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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철 목사님은
예전에 에스라 성경연구원과 웨스터민스터 신학교(한국소재)에서 신약학을 가르치셨으며, 선실교회에서 목사님으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2586
위 링크에 가시면 야고보서 강해 전문이 있습니다.
총 194페이지에 이르는 많은 양이지만 출력해서 꼼꼼하게 읽으시면 많은 은혜를 받을 실 것입니다.
그리 쉽지도 어렵지도 않게 설교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의 강설과 비교하시며 읽으시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malkut 님이 질문한 부분만 올립니다. (16-19강)..이것도 상당한 분량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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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16) 2.14-26
성경: 약 2.14-26
복습
계속해서 야고보서를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2.8-13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이웃 사랑의 계명과 연결해서 설명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0.25-37에 보면 가장 큰 계명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그것이 그 부분에서 야고보의 설명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긍휼 없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마지막 심판 때에도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
이 최후의 심판의 문제를 계기로 해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마치 왜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드는 실례는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와 연결되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본문의 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택되었지만, 그 노리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문제 삼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가 가정한 믿음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어떤 교사들에 의해서 잘못 가르쳐진 결과 실제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3장에서 선생 된 사람들에 대한 타매가 이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선생들이 이렇게 잘못 가르친 사람들이 아닌가 짐작하게 됩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고치고자 하는 오류는 ‘오로지 믿음 만으로 된다’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행하는 것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직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만이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것, 혹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 등은 구원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즉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 대해서 지금 야고보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왜 그렇지 않은지 이유를 밝혀 나갑니다.
이것이 실제로 당시 교회 내에서 발생한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것은 2.15의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라는 표현입니다. 즉 교회 내에서 다른 형제나 자매가 궁핍한 지경에 떨어져서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없는 지경에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람을 보고 ‘몸을 따듯하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만 하는 사람들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말만 하면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들은 구원을 받아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문제 삼고 있는 상황은 바로 이런 교회의 상황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여전히 가난한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
여기서 야고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서로 병행해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교회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은 ‘나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춥고 헐벗은 사람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렇게 춥고 배고픈 채로 있는가, 옷을 좀 입어서 몸을 따듯하게 하고, 음식을 먹어서 배를 부르게 하라’ 하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교되는 핵심은 그들의 말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는 말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말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이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먼저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말을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지금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춥고 배고픈 것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진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진정으로 더웁게 되고 배부르게 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마음의 원함을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따듯한 동정심을 품고 말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정심을 품고 말만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경우에 야고보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의 말이 그 사람을 더웁게 하고 배부르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춥고 배고픈 사람을 향해서 아무리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해도 그 사람은 몸이 더워지지도 않고 배가 불러지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 뿐입니다.
다음으로는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를 보십시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려면 두 가지 사실이 거기에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무엇이라고 하는 그 사람의 이해가 거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결국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상황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믿음이 있다면 거기에 따른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없이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 곧 그 신앙고백은 구원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춥고 배고픈 사람을 보고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말이 춥고 배고픈 사람을 덥고 배부르게 못하는 것처럼 나에게 믿음이 있다는 말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형태의 믿음에 대하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바로 그 믿음은 행함을 수반하지 않는 믿음이고 그가 생각하는 그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
여기 야고보는 그것을 무신 혹은 불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만 말했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죽은 믿음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와 비교해서 말하는 까닭에 여기서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죽은 믿음인 이유는 효력이 없는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죽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무능하고 무력하여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의미에서 죽은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가져다 줄 능력이 없으므로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은 가장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의 구원입니다.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과 관계가 정상적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인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면에서는 그도 사랑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불신을 고집하면 결국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에게 적용하여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믿음은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람의 믿음은 그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므로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믿음에 대해서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죽은 믿음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의 결함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 말은 그 결함을 채우는 유일한 길은 행함이 추가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다른 무엇으로 그 믿음을 산 믿음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행함 있는 믿음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춥고 배고픈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음 속에 저 사람이 몸이 따듯해지고 배가 불러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까 입을 옷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옷을 주고 음식을 주면서, 이 옷을 입고 몸을 덥게 하고 이 음식을 먹고 배를 부르게 하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상대방은 몸이 더워지고 배가 불러집니다. 