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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 (동영상)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국가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우리 역사와 문화, 영적 영역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해설: (동영상) 지난 2월, 우크라이나 해방을 명목으로 우크라이나를 기습 침공한 러시아,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항전을 이어나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70여년 전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동영상)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의해 국군은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넘을 수 없는 전력 차이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고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북한방송: (동영상)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서울시를 포위하고 있던 인민군 부대들은 오늘 28일 새벽에 서울 중심지대에 돌입하여 이승만 괴뢰정부의 소위 중앙청을 비롯하여----
해설: (동영상)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전선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항복하지 않았고 모두가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단기간에 끝날 것 같은 전쟁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됐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전쟁기념관/서울시 용산구): 366번째 억사저널 그날입니다. 어제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었죠. 그래서 오늘 특별히 스튜디오가 아닌 전쟁기념관에서 인사드립니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멋 있네요.
이시원/배우: 여기 탱크도 있고 전투기도 있고 진짜 전쟁터 한 복판에 나와 있는 것 같애요.
최태성: (위를 가리키면서) 저기 폭탄 떨어져요!
이시원: 아~ 놀라라~ 이게 전차들이 진짜 전쟁에서 쓰였던 건지 감이 없거든요 진짜 인가요?
허준/방송인: 일단은 진짜는 진짜인데요. 전쟁에서 노획한 것들은 아니고요. 전시를 위해서 해외에서 구입하거나 고맙게도 국방부에서 기증해 주신 물건들이라고 합니다.
최태성: (허준씨에게) 여기 관계자세요?
허준: 저는 여기를 내 집 드나들듯이~저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너무 좋아해요.
최원정: 굳이 우리가 뉴스 같은데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전시관에서 여유롭게 보지만 실제 전쟁터는 얼마나 살벌할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종군기자로 활동하셨던 태상호 기자님, 느낌이 새로우실 것 같애요.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서~
태상호/기자: 그렇죠, 모든 전문가들이 이 전쟁은 조기에 끝날 것이다. 며칠 안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라고 점을 쳤지요.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전국민들이 단합을 해서 저항을 하고 있는거죠. 하루에 100명 이상의 전사자들이 꾸준히 생겨 났어요. 그 숫자에는 민간인을 포함하지 않고 그런데 사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1950년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죠.
최태성: 6.25 전쟁도 마찬 가지거든요. 진짜 많은 희생자가 있었는데 사실 우리가 6.25전쟁 이야기 하면 무슨 전투 무슨 전투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 전투에 있었던 공간과 시간 그 속에는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자주 놓친단 말예요. 국가 보훈처에서 매달 전쟁 영웅을 기억하자고 해서 선정을 하거든요. (이달의 전쟁 영웅-국가 보훈처에서 2011년 6월부터 한국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인물을 선정-발표), (이시원씨를 향해) 지금 6월달 전쟁영웅은 누군지 혹시 아세요?
이시원: 죄송합니다, 진짜 모르겠어요!
최태성: 참고로 말씀드리면 최용덕 공군중장님 이세요. 6.25전쟁 때도 활약하셨던 분이시거든요. (최용덕-한국 전쟁 당시 공군사관학교 교장 재임 김포지구 경비사령부 편성 및 김포기지 방어), 오늘 제가 전쟁 이야기를 해서 우리의 영웅들 그들의 이름을 한 번 부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실은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기억하고 있는 것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낙동강에서 방어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 다음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됐다. 그 다음에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 정도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태성: 퇴송해요, 제가 수능에서도 딱 그렇게 가르쳐요. 그렇게만 기억하는 거야.
이시원: 자세한 내용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는~
정병준: 사실 전쟁이라는게 결국은 철과 피의 전쟁입니다. 철과 피를 갈아먹는 것이고요.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군이 혹은 한국 국민들이 싸우겠다 라고 하는 전투의지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원정: 오늘은 한국 전쟁 속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들,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해설: (동영상) 6월 25일 새벽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쪽 강릉까지 300킬로미터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북한의 기습공격이 이어졌다.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 하고 국군의 맞대응은 불가능해 보였다. 30일 이내에 남한을 점령한다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북한군, 그런데 갑자기 춘천지역에서 진격을 멈춘다. 완벽할 것 같았던 북한군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최태성; 우리가 알기로는 처음에 전쟁이 시작됐을 때 북한군이 빠르게 남하하고 있죠. 그래서 국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했다고 알고 있는데 북한군이 진격을 잠시 멈춘 적이 있었단 말예요.
최태성: 일단 많은 분들이 6.25전쟁하면 북한의 인민군이 6.25 새벽 남침했어 어디를? 수도 서울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고요. 6.25 때 북한은 서쪽 끝 옹진반도부터 출발해 가지고 300킬로미터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해 들어온 겁니다.
이시원: 38선 전역에서 내려온 건데 딱 춘천지역에서만 저지가 됐다고 그러잖아요. 혹시 춘천지역에 국군이 강했나요?
태상호; 당시 춘천지역을 지키던 부대는 육군 6사단입니다. 6사단은 한국 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부대로 손꼽히는 부대구요.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은 김홍일 장군과 함께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명장 중의 한 명입니다. (김종오-한국전쟁에서 활약한 명장, 춘천-홍천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
이시원: 김종오 장군님 꼭 기억할게요!
허준: (거수경례로) 청~성~!
최원정: 발음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충~성~! 바로 합시다. 충~성~!
허준: 김종오 장군님이 지휘하시던 6사단이 청성부대 푸른 청靑 별성 성星, 저분은 태성~ 이분은 청성!
이시원: 제대로 하신 거에요.
허준: 우리가 인천 상륙작전에서 북진하잖아요. 이때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해서 압록강 물을 떠 가지고 대통령께 갔다드린 부대가 바로 이 청성부대예요. (군인이 압록강에서 수통에다 물을 채우는 모습),
최태성; 압록강 물입니다.
허준: 그래서 미군들이 청성의 전진하는 모습을 보고 청성부대 부대원들은 마치 다리에 프로펠러가 달린 것 같았데요.
