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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목마릅니다
빌립보서 3:10-17(10-21)
I. 주님, 더 알고 싶어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인생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알려줍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과 함께 경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경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문에 도달하는데 예수님의 손을 잡고 나란히 입성합니다.
평생 살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천국에서 큰 상을 받고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려진 상은 주님과 동행하는 자 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바로 한발 뒤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달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이 천국 문에 들어설 때 주님의 바로 뒷자리에서 주님을 따라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큰 상을 받고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려진 상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보다 한걸음 앞장서서 비바람 맞으며 길을 만들고 다리를 만들며 험한길을 달려왔던 사람입니다. 주님보다 한걸음 앞장 서서 천국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사람도 역시 큰 상을 받고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내려진 상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었습니다.
세상에 라면 종류가 많은데 가장 맛있는 라면은? 주님과 함께라면! 입니다.
기독교는 앞을 봐도 예수, 뒤를 봐도 예수입니다. 옆에서 봐도 예수, 뒤에서 내려다 봐도 예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삶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오늘 본문 빌 3:9 “내가 가진 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란 말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가진 의”가 무엇일까?
나의 출생, 내 몸에 지닌 할례의 흔적, 내가 노력해서 얻는 자격들,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십자가의 원수”(빌 3:18)라 말합니다.
오히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일이라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예수 만나고 보니 이것은 모두 배설물에 불과했습니다.
어깨 뻐기고 살던 자신의 의는 부끄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의를 더 쌓기 위해 교회를 박해합니다.
의기양양 다메섹으로 달려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홀연히 눈을 뜰 수 없는 환한 빛이 사도 바울을 강타합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왜 교회를 박해하느냐 묻지 않습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묻습니다.
이 순간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학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발견, 교회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형틀에 달려 죽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그분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서 지금도 역사를 운행하는 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는데 그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다.
교회가 바로 주님이라는 교회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자 하나님의 종 아나니아를 만납니다.
안수하여 눈을 뜨게 만듭니다. 눈에 비늘이 벗겨지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자그만치 3년동안 주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이 누구인가?
그 내용이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알고자”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그 자리에서 하늘의 벼락을 내려 나를 죽였다 할지라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곳에서 내 인생이 끝장났다 할지라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살려 주셨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셔서 내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왜 내 죄를 용서하는 것인가? 세상 모든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라니.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그 신비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다면 그 부활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무엇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십자가를 증거하고 부활을 증거하면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단 말인
가?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Yes. 그렇다.
사도 바울의 케리그마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살겠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죽겠다. 이것이 내 권능이요, 이것이 내 사명이요, 이것이 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보화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한다는 이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눅 1:34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네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때 마리아가 천사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야다)”(눅 1:34)
“야다”이 말과 똑같은 말이 창세기 4:1에 나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야다)”입니다. 똑같은 단어인데 “알다”로 번역하고 어떤 성경에서는 “동침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한몸이 되어 알아가는 것이 “야다”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예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예수 부활을 믿고 증거하도록 나를 부르셨다는 것인가?
이 부활을 증거할 때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똑같이 예수를 믿고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아는데 그 깊이가 다릅니다. 아는 크기가 다릅니다.
그 높이가 다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내 죄 짐을 담당하셨습니다.
그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저주에서 자유를 받고 지옥의 문은 닫혀지고 천국의 문은 열려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똑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받고 십자가를 깨닫는데 그 높이가 다릅니다. 깨닫는 감격이 다릅니다. 그 깊이가 다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권능을 압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부활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권능을 아는 깊이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높이가 다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세상이 사막화되어지고 모든 바다가 초토화되어질 때에 성전에서 말씀,
성령의 생수가 흘러넘칩니다.
성전에 가득 고여 있는 환상을 에스겔이 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걸었을 때 발목까지 물이 차오릅니다.
또 물이 흘러흘러 넘치더니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그 다음에는 허리까지 차오릅니다.
그 다음에는 물이 온 성전에 가득하여 능히 헤엄치지 않고는 발이 땅에 닿지 않습니다.
이 물이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니 사막이 온갖 과일 나무가 무성해 집니다.
모든 나무들이 과목으로 바뀌어지고 사시사철 색다른 과일이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바다로 흘러 들어갔을 때에 죽은 바다가 살아나고 온갖 물고기들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때에 이런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을 공부합니다.
교회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은혜받는 크기가 얼마만 할까요?
자기 믿음만큼 받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깨닫는 것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사모하는 목마른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저는 매주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토요일에 성령수양회를 합니다.
똑같이 성령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은사를 받고 치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깊이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게 은혜를 받습니다.
각자 믿음의 크기만큼 받더라는 겁니다.