즉 그의 말이 효과를 가져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약 이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믿는 것이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18절에서 보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믿노라고 말은 하는데 그 믿음에 수반되어야 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행함이 없다. 행함이 없다면 당신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실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나에게 행함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함이 없으면서도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구원의 믿음이 없다는 것이 그만 입증된 까닭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나는 행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기서 야고보는 그 실례를 듭니다. 21-25절에서 그가 예로 드는 아브라함과 라합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죽은 믿음의 한 실례: 귀신의 믿음
그런데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기 전에 야고보는 먼저 귀신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그것이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 야고보는 다시 귀신의 믿음이라는 독특한 현상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특별히 귀신의 믿음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 야고보가 타매하는 사람이 가진 믿음이 귀신의 믿음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행함이 없으면서 자기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믿음이 무엇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럼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하면 그 사람은 아마 이런 저런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생각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꼭 귀신의 믿음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귀신의 믿음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생한 믿음을 가지고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떨면서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에 임하면 그들은 떨면서 그 앞에 엎드립니다(마 8.28-34). 왜 귀신이 그렇게 합니까? 그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알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귀신의 믿음은 사람보다 나은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조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신들 중에는 그런 귀신이 없습니다. 모든 귀신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임하면 그 앞에서 떨면 복종합니다. 그런 면에서 귀신은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귀신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귀신의 경우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여전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확증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이 귀신의 믿음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결론 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믿음이 있으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례가 있는 까닭입니다.
결론
지난 시간에 보았지만, 지금 야고보의 지속되는 논지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경우의 실례로써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자처럼 보이는 잘 차려 입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면서, 행색이 초라하여 가난하게 보이는 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악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이런 악습이 있느냐 하면, 결국 그 사람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반발할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왜 행위를 거기다가 끌어들이느냐, 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면 되었지 행위는 무슨 행위냐 하는 논리를 가지고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의 논증은 두 가지로 진행됩니다. 첫째로 말은 거기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를 향해서 아무리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해라, 따듯하게 해라 하고 말해도 그 말은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와 같이 ‘내가 믿음이 있노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 말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더웁게 하라, 따듯하게 하라’는 말이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려면 거기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실례는 귀신의 믿음입니다. 귀신은 실제로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다고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생한 실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입증된 셈입니다. 그 다음 단락에서 야고보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실례를 아브라함과 라합의 경우를 들어서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중요한 경고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시대에나 오늘날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도 경고하신 바입니다. 산상보훈의 결론에 첨부된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다. 참된 구원의 신앙은 그것을 가진 사람이 그 신앙에 일관된 삶을 삶으로써 비로소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에 일관된 생활이 없는 경우에도 구원이 있겠거니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여부의 최종 판단은 우리 몫이 아니지만, 그에 대한 판단기준을 가지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야고보서(17) 2.20-26 2007.1.21 오후
복습
계속해서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것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줌에 있어서 무기능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 중요한 예가 귀신의 믿음입니다. 귀신의 믿음을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기이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귀신이 예수님께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신은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도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님에게 구원을 호소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에 의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님께 그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귀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해서 귀신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기이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 생각하면 이것은 그렇게 기이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는 사죄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그런 것을 믿으며 그 믿음이 진실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 믿음에 일관되게 그리스도에게 구원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가르침의 심중성
지금까지 야고보서는 주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부분은 그 생각에 대해서 의문 부호를 찍게 만듭니다. 과연 야고보가 여기서 단지 그리스도인의 행위만을 문제 삼는가? 전체 논지를 살펴 볼수록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먼저 오고, 행위는 그 믿음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말은 보기에 따라서 맞는 말이 될 수도 있고 틀린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위가 논리적으로 믿음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다면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행위가 시간적으로 믿음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라면 반드시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되는 셈인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보는 것처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원래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죽은 믿음인 까닭입니다. 그 믿음의 성격이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이라면 그것은 처음부터 행위를 동반해야 합니다.
