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 16:17~27 / 복음의 권위를 강하게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
2016.10.14 (금) 롬 16:17~27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기 위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일일히 부르며 안부를 물으며, 서로 문안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다시 권하기를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거슬러 분쟁(纷争)을 일으키거나'란 '남의 말이나 가르침, 명령 따위에서 기대에 맞지 않거나 일정한 기준에서 벗어나, 서로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고 복잡하게 다투거나'의 의미다. 그리고 '거치게 하는' 것은 '무엇에 걸리거나 막히게, 또는 마음에 거리끼거나 꺼리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바울은 이런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당부했다.
'살피라'는 것은 '주시(注视)하라'는 것이다. 곧 '어떤 일에 온 정신을 모아 자세히 보거나, 눈여겨 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장차 분쟁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셨음을 유의해야 한다(눅12:51~53).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미리 살펴 분쟁의 위험에 휘말리지 않도록 삼가 조심할 것과 그들로부터 '떠나라'고 당부했다. 좀더 과감하게 그들과 '교류를 단절하라'는 권면이다. 마귀는 항상 성도를 이간질하여 서로 분쟁하게 하여, 핑계와 책임전가로 마음이 나뉘어 서로를 서먹하게 하여 격리(隔离)시킨다. 그런 마귀의 전략에 휘말리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다.
성도가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나누어지게 하는 것은, 마귀의 총체적 전력에 휘말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마귀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켜,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셨고(눅10:27),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말씀도 하셨다(눅 6:35). 따라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는 결코 다툼을 일으켜 분쟁하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을 용납하며, 서로를 세워 주의 온전한 한 몸을 이루게 한다(엡4:16).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다. 분쟁은 이기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일에 몰두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어, 온갖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그래서 은근히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한다. 이것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뱀이 인류의 조상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했던 전략과 동일한 전략이다. 결국은 이런 마귀의 전략에 휘말린 교회는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펴,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당부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렸다'며,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쁘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그들을 격려하며,'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하여, 하나님께서 태초의 복음(창3:15)을 통해 승리를 약속하심을 이루심에 대한 믿음을 피력(披沥)했다. 따라서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후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했다.
바울은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하며,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했다. '문안'은 서로의 마음을 열어 교류(交流)하는 커뮤니티(community)를 나타낸다. 바울이 교류하는 커뮤니티의 폭은 매우 넓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고, 모두와 쉽게 어울려 교감(交感)했다.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쌍방적인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온전한 한몸을 이루기 위해 힘썼다. 이 일로 서로의 관계를 더욱 승화(升华)시켰다.
이제 바울은 '나의 복종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증거했다. 여기서 '복종(服从)'은 '거절할 수 없는 순종'이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복음의 권위를 나타낸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 하여(고넌9:16), 복음의 절대적인 권위를 드러내며,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가 부득불, 곧 하지 않을 수 없어 혹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마땅히 해야 할 일라고 증거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福音)의 권위를 강하게 증거했다. 여기서 권위는 '힘'이다. '힘'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하는 힘이 복음의 권위다. 따라서 바울은 이런 복음의 권위는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엡3:9), 이제는 나타내신바 된 것이라'했다. 인류 구원의 길이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 길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된 것이라 증거했다.
또한 이런 복음의 권위는 '그 신비의 계시에 따라'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려고 쓰는 핀지를 마무리하며, '이 복음으로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축도하여 결론을 맺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태초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거했다.
[기도]
오늘은 말씀을 묵상하며 복음의 권위를 강하게 증거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원하옵기는 저로 하여금 복음의 권위를 마땅히 바르게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온전할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6:1~16 / 서로를 사랑으로 문안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2016.10.13 (목) 롬 16:1~16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뵈뵈'를 추천하는 말로 시작된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다. 겐그리아는 고린도의 동쪽으로 약 15km 쯤 떨어진 사론만(湾)의 항구로, 아시아 지역과 물물교류(物物交流)와 여객운송(旅客运送)으로 제법 활발했다. 여기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찍 서원(誓愿)이 있어 머리를 깍았다(행18:18). 그 때 교회가 세워졌고 뵈뵈는 그 교회의 일꾼이었다. 이런 뵈뵈를 바울은 '우리 자매'라고 불러 복음으로 맺은 친분관계(亲分关系)가 매우 친밀(亲密)했음을 나타내며, '너희에게 추천(推荐)한다'고 했다. 이는 그의 신뢰를 나타낸 것으로 추천은 '어떤 조건에 적합한 대상을 책임지고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의 문맥(文脉)으로 보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내기 위해 쓴 이 편지를 뵈뵈로 하여금 전달하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뵈뵈는 여인이었고, 로마에 간 것도 바울의 편지를 들고 간 초행(初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주라'며, 그를 보호하고, 편의(便宜)를 돌봐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칭찬했다.
