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부 도둑 / 이응백
우리나라에도 작년 세모에 '텔레비전'의 대량 월부가 있었다. 텔레비전'을 놓으면 주부가 일손을 쉬게 되고, 애들의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통폐론에도 불구하고 이에 감연히 한몫 끼인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것이 아직 학령 전이요, 월부라는 편리점에서였다. 방의 크기로 보아 14인치라도 그리 작은 감이 없이 잘 조화가 되고, 더구나 화면이 일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농담(淺淡)도 고르고 음향도 깨끗하여, 이 진귀한 문명의 산물이 내방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저녁을 끝내고는 찾아오는 '팬'도 생기게 되었다. 꼬마도 물론 훌륭한 팬 노릇을 했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이 이채로운 텔레비전도 그리 변변치 못한 우리 살림의 다른 가구들과 제법 어울리게 되어 그대로 자리가 딱 잡히게 되었다. 언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 싱싱한 디자인은 방안이 한결 신선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은 우리 가정에 의젓한 필수품이 되고, 그 시청은 하나의 생리화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라? 그 애지중지하던 텔레비전이 어느 비 오는 새벽, 지붕을 타고 들어온 도둑에게 감쪽같이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흙발로 들어온 그들에게 이끌려 나가며, 그 텔레비전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했으랴? 그리 간단하지 않은 절차 동안, 같은 방에서 자면서도 전혀 낌새도 못챘던 것은 마취제의 살포 때문일 것이라고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자위 하고 있다. 텔레비전이 앉았던 자리는 보기 흉하리만큼 쓸쓸해 보였다.
더구나 물건은 없어졌어도 월부는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둑을 월부로 맞은 셈이다. 하기야 한꺼번에 맞은 것보다는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물 없는 빈 월부를 부어 나가기란 아물려던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비노니 이훌랑 월부 물건은 월부장까지 가져가는 에티켓을 잊지 말아 주기를 그들 밤손님에게 바라는 바이다.
[이응백(李應百)] 현대 국어학자. 호는 난대(蘭臺).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음.
* 저서 『국어교육사연구』‧『자료를 통해 본 한자‧한자어의 실태와 그 교육』‧『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등을 남겼다.
가난했지만 그리운 시절, 오래 전 얘기네요. 재미있어서 옮겨봤어요. 그 옛날 어려운 시절 얘기에 공감이 갑니다. 동네에 14인치 텔레비전 하나 있으면 모두들 저녁을 먹고 그 집에 모여들었지요. 드라마 보는 값으로 일원인가 얼마를 받은 것도 같아요. 그땐 도둑도 많았어요. 된장을 항아리째로 메고 가고, 빨래도 걷어가고요. 텔레비전을 훔쳐갈 때, 월부장까지 함께 가져가라는 솔직함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씁쓸합니다.
첫댓글 월부도둑이 있었군요
저도 월부로 많이 구입했습니다
티비 냉장고 가리방 텐트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