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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의 해석학 강의록
왜 해석학이 중요한가?
1.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종교, 문학, 역사 등 거의 모든 인문학 영역에서 ‘해석’(interpretation)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관점, 전제, 이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진리’가 바뀐다. 해석은 예술 작품, 역사기록, 성경 텍스트(text) 등과 그것을 읽거나 이해하는 사람을 연결시키는 교량(bridge)이다.
진리는 단순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중간매개 역할을 하는 해석 과정을 거쳐 드러난다. 진리, 사실, 옳음과 거짓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교량 역할을 하는 해석자가 기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 인문학은 모조리 ‘해석학’(hermeneutics)이란 관문을 거친다. 해석학은 ‘해석이론’을 의미한다. 영어 ‘해석학’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헤르메스(Hermes)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신과 인간 중간에 역할을 하는 신들의 사신(使臣)이다. 신들의 계획과 결정을 인간에게 설명해 주는 사명을 수행한다. 인간의 영역과 신들의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다.
우리는 같은 책을 재차, 삼차 읽을 때 색다른 경험을 한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한다. 텍스트는 바뀌지 않았는데, 처음 읽을 때와 달리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전혀 다른 눈으로 그 책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같은 책이고, 보는 눈도 같고, 이해하는 두뇌도 같은 데 새롭게 느껴진다. 달라진 것이 있다. 재차, 삼차 읽는 과정에서 우리의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텍스트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느끼는 새로운 경험은 우리가 텍스트의 기호들을 주체적 이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적으로 이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텍스트 이해는 그 텍스트를 재창조하는 능동적 참여를 수반한다. 우리의 삶의 실재(reality)가 텍스트에 투영되어 그 텍스트가 우리에게 실재적(real)인 것이 되게 한다. 이해(Understanding)는 이 두 개의 실재 곧 독자라는 실재와 텍스트라는 실재가 서로 만날 때 생긴다.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또는 “중립적으로” 읽을 수 있는 독자는 없다. 독자는 자기 나름의 선 이해, 관점, 삶의 정황을 가지고 텍스트에 접근한다. 각자의 특별한 관점 또는 선입견을 텍스트에 적용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실재적인 것이 되게 한다.
사람은 지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식 능력이 제한적이다. 무제한적 능력을 소유한 독자는 없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헤르메스가 등장하여 권위 있는 의미를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읽는 우리의 임무 수행이 중요하다. 과연 우리가 그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며, 얼마나 이해하며, 우리의 이해에 어떤 요소들이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해 과정에 대한 분석 곧 해석학 작업이 필요하다.
이해(understanding)와 해석(interpretation)은 다르다. 이해는 해석에 포함된다. 해석의 다양한 측면 가운데 하나가 이해이다. 해석이라는 우산 안에 이해가 들어 있다. 이해는 해석이론 안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텍스트를 해석할 때, 그 해석활동의 함축성, 특성, 상황 등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해석학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을 할 만한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지 않기도 한다. 마치 동영상을 제작용 고급 캠코더를 구입했지만 사용설명서를 주의 깊게 읽지 않는 것과 같다. 자세히 읽을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고, 이미 어느 정도의 사용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구명조끼의 사용설명서를 읽어보고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만약 독자가 사용설명서와 다른 선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캠코더나 구명조끼를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메시지가 조금이라도 모호하면 독자에게 재앙이 따를 수 있다.
텍스트가 생산된 과정과 그것을 읽고 이해하려는 독자의 실재 과정이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때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 시(詩)는 문학 형식 가운데 최고급에 속한다. 시는 항상 독자에게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시가 발표되는 순간 그것의 의미에 대한 이해 또는 해석은 독자에게 위임된다.
인간의 의사전달 형식은 해석학적 고찰의 대상이다. 해석학은 문학작품, 예술작품, 시, 성경 등의 텍스트를 읽거나 접할 때 작용하는 인간이해의 가능성, 한계, 과정을 검토하여 안전한 이해를 돕는다. 독해활동을 증진시킨다.
텍스트는 종종 양자택일의 존재양식을 지닌다. 독자로 하여금 상충되는 세계관 속에 빠져들게 한다. 그 때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독자가 텍스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독자를 향한 텍스트의 도전을 도외시하거나 자기의 편견과 기존 관점으로 접근하면 충돌이 발생한다.
독자가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독자가 그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지, 오해하는지, 곡해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어느 누구도 개인적 관점이나 선입견 없이 텍스트에 곧바로 접근하지 못한다. 텍스트를 안전하게, 충분하게, 제대로 이해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모든 텍스트 해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수반한다. 독자의 관점, 선입견, 해석능력, 해석조건, 삶의 양식, 지적 한계 등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요구한다. 이것들에 대한 해석 능력은 또 다른 조건들에 매여 있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개인의 성장과정과 그 과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 흐름, 분위기라는 조건 등에 영향을 받는다.
기독교 신학은 해석학적 성찰을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는 인간 의사소통의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 텍스트와 신앙 문서들 곧 신조, 교리, 예전, 교회법, 신학성명, 영적인 표현들은 해석을 요구한다.
신학 영역에서도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다. 신학자들은 그 조건들이 무엇이며, 시대마다 어떻게 변화했으며, 고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오늘의 해석자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등을 탐색한다.
신학 원천들에 대한 해석 작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신이 속한 교회 전통에 영향을 받는다. 텍스트 재해석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인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텍스트와 독자의 자기이해는 법학,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 전 영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신학과 법학의 해석은 주로 텍스트의 특정 부분에 대한 해석에 치중하는 반면, 철학은 해석학 원리 자체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철학은 ‘거시적(巨視的) 해석학’에 관심을 가지고서 텍스트를 읽는 독자에게 실재하는 모든 측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해석학적 관심을 가진 다른 인문학 분야의 학자들은 ‘미시적(微視的) 해석학’이라고 일컫는 언어적 또는 예술적 성격의 개인적 표현들을 해석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거시적 해석학과 미시적 해석학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거시적 해석학은 각각의 미시적 해석학의 구체적인 업적 토대 위에서만이 가능하다. 해석이 여전히 해석자 자아와 실재하는 것들 전체에 관한 단편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할 지라도 보다 나은 해석으로 인도하는 멀고도 먼 우회적인 해석여행이 필요하다.
거시적 해석학도 완전히 새롭거나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해석여행을 출발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종종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기존 해석과 가르침의 인도를 받는다.
모든 해석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해석 양식들(modes)이라는 조건 안에 있다. 이 해석 양식들 자체가 텍스트와 기호들을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을 형성한다. 우리는 아무런 생각, 선입견, 조건 없이 텍스트를 읽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기대나 정보를 가지고 텍스트에 접근한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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