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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루카 11,37-41
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 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11,37-41
캄캄해도 희망하십시오!
일반 교우들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사제 수도자들이 정말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님 같이 진한 하느님 체험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곤경 중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는 깊은 침묵 중에 계시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하느님 부재체험을 겪는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성생활의 대가들께서도
우리와 비슷한 그런 체험을 하신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사실 데레사 성녀의 인생에서 묵상과 관상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데레사였지만, 그분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의 깊은 밤을 헤매 다녔습니다.
깊은 하느님 부재체험과 더불어 오랜 방황과 고뇌를 거듭했습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느낌, 고통스러웠던 세월의 흔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고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세속을 찾아 헤매 다녔습니다.
세속적인 향락에 자신을 던질 때는 하느님께 빚진 것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하느님 일에 종사하면 세속적인 성향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과 세속 사이에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가운데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그렇게 뚜렷하게 들리는데도 나는 그 소리에 따를 힘이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이 영성생활의 대가께서도 오랫동안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조금도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삶에로의 발 돋음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녀는 이렇게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오, 지루하고 고통스런 삶이여!
산다고 할 수 없고 완전히 버림받아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삶이여!
주여, 언제이옵니까?
아직 얼마나 더 계속 되려나이까?”
영적인 삶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듯한 수직상승이 없습니다.
기도 생활 역시 힘 하나 안들이고 에스켈레이터 타고 올라가듯이 편안하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발 한발 오르막 계단을 이용해 밟고 올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깊은 영혼의 밤, 끔찍한 하느님 부재 체험, 지루한 자신과의 싸움이 데레사의 신앙 여정 안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데레사는 영혼의 무미건조함에 대해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아주 소중한 깨달음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귀여워하시는 이들을 고생길로 이끄시고 많이 아끼실수록 많은 고생을 내리십니다.”
“최고 단계의 완전성은 내적 위로나 고상한 황홀감이나 현시, 예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일시키고 그분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동일시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데레사는 오늘도 영혼의 깊은 밤 속에 하느님 부재 체험을 겪으면서 지루한 영적 투쟁을 해나가는 우리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소중한 조언을 해주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흐트러트리지 말며 무엇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하느님만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영혼의 어두운 밤, 하느님 부재 체험, 버림받은 느낌이 다가 올 때 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캄캄해도 희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밝은 대낮이 다가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길이 막막해도 우선 내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를 떠받히고 계심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0. 15. 화)(루카 11,37-41)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우리는 속으로도 겉으로도 깨끗해야(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1) 여기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일’은 일반적인 의미의 손 씻는 일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뜻합니다(마르 7,3).
그 규정은 율법이 아니라 바리사이파의 규정일 뿐이어서, 바리사이들은 철저하게 지켰지만, 바리사이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고, 그 당시 일반 서민들도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규정을 무시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서민 출신이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도 그 규정을 안 지켰을 것이고, 제자가 된 다음에도 예수님께서 무시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마르 7,2).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예수님께서 정결 예식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랍비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바리사이들의 정결 예식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하지 않으시니까 놀란 것입니다.
2) 39절의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라는 말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복음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잔과 접시’는 사람의 몸을 뜻하는 말로,
또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하다.’ 라는 말은 ‘거룩하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으로 보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라는 말씀은, “겉보기와 다르게 너희는 마음속에 죄와 악이 가득한 위선자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어리석은 자들아” 라고 부르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고 감히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고, 사람의 마음속도 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마태 6,4.6.18.)
‘속에 담긴 것’은, 여기서는 ‘재물’을 뜻합니다.
앞에서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고 꾸짖으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 빼앗은 것들입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단순히 불우이웃돕기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재물들 가운데에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손해배상도 해야 하고, 자신의 재물들로는 아낌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사용하라는 명령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실천했습니다(루카 19,8).>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진정한 회개와 보속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깨끗함’에(거룩함에) 도달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3)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모든 것’은 ‘겉과 속이 모두’ 라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신앙인들은 ‘겉’과 ‘속’이 똑같이 깨끗한(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속이 깨끗하다.(거룩하다.)” 라고 자부하면서, 겉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막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예의 없는 짓이고, 그런 사람들도
명백하게 위선자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
나이 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동하라고 권고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티토 2,1-3.6-8.).”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즉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답게’ 품위 있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작은 행동 하나라도, 품위 없고, 예의 없고, 저속하기만 한 언행을 하면 안 됩니다.
속으로도, 겉으로도 똑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물론 ‘속부터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