최태성: (허준씨를 향해) 혹시 6사단 출신인 거 같애요?
허준: 청성부대 좋아할 뿐입니다.
이시원: 근데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어떻게 했나요?
최태성: 그게 궁금해요?
정병준: 평양 탈환 기념식에서 마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원정: 한겨울이니까 차가웠으면 괜찮았을 수도~
정병준: 중요한 건 6사단이 북한군의 진격을 특히 중부와 동부에 있는 북한군 2군단 부대들을 저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게 중요합니다. 여기 준비된 보드판이~
최원정: 영어가 아닌 것 같애요.
정병준: 러시아어로 작성된 겁니다. 한국 방송에선 처음 공개되는 겁니다. 1950년 10월에 서울에서 9.28 수복 이후 노획된 문서고요. 이름은 공격작전용 조선인민군 정찰계획으로 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러시아어로 작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허준: 왜 한글로 안 되어있고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요?
정병준: 그 만큼 당시 소련이 한국전쟁에 깊숙히 개입했음을 증명해 주는 거죠.
최태성; 소련 얘기하는 거잖아요?
이시원: 러시아어 까막눈 이라 내용을 몰라서~
허준: (보드판을 들고 지적하면서) 1950 말고는 아무 것도 몰라
정병준: 이 문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게 북한군의 작전계획을 3단계로 나누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한국군의 주력을 섬멸한다.
최태성: 우리가 알고 있는 충격과 공포의 모습이네요.
정병준: 그렇죠, 제일 중요한 게 서울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포위 공격한다는 계획이 1단계입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을 3일 정도로 생각한다.
최원정: 그렇게 짧아요?
정병준: 두번째 단계는 뭐냐? 두번째 단계는 대전 광주 대구에 있는 예비부대를 격멸하는 것입니다.
최태성: 예비부대가 있으면 잘 싸우니까
정병준: 그게 2단계입니다. 그 다음 3단계는 뭐냐? 남부 해안에 적군 그러니까 미군이나 연합군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를 봉쇄하고 전쟁을 끝내는 게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최태성: 전쟁 완료군요.
정병준; 그렇습니다. 군도 붕괴가 되고 정치지도부도 붕괴가 되고 박헌영이나 남로당이 얘기하는 것처럼 남한에서 좌익 동조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면 한국은 싸울 의지나 전투력이 없이 붕괴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최원정: 한국전쟁의 뒤에 숨어있는 비밀을 알아낸 느낌이에요. 교수님, 책을 계속해서 보면 이런 걸 우리가 계속 건질 수 있는 거죠?
정병준: 여기 또 지도가 있습니다(두번째 보드판).
이시원: 이것도 최초 공개인가요?
정병준: 이건 최초 공개가 아니구요. 러시아어 문서를 도형화한 작전개념도 입니다. 여기 보시면 서울이 있구요. 서울 방향으로 북한군의 중요한 사단들인 1, 3, 4사단이 공격을 합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2, 12사단이 춘천과 홍천에서 수원으로 들어와서 여기가 수원-원주 축선이잖아요. 여기에서 한국군의 주력을 완전히 섬멸하겠다.
최태성: 그게 1단계 작전 계획 아닙니까?
정병준: 그렇습니다. 이게 중요한 작전계획이었는데~
최태성: 저기 검은 라인이 수원 쪽으로 그어져 있네요.
이시원: 태 기자님, 질문이 있는데 지금 이 계획이 엄청 철두철미하게 세워져 있잖아요. 좀 쉬운 편인가요?
태상호: 난이도가 높았죠. 그렇기 때문에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에서는 이 계획 대로는 우리가 작전을 수행할 수 없으니 고문단을 주요 부대에 파견해 달라고 몇 차례 모스크바에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8일 조선인민군의 주요 장군이 전사를 했을 때 그 옆에 소련 고문관이 타고 있었다는 일화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병준: 그게 사실은 북한이 10만명 이상이 동원되는 공격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없습니다. 장군은 책으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50년 9월에 갑자기 2차 대전 당시 독소전쟁에 참전했던 밀리터리 아카데미를 두 세개 이상 나온 대령급 사람들이 대거 동원됩니다. 이런 사람들 20여 명이 북한군의 공격작전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 겁니다. 스탈린과 스탈린의 군사참모들이 이건 굉장히 손쉬운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원정: 공격계획서 대로 라면 한국전쟁을 시작하자 마자 전쟁의 승패가 갈릴 뻔 했다는 얘기잖아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 2군단을 막아내어야 하는 국군 6사단과 전력차이가 궁금해지지 않아요? 여기에 대한 분석은 태 기자님과 허준씨가 해 주신다고요? (당시 양측 전력차이를 알아보는 시간),
--------------북쪽에서 서울을 향해 북한군이 쳐들어오고 있었구요. 서쪽으로 옹진군을 거쳐서 방어 라인은 뚫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동쪽 라인만 뚫리게 되면 소련과 북한의 목표는 90% 주력부대 괴멸이 눈 앞에 있었습니다. 국군 6사단은 9300여 명으로 방어 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는데요. 북한군 2군단은 무려 37,000여 명 4배에 달하는 숫자예요.
태상호: 그런데 숫적으로만 많은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병사 개개인의 자질 이게 중요하겠죠. 침공을 해온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부대들에게는 전쟁 직전에 실시된 부대평가에서 1위를 한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실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허준: 근데 2군단은 3개 사단 그리고 1개 고속기동연대가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부대였죠.
태상호: 맞습니다. 지금 여기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소련제 모터사이클을 180대 보유하고 있는 제603 모터사이클 연대가 바로 그 부대입니다 (M-72 모터 사이클-1941년 소련에서 개발한 군용 오토바이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소련 전쟁에서 사용됨), 이렇게 사이드카가 달린 모터 사이클 많이 보셨죠?
이시원: 저 영화에서도 보고 또 경주할 때도 쓰지 않나요?
최원정: 사이드카가 옆에 있으면 무거워서 속도가 안날텐데 고속?
