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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음식, 행위인가 가치인가?
우리 사회의 음식 담론
이성범 (대련외국어대학/서강대학교)
맛있는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음식은 개인적인 생존을 유지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각자 알아서 하면 될 뿐 누구도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끼리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 즉 음식 담론은 오늘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으며 종종 개인의 먹는 행위에 영향을 준다. 누구는 말할 수 있다: “내가 내 밥 먹는 데 음식 담론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과연 그럴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자신이 손수 재배한 재료들로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벌써 이 점에서부터 우리는 음식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식재료를 시장에서 구매하는데 당장 식품 물가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기껏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TV 건강프로그램의 의사가 하필이면 내가 먹으려고 하는 바로 그 음식이 몸에 해롭다고 경고하는 것을 보고 입맛이 싹 달아날 수 있다. 이쯤 되면 내 음식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내 음식에 타인들의 음험한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한다. 하물며 가공의 인물이지만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자신이 육류를 먹지 않겠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를 기억한다면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벼이 넘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먹는 것만큼이나 음식에 대해 말하고, 평가하고, 정보와 느낌을 교환하고,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의 현재 음식 담론은 단순히 ‘먹는 행위’의 차원을 넘어,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건강 문제, 남녀와 세대라는 계층적 차이, 환경 이데올로기와 윤리의식 및 언론과 미디어 소비 등이 마구 중첩된 매우 복합적인 ‘가치 추구 행위’의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어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과 그 음식에 대해 때로는 열광하고, 또 때로는 비판하고, 주장하고 심지어 싸우기까지 하는 이 모든 것, 즉 음식에 대한 소통이 우리 각자의 삶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음식 담론이 가진 특징과 문제점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혼밥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나홀로 산다”의 1인 세대가 증가하면서 이른바 “혼밥”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나라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여전히 식사를 혼자 하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나라 전직 권력자도 즐겨 본다는 일본의 <고독한 미식가>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노가시라 고로라는 중년 남자가 혼자서 식당을 찾아 식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네처럼 특별히 잘 알려진 맛집을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맛집 탐방’이 아니라, 동네 뒷골목의 작고 평범한 식당에서 다양한 메뉴를 즐기는데, 물론 연출이지만 혼자 왔다고 해서 주인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거나 출입이 거부되는 법이 없다. 오래전 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일정 중 하루는 공식 조찬 대신 현지인들처럼 숙소 근처에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했다가 일부 한국 언론으로부터 “왕따를 당한 것”이라느니 “외톨이 식사는 비정상적 외교 대참사”라느니 하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현지 미디어는 전혀 그런 해석을 내린 바 없었다. 그 정도로 한국인들에게 식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다. 그 결과 일부 식당에서는 혼자 밥 먹으러 온 손님을 퇴짜 놓거나 혼자 왔더라도 최소 2인분은 주문해야 할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혼자 온 손님이나 2인 손님이나 기본 반찬은 똑같이 차려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2인 손님을 고집하기도 한다. 반찬이 많이 나오는 음식점일수록 그만큼 상업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향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사회적 추세는 1인 세대의 가속화인데 식당은 전통적인 영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적 아이러니이다. 회사에서 집단 회식은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MZ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혼밥’이 대세가 될지 현재 한국은 목하 사회적 실험을 하고 있다.
채식주의자
집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한국 사회에서 함께 먹는 것은 ‘관계의 증명’이자 지배적 가치에 대한 ‘순응의 신호’이며 ‘정서적 협력 행위’로 통한다.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선호하고 일부는 더 나아가 열광적으로 숭배하다시피 하여 오늘도 열심히 “흡입하는” 육류를 거부한다. 그녀의 ‘고기를 먹지 않음’은 주위 사람들이 믿는 가치와 관행에 대한 도전을 넘어 폭력으로까지 간주된다. 이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영혜의 채식은 육류 소비자들끼리 이미 설정한 관계에 대한 비협조이자, 고기를 즐겨 먹는 일반인들에 대한 무례 및 자신들의 가치 체계와 생활 습관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해석된다.
