC, (Undated).
Daniel Sonnenfeld, “55 years after execution in Syria, Israeli spy Eli Cohen makes headlines,” Jerusalem Post, February 27, 2021.
The Jewish Virtual Library.
글: <월간샤밧> 편집장
※ 참고
골란고원(Golan Heights, רמת הגולן)
동쪽으로는 시리아,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해발 약 1,000m, 면적 약 1,800㎢의 고원지대입니다.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다윗왕 시절의 요새 흔적이 발견되는 등 인류 역사의 오랜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골란고원은 성경에 따르면 원래 유대민족이 통치하던 땅이었는데, 기원전 8세기 이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를 거쳐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에 점령되었고, 다시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아랍제국, 몽골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거쳐, 1920년대 프랑스 위임령이 되었고. 1944년 프랑스 위임 통치가 끝나면서 신생 독립국 시리아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948년 1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두고 네 차례 전쟁을 벌였고,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1,070㎢의 골란고원을 점령하였습니다. 1974년 양국은 휴전협정을 통해 접경지역에 비무장지대를 지정하고 UN군 주둔에 합의했습니다. 1981년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법”을 통과하여 이곳을 자국 영토로 합병시켰습니다.
2019년 3월 25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연방정부를 대표하여 이스라엘 국가의 골란고원 영유권을 인정한 미국-이스라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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