치유수양회에 참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상처의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상처만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겠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치유하는 치유사역자로 살아야지.
이렇게 차원이 다르더라는 겁니다. 은
혜의 깊이가 다르고 높이가 다르더라는 겁니다.
II.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소서
예수님을 더 잘, 더 많이, 더 깊이, 더 알고 싶어서 달음박질하던 사도 바울은 이 영적 경주에
걸림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사랑했던 그 모든 것들은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는데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버릴수록 시원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달리는 자신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마귀는 과거가 생각나게 합니다.
지난 일에 잘못을 집착하게 합니다.
과거의 실수, 죄와 상처를 들추어내 자기를 괴롭힙니다.
때로 약점을 기억나게 만들어 열등감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달려갈 푯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 부름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여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를 기다리는 그 골인지점의 상급을 보여줍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13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입니다.(빌 3:13) 자동차를 운전하여 달리다가 한 번씩 백미러를 봅니다.
초보운전자들은 뒤를 못 봅니다. 운전대에 매달려 앞만 보고 갑니다.
그러나 노련한 운전자는 뒤를 잠시 봅니다. 왜요? 뒤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고 앞으로 더 잘 달리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날 내 약점과 허물이 보일 때도 많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내 인생에 고통이 아니라 내게 유익이 되어서 앞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할때 대부분 행복비타민 다섯 알 주례설교를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가 이레이즈 erase. 지난날을 잊어버리라는 겁니다.
지난 날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지워버리고 오늘 이 시간에 행복 출발을 하라고 교훈합니다.
부부싸움 할 수 있지만 한번 메뉴로 올린 어젠다는 다시는 끄집어내지 말라는 겁니다.
한번 부부싸움하고 나면 다시는 내 입에 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상대방의 약점, 지난날의 실수, 2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되뇌는 사람과 어떻게 살겠습
니까? 자기 잘난 것만 얘기하는 사람과 살기가 힘든 겁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무엇을 잊어버릴까요?
첫째는 무엇보다 먼저 과거 허물과 실수, 죄와 상처를 잊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안에서, 구속의 피로 과거의 모든 죄와 상처가 씻김 받았음을 믿고
이 시간에 모두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죄가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짓밟았다.
주님은 우리 모든 죄를 번쩍 들어서 용서의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주 밖으로 던지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은 모두 잊으셨기에 기억조차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 죄와 상처와 지난날의 약점과 실수를 우리는 자꾸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십자가의 원수”(빌 3:18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는것을 무효화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한때 “가게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이 있었는데, 예수 밖에는 가게에 흐르는 저주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저주는 사라졌습니다. 죄는 옮겨졌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징벌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오직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주님의 목표, 새로운 비전, 꿈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실패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날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던 삶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실패에 사로잡히면 성공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에디슨은 “내게 실패경험은 없다. 오직 가서는
안되는 길, 좋은 경험이 많았을 뿐이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슬펐던 일, 힘들고 괴로웠던 일,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일, 불평거리, 원망거리,
비난과 조롱을 당한 일, 모두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경험들과 은혜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지난 날의 성공,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위한 수고와 헌신, 공로 보따리를 잊어버리세
요. 과거에 받은 은혜 경험에만 매여 있으면 더 큰 은혜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위해 많은 봉헌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잊어버리세요.
교회 구석구석 어려운 자리에서 수고하고 애썼다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잊어버리세요. 밖에
나가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것들 그것도 잊어버리세요.
그것이 자꾸 생각나면 교만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 당신은 섭섭증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상급이 무너지는 소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고백하십시다.
주님,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교회를 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였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이었고 힘이
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이 있어야 겸손하여 더 큰 은혜를 더 깊은 자리에서 더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III. 내 인생 골인점, 그 사명을 향해
여러분 생명보다 소중한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 구원의 기쁨이라는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 보물을 얻는데 걸림돌이 되는 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이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자기를 붙잡고 늘어지는 과거, 어제의 짐과 자랑을 모두 잊어버립니다.
과거라는 끈을 잘라 버립니다.
이제 그 보물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기 위하여 남은 생애를 달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빌립보서 3장 12절과 14절 “달려가노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기 “달린다”는 헬라어 디오크는 올림픽 단거리 선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얼굴 근육과
온몸의 근육이 불뚝불뚝 떨리며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린다.
전심전력하여 달려 가노라 디오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이렇게 달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존재목적 그 푯대를 향해 “달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실상 바울은 구태여 달리지 않아도 좋은 사람입니다.
달릴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예수님은 아마 거의 같은 해에 태어났을 겁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66년을 살고 네로 황제의 손에 순교합니다. 여기 빌립보서가 주후 62년경에 기록되었으니 지금 바도 바울의 나이 62-3세쯤입니다. 사도 바울 인생의 말년입니다.
