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어쩌다 아내는 별로 어둡지도 않은 초저녁에 샤워를 했을까?
좀처럼 내 앞에서도 알몸을 보이지도 않던 아내가. 나 역시 아내의 알몸을 봤던 것이 언제였던지 그 기억 조차 까무룩했었다. 묵호항 선단들의 불 빛이 겨우 반짝일 때 쯤 아내는 벌거벗은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아! 아마 그날 오징어배 선주가 텃밭에 심어 놓았던 들깨 잎을 꽁짜로 따 내느라 아내는 제법 땀을 흘렸을리라. 그렇더라도 과거의 아내의 행적에 비해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아내가 샤워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공교롭게도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내의 벗은 몸을 보자 아내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는 거였다. 삼십년 가까이 살아온 대다수의 부부라면 서로의 알몸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다반사인거늘 아내의 행동의 의외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내의 그 모습이 괴이하여 아내의 벗은 몸을 유심히도 보았는가보다.
그러면서 퍼뜩 스치고 간 그곳, 아내의 陰毛, 그곳은 유난히 무성하던 아내의 그 곳이 아니였다. 벌써 탈모가 진행될 나이도 아닌데.......그곳은 전쟁터 포격 맞은 도심지 처럼 듬성듬성 뽑혀져 있었다.
지독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다. 아내의 고통은 나의 그것에 비해 모성의 깊이로 따져 몇 배나 더했을 것이다. 내가 막걸리의 취기로 고통을 이기는 이기적인 것에 비해, 아내는 딸 아이의 고통을 같이 하면서 얼마나 지독한 괴로움을 느꼈을 것인가. 그 고통이 아내의 陰毛를 그토록 안타깝게 만든 것이다.
작년 3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필라델피아래요."
"필라델피아가 뭐야?"
"제일 힘든 거래요."
나는 그 즉시 컴퓨터를 열고 검색을 해 보았다. 수백 종류의 백혈병중에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었던 딸아이의 진단이 필라델피아 양성이었다. 백혈병 중에 예후가 제일 좋치 않고 완치율도 제일 낮다는 그것이었다. 난생 처음 필라델피아라는 말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겨우 미국 독립 초창기의 동부의 유서 깊은 도시 정도의 상식 뿐이었는데, 그 후 나는 필라델피아라는 말에 온 신경이 집중이 되었다. 필라델피아의 어느 연구실에서 염색체 이상으로 밝혀진 딸아이의 급성림프구성 백혈병 필라델피아 양성이라는 진단은 아내와 나에게 내려진 천형이었다.
과거의 달리 한국의 의료 현실은 백혈병은 불치의 병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추적 항암제가 발달했더라도 필라델피아는 힘든 현실이었다.
그래도, 그 힘든 무균실 항암 과정과 이식을 이겨내고 딸 아이의 치료 과정은 순탄한 편이었다. 아내와 나는 겨우 한 숨을 돌렸다.
그런데, 올해 2월, 골수 검사 결과에서 재발았었다. 모든 암이 그렇지만 백혈병의 재발은 대부분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작년 보다 더욱 심한 괴로움에 빠졌고, 딸 아이 역시 삶을 포기하다시피했다.
그때의 충격 때문었을 것이다. 아내의 陰毛는.
나는 아내의 그것을 보자마자 황급히 눈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내에게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 후, 다행히 좋은 약과 뜻하지 않던 건강보조식품으로 딸 아이는 재발에서 벗어나 다시 항암과 골수 이식 없이 항암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희망과 삶을 찾았다.
그렇지만, 몇 달 밖에 지나지 않던 그 아픔의 흔적이 아내의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필라델피아라는 미국 동부의 어느 도시와 아내의 陰毛의 상관관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