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10분, 맑은 제주 공기를 마시려 바깥으로 나선 길에 잔디밭에서 부지런히 잡초를 뽑고 계시던 숙소 주인 할머니를 만났다. 건너편에 듬직하게 서 있는 산의 이름을 여쭈니 "한라산"이라는 답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면 근사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솔깃한 말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한라산이 이렇게나 가까이 손에 잡힐 듯 보일 줄이야. 새벽 5시 30분경 한라산 맨 우측 능선너머로 붉은 태양이 장엄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눈이 부셔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장관. 재빨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 그 감동을 담아냈다.
다른 동문들은 보지 못한, 오직 새벽을 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선물에 아침부터 마음이 벅차올랐다. 기분 좋은 상쾌함을 안고 논짓물 해안가로 발길을 옮겼다. '바다로 바로 흘러가 버려 쓸데없는 물'이라는 재미난 뜻을 지닌 논짓물은 올레길 8코스가 스쳐 지나는 정겨운 곳이다.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용천수는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주민들의 목을 축이고 삶을 이어주던 고마운 젖줄이었다. 흐르는 물소리에 옛사람들의 숨결이 겹쳐 들리는 듯했다. 아침 8시가 넘어서자 토닥토닥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체로 노란 비닐우의를 챙겨 입고 중문정으로 향했다. 따끈한 고등어구이 돌솥밥으로 든든하게 아침을 채운 뒤, 오전 10시경 사려니 숲길에 들어섰다. 빗방울을 머금은 노란 우의 차림으로 들어선 사려니 숲은 그야말로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하늘 높이 미끈하게 치솟은 삼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서니 내 존재가 한없이 작고 겸손해졌다. '신성한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장애 데크길을 지나 붉은 흙길로 들어서자 졸참나무, 서어나무, 편백나무가 내뿜는 푸르고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촉촉한 빗소리를 들으며 숲을 걷는 낭만은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다. 오가네 설렁탕에서 따뜻한 돌솥설렁탕과 만두로 허기를 달랜 후 서귀포항으로 이동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내림을 멈췄다. 항구 맞은편, 초가지붕을 덮던 억새가 많이 자랐다 하여 이름 붙은 '새섬'으로 향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준다는 '새연교'를 건너 1,2km의 둘레길을 걸었다. 한 폭의 그림같은 서귀포항의 풍경과 더불어 문섬과 밤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경이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이어 방문한 곳은 높이 20m의 기암괴석, '외돌개'였다.
12만 년 전 화산폭발로 형성된 조면안산암이 세월과 파도에 깎여 외롭게 서있는 돌기둥.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범섬으로 달아난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장군의 모습으로 위장시켰다 하여 '장군바위'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절벽과 동굴이 어우러진 올레길 7코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걷다 보니, 제주의 자연과 역사는 아느 만큼 더 깊이 와닿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약 40분간의 외돌개 트레킹을 마치고, 저녁으로는 제주에 오면 빠뜨릴 수 없는 흑돼지 숯불구이를 즐기려 갔다. 특히 이날은 류제형 동문 부인의 생일이라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 깜짝 축하를 건넸다.
감동에 복받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연회석 전체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다. 부드럽고 풍미 가득한 흑돼지 구이에 정겨운 담소가 더해지니 이보다 더 완벽한 마무리가 없었다. 제주의 푸른 자연과 깊은 역사, 그리고 정겨운 동문들의 웃음소리가 빗물처럼 촉촉하게 가슴에 번져가는 제주에서의 둘째 날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