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제비
강성희(리디아)
나는 평소에 현금을 많이 소지하지 않는다. in my porket 뿐만 아니라 집에도 현금을 잘 두지 않는다. 웬만하면 신용카드나 현금카드를 사용하는 쪽이다. 돈이 필요한 거의 모든 장소에서 카드가 통용되니 굳이 현금을 찾아 소지할 필요도 없고 은행이나 ATM 기계에서 돈을 자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편하기도 하다.
미사 예물로 쓰기 위한 현금을 조금 준비해두고 지갑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만 원 미만의 현금만 들고 다닌다.
여자들은 대체로 들고 다니는 핸드백의 종류가 많다. 직장 여성이었던 나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할 때 마다 입을 옷과 핸드백 선정을 고민해야 했다,
옷차림에 어울리는 핸드백으로 바꾸어 들 때 마다 지갑을 이 핸드백에서 저 핸드백으로 옮기는 일이 귀찮았을 법 한데 젊은 날에는 그 일을 기꺼이 하고 다녔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핸드백을 바꾸며 지갑을 옮겨 넣는 일을 자주 잊어버렸다. 지갑이 없는 줄도 모르고 마트에서 장거리를 잔뜩 골라 계산대에서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창피한 일을 몇 번 당한 후에는 핸드백마다 아예 지갑을 하나씩 넣어 두곤 했다.
그 지갑 속에는 보통 이삼만 원 지폐가 들어 있었을 뿐 큰돈은 들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남편이 부의금 봉투를 만들면서 찾아 둔 현금이 없다며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 이 핸드백, 저 핸드백의 지갑을 들쳐 내어 끌어 모은 돈이 십만 원이 넘었다. 남편은 반가워하며 나의 비자금 모으는 수법이 교묘하다며 농담을 했다. 나이 앞에 6자를 달 세월만큼 인생을 산 지금은 옷차림이나 핸드백 같이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일에 신경에 무디어진 것 같아 새삼 편하다. 어떤 옷이든 편한 옷이 좋은 옷이고, 여기 저기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고 남편에게 지청구 받던 핸드백도 꼭 필요한 몇 개만 남기고 모두 없애 버렸다. 지갑 바꾸는 일도 귀찮아 한 개의 지갑만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나마 요즘은 휴대폰 커버에 딸린 간이 지갑이 있어 작은 손지갑에 손이 가는 일은 드물다.
나는 평소에 비자금을 따로 모아 보겠다고 여기 저기 돈을 숨겨본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비자금을 만드는 불법적? 사회적? 제도에는 기꺼이 참여하여 비자금을 보아본 경험은 여러 번이다.
월급을 현금으로 받던 시절, 월급날에는 선생님들 끼리 제비뽑기 계를 했다. 월급에서 얼마 씩을 떼서 그 자리에서 일번 제비를 뽑은 선생님께 몰아주는 그 자리 적금이었다. 자신이 몇 번 순번이 될지는 그 날 당첨된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당첨된 선생님 외에는 다음 월급날 제비를 뽑아 봐야 그 날 어느 선생님이 당첨될지 아는 식이었다. 한 학년의 학급수가 열 학급이 넘는 큰 학교에서는 끝번까지 가서 당첨 제비가 되면 일 년을 기다려야 비자금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다음 달에는 목돈을 내가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제비뽑기의 아슬아슬한 기대감으로 한 달, 한 달, 일 년이 후딱 지나가곤 했다.
이 돈을 타면 무엇을 할까? 선생님들은 저마다 계를 시작하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몇 번 목돈 비자금을 모아 흐지부지 써버렸다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어느 해는 금반지계도 하고, 어느 혜는 코끼리 밥솥 계도 했다. 나는 금반지니, 코끼리 밥솥이니 물건을 장만하는 계가 좋았다. 현금으로 목돈을 받는 경우에는 그 돈은 절대 나 혼자만의 비자금이 되지 못했다. 몇 달은 남편 모르게 내 미래의 비자금이 되어줄 그 목돈 마련의 비밀을 잘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미래가 현실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는 나의 대견함을 남편에게 자랑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 남편이 안다고 해서 내 돈을 빼앗아 가거나 내 놓으라고 말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남편 모르게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을 남편은 엄청 기분 좋아하고 대견해했다. 나보다 더 뿌듯해하는 남편을 보며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나는 한 번도 성공적인 비자금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게 인간적이고 흥미로웠던 비자금 만들기 프로젝트도 금융 산업에 컴퓨터 기술이 도입되면서 사라져버렸다. 현금을 만져 볼 수도 없이 명세서 목록 종이만 받아보던 시대가 되더니 나중에는 명세서도 없이 봉급 입금액 숫자만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늑대를 피하면 범을 만난다고 하더니 내가 범이 되었다. 스마트 폰 시대의 비상금 모으는 방법은 더 은밀해지고 세련되어졌다. 월수입이 들어오는 입출금 통장 외에 입출금 통장을 하나 더 만들어 한 달 생활비를 쓰고 남은 돈이나 자식들에게 받은 용돈, 적금 탄 돈처럼 특별한 돈은 비상금 통장으로 넘겨 버린다. 은행에 갈 필요도 없고 소문날 염려도 없다. 다람쥐 도토리처럼 잊어버릴 일도 없다. 혹시 잊어버릴까 걱정되어 남편의 메모장에도 적어둔 비밀번호만 아니면 스마트 폰 속의 쌈지 주머니는 내 비상금을 지켜주는 안전하고 든든한 금고이다. 손에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는 재미가 사라져 가끔은 허무할 때가 있긴 하다. 비상금의 맛은 꼬깃꼬깃 접어서 숨겨둔 종이돈을 펼 때의 흐뭇함에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끝) 2019.11.17
첫댓글 행정실이 없던 시절, 제가 봉급계를 맡았을때 남선생님들의 봉급 봉투 명세서를 요구하시는데로 만들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모님껜 무척 죄송하지만 그 시절이 그래도 사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내의 목돈 모으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태도에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제비뽑기 계는 비자금 조성이 아닌 일종의 목돈 마련을 위한 일종의 적금 같은 것으로 월급을 현금으로 받던시절 한번쯤 격어본 일입니다. 그래도 차례가 되어 목돈을 거머쥐면 갑자기 공돈이 들어온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시절 봉급날 제비뽑기 계를 많이 했지요. 봉급을 현금으로 받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선생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비자금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자금에 대해 생각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자금 규모도 중요한데 통상적으로 무리없이지출 할 정도를 넘어서는 금액이라고 봅니다.
재직시 급여의 3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후대책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시대 보다 아날로그 시대가 사람 사는 재미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비뽑기, 사다리 타기 등으로 즉시 현금이 오가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일부 직원들은 도박을 좋아해서 가정 경제에 다소 지장을 주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부간의 이해와 아량으로 비자금도 잘 모으셨으니 이제 노후를 편하게 보내셔도 될 듯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삶의 이야기, 누구나 겪어왔던 단편적 이야기들이 나와 얽혀 옛날을 그리워하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보다는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보니 누런 봉투에 넣은 월급을 받을 적이 생각납니다. 제법 두툼한 봉투를 받으면 한 달 동안 일한 보람도 느꼈습니다. 세월이 흘려서 입금된 통장을 받으니 실감이 덜 하더군요. 같은 돈인데 말입니다. 담백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학교에서 현금을 나눠 누런 봉투에 넣어주던 월급이 생각납니다. 저도 계를 한 기억이 납니다. 복잡해진 금융.. 비밀번호라도 메모장에 잘 적어놓아야 겠습니다. 많지 않은 비자금이라도 관리하려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