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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조, 나의 시론
이우걸 / 시조시인
‣ 시작하며
전통 그리고 언어미학적 관점
나는 중농의 가정에서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1946년은 해방 이듬해이고 청록집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셨고 어머니는 시나 가사 외우기를 좋아하고 생활화하시는 분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외울 거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형님들 국어책에서 고시조나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비료포대 종이나 신문지에 붓글씨로 써 드리곤 했다. 그런 가정 분위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책읽기를 좋아했고 가끔 혼자서 시를 써서 외워보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고 처음엔 말없이 지켜보시기만 하셨다. 그러나 고등학교 다닐 때쯤엔 오히려 화를 내시며 글 쓰는 일은 집안을 망치는 일이라고 타이르시곤 하셨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헌 책 장사가 가져온 책을 운동장에 펼쳐놓고 팔곤 했다. 대부분 문학책이었다. 모윤숙의 『렌의 애가』, 한하운의 『보리피리』, 신석정의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과 청록파 시인들의 시집, 김춘수의 『세계 현대시 감상』, 김소월, 장만영, 김용호 시인들의 시집을 사서 많이 읽었다. 내 문학은 그런 독서를 통해 조금씩 깊어갔지만 어디까지나 취미로 생각했다. 경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한 것도 문학을 취미로 생각하는 나의 다짐을 현실화시킨 결정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나의 결정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어수선한 1967년 8월 14일 나는 육군에 입대했고 군대생활 3년 내내 작은 형님은 박봉에도 《현대문학》을 매달 사서 부쳐 주셨다. 나는 결국 습작을 했고 가끔 독서일기를 쓰기도 했다. 1970년 복학한 뒤에도 법학과 학생들의 교과서를 구해 읽으면서 사법고시를 막연히 생각했다. 일학년 가을 어느날 나는 『고시계』를 사러 갔다가 《현대시조》라는 잡지를 사왔다. 그날 밤에 비가 내렸고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너무나 외로워 《현대시조》를 꺼내 읽었다. 김상옥, 이근배, 장순하 시인들의 작품이 있었지만 내 눈엔 이영도의 ⌜모란⌟이 환하게 들어왔다.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가득하고/ 가슴 열면 몰려드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흔든다.”
생의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하는 내게 ⌜모란⌟이 시조를 쓰게 했다. 결국 시조작품 2편을 써서 학보사 투고함에 넣었다. 그 작품이 활자화되고 김춘수 교수의 고평을 받으면서 나는 고등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조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교육과 역사전공인 나는 학과 공부에 큰 흥미를 갖지 못해서 늘 창작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1년에 두 번씩 학보에 발표되는 내 작품은 김춘수 교수의 때로는 자상하고 때로는 가혹한 비평에 의해 단련되어 갔다. 김춘수, 김종길, 조지훈, 조병화 선생의 시론집을 구해 읽고 영남대 박철희 교수께 평론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결국 1973년 《현대시학》 2월호에 ⌜이슬⌟, ⌜지환⌟이란 작품으로 첫 추천을 받았다. 이영도 선생의 선이었다. 작품 제목이 환기하는 바와 같이 아름다운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그림 그리기가 내 습작과정의 전부였다.
그러나 릴케에 경도되어있던 김춘수 선생은 스스로의 작품과 비평으로 언어에 대한 각성과 내면 의식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냥 사물 그리기는 물론 아니었다. 우리나라 시는 모더니즘시, 리얼리즘시, 전통서정시가 있다고 봤을 때 나는 전통서정시 이상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작품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영도 선생은 2회째는 ⌜편지⌟, ⌜설야⌟, 3회째는 ⌜도리원 주변⌟등 서정적인 작품을 추천해주셨다.
1977년 첫 번째 시집 『누군가 와서』를 내었지만 그 시기의 대표작으로 1981년 두 번째 시집 『빈 배에 앉아』에 실려 있는 다음 작품을 들 수 있다.