물론 야고보서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야고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모든 서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다른 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야고보서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우리가 이 서신에서 특별히 배우는 중요한 진리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는 것이 구원의 믿음인지를 배운다는 면에서 구원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구원론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가 주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한 전통적 생각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예와 다음 주에 다룰 라합의 예에서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믿음과 행동의 관계
2.21-23에서 야고보의 논지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주는 믿음은 행함이 수반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21절의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말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런 문장을 앞뒤 문맥을 생각지 않고 그것만 똑 떼어내서 읽으면 영락없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말로 들립니다. 즉 이삭을 제단에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에 모든 문장을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본의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 다음 구절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22절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야고보의 가르침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그 사람에게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이 어떤 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속에서 믿음이 힘을 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일속에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믿음을 의인화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일하는 사람으로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떤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하는 일이 사람에게서는 믿음의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가 있을 때에 비로소 그에게 믿음이 있음이 확실해집니다. 즉 믿음이 그 목표에 도달해서 완성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그 믿음이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에게 있어서 구원의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은 그가 그 믿음의 내용을 행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가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무능한 믿음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능한가 하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무능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죽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실을 거론하여 구원의 믿음은 일하는 믿음이라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 속에서 믿음이 일하고 있는 생생한 실례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인가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동을 하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일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이삭을 제단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고, 그 믿음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는지를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
여기서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의 사건을 배경으로 삼아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신 이야기입니다. 야고보가 이 사건을 거론한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사건 자체가 아브라함을 시험한 일인 까닭입니다. 창세기 22.1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시험의 결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하). 창세기 기록에서 관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의 여부였습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야고보의 논점
그런데 야고보는 이 사건을 아브라함의 믿음을 입증한 행동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동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라는 증명이라는 것이 야고보의 논지입니다. 어떻게 해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 행동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이 사건에 대한 야고보의 독특한 해석이 배경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성격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아브라함 앞에 어떤 숙제가 되었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약속의 자녀라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라는 말이면서 동시에 약속의 성취인 자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에 약속을 받고 떠났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1-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후에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후손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후손이 있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면 그의 믿음은 후손에 대한 기다림으로 입증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후손을 기다린다면 그에게는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가 후손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그 언약이 성취되리라는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언약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에게 지금까지 자녀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자신에게 후손을 줄 것이고 그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나님이 후손을 주시지 않자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의 하나인 엘리에셀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실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창 15.2-3).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그가 그 언약의 성취를 믿지 않았다면 엘리에셀을 후손으로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민족을 약속하셨으나 저희 부부에게서는 후손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자를 통해서 후손을 얻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인 줄로 알겠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논지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4). 그리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으로 언약을 재천명하셨습니다(창 15.5).
이런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후손은 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라의 처지가 불편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 되리라고 했는데도 자녀가 없다면 결국 사라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결론이 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자기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서 후손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후손을 얻겠다고 명확하게 했으면 그런 마음이 안들었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의 몸 만이 명확하게 지정된 까닭입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진리에 비춰볼 때, 그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진리를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는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울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이 출생했고, 아브라함은 한 동안 이스마엘이 약속의 후손이려니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은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출생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바로 거의 사반세기 전에 약속하셨던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21).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100세 때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이삭을 기다린 것은 단순히 자기의 대를 이을 자녀를 얻겠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자기 후사로 세울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육신의 후손에게 매달리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훨씬 통이 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감정에 육신적인 애착과 사랑이 없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언약의 자손, 곧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난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해석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그 문제를 그렇게 해석한 결과 아브라함은 난제에 빠졌습니다. 그 난제는 하나님이 모순된 일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말은 그가 살아서 후손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받았을 당시에 이삭이 이미 혼인하여 후손을 본 상태였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했습니다. 이미 후손이 있으니 이삭이 죽는다고 해도 적어도 후손의 약속에는 문제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단순히 자식에 대한 사랑이 문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직 혼인하여 후손을 본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정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것도 사반세기를 기다려서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자녀를 죽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의 난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언약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그를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사실은 양립할 수 없는 난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히브리서 저자가 설명해 줍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살아야 할 사람을 죽이라는 모순된 명령이 해결되는 방식을 아브라함이 이렇게 찾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이삭을 죽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게 이삭을 살리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그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즉 다시 살리실 줄로 믿은 것입니다.