『채식주의자』를 읽은 사람들의 반응 중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 영혜의 생각이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하루도, 아니 한 끼라도 고기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는 많은 젊은 남성들은 영혜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음식 담론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인 폭력성의 문제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에서 본 것을 보고 다분히 비논리적, 비이성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녀의 결정을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그래도 먹어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일 수 있음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채식주의를 동물과 환경에 대한 도덕적 우월함으로 떠받들 필요도 없지만, 기이함과 비정상으로 매도하고 경멸의 대상으로 폄하할 이유나 권리도 없다. 영혜의 몸은 가족의 체면과 남성의 욕망, 사회의 정상성을 근근이 유지하는 매개체였는데 그녀가 선택한 채식은 그 매개 고리를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이쯤 되면 음식은 돌봄이 아니라 권력의 수단임이 드러난다.
2023년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비건”이라 부르는 완전 채식주의자는 약 4%에 해당하고 “세미 또는 플렉시” 채식주의자라고 답한 사람은 12%로 전 인구의 16% 정도가 채식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60대 이상의 채식 실천율이 24%로서 9%인 20대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는데, 이 점은 18세~34세의 젊은 층에서 채식 선호도가 높은 미국과는 대조적인 결과이다. 채식을 하는 이유로는 건강이 가장 높았고 그다음으로 환경보호와 미용 목적이며 동물보호는 20%에 머물렀다. 이 조사에 따르면 채식 실천자들은 꾸준히 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채식식품 개발이나 전용음식점 확충 등 사회적 뒷받침은 증가세에 못 미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는 비정상은 아니더라도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우리 역사에서 주된 식단은 육고기가 아니라 밥과 나물이었다는 점에서 채식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뀔 수 있다. 정답은 없고 이해와 배려가 공존의 열쇠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건강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면서 미국인들에게 상대적으로 흔한 심장병의 주원인이 붉은 고기의 과도한 섭취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가 계속 발표되었다. 그 결과 육류 소비량이 줄어들게 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축산업자들이 육류 소비자의 마초 이미지를 건강함과 동일시하는 “I eat meat” 구호의 TV 광고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다가 고기 생산을 위해 목초지를 개간하고 인간이 먹을 식량 대신 소 사육을 위한 사료 재배에 몰두하는 등 환경생태학적인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의학전문가와 축산업자들의 한판 승부는 환경론자와 이에 반발하는 지역 정치인들까지 가세하여 그 논쟁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고 타협점이나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국의 여러 환경단체들은 일주일에 하루 육류 소비를 하지 않는 ‘Meatless Mondays’를 지원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9년부터 뉴욕시는 모든 공립학교에 ‘Meatless Mondays’를 도입해 학생들이 대체육에 어릴 때부터 노출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에서 채식식품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한국에서 월요일만큼은 대체육 급식을 하자고 주장하면 그는 아마도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아동학대자로 낙인찍혀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한국은 육식 대국이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영혜처럼 외톨이가 될 수 있다.
소박한 밥상 vs 화려한 밥상
<나는 자연인이다>는 10년 이상 롱런하고 있는 장수프로그램이다. 도시지향적인 젊은 여성보다 은퇴 전후의 남성들 시청 비율이 훨씬 높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많은 “자연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산속에 들어와 채소와 버섯 등을 위주로 한 소박한 식사를 함으로써 도시에 있을 때보다 건강도 좋아지고 마음도 편해졌다고 고백한다. 물론 개중에는 도시인 시절에 즐겼던 인스턴트 음식이나 가공식품 등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자연인’이라는 개념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어쨌든 자연인들의 삶은 적지 않은 도시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뒤 이어서 방송되는, 이른바 ‘먹방’ 프로그램에서는 “사는 게 뭐 있느냐? 먹어 남주랴?”면서 누가 더 복스럽게 또는 게걸스럽게, 잘 또는 많이 먹는지 즉석 내기까지 하는데 조금 전 자연인에서 공감했던 시청자들조차 이번에는 먹방 출연자들을 부러워하고 그 음식점이 어딘지 찾아보기까지 한다.