정병준: 모터 사이클을 북한말로 모터찌클이라고 합니다. 모터찌클~ 모터찌클이라고 불렀는데요소련군 군사고문들이 다 독소전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평원에서 사용했던 모터 사이클을 한국전쟁에 투입을 했습니다. 어디에 투입을 했느냐, 홍천-춘천과 같은 산악지대에 투입을 했습니다.
이시원: 현지 사정을 몰랐군요.
최원정: 산악지대잖아요.
정병준: 한국지형을 모르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고속으로 달려서 수원으로 기동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은 둘 다 불가능했습니다.
최원정: 모터 찌클이 크게 찌그러졌겠네요.
허준: 조금의 실수는 있었지만 북한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 장비 엄청나지 않았습니까?
태상호: 북한군은 개전 당시 여러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중에 한 가지를 만나 보겠습니다.
허준: 이동해 보시죠~ 우리 국군 6사단의 심장을 떨리게 한 북한군 비방의 무기가 바로 이거죠?
태상호: 네, 이 무기체계와 비슷하지만 다른 무기체계입니다. SU-76 이라는 자주포인데요. 지금 저의 뒤에 있는 것은 SU-100 이라는 자주포입니다. SU는 자주포를 뜻하고 100은 포탄의 지름을 뜻합니다. 즉 SU-76은 SU-100 보다 차체가 작습니다. 북한군 2군단에는 SU—76 자주포가 총 48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전 초에 국군장병들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하지를 못 했어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시원: (질문) 저희도 모르겠어요. 전차와 자주포의 차이가 뭐예요?
태상호: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자주포라는 것은 자력으로 기동할 수 있는 차체 위에 포를 올린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주포-자력으로 기동할 수 있는 차체 위에 포를 결합한 것), 그래서 좌우로 포를 움직이기가 거의 힘든 거죠. 대부분의 자주포는 상하로만 포를 쏠 수 있습니다. 뒤를 쏠려면 차체를 돌려야 합니다. 뒤쪽에서 공격하면 적 전차가 적의 자주포에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인 거죠. 반면 전차를 보시면 차체와 포탑이 분리되어 있죠.
허준: 그러면 자주포를 저희가 보여드렸으니까 전차와 비교해 가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시원: 제가 지금 확실하게 이해를 했어요. 자주포는 끄덕끄덕이고 전차는 도리도리예요.
최태성: 탱크는 끄덕끄덕도 돼요.
이시원: (다시 정리) 다 되는게 전차, 끄덕끄덕은 자주포~
태상호: 탱크를 정확히 전차라고 하는데요. 당시 북한군의 주력 전차는 T-34 였습니다.
허준: 그렇다면 국군이 전장에서 마주쳤던 그 탱크가 바로 이거였군요.
태상호: 맞습니다. 전차 공포증을 유발했던 그 전차가 바로 이 T-34였습니다.
허준: 자주포와 전차는 어떤 다른 특징이 있습니까?
태상호: 자주포는 원거리에 있는 적을 쏘기 위해서 곡사로 쏘는 반면에 전차는 근접 거리에서 직사로 정확하게 사격하는 무기체계죠.
허준: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3만7천여 명의 적 2군단을 막아야 하는 6사단 이거든요. 6사단은 전차를 못봤다면서요.
태상호: 6사단이 마주한 전차는 없었지만 6사단은 전차를 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SU-76이 밀고 내려 왔기 때문입니다.
허준: 자주포를 전차로 착각했구나.
태상호; 특히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자주포에 나뭇가지를 엄청나게 걸어놓았습니다. 삐쭉 튀어나온 포신을 멀리서 보면 전차인지 자주포인지 헷갈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장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겁니다.
허준: 그렇다면 그에 맞서는 6사단은 어떤 무기로 무장했습니까?
태상호: 안타깝게도 당시 6사단에는 전차도 자주포도 없었습니다.
최태성: 자주포도 없었어?
태상호: 6사단이 가진 가장 강력한 화력이 바로 105미리 곡사포였습니다. 방열을 해서 쏴야 하는 재래식 화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병전력으로만 봐도 춘천지역은 북한군이 국군에게 두 배 이상 우세했구요. 홍천지역은 7배 이상 우세했습니다.
최태성: 사실은 군복이나 철모도 없어가지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들을 썼다고 하니까~ 우리 그노래 있잖아요.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최원정 아나를 향해) 이 노래 알아요?
최원정: 당연 하죠~
이시원: 저는 처음 들어요.
최태성: 이 노래가 그냥 나온 오래가 아니에요.
허준: 사실 6사단은 먹을 식량 조차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식량은 건빵 하루치 650상자 밖에 없었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방어를 했을까요? 그건 테이블에서 계속해서 이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허준~ 태상호~ 였습니다.
최원정: 전력면에서 사실 비교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 6사단은 이걸 어떻게 막아낸 건가요? 이거 자체가 미스터리 아닌가요?
최태성; 미스터리 주인공을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6사단 특공대 사진등장) 사진으로 보시죠, 지금 여기 사진이 나왔는데요. 6사단 소속 11명의 특공대입니다. (수류탄을 이시원씨에게) 이거 받아 보시겠어요?
최원정: 실제 수류탄은 아니죠?
최태성: 특공대원들에게 수류탄 2개와 안전핀 제거탄 포탄 1개를 지급합니다.
허준: 언제든 터지게 할 수 있게~
최태성: 충격만 가하면 바로 터지는 거예요.
최원정: 손에서 놓지면 안 되잖아요.
이시원: 이거 들고 어떻게 되는 거죠?
최태성: 안전핀을 빼 보세요.
최원정: 북한군 자주포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거예요. 이걸로 가격하면 되는 거예요?
최태성: 자주포의 조종석 거기를 딱 본 거예요.
최원정: 근데 뚜껑이 닫쳐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걸 막 강제로 열어요?
태상호: 당시에 한국전쟁에 투입됐던 북한군 SU-76m 모델, 즉 뚜껑이 없는 모델입니다.
