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1-15 하나님 없는 열정의 결과는 항상 실패다
모세는 바로의 딸, 공주의 양아들[왕자]로서 손색이 없이 장성했다. ‘장성하다’의 히브리어는 “가달”인데, “위대해지다”, “높게 평가되다”라는 뜻이다. 그는 왕자로서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행 7:22). 문법, 법률, 역사, 과학, 수학, 의학, 기하학, 건축학, 천문학 등. 박학다식한 모세는 말과 하는 일이 능하여(행 7:22) 애굽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백성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정상에 오른 모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동족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다(7:23). 모세는 애굽 왕실 소속이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언젠간 도울 것인데 지금이 그때임을 확신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 현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포들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동 현장은 생각 이상으로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현장을 관찰하던 중 어떤 애굽 사람이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혈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모세는 신중한 사람이라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를 살폈다. 다행히도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 모세는 왕자의 힘[권력]으로 동족을 대신하여 애굽 사람을 쳐 죽여[응징하여] 모래 속에 그 시체를 묻어 버렸다.
여러분은 모세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족의 영웅? 민족을 위해 싸우는 투사? 모세 자신은 힘없는 동족을 대신하여 압제하는 원수를 대신 갚아 죽였으니 뿌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행동은 동족을 향한 사랑이었고, 의로운 행동이었다[의협심]. 독립투사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애굽인을 죽임으로써 ‘나는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들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동족의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형제들을 보호하고 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계기로 모세는 본격적으로 민족을 위해 쓰임 받는 지도자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다음 날에도 동족들의 노동 현장으로 나갔다. 사명감에 불탔을 것 같다. ‘오늘은 어떻게 동족을 도울까? 만약 나의 동족을 치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어제와 같이 죽일 거야!’라는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이번엔 이스라엘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있었다(13). 모세는 잘못한 사람에게 책망했다.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13) 그때 모세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애굽의 왕자라는 권위 앞에서 잘못을 시인할 줄 알았다. 모세를 지도자로 여기고 모세의 판단에 감명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책망을 받는 자는 오히려 대항[배척]했다.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중재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14) 나의 말이 통할 줄 알았는데, 통하지 않고 거절당하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당혹스럽다.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왜 안 통하지?’ 그런데 이스라엘 동족은 어제 일을 들춰냈다.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14) 그때 모세는 당황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살인을 그 누구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는 자가 있었다는 것에 바로 두려움을 느꼈다. 모세의 살인은 삽시간에 퍼져 정치적 라이벌인 바로의 귀까지 들어갔다. 정적(政敵)인 바로는 이때를 틈타 모세를 제거하기 위해 수배령을 내렸다. 순간 겁을 먹은 모세는 애굽을 부랴부랴 탈출해야 했다.
모세는 동족을 돌보겠다고 나간 지 이틀 만에 동족을 돌보기는커녕 살인자로 찍혀 하루아침에 애굽을 떠나야 했다. 애굽의 왕자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유명한 자가 갑자기 무능한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왜 그의 오랜 계획은 이틀 만에 실패하여 도망가야만 했을까? 모세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족을 지켜주고 싶고, 대신 응징해 주고 싶어서 원수를 갚아 준 것뿐인데, 동족을 화합시키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신세가 되어야 하는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살인은 예나 지금이나 중죄이지만, 이 당시 왕자의 살인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도망갈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살인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어 모세의 생명을 위협했고, 정적 바로는 이를 빌미로 손쉽게 모세를 변방으로 밀어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동족이 무지하여 모세를 구원자로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행 7:25) 왜 하나님은 모세의 편에 서서 모세를 변호해주지 않으셨을까? 왜 모세는 졸지에 도망자, 실패자, 나그네가 되고 말았을까?
모세가 행한 행동들은 동족을 향한 사랑이 맞다. 민족적 투사였고, 민족의 화해자였다. 참으로 훌륭하다. 그런데 문제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좌우를 살피는 신중함은 있었으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경외감은 없었다. 애굽인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다. 민족의 지도자로 하나님은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 왔던 바를 이제 왕자로서 입지가 굳건해지니까 지도자로 자청한 것뿐이다. 말과 일에 능한 모세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했다. 왕자의 권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의협심과 교만과 혈기만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오랜 세월의 꿈을 단 2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셨다. 그리고 변방으로 내몰려 처량한 도망자 신세가 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이 실패를 통해 모세를 다듬기 시작하셨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려면 인간적인 방법과 의협심과 혈기, 교만을 철저히 제거해야만 했는데, 하늘같이 높아진 모세를 깨는 덴 실패만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려한 모세의 데뷔 무대를 실패로 끝내게 하셨고, 무능한 무명의 삶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없는 열정의 결과는 항상 실패이다. 야곱이 장자권을 획득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장자권은 원래 장남 에서에게 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하나님은 차남 야곱에게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은 예언된 말씀대로 장자권을 획득한다. 그러면 장자의 축복권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장자권을 획득하자마자 형 에서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죽고 싶지 않아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안정을 취해야 할 삼촌 집에서 20년간 삼촌에게 속고 사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인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거짓말]으로 약속된 장자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롬 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모세도 야곱도 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따른 것이다. 그 둘은 영의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을 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육신의 생각으로 풀었다. 야곱이 장자권을 회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야곱도 모세와 동일한 방식으로 육신의 생각으로 획득했다. 그 결과가 둘 다 도망을 가야만 했다. 도망간 그 곳에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우리도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법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다가 오히려 관계가 꼬이고, 원수 관계로 발전할 때가 있다. 잘 풀어보려고 했는데 더 꼬일 때가 있다. 왜 그럴까? 모세와 야곱이 선택한 것을 여러분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영]을 따르거나, 하나님[영]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경험으로 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늘 의협심, 혈기, 분노가 숨어 있다. 여러분이 계획한[상상한] 사랑과 판단[정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서 정죄하고 단죄하고 비난 비판하고 있는가?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다. 나와 우리가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아파한다고 하여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을까? 공유하는 것이 말씀과 맞다면 하나님의 뜻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나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불평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있는가? 이 또한 육신을 따른 것이고, 육신의 생각이다. 이 모든 결과는 항상 사망, 실패다. 생명과 평안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는다. 교만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서 섬기고 있는가? 그 모든 섬김이 말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감정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인지 기도해 보라.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육신을 따르는 육의 생각이다. 사망으로 이끄는 것이니 속히 회개하며 수정하길 바란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서 일하려고 하면 교만이다. 나를 과시하고 내 이름을 내려고 하면 교만이다. 여러운 일이 계속 생기는 징계를 받고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교만이다.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랑하면 교만이다. 배우기 싫어서 훈계를 외면하는 것도 교만이다. 협력하지 않고, 매사에 나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이다. 설교 평가하고, 남 판단하고, 나는 문제가 없고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도 교만이다. 이 모든 것을 회개하자.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분노함을 회개하자. 불평, 원망, 거역도 분노다. 신경질, 증오, 원한, 억울, 서운, 씩씩거림 등이 분노이다. 캐고 따지고 늘어지고 시비 거는 것도 분노다. 인상 쓰고, 짜증내고, 욕하고 저주하는 것도 분노다. 분노는 부젼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충격과 공포를 준다. 자신을 멸시하는 자기학대도 분노이다. 이 모든 것을 회개하자.
하나님이 없는 열심,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정당성은 모세가 행한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혈기, 교만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더욱더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원수가 된다
결론 - 하나님 없는 열정의 결과는 항상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