이어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낼 편지글을 마무리하면서, 자기가 아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列举)하며 문안(问安)했다. 여기서 '문안'이란 '안부(安否)하다'의 의미다.'어떤 사람이 편안하게 잘 지내는지, 그렇지 아니한지에 대한 소식을 전하거나 묻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가장 먼저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같은 인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다.
이들은 부부(夫妇)로 바울이 그들을 처음 만난 곳으 고린도였고, 업(业)이 같아 동거(同居)하여 일하기도 했다(행18:3). 그런 그들이 로마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로마의 성도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를 수 있어 바울은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다'며, 그는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한다'고 칭찬하는 말로 그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바울은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했다. 이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자기 집을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는 장소로 공개(公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교회(教会)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하면 떠 올리는 건물이나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 공동체로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임이다. 따라서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모든 이들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
더불어 '내가 사랑하는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며,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며 안부를 물었고,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며,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칭찬했다.'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했고,'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고 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했고, '아리스도불로의 권속'과 '내 친척 헤로디온', 그리고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며,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고 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며, 특별히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했다.
여기서 '루포'는 예수님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十字架刑)의 선고(宣告)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오르시던 중에,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여 지게 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이다(막15:21). 그가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서 살았는데,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들은 서로 친밀하게 지냈었다.
바울은 계속하여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했고,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고 했다. 이렇게 일일히 그 이름을 나열한 사람만 해도 25명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히 물으며, 마지막에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는 말로 안부를 묻는 것을 마무리했다.
오늘 바울이 안부를 물은 로마의 성도들은 아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처럼 한때 바울과 동고동락(同苦同乐)했던 동역자와, 아시아인으 로 첫 개종자(改宗者)였던 에베네도, 바울이 '내 친척'이라 불러 유대인이었을 것이 분명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그리고 헤로디온. 로마의 종(奴婢)들 사이에 흔한 이름 이었던 암블리아와 가이사의 가족 명부에 흔히 발견되는 평범한 로마의 종이 가졌던 이름의 우르바노로 출신(出身)이 짐작되는 인물이 포함되었다. 이 외에 헬라인으로 짐작되는 스다구와 당시 유다의 유명한 희극배우였던 아벨레, 그리고 대체로 가문의 노예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리스도불로나 나깃수의 권속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들을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다. 모두 주 믿는 자된 성도로 사랑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일히 안부를 물으며,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성도가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할 것을 권고하며, 이런 사랑의 표현을 통해 서로가 그리스도의 한 몸된 공동체로서 돈독(敦笃)한 관계를 이루어야 할 것을 권면한 내용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었다.
오늘의 교회에 이렇듯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문안하는 아름다운 덕이 나타나야 한다. 이것을 점검하여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많은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오히려 성도들이 서로 불목(不睦)하여, 사랑은 고사하고 서로 분쟁하여 다투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한 울타리 안의 건물의 서로 다른 공간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웃지 못할 난센스(nonsense)가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내년이 말틴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라 하여, 여러 가지 행사들이 화려하게 계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사를 준비하는 일에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의 이벤트(event)가 준비될 뿐, 교회는 전혀 변화될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별무소용(别无所用)의 행사로 교회와 사회를 더욱 시끄럽게 할 것만 같은 우려감(忧虑感)이 자꾸만 높아진다. 왜냐하면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자타가 공인(公认)하는 교회지도자들의 작태(作态)가 그런 우려를 불식(不息)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교계(教界)의 지도급 인사들의 부적절하고 몰염치한 일들이 범람(泛滥)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사실유무(事实有无)를 떠나 도의적(道义的)인 책임을 지고라도, 조용히 백의종군(白衣从军)하듯이 자숙(自肃)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물론 무고(诬告)일 수 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을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라 한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사필귀정(事必归正)이다. 하나님은 결코 의로운 자의 파멸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아무도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 놓지 못하고 있다. 추종자들로 인(人)의 장막에 둘려 쌓여 세상의 비난에 너무 의연(依然)하다. 더 감춰진 사실이 속속 들어나는데도 가증(可憎)스럽게 감미(甘美)로운 말로 스스로 변명하는 파렴치한 모습이 왕왕(往往) 드러나고 있어 안타깝다.