산속 자연인의 ‘소박한 밥상’이 상징하는 ‘절제’, ‘건강’ 지향적인 삶과 먹방 연예인의 ‘화려한 밥상’이 상징하는 ‘쾌락’, ‘소비’ 지향적인 삶 사이에서 시청자들은 오늘도 흔들린다. 이는 거창하게 말하면 고대 철학에서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논이 주도한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자’로 번역되는데 자연의 이성적 질서와 운명을 받아들이고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 즉 ‘아파테이아’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에피쿠로스가 주도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자’로 번역되는데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운명보다 개인의 선택에 따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불안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보았다. 중요한 점은 ‘쾌락주의’라고 해서 마음대로 먹고 즐기라는 것은 아니며, ‘쾌락’을 감각적 즐거움과 동일시하지 않고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아타락시아’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먹는 것을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흥청망청 과식, 폭식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적게 분별력 있게 욕망을 충족시켜야 마음의 평온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때 유행했던 “YOLO (You Only Live Once)”는 원래 단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마음껏 즐기면서 살자”로 결론짓는다. 시간만 나면 맛집을 찾아다니고 돈만 생기면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젊은 층들에게 YOLO는 그들의 소비지향적 삶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전락하였다.
한국어로는 <소박한 밥상>으로 번역된 헬렌 니어링의 <Simple Food for the Good Life>는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니어링의 음식은 마치 ‘도덕적 실천 교과서’로 수용될 정도였다. 미국에서 <소박한 밥상>은 종종 청빈과 자급자족, 올바른 삶의 모범 답안처럼 읽혀 왔지만, 이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점들이 있다. 니어링 부부의 실천은 땅과 노동 자율성이 보장된 일부 백인 중산층이라는 특권적 조건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일부 용기 있는 “자연인”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생활인들이 그런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에는 과도한 노동 시간과 아파트로 상징되는 도시에서 주거하며 손바닥만 한 텃밭도 구하기 쉽지 않은 마당에 자급자족할 농지를 찾고 경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적 조건이 무시된 채 한국인이 나도 그런 조건이 충족된 미국 백인처럼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는 자기 계발 담론을 부추기는 책으로 오해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 한국 사회에서 이 텍스트는 종종 과잉 소비의 개인적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인류가 처한 구조적 문제를 모두, 마치 개인의 잘못에서 연유하는 것처럼 문제의 개인화를 부추기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즉 저자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독자는 이 책을 읽는 중에 ‘착한 소비자’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될 수 있다. 영혜의 채식이 그녀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듯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환경에 맞는 미국 노부부의 최적의 선택이고 한국의 대부분의 독자는 자기 상황에 맞는 ‘소박한 밥상’을 찾아야 한다.
앞서 본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충격적인 음식 담론을 통해 한국 사회의 규범적 폭력과 정상성의 강제를 드러낸다면, 니어링의 잔잔한 <소박한 밥상>은 그러한 사회에 대해 수용 가능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 두 텍스트의 수용 방식은 음식 선택이 개인의 윤리로 환원될 때 비판이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보여주며, 설명되지 않는 거부가 얼마나 빠르게 병리화되는지를 드러낸다. 먹는 게 이렇게 복잡할 줄이야!
먹방과 K-푸드
요즘 우리 TV와 유튜브를 장악하다시피 하는 먹방과 과식/폭식 담론은 한편으로는 대리만족과 해방의 서사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섭생 규범을 위반하는 일탈의 관음화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특히 1,200만 명의 구독자를 갖고 있는 쯔양과 같은 젊은 여성의 먹방은 외모나 체형의 담론과 얽혀 있는데, 일견 해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규범을 재확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먹방은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에게 일종의 블랙홀이다. 전직 체육인에서 예능계로 진출한 예능 초보나 별다른 “개인기”가 없는 일부 개그우먼은 먹방이 가장 손쉬운 선택으로 여겨지는데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쉽지 않다.