이시원: 이게 이렇게 들고 있기만 해도 무서운데 작전이 말이 쉽지 가능한 거예요?
허준: 잘 생각해 보시면 자기 키의 두 배 정도되는 높이인데 이걸 그냥 수류탄을 던지겠습니까, 아니에요, 자주포 포탑 위로 기어올라 가는 겁니다. 그 열려 있는 뚜껑에 핀을 뽑고 수류탄을 던지고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빗발치는 총알세례에서 폭탄을 넣고 도망치는 거예요. 이걸 11명 특공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시도했어요.
최원정: 저분들 어떻게 하면 좋아~ 최후가 너무 예상이 되는데~
이시원: 저는 못 할 것 같애요.
정병준: 이게 산악지역에 고개를 올라오는 10대의 자주포가 있었습니다. 대전차 포대가 선두 자주포를 포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주포가 멈추게 됐습니다. 그 사이에서 특공대가 선두에 있던 1호 자주포와 후미 자주포에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고개길이니까 허둥지둥 대다가 북한군 자주포 몇대가 벼랑으로 떨어져서 완전히 독안에 든 쥐처럼 되었습니다. 북한의 자주포 9대 이상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는 게 홍천 말고개 전투의 실상이었습니다.
최원정: 아까 사진에 나온 11명은 다 어떻게 되셨어요?
장병준: 다 무사했습니다. 한 분만 다치고요.
최원정: 이 작전을 하면서~
허준: 결코 일본 스타일의 가미가제나 자살 특공대처럼 병력을 운용하지 않았습니다. 11명의 영웅들에게 박수 한 번 보내주세요!!
최원정: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라는 정신으로 임했겠어요.
이시원: 어떻게 보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임무 받았을 때 본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태상호: 정말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되는 군인들을 인터뷰를 해보면 하나 같은 이야기가 이겁니다. 위험한 전투는 알겠는데 내가 안 나가면 이 친구가 나가야 되는데 그러면 이 친구가 나가서 다쳐서 오면 나의 마음은 어떻겠어?
최태성: 이 때 활약했던 대표적인 분이 조달진 일병인데요. 2012년 7월 이 달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하셨습니다.
이시원: 진짜 용감하게 목숨을 한 번 걸면 이길 수 있다라는 걸 증명해 낸 거 같애요.
정병준: 사실 6사단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 포병이었습니다. 포병의 공격으로 북한군 1개 보병대대를 폭파했는데요. 북한군 포로심문조서나 공적조서를 보면 북한군은 남한 포병대대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굉장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군 포병이 큰 기여를 했습니다.
최원정: 워낙 열세이다 보니까 우리는 국군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전략을 쏟아낸 거에요.
정병준: 준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북한군의 동태에 대해서 굉장히 세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최원정: 38선이 맞닿아 있었으니까.
정병준: 북한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대비를 해서 일종의 차폐물이나 엄폐물을 만들고 진지를 구축했구요. 현지에 있는 지역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서 북한군의 공격을 좌절시키는데 기여를 했습니다.
최태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또 한 번 전쟁 영웅의 이름을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임부택 소령님~ 이 분이 어떤 분이시냐면 남침 징후를 사전 인지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준비태세를 준비하고 있다가 남침했을 때 맞서 싸운~ 사실 남침했을 때 그때 대부분의 국군들이 후퇴하고 있었는데 북한이 지금 막 밀고 내려와야 되는데 초전 전투에서는 북한군이 일시적 후퇴까지 합니다. 빨리 가야 하는데 일시적 후퇴까지 할 정도로~대단한 전투일 수 밖에 없는 거죠.
최원정: 춘천-홍천 지역의 전투 결과는?
최태성: 국군 6사단은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텨내다가 결국 후퇴하게 된 것이죠. 춘천과 홍천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수원에 들어와서 점령할 지역에 그 시간에 맥아더가 들어와서 한강을 들러보게 되면서 미국이 파병을 하잖습니까.
정병준: 맥아더가 6월 29일에 수원에 왔으니까 북한군 작전계획에 따르자면 6월 29일이면 이미 수원을 점령했어야지요.
최태성; 거기에 지금 맥아더가 와 있는 거잖아요.
정병준: 사실 스탈린도 경악했습니다. 스탈린이 김일성한테 닦달하는 전문을 보냅니다. “조선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귀관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전진할 생각인지? 아니면 전진을 중단하기로 했는지…(1950년 7월 1일 스탈린의 전문 中).
허준; 북한 2군단이 못 싸운게 아니라…우리 6사단이 너무 잘 싸운 거에요. 아마도 그때 김일성이 그랬겠지요. 6사단하고 싸워봤어요? 안 싸워 봤으면 말도 하지 마요.
일동: (웃음)
정병준: 제일 중요한 건 한국군의 전투의지나 사기가 상실되지 않았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1948년으로 넘어가면 여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해군에서는 킴볼 스미스 호라는 한국군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배가 월북했습니다. 공군 조종사 2명이 탑승한 비행기도 월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세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국군 장교들은 다 투항하게 되고 한국군 부대들도 다 투항 할거야. 그런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 장군이나 단위 부대장 가운데 투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었습니다.
이시원: 우리는 다른데~기분 나쁘네요
정병준: 한국군이 끝까지 싸우겠다는 전투의지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최원정: 결국 이 분들의 목숨 건 애국심들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거잖아요. 그런 상황은 바다 위에서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해설: 1950년 6월 25일 밤 9시 30분경 부산 인근 해상에서 정체 불명의 선박이 발견된다. 국군의 발광신호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남하를 계속한 괴선박, 정체는 바로 600여 명의 해군 육전요원을 태운 북한의 무장수송선이었다. 그때 이를 막아선 작은 함선,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최원정: 북한군이 부산항으로 들어올려고 했다구요? 해전이라니 한국전쟁에 해군이 있었다구?