참으로 모든 성도가 서로를 사랑으로 문안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서로가 사랑으로 서로를 염려하며 안부를 묻는 그런 아름다운 풍토가 오늘의 교회에 새롭게 조성되어야 한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성도들의 안부를 묻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여겨졌다. 이런 안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진정한 마음의 교류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문안하는 그런 아름다운 풍토가 새롭게 조성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참 하나됨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5:22~33 /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옵소서
2016.10.12 (수) 롬 15:22~33
사도 바울 당시의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들을 지배하는 대로마제국의 수도로, 세계 모든 나라의 다양(多样)한 이방인들이 모여 번화했다. 이런 로마는 복음선교의 최적지(最适地)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었던 것은 당연지사(当然之事)였다. 특히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正体性)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로마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하지만 로마에는 이미 주 믿는 성도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떤 경로로 주 믿는 성도들이 되었는지는 여러 가지 추론(推论)은 가능하지만,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바울은 항상 복음의 불모지(不毛地)에 집중(集中)했다. 그것이 그의 사역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서쪽을 향하여 땅 끝까지 가고자 함이 그의 선교적 방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서바나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다.
서바나는 오늘의 스페인이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오늘처럼 '지구는 둘굴다'라고 믿지 않았다. 땅은 평평하여 지중해의 서쪽 끝에 있는 서바나를 땅 끝이라고 믿었다. 서바나의 서쪽에는 지중해보다 더 커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서양을 지나 또 다른 땅이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오매불망(寤寐不忘)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서바나는 필연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었기에 그곳에 가고자 하는 열망(热望)으로 가득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서바나로 가는 길에 로마에 들려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는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보다는, 로마가 정치, 경제, 교육은 물론 지리적으로 복음의 서진사역은 물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매우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평소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는 로마는 크게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최대의 사명(使命)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라며,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다(롬15:20). 그런데 로마에는 가고 싶어했다. 로마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그래서 서바나로 가는 길에 꼭 들리고 싶어 했다.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바울은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바울이 로마에 가는 일은 자꾸만 지체되었다. 그 이유를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사역의 우선순위(优先顺位)가 정확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의 기준이 분명했다. 따라서 바울은 가고 싶은 로마지만 그 전에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자원하여 기쁘게 드린 연보를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로마로 갈 계획은 또 지체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의 선행을 구태어 로마의 성도들에게 밝힐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밝힌 것은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하여, 이방인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빚진 자가 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빚'이란 '갚아야 할 은혜'다. '은혜'란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이다. 그렇다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베푼 은혜란 무엇일까?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은 본래 이방인이었지만,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유대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인 이스라엘의 줄기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 그 메시야의 대속하신 은혜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주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구원을 주셨다. 곧 복음이 빚이다. 그래서 그 복음의 빚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의 선행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한 일이라' 하여 로마의 성도들도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을 본 받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계속하여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며, 자신의 이후에 대한 계획을 다시 밝혔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의 연보를 열매라고 하여, 이 열매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할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행위가 씨앗되어 많은 교회들이 본받아 더 풍성한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소망했다.
이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다시 친밀하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며,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며 도고(祷告)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는 기도로 끝을 맺었다.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자기가 먼저 기도했고, 동일한 기도의 제목을 나누어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기도가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더불어 서로의 마음에 편히 쉼을 얻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소망의 기도로 서로의 마음이 교류되기를 바울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기도]
날마다 주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로 하여금 사역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분별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진정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의 순서에 혼란이 생기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주의 뜻을 먼저 알아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집중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5:14~21 / 성도의 바람직한 자랑
2016.10.11 (화) 롬 15:14~21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내 형제들아'라고 친근(亲近)하게 불렀다. 하지만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까지만 해도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그렇게 친근한 사이는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도 '주 믿는 성도들이다'라는 사실이 그들을 만나고 싶어 로마에 가고 싶을 정도로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어 그렇게 친근하게 불러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칭찬(称赞)했다. '선함'은 '마음과 삶이 정직함'이다. 또한 '모든 지식'은 '성도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이다. 로마의 성도들은 이런 것들로 가득하여 충만했다. 그리고 서로가 권하여 바른 신앙의 유지를 위해 힘썼다. 이런 소문을 전해 들은 바울은 그 소문을 '나도 확신한다'며 칭찬했다.