Oxford 영어 사전에 ‘mukbang’으로 등재될 정도로 유명해진 먹방은 미디어 중심, 이미지 중심으로 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TV 예능, 유튜브 먹방, SNS 숏폼을 통해 음식이 ‘보는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조리의 과정이나 사회적, 인문학적 맥락보다 자극성, 속도감, 기발함 등이 강조되고 있다. 진정한 음미와 분석이 아니라 “대박!”, “미쳤다”와 같은 감탄어 중심의 평가로 음식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제거되고, 감각 자극만 진하게 남는다. 소개되는 모든 음식점이 “인생 맛집”이자 “최고의 밥상”이고 “달인 레전드” 급이다. 음식을 다루는 사람들조차 미각이나 질감이나 조리 방식에 대한 정밀한 언어 지식과 능력이 부족해서 결과적으로 음식에 대해 말은 많지만, 사유는 얕아지는 내용의 빈곤화 현상을 겪게 된다.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라는 질문은 아이들에게 곤혹감을 주는 진부하다 못해 비교육적이기까지 한 물음이지만 여전히 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요리철학이 다른 셰프들이 만든 두 개의 전혀 다른 요리를 두고 점수를 매기거나 우열을 논하는 것은 흑백논리에 매몰된 음식의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일부 먹방에서는 피상적인 ‘힐링’과 ‘위로’의 의미 부여가 과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음식이 정서적 결핍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담론화되어 “혼밥 힐링”이라든지 “퇴근 후 한 끼 위로”라는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한다. 또한 시청률이나 조회수,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어디까지 먹어봤니?”라고 물으면서 기이한 것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을 유발하려 한다. 밥은 언제나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힐링인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국적 불명의 음식을 보여주며 자랑하듯 먹는 것은 아무리 엔터테인먼트라고 하더라도 보고 난 뒤 공허함만 남을 뿐이다. 음식은 중요한 사회적 텍스트이지만, 너무 감정적이고 개인화되어 있으며 미디어 논리에 너무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음식 담론을 개인의 취향에서 사회적 조건으로 확장하고 단순한 개인적 힐링에서 일과 삶의 건강함까지 폭넓게 다룰 필요가 있다. 즉 논의의 초점을 “무엇을 먹느냐”에서 “왜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는가”도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음식 관련 방송에서 주목할 문제는 건강 담론의 상업화, 도덕화 현상이다. 음식 선택이 흔히 윤리적,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 “클린 푸드 vs 나쁜 음식”, “의사들은 전혀 먹지 않는 음식 best 3”와 같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이 횡행한다. 다이어트, 저당, 고단백, 저탄수 등이 규범처럼 유통되고 종종 그 해결책은 특정 건강기능식품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인터넷 매체의 특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음식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에서 벗어나 불필요할 정도로 불안감을 갖게 되어 방송의 사회적 기능에 의문이 제기된다.
먹방과 더불어 음식으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또 다른 주제가 K-푸드이다. K-pop 열풍에 이어 한식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한국 음식의 국제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 한식은 대표적인 발효 음식으로 건강식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때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한식의 세계화가 주춤하기도 했지만, 한식이 “K-푸드”로 브랜딩되며 국가 이미지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이 현상에서 특정 소수 메뉴에 집중한 나머지 실제 한식이 갖는 다양성과 건강성은 간과되는 면이 있고, 살아 있는 식문화가 박제된 문화 상품으로 변형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한국인 자신이 한식의 가치와 특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일례로 인터넷에 보면 한식을 제대로 소개하는 개인블로거나 유튜버는 드물고 단지 음식 사진이나 맛집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10대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피자, 치킨, 햄버거, 라면, 족발 등이 뽑혔는데 이 중 순수 한식은 없고 김치나 된장, 청국장 같은 발효 음식은 오히려 혐오하는 음식으로 뽑혔다. 한국 젊은 세대들이 외면하는 한식을 외국인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권할 수 있을까? 김치 담그는 법은 모른다면서 까르보나라 만드는 법은 잘 아는 한국인들에게 K-푸드의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고 즐겨 찾지도 않는 한식에 대한 섣부른 자부심 때문에 일부 방송에서는 거리를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갑자기 김치를 들이대면서 먹어보게 하고 맛을 물어본다든지 한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음식이라며 매운 떡볶이를 억지로 먹게 하여 긍정적인 식후 소감을 유도하는 것은 이른바 “국뽕”에 취한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 K-푸드 열풍에 오히려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차라리 K-푸드에 대해 개선할 사항이나 솔직한 평을 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중국음식이나 일본음식은 그런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탄탄한 월드 푸드의 반열에 올랐고, 타이 푸드나 튀르키에 음식도 K-푸드보다 훨씬 세계 시장에서 앞서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배달의 민족?