나는 그대 이름을 새라고 적지 않는다
나는 그대 이름을 별이라고 적지 않는다
깊숙이 닿는 여운을
마침표로 지워버리며
새는 날아서 하늘에 닿을 수 있고
무성한 별들은 어둠 속에 빛날테지만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기인 편지. ⌜비⌟ 전문
1983년 중앙일보 제정 제2회 중앙시조대상 심사에서 이 작품과 유재영의 ⌜월포리 산조⌟가 대상없는 신인상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상옥, 장순하, 박재삼 선생이 심사위원이었다. 프랑스 시인들의 그림자 혹은 박목월 시풍이 스며있다고 심사위얘기하기도 했고 장경렬, 이종문, 엄경희교수등은 여러 방법으로 이 작품을 해독했지만 나는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 상승의 이미지와 하강의 이미지를 그려 보이면서도 결국 가을비는 부치지 못하는 연문(실로폰 소리)고 표현한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외국 시나 청록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란 아름다워야 한다는 내 지론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시학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물관에 놓인 ⌜잔⌟이나 ⌜뮤즈⌟를 노래하면서 또는 ⌜봄비⌟나 ⌜단풍물⌟을 노래하면서 한편으로 무언가를 잊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다름 아닌 현실이었다. 그런 의식은 60년대 시인들의 참여시를 읽으면서 또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나 교련 반대 데모를 하면서 늘 느끼곤 했다. 그러나 성공한 참여시처럼 내적으로는 치열하지만 표현만은 승화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그런 계열의 작품으로 ⌜팽이⌟,⌜나사·2⌟,⌜실업⌟ 등을 발표하면서 콤플렉스 극복을 위해 몸부림쳤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전문
팽이는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색깔을 칠해 돌려도 결국 빨간색이 되는 것을 어릴 때 보았다. 나는 겨울에 언 논에서 팽이를 돌리며 놀았다. 내가 때리는 채찍을 맞을 때 팽이는 팽이의 역할을 한다. 그 기억을 떠올려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자행된 유신 시대를 표현하고 싶었다. 수많은 양심수들, 투옥된 학생들은 팽이처럼 자신을 희생시켜 정의를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유신 시대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팽이의 역할을 자임하여 희생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작품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썼지만 평론가, 자유시인, 시조시인, 이름 없는 독자의 호응으로 내 대표작이 되어있다.
1
나사가 나사일 땐 나사인 줄 몰랐다
병든 자본의 가지 끝에 앉아서
마지막 조립을 위해 피 흘리던 손이여
무너진 계단 밑에서 잠이 든 너를 보며
으깨진 사체 속에서 일어서는 너를 보며
어둡고 아름다운 세상의
나사를 생각한다.
2
일기를 쓰기 위해 안약을 넣는 저녁
따스함도 희망도 애써 넣어 보지만
창밖엔 수의도 없이
떠도는
7월이
깊다. ⌜나사·2⌟전문
이 작품은 1996년에 간행한 시집 『사전을 뒤적이며』에 실려 있지만 1995년에 발표한 것으로 그 해 연말에 시상된 제14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작이다. 일부러 부제를 달지 않았더니 검정삿갓이란 익명의 논자로부터 이런 추상적인 작품으로 중앙시조대상을 받는 것은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 때 심사위원은 조남현 서울대 교수와 장순하, 이근배 시인이었다.
나사는 모든 기계의 기초 단위다. 어떤 기계도 나사 없이는 그 기계가 기능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 가장 분노했던 것은 이미 금간 건물이 붕괴를 예고했는데도 순간의 이익에 집착하여 철수 명령을 내리지 못한 병든 자본가였고 가장 눈물겹고 애석한 사람들은 끝까지 맡은 구역을 지키다 매몰된 상업고등학교를 금방 나온 어린 여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사원으로 취직한 뒤 받는 월급을 먹는 것까지 아껴가며 시골 어머니께 송금했다는 미담이 전해졌을 때 전 국민이 가슴 아파했다. 그 사고 뒤 곳곳에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인내력 있던 직원들은 불굴의 의지로 생명을 회복하는 기적이 있었다. 그 풍경을 T·V로 바라보면서 쓴 작품이다. 조금도 추상적이지 않은 현장의 시다.
길이 짧아졌다
제출할 서류가 없다
커서는 신호등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화면엔
초점도 없는
허공이
걸려있다. ⌜실업⌟ 전문
이 작품은 2003년에 간행한 시집 『맹인』에 실려 있지만 1997년 이 땅에 불어 닥친 IMF 이후에 자행된 몸서리쳐지는 실업 사태를 바라보며 쓴 작품이다.
고시조건 현대시조건 시조라는 이름 속에는 시대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명령이 들어 있다. 가령 이방원의 하여가나 그 하여가에 단심가로 답한 정몽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무너지는 고려와 신생하는 조선의 운명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현대시조는 음악과 사실상 결별한 채 시로 읽혀야 하기 때문에 서정성과 현대성 혹은 시대성을 얼마나 조화시킬 수 있는가가 성공의 열쇠가 될 수밖에 없다.