'칭찬'이란 '좋은 점이나 착하고 훌륭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상대방을 인정(认定)하고 신뢰(信赖)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도 복음을 듣고 '주 믿는 자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을 인정하고 신뢰하여 칭찬한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그들을 칭찬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칭찬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칭찬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칭찬은 사람을 고무(鼓舞)시켜 '힘을 내도록 격려하여 용기를 북돋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원했다. 그것이 바울의 속내였고, 그들을 칭찬한 이유였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다'고 했다.
바울은 자기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正体性)이 분명했다(롬11:13). 그래서 그는 스스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고 주장했다(딤전2:7).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라고 고백했다. '은혜(恩惠)'란 '자발적이고 조건없이 베푸는 사랑이다. 그래서 은혜의 주권(主权)은 받는 쪽에 있지 않고, 주는 쪽에 있다. 은혜를 주는 이가 자의적(自意的)으로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베풀고자 하는 자에게 아무 대가(对价)없이 주는 것이 바로 은혜다.
바울은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 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그 부르심 대로 이방인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받으실 만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된 것을 증거한 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자랑'이란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이나 일 따위가 썩 훌륭하거나, 남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임을 드러내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자랑은 하나님의 일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일'이라 자랑했다. 따라서 이런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는 매우 바람직한 자랑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한 것이다(고후10:17).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행한 하나님의 일을 널리 자랑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성도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그 자랑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며,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이라고 증거했다. 이렇듯 복음의 증거는 자기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이렇게 증거된 복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증거한 것이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열정적인 복음의 증거자였다. 그의 이런 열정적인 복음의 증거는 서진선교(西进宣教)에 혁혁한 족적(足迹)을 남겼다. 바울의 이런 열정은 그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초인적(超人的)인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이루어진 그 일을 자랑했다. 그러므로 이런 자랑은 성도의 바람직한 자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랑 때문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는 초석(超石)이 되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개척자로 항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복음 전도자들보다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다(고후11:23~27).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의 증거를 포기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고백하며,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면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증거했다(롬8:35~37).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고 했다.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수고한 열매를 거두는 일로, 서로 분쟁을 우려하게 하는 근거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였다. 더불어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다짐이었다. 이런 바울의 태도와 다짐이 오늘의 교회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부터 그래야 한다. 그리하면 오늘날 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빈빈한 교회의 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리이다.
[기도]
날마다 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매우 자랑할 만한 것임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것들을 널리 자랑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되게 하옵소서. 이런 열정으로 오직 주의 성령님을 의지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5:1~13 / 교회공동체가 화합하는 두 가지 비결
2016.10.10 (월) 롬 15:1~13
오늘의 본문 말씀은 가장 먼저 '믿음이 강한 우리는'이라 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두려움'은 '꺼려하거나 무서워하는' 공포감(恐怖感)이 아니다. '공경(恭敬)하고 어려워하는' 경외감(敬畏感)이다. 이로써 몸가짐이나 언행(言行)을 조심하며, 하나님을 엄숙히 섬김으로 주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깊이 의뢰심(依赖心)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사람마다 모두 약점(弱点)이 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은 언제나 상대적(相对的)인 비교(比较)에서 나타나는 감정(感情)이다. 그래서 약점을 사전은 '무언가 모자라서 남에게 뒤떨어지거나 떳떳하지 못한 점'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믿음이 약한 사람은 이런 약점의 지배(支配)를 받아 스스로를 비하(卑下)하는 사람으로 믿음의 열등감(劣等感)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사람을 담당'해야 할 것을 권면했다.
교회공동체는 서로 화합(和合)해야 한다. '화합'이란 '서로가 뜻이 맞고 정다워 서로 잘 어울림'이다. 이런 화합은 교회공동체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가 믿음이 약한 성도를 자원(自願)하여 담당할 때 일어날 수 있다. '담당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맡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성도를 격려하며 돕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공동체의 건실(健实)한 성장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로, 이 일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공동체가 화합하는 비결이다. 그것이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 선(善)은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理想)'이다. '도덕(道德)'은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이 양심과 사회적 여론이나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의 총체(统体)'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가 항상 공정하고, 서로를 폭 넓게 이해하고 용납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반드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요4:9). 그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보내신 것이다(마1:21). 이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증거하셨다(막1:11). 이런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16: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증거했다.