야고보의 논지의 핵심
바로 여기에 야고보의 논지의 핵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 이렇게 믿은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믿음에 일관되게 이삭을 죽여서 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죽여도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기는 하되 실제로 바치지 않으면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나는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냥 믿고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것을 야고보는 귀신이 믿는 것과 같은 믿음 곧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그가 이삭을 실제로 제단에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믿음이 바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2장 23절에서 비로소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가 드러납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서 야고보는 결국 구원의 믿음의 성격을 다루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 말은 창세기 15.5-6,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이신칭의의 근거를 삼은 이는 바울이었습니다.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1-3).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점에서 바울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만약 로마서의 이 해석이 바울의 독창적인 해석이었다면 아마 야고보는 바울에게서 이 해석을 배웠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사실을 인용하고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여기 그 ‘말씀이 응하였고’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무엇이 성취되었다, 완성되었다, 명확하게 밝혀졌다, 알려졌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믿음이 아브라함 속에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22장에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어떤 형태의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이 22장의 이삭을 바치는 행동에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행동을 통해서 비로소 그것이 귀신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 곧 죽은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야고보는 믿음 더하기 행위라는 도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유다서 3절의 ‘단번에 주신 믿음’은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믿음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믿는 바를 행동에 옮기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에게 있는 믿음이 구원의 믿음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야고보서(18) 2.20-26 2007.1.28 오후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복습
계속해서 야고보서를 상고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지적한 것처럼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 규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구원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가르칩니다. 물론 사도 바울도 구원에 대해서 경고하고 권면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혹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혹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이런 구절들은 믿음에 따르는 행동이 없다면 구원을 확증할 수 없다는 간접적인 경고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우리가 보는 야고보서의 이 부분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천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야고보에게 참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이 부분에서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상세히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훨씬 많은 혼란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구원 얻는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명확하게 밝혀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 희미하게 생각하지 않고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를 통하여 이런 진리를 밝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믿음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야고보의 논지는 구원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그냥 믿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려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논지는 ‘내가 무엇을 믿는다’고 하는 말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가 믿는 그것을 실행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의 논지는 그것이 불신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믿음이기는 하되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이 반드시 어떤 행동을 요구하느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은 그냥 우리가 명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론은 그렇게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 기독교 진리가 과연 있는지 의심스러운 까닭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념으로만 존재하고 우리 편에서 아무런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명확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경배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사실을 단순히 명상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이 바로 죽은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당연히 그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아보아야 하고, 그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려 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명상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믿음은 어떻습니까? 삼위일체는 신의 본질에 대한 신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 삼위일체의 사실은 그냥 우리가 믿고 명상만 하면 끝나는 진리입니까? 우리는 이미 강설 시간에 여러 번에 걸쳐서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의 단일복수성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이 중요한 진리는 피조물 속에 여러 가지 유비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통일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양성을 가집니다. 희랍 철학에서는 존재의 근원이 하나인가 여럿인가에 대해서 오랫 동안 논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하나이면서 여럿입니다. 마치 삼위일체와 유사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부부관계에서도 그런 단일복수성을 발견합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독립된 두 인격체의 결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혼인의 제도를 통해서 그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분명히 두 인격이 있으나 마치 한 인격인 것처럼 완전한 통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강요하거나 지배해서 도달하는 통일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일한 사상에 도달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 이루는 통일입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도 그와 유사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지만 거기에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 각각의 지체는 독립된 인격을 가진 인격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을 때에는 또한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단일복수성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쳐야 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쳐야 하고 우리의 교회 생활에도 빛을 비춰야 합니다. 이런 일이 없이 그저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명상만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어느 것도 신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저 명상만 하면 된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행동하지 않고 명상만 하겠다는 것은 희랍의 이교적 사상의 영향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믿음은 행동을 수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야고보는 먼저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명령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는 그를 죽여서 불태우라는 명령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만약 그런 명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금방 로마서 12.1-2을 상기하면서 아들을 죽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고, 그래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딜레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습니다. 자기는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침으로써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은 그 이삭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마음 속에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사반세기를 기다려서 얻은 약속의 후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1-4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인생을 거기에 투신했습니다. 그의 투신은 허무하지 않아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는 여러 아들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지정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를 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만든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약 2.22-24에서 야고보가 가르친 내용입니다.