2-4년 남은 인생, 그이 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은 올림픽 선수처럼 지금 달린다는 말이 어울리기나 하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평생을 달려왔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몸도 약해졌고 앞도 잘 안보여. 그래서
조금은 느리게 쉬면서 간다고 해야 어울리는 말이지요.
사도 바울은 부름받기 전에도 큰 업적을 이룬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다음에도 충분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룰만큼 충분히 업적을 이룬 사람입니다. 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
다. 가진 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도 얼마나 많은 경주
를 해 왔습니까? 교회를 많이 세웠습니다. 많은 제자들을 세웠습니다. 이 당시에 적어도
10권 이상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그의 인생 말년 달려야 했을까요?
왜 인생은 달리기라고 이해했을까요?
기억하세요.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 신앙인의 푯대는 이 땅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려가는 목표, 푯대 피니스(finis) 즉 골인점 목표점은 종말, 마지막 날과 같은 말입니다.
내 숨이 끊어지고 다시 눈을 떠 발견되는 피니쉬 라인, 골인점, 종말을 말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달려가야 할 자리, 피니쉬 라인은 나이가 들었다고 멈출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업적을 이룰만큼 이뤘다고 충성할만큼 했다고 끝장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을 말합니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 내가 우뚝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 우리 주님 예수님 앞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긴 그 사명, 그 푯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간계산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달리는 겁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통하여 멋지게 달려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죽는 순간도 끝나는게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서 멋진 사역자로 죽어야 합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종으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도 달리는 시간입니다. 가장 멋지게 달리는 시간이 그 시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IV. 나를 본 받아라!
바울 자신만 종말을 향해 달리는게 아닙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달리라고 합니다.
인생의 종착점이 가까워 옴을 느낀 사도 바울은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본문 시작하는 빌립보서 3:10절에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 받는다”고 말하고 17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를 보고 너를 본받게하고 너를 본받는 자가 있으면 눈여겨 살피고 그 사람
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는지 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희 어릴 때 할머니에겐 “버선본”이 있었습니다. 버선 모양의 종이입니다.
버선감 위에 버선본을 올려놓고 천을 잘라 버선을 만드시더라구요. 뿐만 아니라 “남자 옷본”“여자 옷본”이 있었습니다. 그 옷본을 따라 옷감을 잘라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나 우리 할머니에게 예쁘게 보이면 버선본을 잠시 빌려주기도 합니다.
옷본도 가끔 빌려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본입니다.
이번 동사목사를 청빙하며 우리 당회의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청빙의 본이 된다.
요즘 담임목사를 모시는데 영적인 지도자를 모시는 방법이 맞나? 우리가 존경하고 주님이 보내주는 종을 우리가 모시는 청빙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디션을 합니다. 이력서 오디션, 설교 오디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설교가 있는데 불러다 설교를 듣고 오디션을 합니다. 교역자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려놓고 담임목사라고 모셔놓았으니 신령한 기름 부으심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내준 종이 누군지 기도하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한 분을 기도로 결정하고 당회가 만장일치로! 제직회가 만장일치로! 주의 종을 청빙하는 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교회는 한국교회에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시대에 경건의 본을 보여야 되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를 섬기는 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요즘 본이 없는게 이 시대의 위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던 사람들이, 마지막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던지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정치가가 되었던 겁니다.
정치가에 본이 없는 세상입니다. 기업가의 본이 없는 세상입니다.
돈을 벌면 저렇게 벌어야 된다. 돈을 쓰면 저렇게 써야 된다.
죽을 때는 저렇게 죽어야 된다.
유한양행에 유일한 박사 같은 기업인의 본이 없는 세상입니다.
요즘 신학생들이 목사님들을 바라볼 때 누구처럼 목회를 하면 좋을까?
누구처럼 살아야 될까? 누구처럼 죽어야 될까? 본이 없어서 방황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교회 젊은 신앙인들이, 청년들이 우리교회 장로님들이 신앙생활에 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수집사, 권사님들을 보면서 우리교회 청년 젊은 신앙인들이 교회는 저렇게 섬기는 거야. 기도는 저렇게 하는 거지. 교회를 섬겨도 저런 모습으로 섬겨야 되는 거야. 집사님들, 권사님들 한국교회에 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목마릅니다. 노래한 시편의 기자가 있습니다.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뵙고 싶어서, 주님을 깊은 곳에서 만나기
위해서, 목마르게 달려갔습니다.
시편 42편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노래했
습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주신 주 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그 보배를 발견하고, 그 보배를 얻은 기쁨에 살아가며, 그 보배를 더 많이 간직하기 위해서, 그 보배를 더 많이 나누기 위해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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