예수님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계속이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그것이 그의 삶이 영화롭게 되어 세상의 기쁨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엄청난 고난과 역경이 되었다. 끝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진실로 세상의 기쁨 과는 무관한 최후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끝까지 감당하셨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셨기 때문이다(눅22:42).
바울은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모범이 오늘의 성도가 본받아야 할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누릴 기쁨과 평안은 세상에서 고난과 슬픔을 당하는 것이 전제될 수 있음을 말하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고 독려(督励)하며,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했다. 이는 교회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교회공동체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의 몸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모든 성도들은 그 모메 붙은 각 지체다. 머리와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나뉠 수 없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지체는 죽은 것이며, 머리 없는 지체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예수님과 성도가 더불어 나뉠 수 없는 하나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가장 큰 이유였다.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교회공동체가 서로 화합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권면했다. 계속하여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다'고 고백했다.
이제 바울은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권면하며, '주를 찬양하라'고 반복하여 당부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한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열방, 즉 지구촌의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을 소망하는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고백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회공동체가 화합하는 두 가지 비결을 교훈했다. 첫째는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다음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락라고 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교회 안에서 가득하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서로를 기쁘게 하고, 서로를 받아 들이는 일이 더욱 풍성하여,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서로 화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하나된 몸이 되길 소망한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땅에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한몸된 거룩한 교회공동체가 세워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더 많은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 온 세상을 가득하게 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4:13~23 / 서로 비판하지 말고, 서로 배려하라
2016.10.09 (주일) 롬 14:13~23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비판(批判)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판을 받아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 받는 것'을 유쾌(愉快)하게 여기지 않는다. '판단(判断)'은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결정하는 것'이고, '지적(指摘)'은 '허물 따위를 꼭 집어서 가리켜 드러내는 것'으로, 이것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것으로 마음이 불쾌(不快)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 하라'고 했다. '도리어'란 '예상이나 기대 또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되거나 다르게'를 의미하는 부사(副词)다. '부사'란 '다른 말 앞에 놓여 그 뜻을 분명하게 하는 품사(品词)로,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서로 비판하여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나 상황 따위에 직면하거나, 서로가 거리끼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주의(注意)하여, 상대방을 '배려(配虑)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비판으로는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반감을 사서 더 큰 분쟁을 일으킬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배려는 분쟁은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서로의 화합을 이끌어 낸다. '배려'란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으로,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그의 입장에서, 그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려는 서로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한다.
이방인은 고기를 시장에서 팔기 전에 그 고기를 먼저 우상에게 제사로 드렸다. 그래서 그것을 사 먹는 일로 성도들 사이에 서로를 비판하여 분란(纷难)이 일어났다. 따라서 바울은 서로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 배려할 것을 가르쳐 분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래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한다'며,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했다.
무릇 속됨은 각자의 신앙적 양심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며, '사람이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 지적하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부정하고, '형제를 음식으로 망하게 하는 것'으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선한 것'은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창2:16).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에게 허락된 자유를 가볍게 여겨 마귀의 유혹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열매에 관심을 기우려 그 열매를 먹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누릴 자유가 곧 '선한 것'이며, '이것을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서 먹거나 먹지 않는 일로 서로 비판하여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당부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서로 구속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라'고 권면하며,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의(义)'는 '사람으로서 지키고 행해야 할 바른 도리,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는 일'이다. '평강(平康)'은 '아무 걱정이나 탈이 없음'으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이에서 비롯된 마음의 평화다(요14:1). 그리고 '희락(喜乐)'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 얻어지는 것이다(빌4:4). 이런 것들이 성령 안에 보장되어 있음을 가르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고 격려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쓴다'며,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며,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비판하여 정죄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답다'고 칭찬하여,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며,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며,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다.
바울은 '죄(罪)'에 대한 정의(定义)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했다. '믿음'이란, '어떤 사실이나 말이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는 것'은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생각'이란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 판단하는 작용'이며,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사람이 시청각적인 오감(五感)을 통해 확인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며, 그것이 복된 것이 믿음이다(요20:29).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없는 모든 행함이 모두 죄인 것이다.
