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들의 상소와 고종의 수상한 반응
우리 한국인들은 “을사조약”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을사오적’을 생각하며 ‘그 놈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 욕하며 부르르 떤다. 나 또한 그렇게 알고 분개하며 그들을 욕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고종과 왕가의 사람들이 작위를 받았으며 그들이 일본의 지원으로 왕족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비롯한 여러 의문들을 가지고 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나의 생각을 수정하여 을사조약을 맺은 주범을 고종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9일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송하여 ‘한일협약안’이라고 부르는 을사조약을 강행하였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기고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늑탈한 것이다.
거의 모든 역사가들의 서술에 의하면 고종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였는데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공상대신 권중현이 조약 체결에 찬성하여서 조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과연 역사가의 서술대로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들이 왕의 뜻을 무시하고 을사조약을 강제로 밀어붙였는가?
박종인의 ⌜광화문 괴담⌟은 강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래 글들은 ⌜광화문 괴담⌟, 309,310,311,312 쪽에서 발췌하였다.
을사조약은 부당하며 따라서 조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수많은 상소에 고종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고 모두를 물리쳤다.
그리고 한 달 위 바로 그 을사오적들이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게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지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개가 따라 짖듯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시만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로 ‘을사오적’이라는 말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억울한 이유를 조목조목 상소문에 적어 넣었다.
신(농상공대신) 권중현이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이 없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 조약 내용에 여기에 대해 한 구절도 언급한 부분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여 보태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별도의 한 조목으로 만들어야 합니다”하니 성상께서 “과연 그렇다. 농상공부 대신 말이 참으로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신들8인은 일제히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 일본 대사를 만나서는 의당 ‘불가(不可)라는 두 글자로 물리칠 것입니다”하고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성상께서 이렇게 하교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방금 전에 이미 짐의 듯을 말하였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
대한제국의 8대신들이 함께 고종에게 ‘절대 조약 체결은 안 된다(不可)고 하겠다고 결의했다고 보고하자 고종이 ’짐의 뜻에 맞게 모양 좋게 조처하라‘고 아리송한 말로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대신들이 협상장에 다시 입장하여 협상이 난항을 겪자 일본측 대표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의 알현을 청하였다. 고종과 담판을 짓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한 상소문이 이어진다.
일본 공사가 대사를 만나 전후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 대사가 궁내부 대신 이재극에게 폐하께 알현을 청해달라고 수차에 걸쳐 요청했습니다. 이재극이 회답하여 폐하의 뜻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짐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인후통을 앓고 있어서 접견할 수가 없다. 모름지기 모양 좋게 협상하기를 바란다.”
대한제국의 일인자가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협상을 대신들에게 맡기고 인후통을 핑계대고
숨어 있는 꼴이라니! 비겁하고 누추하기 그지없는 망국(亡國)의 황제다운 모양새다.
혹시 <고종실록>에 나와 있는 5적들의 상소문이 위조되었거나 <고종실록> 자체가 위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와 함께 실려 있는 현장 르포 기사를 일부 적는다.
이토 대사가 이 궁내대신을 초청하여 폐하 알현을 청하는데. 마침 그때 폐하께서 인후(목구멍)가 아파 고통스러워하시므로 알현을 거절하시니, 이토 대사가 폐하에 근접해 알현을 청했으나 폐하께서 거절하시니 왈, “알혀낳 필요가 없으니 돌아가서 정부 대신과 협의하라”고 하유하시더라.
황성신문은 상소문보다 더 자세하게 이토 히로부미가 궁내대신을 통하여 알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가까이 가서 고종에게 알현을 청했더니 고종이 인후통을 핑계로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황성신문은 고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고종이 조약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들에게 떠넘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오적들의 상소문은 이렇게 끝난다.
‘신들이 벼슬을 지내며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 본분에 비추어볼 때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다 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터이니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
도대체 고종이 말하는 ‘대신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되는 일’이 무엇일까?
그 일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한 정부의 개혁정치인가?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인가?
아니면 5적 뿐 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지탄받게 될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고종만의 특유의 회화법인가?
5적들의 진술은 분명한데 고종의 진술은 자기 처세를 위한 ‘우문현답’의 모양새이다. 고종의 어법은 불분명하며 두루뭉술한 말로 자신의 복심을 감추고 있다. 그는 을사조약 명목으로 이미 많은 뇌물을 받은 추하고 비열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일국의 지도자가 생명을 걸고 자기 나라 주권과 백성의 안전을 지킬 의지가 없는데, 얼마나 좋은 먹이 인가?
그 아래서 대신으로 재직하고 있는 대신들도 불쌍하고 백성으로 사는 백성들도 참으로 가련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는 여전히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적들이 왕을 밀어붙여서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고 가르친다.
아! 잘못 알려진 역사를 누가 바로 잡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잘못 알려진 역사를 적극적으로 바로 잡으려하지 않는가?
2023.2.3.금 새벽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