라합의 믿음
그러나 야고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은 듯 또 한 가지 예를 듭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25절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의 경우에도 우리는 아브라함과 유사한 믿음의 행동을 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라합이 어떻게 믿음을 얻게 되었고, 그 믿음을 어떻게 행동에 옮겼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본문의 논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라합은 기생이라고 번역되었으나 실제로는 창녀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창녀였던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첩자가 라합의 집에 숨어들 간 것이 그것을 또한 뒷받침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잘 가는 곳이 무법한 곳인데, 창녀의 집이 그런 사람들이 숨어들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아주 천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이스라엘의 첩자들에게 자기의 온 가속의 목숨을 의탁한 것을 보면 그녀는 자기 가족의 부양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런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경위입니다. 라합은 물론 성경을 읽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아직 성경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진 것이 그로부터 약 40년 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후에 약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까닭입니다. 이제 그 방랑의 세월이 끝나고 죽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세대가 성장했으므로 이제 가나안 정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도 없던 그 시대 환경 속에서도 라합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렇게 제한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라합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소문을 들은 결과였습니다. 라합이 들은 소문이 어떤 것인지가 여호수아 2.8-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것이 여간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의 천한 창녀가 소문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크신 일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녀가 들은 소문은 출애굽의 기적과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이스라엘에 붙이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라합은 이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백성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아무도 못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하나님의 군대가 여리고 성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백성의 목숨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의 행동
이것이 라합이 도달한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의 집에 이스라엘의 첩자 두 사람이 숨어들어 왔습니다. 지하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익히 아는 라합은 그 두 사람을 보고 즉시 그들이 수상한 사람임을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을 주목한 라합은 곧 그 두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의 첩자인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의 도움을 입는 것이 상천 하지의 하나님의 도움을 입는 것이며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 첩자가 여리고 성에 잠입한 사실을 알게 된 여리고 당국자들이 그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럴 가능성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라합은 즉시 두 사람을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지혜로운 말로 그들을 돌려 보내고 두 사람을 살려 주었습니다.
야고보의 논지
라합의 경우에 핵심은 첩자가 라합의 집에 잠입했을 때에 라합이 취한 행동입니다. 라합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두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녀의 믿음대로 그들을 숨기고 보호해 주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고발하거나 군대가 잡으러 왔을 때 그를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라합은 분명히 그들이 이스라엘의 군대이며,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줄 것이며, 그들에게 저항한 여리고 백성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가 그들을 넘겨 주든 아니면 보호해 주든 그녀는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라합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런 두려움은 라합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의 모든 백성이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11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은 라합만의 것이 아니라 그 성 모든 사람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라합이 그것을 믿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라합이 그 첩자를 넘겨 주었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겠습니까? 그 첩자들은 죽었을지 몰라도 라합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라합 뿐 아니라 그 가족도 몰살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했을 때에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1).