최태성: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깜짝 놀랄텐데~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바로 백두산호가 진해항에 있었어요. 이 백두산함이 저녁 8시경 울산 앞 바다에서 이상한 배 한 척을 만나게 됩니다 (1950.6.25.20:12, 검은 연기 발견), 국기도 안 달았어요. 이름도 없는 것 같애~ (1950.6.25. 21:30, 선체확인발광 수화), 그 배가 무슨 배인지를 알려면은 레이더 성능이 좋지 않아서 가까이 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이시원: 너희 누구니? 내가 갈게~
최태성; 그래서 쭉 가서 근접해서 시야에 들어와서 보니까 갑판 위에 무장한 600여 명의 북한 게릴라 부대가 있었던 거예요. 즉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북한 인민군 수송선이었던 거예요.
이시원: 우와~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예상도 못했을텐데~
허준: 앞에서 전방에서 밀고 내려오는 국군 섬멸 90%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후퇴를 해서 전열을 가다듬어야할 것 아녜요. 후퇴를 해서 전열을 정비하는 걸 막아버리면 후퇴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뺏기는 거에요.
최원정: 전후방이 점령 당하면 전쟁 끝~
정병준: 사실은 제일 중요한 건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대전에 와 있었는데 만약에 북한군이 6월 26일 부산에 상륙해서 부산시내를 장악하거나 소란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대통령이 갈 데가 없는 거죠. 첫번째는 심리적으로 붕괴되는 것이고요. 두번째는 전투의지가 상실이 되는 거죠.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도 전혀 없어지는 것입니다.
최태성; 만약에 백두산함이 없었으면 북한군이 6월 26일이면 부산을 점령하는 거죠.
정병준: 사실은 춘천-홍천 전투와 한강 방어선 전투의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죠. 부산이 점령당하면 미군이 들어올 수 있는 교두보가 없어지게 되니까요.
이시원: 백두산함 없었으면 어쩔번 했어요.
----------------이광용/아나운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요 국가들의 해군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해군력은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지금 좌우로 있는 이 사진이 당시 우리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배들이었습니다. 어선을 개조하거나 일본이 버리고 간 연안 경비정을 재활용한 배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 발발 불과 두달전까지 우리 해군에게 포가 달린 전함, 전투함은 단 한 척도 없었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해군사관학교가 출범한게 1949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함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리고 해군장교, 병사들과 함께 계획을 세웁니다. 무슨 계획? 전함을 만들계획이 아니죠. 기술이 없기 때문에 전함을 사야죠. 그러기 위해서 돈을 모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최태성; 얘기를 들으니까 마치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이 떠오릅니다. 선조를 포함해 수군이 필요 있겠냐 해가지고 홀로 수군을 재건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잖아요. 그 얘기를 듣는 것 같은데 지금 손원일 제독이 누구냐 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손정도 의장의 아드님이세요. 그렇죠, 애국금수저 집안~
태상호: 진짜 손원일 제독하면 한국 해군을 오늘날 이렇게 만든 주춧돌을 놓은 그런 분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죠.
최태성: 해군의 아버지
태상호: 그렇죠, 해군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가 있죠,
이광용: 당시 해군 소위의 월급이 쌀 한 가마 가격인 15000원 정도였습니다. 장교들은 월급의 10%씩을 모았다고 하구요. 사병들은 고물을 팔아서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장교회의 부인들은 바자회를 통해서 한푼 두푼 돈을 보탰습니다. IMF 금 모우기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해군 식구들의 모금운동을 통해서 모두 만5천 달러가 모였습니다. 여기에 국고 4만5천 달러가 합쳐져서 총6만 달러를 마련했습니다. 시세를 반영한다면 적게 잡아도 수십억이 되지 않을까. 그만큼 정말 처절한 모금운동이었습니다.
태상호: 세계 어느 전사를 봐도 수병들 끼리 십시일반을 해서 전투함을 구매한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시원: 정말 다행이다.
이광용: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손원일 제독과 장교들은 450톤 급의 전함인 화이트 헤드호 지금 제 앞에 놓여있고 여러분께서 보고 계신 이 배입니다. 화이트 헤드호를 구매하는 데요. 이 배가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전투함 백두산함입니다.
이시원: 화이트 헤드호를 사서 우리나라 이름을 부친 거잖아요. 화이트 헤드호라서 백두산호인가요?
이광용: 아니에요, 놀라운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이 배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군이 활용하던 배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미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활용이 되다가 퇴역한 배였습니다.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수리를 하려면 뭐가 들죠? 돈이 듭니다. 하지만 이 배 산다고 탈탈탈 모아서 6만 달러나 썼는데 돈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배에서 숙식을 하면서 직접 배를 고쳤습니다. 배를 사서 고치기는 했는데 허전해요. 전투를 할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포가 있어야죠. 그런데 포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해군은 일단 포를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포를 사기로 합니다. 그게 하와이 였는데요 (뉴욕-마이애미-파나마 운하-만사니오-하와이), 당시 우리 해군이 구입한 포가 3인치 짜리 포였습니다. 백두산함에 3인치 포가 장착됩니다. 포만 달면 끝인가요? 실탄이 없습니다. 그래서 포탄을 사기 위해 이번엔 괌으로 가서 포탄 100발을 구매합니다.
최원정: 다행히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길 위에 있네요. (뉴욕-하와이-괌),
이광용: 그렇게 백두산함이 포와 포탄까지 구매해서 대한민국 진해항으로 최종 귀향한 날이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이었습니다.
최태성: 말도 안돼!!
이광용: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백두산함의 젊은 60명의 승조원들은 북한의 무장 수송선과 마주합니다.
최원정: 아니 이게 사실입니까? 어떻게 전쟁 하루 전날 전투함이 도착을 해요?
이시원: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
최원정: 예전에 이순신 얘기 하면서 생각나는데 거북선도 임진왜란 하루 전에 완성해서 훈련까지 마치고 하루 전날이었다고 들었는데 맞죠? 그랬죠? (소름 돋는 팽행이론),
최태성: 그러네~ 뭐야 이게~
허준: 우리가 함장님,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을 얘기하고 장병들 얘기하고 했잖아요? 근데 해군의 어머니가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 그런데 제독이라 하면 해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예요. 그런데 이 부인이 삯바느질 해서 번 돈으로 배를 사라고 헌금을 했어요. 홍은혜 여사님은 2019년 8월 이 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셨어요.