참 믿음의 사람은 아무도,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어 그를 배려한다. 이런 배려로 믿음의 사람들은 서로 화합한다. 그리고 이런 화합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이루어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성도는 서로가 서로를 깊이 신뢰하여, 서로를 비판하기 보다는 서로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기도]
오늘도 귀한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로 하여금 아무도 비판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여 그들과 더불어 화합을 이루고, 화합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쓰임받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4:1~12 / 이제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2016.10.08 (토) 롬 14:1~12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는 칭의(称义)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한 삶의 진보(进步)로 성화(圣化)를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行)하는 삶으로 증거되는 믿음을 통해 정립(定立)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이루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이룬다. 따라서 바울은 '사랑 의 빚 외에는 그 어떤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런데도 난제(难题)가 남아 있다. 곧 성도들이 서로 견해(见解)의 차이(差异)에서 일어나는 충돌(冲突)이다.
성도들의 충돌을 엄격한 해석으로 해결하면, 그것은 율법주의로 환원(还原)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의 깨달음으로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면, 그것은 서로의 충돌은 해소(解消)될 수 없다. 이것은 어느 한쪽의 양보(让步)나 서로의 타협(妥协)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성(多样性)의 일치(一致)를 이루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교감(交感)으로 영적인 성숙(成熟)을 도모(图谟)해야 한다.
바울 당시에는 상인들은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기 전에 먼저 우상에게 제사지냈다. 그렇게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팔아, 성도들 사이에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는 우상숭배에 감염된 것이니 먹을 수 없다'는 이들과, '모든 음식은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비록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라도 먹기를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이들이 서로 분쟁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성도의 다양성의 일치는 타협에 의하지 않고, 용납에 의해 이루어진다. '용납(容纳)'은 '있는 그대로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당시 시장에서 파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여 피차에 분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성도는 피차에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용납해야 할 것을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음이라'는 말로 종용(怂恿)했다.
바울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며,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다'고 했다. 여기서 '남의 하인'은 모든 성도를, '주인'은 하나님을 지칭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하나님)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성도)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성도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하여 아무도 비판하지 말고 용납하여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사람은 아주 다양한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성도들은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다(고전12:27). 그러므로 모든 지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다. 그리고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리라'고 했다.
바울은 좀더 단호(乎断)하고 강경(强硬)하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라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지체로서 머리되시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의 증거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여 별개(别个)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필연적(必然的)이고 절대적(绝对的)인 관계에 의해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됨의 증거다.
또한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의 완성에 대한 선포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죽음 곧 사망은 죄의 삯이다(롬6:21).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신 것이다(고후5:14). 이렇게 그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고전15:12), 모든 죽은 자에게와 산 자에게 주가 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류를 창조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창1:31).
그러므로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며,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고 반복하여 물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증거하여, 아무도 서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음을 명시(明示)했다. 그리고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굻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면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리라'고 했다. 이는 모든 성도마다 각자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직접 자신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성도는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존재다. 따라서 성도는 사나 죽으나 항상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지체로 살며, 다른 성도도 동일한 지체인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용납하여 더불어 살아야 할 한몸의 지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하나된 살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훈한 것이다.
[기도]
오늘도 제가 주님의 지체된 성도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모든 성도들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도 나와 동일한 예수님의 지체로, 지체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용납하여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온전한 주님의 몸된 지체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루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4:1~12 / 이제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2016.10.08 (토) 롬 14:1~12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의롭게 여김을 받는 칭의(称义)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한 삶의 진보(进步)로 성화(圣化)를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行)하는 삶으로 증거되는 믿음을 통해 정립(定立)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이루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이룬다. 따라서 바울은 '사랑 의 빚 외에는 그 어떤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런데도 난제(难题)가 남아 있다. 곧 성도들이 서로 견해(见解)의 차이(差异)에서 일어나는 충돌(冲突)이다.
성도들의 충돌을 엄격한 해석으로 해결하면, 그것은 율법주의로 환원(还原)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각자의 깨달음으로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면, 그것은 서로의 충돌은 해소(解消)될 수 없다. 이것은 어느 한쪽의 양보(让步)나 서로의 타협(妥协)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양성(多样性)의 일치(一致)를 이루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교감(交感)으로 영적인 성숙(成熟)을 도모(图谟)해야 한다.