그러나 라합은 거기서 믿음에 일관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첩자를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고보는 이렇게 묻는 셈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상천 하지의 하나님으로 믿었고, 이스라엘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임을 믿었고,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질 것을 마음에 진심으로 믿었다고 가정하자. 그렇게 믿고서도 위기 앞에서 첩자를 넘겨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그녀와 가족이 여리고 성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녀의 모든 믿음은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아무 실효도 없습니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아무리 잘 믿고 백날을 믿습니다 하고 외쳐봐야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리고 왕의 사람들이 와서 첩자를 내어놓을 것을 요구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만이 그녀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 순간에 믿음에 일관되게 행동했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라합이 그 순간에 자기의 믿음을 행동에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하게 됩니다. 만약 첩자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라합의 말을 믿지 못하고 집을 수색하기로 작정한다면 첩자는 발각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첩자 뿐만 아니라 라합의 목숨도 죽은 목숨입니다.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적군의 첩자를 숨겨준 죄를 짓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라합은 생명을 걸고 믿음을 결행한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문제를 놓고 오래 생각했을 것이며 그럴 만한 시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집에 첩자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라합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의 믿는 바에 따라서 목숨의 위협을 감수하고 첩자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라합의 이 결단과 투신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결론
성경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합의 경우에 이 결론은 필연적입니다. 실제로 라합이 자기 믿음에 일관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녀와 가족은 여리고 성과 함께 멸절되고 말았을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 최후로 우리의 구원을 담보하는 것은 도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 것입니다(약 2.24). 물론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참된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고보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든 아브라함과 라합의 두 예는 그냥 되는대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치밀하게 생각하고 든 예입니다. 우리는 야고보가 가르치는 두 개의 실례와 그 논리를 두 번의 강설을 통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은 공허한 위협이 아닙니다. 이 위협은 비단 야고보의 위협만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위협이기도 합니다.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주님의 이 명백한 경고가 그렇게도 쉽게 무시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마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많은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이 경고를 심각하게 여기십시다. 그리고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구원의 믿음임을 입증하십시다.
야고보서(19) 2.20-26 2007.2.4 오후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복습
지난 두 번의 강설을 통해서 행함 없는 믿음이 왜 죽은 믿음이 되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이 비록 믿음과 행함을 두 개의 요소로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가지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특별히 가르치는 행함이 도덕적인 선행이 아닌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행함은 믿음에 일관된 행동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진정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말해도 그 믿는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효에 있어서 불신과 다름 없습니다.
주님의 경고들
우리는 바로 이런 빛에 비추어서 우리 주님의 경고를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 사람이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마 7.24-29의 건축자의 비유는 그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앞에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말한 사람들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마 7.22-23). 그러므로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에서도 그들이 산상보훈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인 것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의 열매를 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 16.27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의 판단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행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행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앞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4-26).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행위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27절에서 ‘행한대로’라고 말씀하실 때에 의미하신 행위가 그것임이 분명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주님을 위해서 지상의 목숨을 포기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지상에서 목숨을 얻는 일에 급급한 사람들은 그 생명마저도 영원히 잃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경고입니다.
혹은 마 25.31-46에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가르치십니다. 그 비유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에서 발생할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 때의 심판 모습이 꼭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모습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목자는 먼저 오른 편에 양을 두고 왼편에 염소를 둡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온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어떤 사람들은 오른 편에 두시고 어떤 사람들은 왼편에 두실 것입니다. 그렇게 딱 나눠서 앉히신 후에 오른 편에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6).
그런데 막상 이 말을 듣는 오른편에 앉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주님에게 그렇게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 그러자 왕이신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렇게 한 연후에 왼쪽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선고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1-43).