정병준: 해군의 노래를 지었습니다. 해군 노래를 지었구요. 해군에----이화여대 출신 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최원정: 정 교수님이 이화여대 교수님이십니다.
정병준: fact입니다. 제가 해군사관학교에 갔더니 그런 얘기를 하셔서 직접 들은 이야기 입니다.
최태성: 이제 전투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는데요. 해군 본부로 부터 격침명령이 떨어진 게 26일 자정입니다. 이때 격침 명령이 떨어질 때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함장이 당번에게 물을 다 떠오라고 해서 컵에다 물을 다 채웁니다. 함장이 맨 마지막으로 이야기 하죠. 서로 보고 있는 이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우리 용감하게 싸우자. 건배를 하고 60여 명의 승조원들이 최초 사격을 시작합니다.
이시원: 그 컵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 같으면 무서운 마음이 더 컸을 것 같은데~
태상호: 함정을 인수해서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부산 쪽으로 들어온 항해훈련 정도만 하였지 실제로 포 사격훈련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해군 함정에서 포를 쏘는 것은 지상에서 포를 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면 받침이 안정되어 있지 않아요. 배가 상하좌우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 쏴봐야 잘 쏠 수 있는데 한번도 안 쐈다는 건 권투 선수인데 맨날 줄 넘기 연습만 하고 펀치는 때려 본적이 없다는 얘기죠.
정병준: 해군이 정말 월급을 아껴서 모아서 산 귀중한 함이었습니다. 실탄을 가지고 포 사격훈련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얘기에 따르면 나무로 포탄을 깎아서 그것을 장전하고 쏘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최태성: 실탄이 너무 귀하니까 총을 못 쏘잖아요.
정병준: 사실은 그렇게 모의연습만 했는데 실탄을 넣고 쐈는데 적함을 명중시킨다 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상호: 게다가 이때 시간이 자정이 넘어간 시간이었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백두산함엔 레이다나 사격통제장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두산함이 사격을 할려면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조명을 비춰서 적함을 밝히던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적함도 나를 보는 거예요. 게다가 백두산함의 무장은 3인치 포 밖에 없지 않습니까. 불리해 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어떻게 보면 이게 더 무서운 방법입니다. 적함의 화염을 보고 쏘는 겁니다.
이시원: 저격수들도 서로 조준을 할 때 상대방이 쐈을 때 반짝하는 그걸로 위치를 파악하잖아요.너무 소름이 돋는다.
최태성: 두 경우의 수 중에서 함장이 드디어 결단을 내립니다. 최대한 가까이 간다!!
이시원: 가까이 올 때까지 쏘지 마라
최태성: 왜냐면 그 귀한 포탄을 정확히 맞춰야 되고 최대한 명중률을 높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된다. 나도 맞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목숨을 걸고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죠. 적함에 1 킬로미터 까지 접근을 합니다. 그러면서 포격전이 엄청 치열하게 시작이 됩니다. 우리도 쐈고 우리도 맞았어요. 계속 쏘고 맞고 쏘고 맞고 하는 과정 속에서 결국 거의 포탄이 떨어져갈 즈음에 드디어 한 발이 적함의 중앙 하부를 때렸습니다. 이러면서 그 적함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새벽 1시 반경 침몰합니다. 600여 명의 적함은 침몰했습니다.
최원정: 다 수장되고~
허준: 1 킬로미터가 생각하면 멀어 보이잖아요. 근데 해전에서의 1 킬로미터는 어느 정도냐 하면 총을 들고 몇 발짝 앞에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거랑 비슷해요. 눈 앞에 있는 거예요.
이시원: 근데 그렇게 서로 쐈을 때 우리측 피해도 만만치 않았겠는데요?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대한 해협,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 결국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젊은 승조원들),
故윤영록/당시 백두산함 위생부사관: 제일 많이 다친 사람이 전병익입니다. 포장전수인데 왼쪽 가슴이 아주 날아가 버렸어요. 폐가 벌렁벌렁 숨 쉬는 것이 보이더라고~
최도기/당시 백두산함 조타사: 김창학이 죽기 직전에 갑판사관에게 어찌 됐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러니까 갑판사관이 격침시켰다고 걱정말라고,
故최영섭/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 (김창학의) 얼굴빛이 환해 지더라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대한민국’ 하고서 마지막 얘기를 못하고 고개를 떨궜어요. 지금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라고 만세소리를 못했던지 혹은 내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달라고 얘길 했던지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진해에 잠든 故전병익 이등병조 故김창학 삼등병조)
故최영섭: 갑판사관님, 저 내달 제대합니다. 그래? 제대하면 뭐하냐 그랬더니 장가가야죠, 그래 그러면서 자기 수첩에 요만한 사진을 보여주더라고, 제 색싯감입니다. (김창학 흉상을 만지면서) 창학아 의젓하구나, 이런 젊은 분들의 피가 녹아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때 고맙기도 하고 거룩하기도 하고,
--------------치열한 전투 속 나라를 지켜내신 여러분의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최원정: 먼저 떠난 전우의 흉상을 닦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노병(故최영섭/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
허준: 마지막 숨이 헐럭일 때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나라를 걱정한 故김창학 하사~사실 안타까운게~ 우리가 가난하지 않아서 포탄을 더 구했다면 포격연습을 더 할 수 있었다면 두 전사자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태상호: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배 따로 포 따로 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돈 없는 나라의 설움이죠.
이시원: 정말 어찌보면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셨잖아요. 제가 지금 여기 있는게 갑자기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게 확 느껴지네요.
최원정: 진짜 우리가 이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많은 분들의 목숨 덕분입니다.