바울 당시에는 상인들은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기 전에 먼저 우상에게 제사지냈다. 그렇게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팔아, 성도들 사이에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는 우상숭배에 감염된 것이니 먹을 수 없다'는 이들과, '모든 음식은 범사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비록 우상에게 제사지낸 고기라도 먹기를 거리낄 필요가 없다'는 이들이 서로 분쟁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성도의 다양성의 일치는 타협에 의하지 않고, 용납에 의해 이루어진다. '용납(容纳)'은 '있는 그대로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당시 시장에서 파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여 피차에 분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성도는 피차에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용납해야 할 것을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셨음이라'는 말로 종용(怂恿)했다.
바울은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며,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다'고 했다. 여기서 '남의 하인'은 모든 성도를, '주인'은 하나님을 지칭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하나님)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성도)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성도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하여 아무도 비판하지 말고 용납하여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다.
사람은 아주 다양한 지체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성도들은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다(고전12:27). 그러므로 모든 지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고 했다. 그리고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리라'고 했다.
바울은 좀더 단호(乎断)하고 강경(强硬)하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라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지체로서 머리되시는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의 증거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여 별개(别个)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필연적(必然的)이고 절대적(绝对的)인 관계에 의해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됨의 증거다.
또한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의 완성에 대한 선포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죽음 곧 사망은 죄의 삯이다(롬6:21).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신 것이다(고후5:14). 이렇게 그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고전15:12), 모든 죽은 자에게와 산 자에게 주가 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류를 창조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창1:31).
그러므로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며,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고 반복하여 물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증거하여, 아무도 서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음을 명시(明示)했다. 그리고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굻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면서,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直告)하리라'고 했다. 이는 모든 성도마다 각자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직접 자신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성도는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는 존재다. 따라서 성도는 사나 죽으나 항상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지체로 살며, 다른 성도도 동일한 지체인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용납하여 더불어 살아야 할 한몸의 지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하나된 살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훈한 것이다.
[기도]
오늘도 제가 주님의 지체된 성도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모든 성도들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그들도 나와 동일한 예수님의 지체로, 지체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용납하여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온전한 주님의 몸된 지체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루 기도드립니다. 아멘.
롬 11:13~24 /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2016.10.02 (주일) 롬 11:13~24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가 말한 '이방인'은 로마의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을 총칭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다고 경시(轻视)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내가 이방인의 사도(使徒)'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도'를 우리말 사전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가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뽑은 열두 명의 제자'라고 한다. 또한 성경사전에서는 '전권(全权)이 위탁된 자'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사도를 택하실 때, 아주 신중하셨다.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다(눅6:12,13).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셨다(요17:18).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정한 사명(使命)을 위해, 세상에 사자(使者)로 파견된 자'가 바로 사도다. 따라서 초기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지명하신 열 두 제자를 사도라 하여, 가룟인 유다의 배교로 한명이 결원된 자리를 제비뽑기로 맛디아를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웠다(행1:26).
맛디아가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수에 가입한 당시는 사도의 조건으로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었다(행1:21,22).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택하여 사도로 칭하신 제자들 외에 바나바와 바울(행14:14),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 등도 사도라 칭했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교회에서 복음의 진리나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자요, 감독이었다.
바울은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职分)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여기서 '직분'은 '직무상의 본분' 즉 '마땅히 해야 할 본문'이다. '직무(职务)'는 '직책이나 직업상에서 책임을 지고 담당하여 맡은 일이다.'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 곧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긴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바울은 사실상 사도라고 직책에 대해 많이 헐뜯기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을 개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바울은 자기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직분을 사랑했다. 주의 사도라는 권위적인 명예로 직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직분 때문에 해야 할 일 곧 사역을 사랑했다. 그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바울은 오매불망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매우 사랑했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
먼저 그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 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계기가 되어, 유대인들의 회개로 말미암아 서로 화목하게 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는 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설명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로 비유로 들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인 것'으로 설명하며,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나무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공유하는 자가 되었음을 증거하게 됨을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만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며, 더불어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라 권면했다.
바울은 계속하여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고 하여 다시 한 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며,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면서,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함을 받게 된 것을 자랑하여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겸손할 것을 권고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며, '넘어지는 자들 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너도 찍히는 바되리라'고 경고하며,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증거했다. 그러므로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는 말로 유대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진심으로 나의 나 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비롯되었다. 따라서 돌감람나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열매를 맺는 일이 불가능했던 나를, 하나님이 미쁘게 여기사 참감람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게 하셨다. 이 놀라운 은혜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열매를 맺는 일을 가능하게 하셨은즉, 더욱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이 오늘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뤄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 그리고 사명주셨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앞에 더욱 겸손하게 엎드려,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