이 선고에 대해서 왼편에 앉은 사람들도 역시 그런 적이 기억나지 않아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에 대한 임금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그리고 최후의 선고를 내립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물론 여기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그런 심판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민족은 결국 모든 민족 중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심판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까닭입니다. 또한 이 비유에서 그들은 모두 주님을 향하여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라고 질문하는 것을 보더라도 양과 염소로 갈린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심판을 당하는 기준은 신앙을 고백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신앙에 일관되게 살았느냐의 여부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도 그와 유사한 경고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사람이 최후에 자기의 일한대로 받는다는 이 가르침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2.6-8은 이렇게 말합니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최후의 심판이 행위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주님께서 최후에 신자를 심판하실 때에 왜 그의 신앙고백을 근거로 하지 않고 그의 행위로 하시는지는 야고보의 가르침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바로 참된 신앙은 행함에 의해서 증명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행위에 의한 심판은 결국 그들의 신앙고백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하고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믿는 믿음에 일관되게 살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하고 질문하면 아마 신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산 모든 사람들이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날에 누군가가 주님 앞에 서서 ‘나는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나의 삶은 나에게 구원을 확보해 주기에 충분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구원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까닭입니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해서 주님 앞에서 서는 사람은 율법의 기준으로 주님 앞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기준으로 선다면 아무도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저주를 받고 주님에게서 끊어집니다. 도리어 주님을 진정으로 의지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 행위에 의해서 심판 받는다는 것은 믿음과 무관하게 순전히 행위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도리어 그의 믿음이 참인지를 심판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심판은 우리 모두가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신앙에 일관되게 사는 것은 아닌 까닭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바로 마지막 날에 심판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기준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
이것은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고백하는 그 신앙의 내용이 실제로 자기에게 발생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실제로 자기에게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자기에게 발생한 사실이 입증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의 행위가 그의 고백에 일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보십시다. 구원은 포괄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큰 능력이 사람에게 발휘되어 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선 그 사람의 죄책이 용서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이 사실이 실제로 발생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안정과 평안이 있습니다. 이 안정과 평안을 가지고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마음의 준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일이 수반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생명이 그리스도로부터 흘러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의 공급을 받는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삶이 그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명이란 결국 삶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만약 그가 아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아담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리스도적인 생명이 공급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적인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는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도 그에게서 그리스도적인 삶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맙니다.
예외적인 경우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풍부히 공급되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거기에 구원이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공급 받지 못해서 그 속 사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을 만납니다. 이것은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는 신령한 젖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젖을 공급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면 악습이 몸에 배기도 하고,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믿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람의 경우에도 나쁜 환경에 처해서 악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인격과 생활을 형성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진리를 들으면 즉시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새 생명이 있음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행위에 많은 허점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고려하게 됩니다.
둘째, 성경에는 구원과 관련하여 비상한 경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5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의 경우입니다. 여기 가르침을 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력이 허망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축을 하기는 하는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이 견고한 재료들을 가지고 건축을 하지 않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건축했는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마지막 날 심판을 할 때에 그것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가지고 시험합니까? 불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그들이 세운 집에 불을 붙여 봅니다. 그러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한 사람들의 집은 다 타버릴 것입니다. 그들이 일생 동안 헛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결과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마치 불 난 집에서 황급히 벗어난 사람처럼 자기 한 몸을 거의 추스리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삶이 완전히 낭비되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7.22-23에서 ‘주여 주여’를 외치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마 그들의 진정성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저주를 받는 자들은 악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자기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혹은 이 세상에서 종교를 자기들의 직업으로 가지고 그것을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알게 된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성도 중 한 사람이 신앙 상담을 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점쟁이라고 했습니다. 그 점쟁이에게 점을 치러 오는 목사들이 그렇게 많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대개 어디에 교회를 개척해야 잘 될 것인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론 불신자에다가 영락 없는 종교 사업자들일 것입니다. 이곳 저곳에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을 배워가지고 교회를 크게 키운 후에 거기서 돈과 명예를 얻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행악하는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전 3.10-15에 기록된 바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은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인생을 헛된 데에 낭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었든지, 아니면 무엇을 착각했든지 해서 쓸데 없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하기는 했으나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기는 얻겠지만, 자기가 살면서 해온 모든 일들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또한 고전 5.1-5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다소 신비스럽게 들리는 이 가르침은 두려운 죄악 가운데 빠진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이라고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육신의 생명을 제거하는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구원 받은 사람도 그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론
이런 몇 가지 예외적인 사실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사람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리를 명확하게 쥐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다루는 야고보서의 본문에 비춰보든지, 주님의 경고들을 들어보든지 마지막 날 받을 심판의 사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지막 날 심판 자리에 가서 때 늦은 후회를 하는 수가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일단 복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