정병준: 두 사람이 사실은 북한 특수 부대를 실은 수송선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부산항을 지킬 수 있게 되었구요. 한국 해군이 단독으로 첫번째 한국전쟁에서 해전을 승리로 기록하게 되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구요. 한국 전쟁에서 북한과 소련 군사고문단이 같이 세웠던 한국전쟁 초기 전쟁계획을 무산시킨 중요한 공로를 세운 승리였습니다.
태상호: 전쟁이 지속되면은 미군과 연합군의 병력이 어디로 지원이 될지 북한과 소련 군사고문단도 빤히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병력을 시작부터 600명을 부산항으로 보낸 거겠죠. 이들의 임무가 확실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미국이나 연합국이 장비나 병력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백두산함이 해전에서 패해서 부산 교두보를 빼앗겼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낙동강 방어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최태성; 실제로 7월 1일 여기서부터 해상수송작전이 개시되는데 7월 10일 부터는 수많은 병력과 물자들이 부산항을 통해서 수백만 명이 들어와요. 이 부산항을 우리가 잃어버렸다면 이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애요.
허준: 한 영국군 장군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유엔군이 들어가서 한국을 지켰다고 얘기를 하는데 나는 실제 그 전투에서 함께 하면서 대한민국은 국군이 지킨 것이다. 자신의 나라를 자신들이 지킨 것이다. 잊지 말아야 된다 이 말씀을 한 게 기억나는데 대한민국 국군의 희생을 6월 달 한 달만이라도 찾아보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병준: 개전 초기에 북한의 압도적인 화력과 공격작전으로 한국군이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엔이 개입할 수 있도록 6사단이 춘천과 홍천을 잘 방어하였구요. 또 보이지 않지만 백두산함이 부산항을 지킴으로써 한국전쟁 초기에 한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유지하고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벌어준 것은 국군의 필사적인 항전이었습니다. 북한의 압도적인 화력과 탱크에도 맨 몸으로 맞서면서도 전투의지를 잃지 않았다고 한 것이 북한과 소련이 세웠던 한국전쟁 초기의 군사작전 침공계획을 와해 시키고 좌절시키는 제일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기념관 회랑에 자리한 기념 조형물, 전사자 명비), 수많은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한 선열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무명용사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최원정: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국가 보훈처에서 신원이 확인되면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는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아직도 펼치고 있다고 해요. 많은 이름들을 찾아서 추모비에 새기게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오늘 이곳에 있으니까 굉장히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이시원: 정말 저는 뭘 해야 할까요?
최원정: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애국이에요. 좋은 작품활동 많이 해주시는 것도 애국의 길입니다.
허준: 항상 이 단어는 제 가슴 속에 새겨져 있죠. 자주국방을 잊은 나라는 절대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장병 여러분, 사랑합니다.
최태성; 사실은 이분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이게 산자의 예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우리가 흔히 왜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 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매번 이런 순간마다 기억하자 기억하자 하는데 저는 이런 걸 기록하신 분도 계시고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이유를 오늘 찾은 거 같애요. (정병준 교수를 향해) 교수님의 두꺼운 한국전쟁의 책을 다시 한번 펼쳐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병준: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한국군은 결코 전투의지를 꺾이거나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투의지가 한국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최태성: 우리 다시 한번 국군 장병께 박수 할까요. 감사합니다.
최원정: 특별히 한국방송 최초로 한국전쟁 극비자료를 보여주신 교수님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한국전쟁 기획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오늘 전쟁기념관에서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6회 한국전쟁 기획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에서 정리).
① 지난 2월,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은 우크라이나 해방을 명목으로 우크라이나를 기습 침공하였다. 모든 전문가들이 이 전쟁은 며칠 안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러시아의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항전을 이어가고 있다(5개월간 지속).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70여년 전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의해 국군은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넘을 수 없는 전력 차이로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고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② 1950년 6.25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전선은 무너졌다. 그 누구도 항복하지 않았고 단기간에 끝날 것 같은 6.25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됐다. 6.25한국전쟁 속에 영웅들이 있었다. 국가 보훈처는 2011년 6월부터 매달 전쟁 영웅을 선정 발표하고 있다. 금년 6월달은 최용덕 공군중장이다. 전쟁 당시 공군사관학교 교장, 김포지구 경비사령부 편성, 김포기지 방어, 전쟁은 철과 피의 전쟁이다.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한국군의 싸우겠다는 전투의지였다.
③ 북한군은 30일 이내에 남한을 점령한다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르게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춘천지역에서 진격을 멈춘다. 북한군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춘천지역을 지키던 부대는 육군 6사단, 사단장은 김종오 장군, 6사단이 북한군 2군단을 저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 10월에 서울에서 9.28 수복 이후 러시아어로 작성된 북한군 공격작전용 조선인민군 정찰계획을 노획하였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3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 단계는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한국군의 주력을 섬멸한다. 두번째 단계는 대전 광주 대구에 있는 예비부대를 격멸한다. 3단계는 부산에 미군이나 연합군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를 봉쇄하고 전쟁을 끝낸다. 전쟁 완료. 북한 김일성은 남침하면 군과 정부가 붕괴 되고 박헌영이 얘기한 것처럼 남한에서 좌익 동조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면 한국은 싸울 의지나 전투력 없이 붕괴될 것이다.