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음식은 더 이상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사 먹는 것”으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배달 음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아침 식사를 만들어 먹기보다 집 밖에서 사 먹는다는 해외특파원의 리포트가 생소하게 들렸다. 1990년대부터 해외여행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만이나 동남아 등지를 방문하고 그곳의 독특한 야식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그런지 한국도 야식을 먹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보도도 있다. 고작해야 찹쌀떡과 메밀묵 정도가 야참의 주메뉴였지만 이제는 야식이 주식보다 더 거창한 경우가 있다. 아울러 스마트폰의 배급이 보편화되면서 온갖 종류의 배달 음식을 소비하는 것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국내 1위 배달업체는 우리 겨레가 배달의 민족임을 강조하는데 물론 그 ‘배달’이 음식의 ‘배달’은 아니지만 아무튼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널려 있는 게 식당이요 음식점인데 사람들은 배달료를 감수하면서까지 즐겨 배달앱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부 중식당에서만 무료 배달 서비스했었는데 이제는 중식, 한식, 일식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업체가 배달을 외면하고는 생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비자나 공급자 모두 배달 플랫폼의 종속변수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편리하기는 하지만 각종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자영업자들의 배달 수수료 부담도 늘어나고 이는 고스란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결국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또한 대부분의 배달업체가 일회용 용기를 사용하고 있어 쓰레기 배출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규제는 미미한 실정이다.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 빨대 사용을 의무화했다가 불편함의 이유로 철회했던 것처럼 현재의 편의성은 미래의 환경보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유독 “빨리 빨리”를 외치며 신속 배달에 민감한 한국 소비자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배달라이더들은 위험한 질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음식이 좀 식어도 좋으니, 배가 조금 고파도 괜찮으니, 천천히 안전 운행하면서 오라”는 소비자들은 귀를 씻고 들을 정도로 드물다고 한다. 또한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배달 음식이 지나치게 맵고, 짜고, 뜨겁고, 화학조미료가 듬뿍 들어 있어서 건강식과 거리가 멀고, 일부 업체는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음식을 만들다가 적발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배달 음식은 각 가정에서 대대로 주부들이 지켜온 손맛을 사라지게 하고 개개인의 입맛을 획일화하여 토종 한식의 맛을 멸종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오늘도 배달앱은 쉴 새 없이 울리고 목숨을 건 오토바이 질주와 건강을 망각한 배달 요리 탐식은 그칠 줄 모르니 이제 우리는 정녕 배달의, 배달에 의한, 배달을 위한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음식 담론
우리 삶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높은 인공지능 시대에는 음식 담론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이제까지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누가 왜 그 음식을 권하는가?”라는 화두로 전환될 것이다. 또한 담론의 중심이 음식 공급자에서 수요자로 바뀌어 현재 “어떠어떠한 집이 맛있다”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맞는 음식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서 다른 인간이 추천하는 것이 아닌, 나를 잘 아는 로봇이 내 식단을 정해줄 것이다. 아울러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도움으로 레시피는 흑백요리사 같은 셰프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만들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셰프처럼 음식을 개발하고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될 경우 요리에 대한 저작권이나 장인정신에 대한 논의가 재정립되어야 하는데 음식 담론은 감각적, 감성적 신화에서 철학적, 윤리적 논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점차 가속화되는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에 맞추어 식재료의 원산지와 재배 과정, 탄소 배출 등을 면밀히 따지게 되어 소위 “착한 음식”이 “맛있는 음식” 못지않게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음식은 식욕의 대상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간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서 음식을 소비하는 행태에서 비만이나 질병, 지속가능성 등을 고려한,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담론의 패턴이 정착하게 될 것이다. 현재는 노년 세대를 제외하고 음식은 첫째가 맛이고 건강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점차 나이에 상관없이 맛과 건강의 균형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간에게 음식이 주는 즐거움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불변일 것이기 때문에 일부 공상과학에서 보듯 캡슐 하나로 식사를 대신한다거나, 동식물로부터 “야만적으로” 영양분을 취하는 대신 인간이 조제한 합성물질로 “문명인답게” 식사하는 것은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음식 문화를 더 풍성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줄 것을 바란다면 인공지능을 다루는 우리 자신이 보다 스마트하고 선제적인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결국 음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가능하다. 어차피 인공지능 시대에도 음식은 로봇이 아닌 인간이 즐겨 먹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자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