아포리즘적인 시, 혹은 초월의 미학
시조는 시대와 동거하는 운명을 타고난 시다. 그러나 모든 시조가 천편일률적이라면 시조의 정원이 얼마나 초라해질 것인가. 15, 16세기의 학자들은 시조에 훈민 혹은 교화의 기능을 실었고 황진이나 홍랑 같은 기녀들은 영원한 절창의 사랑 노래를 빚었다. 나는 최근 단형시조와 인생의 지혜가 담긴 아포리즘적인 시조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다. 이미 《현대시학》 《열린시학》 등을 통해 작품과 함께 그 견해를 피력해 왔지만 그 실적을 한 권의 시집으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번에 묶은 제8시집 『아직도 거기 있다』는 기존 단형시조 40편과 신작 30편을 묶은 것으로 한 권 전체가 단형시조다. 이 시집에는 세상을 지혜롭게 통찰할 수 있는 아포리즘적 시구가 소수 담겨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노년에 들어서면서 문득 이런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길이 가파른 곳엔
반드시 샘물이 있다
상처가 깊을수록 깊어지는 사랑이 있듯
어둠을 뚫고 빛나는 저 별빛의 일획으로 ①
껴도 희미하고 안 껴도 희미하다
초점이 너무 많아
초점잡기 어려운 세상
차라리 눈감고 보면
더 선명한
얼굴이 있다 ②
길은 달리면서 바퀴를 돌리지만
바퀴는 돌면서 길을 감고 있다
모나고 흠진 이 세상
둥글게 감고 있다. ③
①은 ⌜희망⌟이란 제목의 시조이고 ②는 ⌜안경⌟이란 제목의 시조이고 ③은 ⌜바퀴는 돌면서⌟라는 제목의 시조다. 시공을 초월해서 읽혀지길 바라면서 쓴 것이다. 특히 작품③은 어느 지면에도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이번 제 8시집 『아직도 거기 있다』에 담았다. 오늘날 자유시는 지나친 장형화 경향을 띄고 있다. 그리고 지나친 산문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고 주제 의식도 미약해진 느낌이다. 이러한 상황의 초래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변화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조는 절제미를 살리고 운문 미학의 묘미를 극대화하고 주제 의식도 건강하고 분명하게 해서 자유시와 또 다른 변별성과 존재 이유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조의 특장이 있을 때 한국 현대시는 현대자유시와 현대시조를 포괄해야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다시 휴머니즘을 생각하며
⧫ 왜 휴머니즘인가
내가 휴머니즘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부산 어느 일식집에서 초정 선생이 들려주시던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걸인⌟을 알고 난 뒤부터였다. 그 분이 들려주신 ⌜걸인⌟은 다음과 같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걸인은 거리에 서서 적선을 호소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한 신사는 그 걸인 앞에 가서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걸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시하는데 그 신사의 주머니엔 그날따라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자 당황한 신사는 차가운 걸인의 손을 꼭 쥐어주며
“어쩌지요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서요?”
라고 하곤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런데 그 걸인이 다시 와서 그 신사의 손을 잡으며
“나으리, 제게 더 이상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신사는 자기가 걸인에게 무언가를 준 것이 아니라 그 걸인이 자기에게 무언가를 주고 갔다고 생각했다.
초정 선생은 자신의 시를 잘 외우기도 했지만 미당의 시도 좋아해서 주례사 대신 미당의 ⌜무등을 보며⌟를 외운 적도 있었다. ⌜무등을 보며⌟도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시다. 나는 시에서 진솔함과 인간애, 그리고 성찰이 있으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했고 그 원동력이 휴머니즘이라고 믿었다. humanism은 라틴어 humanista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모든 인간적인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 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을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우리가 잘 아는 14세기말, 이탈리아 자치 도시에서 시작하여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간 문화운동으로 인문주의자 보카치오는 토속어로 서사시를 썼으며 살루타티는 페트라르카처럼 도덕론과 정치학에 관한 필사본을 모았고 단테는 신곡을, 페트라르카는 그의 애인에게 인간 원초의 감정으로 서정시를 썼다. 결국 신께 지배당한 중세를 해방하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의 자유 의지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정신적 태도를 포괄했다. 17,18세기에 와서는 휴머니즘이 갈릴레리, 코페르니쿠스, 뉴턴 등에 의해 발전된 근대 과학과 결합되었다. 근대 서양 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종교적인 ‘자연의 빛’이 아니라 타고난 ‘자연의 빛’ 즉 양식(common sense)에 의한 철학의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 19세기에는 니체와 톨스토이의 생철학, 하이데크, 야스퍼스의 실존주의, 제임스, 듀이의 실용주의 등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본성이 훼손되고 인간의 자율성이 억압당할 때 휴머니즘은 수많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서 인간의 인간됨을 지켜야하고 지킬 것이다. 과학의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 소외의 문제, 빈부의 갈등을 치유하는 것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적지 않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시인들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미학의 동굴에 빠지거나 고뇌 없는 언어로 세상을 그려서는 안 된다. 시는 감동이 필요한 것이다. 중견 시인 손택수, 문태준이나 신예 시인 박준, 황인찬의 작업에 박수를 치는 것도 잃어버린 정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