④ 러시아군이 작성한 작전개념도를 보면 서울 방향으로 북한군 1, 3, 4사단이 공격을 한다. 북한군 2, 12사단은 춘천과 홍천에서 수원으로 들어와서 한국군의 주력을 섬멸한다. 이게 1단계 작전 계획인데 난이도가 높았다. 북한 김일성은 이 계획대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으니 소련고문단을 주요 부대에 파견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북한은 10만명 이상이 동원되는 공격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 장군은 책으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50년 9월에 갑자기 2차 대전 당시 독소전쟁에 참전했던 대령급 군인들 20여 명이 북한군의 공격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스탈린과 그의 군사참모들은 이건 쉬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⑤ 춘천에서 북한군 2군단을 막아내어야 하는 국군 6사단, 서쪽에서 옹진군을 거쳐서 방어 라인은 뚫리고 있었다. 동쪽 라인만 뚫리면 소련과 북한의 목표는 90% 주력부대 괴멸이 눈 앞에 있었다. 국군 6사단은 9300여 명, 북한군 2군단은 무려 37,000여 명 4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북한군 2군단은 3개 사단 그리고 1개 고속기동연대가 있었다. 고속기동연대는 소련제 모터사이클을 180대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평원에서 사용했던 모터 사이클을 홍천-춘천과 같은 산악지대에 투입을 했다. 고속으로 달려서 수원으로 기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⑥ 북한군 2군단에는 SU—76 자주포가 총 48대가 있었다. 이게 국군 6사단의 심장을 떨리게 한 북한군의 무기였다. 당시 북한군의 T-34 전차는 국군에게 전차 공포증을 유발했다. 자주포는 원거리에 있는 적을 쏘기 위해서 곡사로 쏘는 반면에 전차는 근접 거리에서 직사로 정확하게 사격하는 무기체계다. 북한군은 전차와 비슷한 SU-76 자주포를 밀고 내려 왔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자주포에 위장을 했다. 6사단에는 전차도 자주포도 없었다. 6사단이 가진 강력한 화력은 105미리 곡사포였다. 방열을 해서 쏴야 하는 재래식 화포다. 포병전력으로만 춘천지역은 북한군이 국군에게 두 배 이상 우세했다. 홍천지역은 7배 이상 우세했다.
⑦ 국군은 군복이나 철모도 없어가지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들을 썼다. 6사단은 먹을 식량 조차 부족했다. 남아 있는 식량은 건빵 하루치 650상자,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방어를 했을까. 전력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 6사단은 이걸 막아냈다. 이것 자체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주인공은 6사단 소속 11명의 특공대다. 북한군 SU-76 자주포의 약점은 뚜껑이 없는 무기였다. 산악지역 고개를 올라오는 10대의 자주포가 있었다. 대전차 포대가 선두를 포격했다. 이 자주포가 멈추자 그 사이 특공대가 선두에 있던 1호 자주포와 후미 자주포 포탑 위로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투척했다. 자주포 몇대가 벼랑으로 떨어졌다. 9대 이상을 격파하였다. 특공대원들은 무사했다. 이 때 활약했던 조달진 일병이 2012년 7월 이 달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⑧ 6사단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 포병이었다. 포병공격으로 북한군 1개 보병대대를 폭파했다. 6사단은 북한군 동태에 세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6사단의 임부택 소령은 남침 징후를 사전 인지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군 6사단은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텨내다가 후퇴하였다. 춘천과 홍천전투가 있었기에 맥아더가 한강을 들러보고 파병하게 되었다. 이에 스탈린이 경악했다. 북한 2군단이 못 싸운게 아니라 국군 6사단이 너무 잘 싸웠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 장군이나 단위 부대장이 투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목숨 건 애국심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런 상황은 바다에서도 펼쳐졌다.
⑨ 1950년 6월 25일 밤 9시 30분경 부산 인근 해상에 정체 불명의 선박이 나타났다. 아무런 응답 없이 계속 남하한 괴선박, 바로 600여 명의 육전요원을 태운 북한의 무장수송선이었다. 그때 이를 막아선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대전에 와 있었는데 만약에 북한군이 6월 26일 부산에 상륙해서 부산시내를 장악하거나 소란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대통령이 갈 데가 없다. 첫번째는 심리적으로 붕괴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전투의지가 상실이 된다. 미군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도 없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북한군이 6월 26일 부산을 점령하였다면 춘천-홍천 전투와 한강 방어선 전투의 의미가 없어진다. 미군이 들어올 수도 없다.
⑩ 당시 해군은 어선을 개조하거나 일본이 버리고 간 연안 경비정을 재활용한 배들이 전부였다. 해군에게 포가 달린 전투함은 단 한 척도 없었다. 해군사관학교가 1949년에 개교하였다.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전투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모금운동을 통해 만5천 달러를 모았다. 여기에 국고 4만5천 달러가 합쳐져서 총6만 달러를 마련 미국으로 건너가 450톤 급의 전함을 구매해서 백두산함으로 명명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 전투함이다.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샀고 괌에서 포탄 100발을 샀다. 진해항으로 귀향한 날이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이었다. 다음날 60명의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북한 무장 수송선과 마주하였다.
⑪ 26일 자정 해군 본부로부터 격침명령이 떨어졌다. 백두산함이 사격을 할려면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다. 하나는 조명을 비춰서 적함을 밝히던지 다른 방법은 적함의 화염을 보고 쏘는 거다. 함장이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최대한 가까이 간다!! 왜냐면 그 귀한 포탄을 정확히 맞춰야 되고 최대한 명중률을 높여야 된다. 적함 1 킬로미터 까지 접근한다. 치열한 포격전이다. 우리도 쐈고 우리도 맞았다. 계속 쏘고 맞고 쏘고 맞고 하는 과정 속에서 거의 포탄이 떨어져갈 즈음에 드디어 한 발이 적함 중앙 하부를 때렸다. 적함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새벽 1시 반경 침몰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대한 해협,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 결국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젊은 승조원들, 진해에 잠든 故전병익 이등병조 故김창학 삼등병조,
⑫ 해군 백두산함이 북한 특수 부대를 실은 수송선을 격침시켰기 때문에 부산항을 지킬 수 있었다. 한국 해군이 한국전쟁에서 단독으로 첫 해전을 승리하였다. 북한과 소련 군사고문단이 세웠던 전쟁계획을 무산시킨 중요한 승리였다. 만약 백두산함이 해전에서 패했다면 낙동강 방어선도 없다. 백두산함이 부산항을 지킴으로써 미국이 개입할 수 있었다. 실제로 7월 10일부터 부산에서 수많은 병력과 물자들이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유엔이 개입할 수 있도록 6사단이 춘천과 홍천을 잘 방어하였다..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전투의지를 꺾이거나 잃지 않았다. 그런 전투의지가 한국을 구원하는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