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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가 중천에 떴을때 집으로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잤다. 그리고 두어시간 후에 잠에서 깼다.
몸은 피곤해 죽겠고 잠을 자고 싶은데 오늘따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던 나는 몇번이나 잠을 설치다가 결국에는
일어나기로 했다.
멍하니 누워 빡빡해진 눈만 깜박이고 있을때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신혜였다.
“아이고. 며느님께서 어쩐일로 하찮은 제게 전화를..?”
-“뭐야 이송민. 죽을..아니 혼날래?!”
결혼 후, 늘상 자신을 쫓아다니는 ‘재벌집 며느리’라는 꼬릿말에 욱한 신혜는 분명 나에게 욕한바가지를 퍼부으려했으나
만삭이 다 되어가는 그녀는 태교에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바꿨다.
이러나 저러나 좋지 않은 말인건 맞는데 말이다.
“으흐흐. 무슨 일인데? 남편이 나 맛있는거 사주라고 용돈주드나?”
-“용돈은 무슨. 병원 갔다오는 길인데 시간되면 밥이나 먹자구.”
밥이라. 잠을 못자서 그런지 딱히 밥생각이 없었다.
됐다고 말하려다가 경제가 어려운 이때, 그녀의 시댁의 돈을 좀 풀고자 생각을 바꿔 알겠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입에 기름칠좀 하게 생겼으니 생각만해도 벌써 침이 흐른다. 하여간 이래서 친구를 잘 둬야 한다니까.
신혜와 통화를 끝내고 한 1초정도 흘렀나. 나가겠다고 한 것이 조금은 후회도 됐지만 집안의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하는 그녀를 보는 것이 쉽지 않아 오늘이 날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헌데, 웃음이 나왔다. 좀 어이없는 웃음이랄까. 그렇게 오지않던 잠이 올 것만 같았다.
.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 안할거야?”
“응. 그런거 안해도 난 우유빛 피부라니까?”
“초코우유?”
“쓰읍.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너나 하고 오세요.”
남편과 자주 간다는 신혜를 따라 호화로운 곳에서 배를 가득 채우고서 온 곳은 꽤 유명한 피부관리실이였다.
얼마나 유명하냐면은, 이 곳에 들어온지 5분도 채 안됐는데 벌써 연예인만해도 다섯명이나 왔으며
신혜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여자들과 꽤 높은 저력가들이 끊기지않고 들어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하여간 이송민, 친구덕에 이런 곳도 왔지만 딱히 관리를 받고 싶지 않은 나는 신혜만 들여보내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밤낮으로 컴퓨터앞에 앉아 글만 쓰느라 전자파로 가득하니 케어를 받으라고 할때 냉큼 받아야 하는거지만
딱히 땡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서야 밀려오는 잠에 신경이 조금 예민해져 있어서 타인과 접촉하는게 썩 내키지 않았다.
“남자도 오는구나..”
쇼파에 앉아 잡지를 보며 하품만 하고 있는데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는건지 프론트 앞에 있는 서너명의 남자들이 보였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저 남자들중 캡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와 비니를 쓰고 있는 남자는 굉장히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들이였는데 생각이 나질 않아 답답해하고 있을때 이제 막 넘긴 잡지의 다음장에 그들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프론트 앞에서 모자를 쓰고 있는 두 명의 남자와 모 브랜드의 모델인듯 나란히 서있는
잡지속의 두명의 남자. 그들이였다.
그 모델들 밑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옷에 대한 설명과 가격이 써있고 모델 이름이 써있는데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가수 투보이였다.
하긴, 연예인들은 남자고 여자고 이런 것들이 필수일테니. 곧 한쪽 복도로 모습을 감추는 그들을 보다가 다시 잡지속으로
시선을 옮기면 대기실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땠어? 받으니까 피부가 좀 달라졌지?”
“그렇긴한데 이거 계속 해줘야하는거 아냐?”
“계속하는게 뭐 어려운가. 나 할때 같이 와서 하면 되잖아~.”
“하여간 내가 너때문에 별걸 다 해본다 진짜.”
남자를 향한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그런 애정표현들쯤이야.
옛 세대와 달리 요즘 세대들은 개방적이고 나 또한 그렇기에 민망하진 않았지만 좁혀진 미간의 주름의 원인은
여자의 목소리가 낯익다는 거.
잡지를 보던 고개를 들어 여자를 확인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 언니 안녕하세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반갑다는 듯, 내게 먼저 인사를 건냈고 누구냐는 남자의 질문에 학교 선배의 여자친구라며
나를 소개했다.
학교 선배의 여자친구라. 우리가 단순히 그런 사이일까?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겨버렸다.
“언니도 관리 받으러 오신거예요? 혼자서?”
“아니. 친구받는데 같이 온거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남승주가 그럼 그렇지라며 나를 내려 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높은 힐을 신고 위에서 나를 내려보는데 상대가 상대인만큼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언니도 좀 받으셔야겠어요. 트러블이 장난이 아닌데요? 요즘 글이 잘 안써지세요?”
“그러는 너는 깨끗하네. 여기 잘하나봐?”
“아 정말요? 여기 실력도 좋긴 하지만 제가 원래 뾰루지같은 건 없거든요. 전 기본케어만 해요.”
오물조물 잘도 움직이는 그녀의 입을 성질같아선 확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녀의 옆엔 보호해주는 몇번째일지 모를 듬직한 남자도 있고 본인의 말대로 그녀의 얼굴은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관리를 받은 덕도 있겠지만 기본 바탕이 되니 쌩얼이어도 저렇게 빛이 나겠지.
알겠다며 그만 가라고 손짓을 해보이면 내게 한발짝 더 다가오는 구두소리와 나를 덮는 어둠에 잡지를 넘기던
손이 멈춰졌다.
“희수선배 몸은 좀 괜찮아요?”
약간 허리를 굽혀 말을 건내는 그녀는 앞으로 쏠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감기기운 있는 것 같던데.”
그 것은 모든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의 1순위 모습이였다.
.
다음 날 일요일 아침, 아니 새벽부터 나는 화장실에서 살아야했다.
역시 나에게 호화로운 음식들은 맞지 않는 모양인지 어제 먹은 것들을 아깝게도 모조리 뱉어냈다.
날이 환해질때까지 남김없이 뱉어낸 나는 방으로 돌아갈 힘도 없어 기어오듯 오른 쇼파에 누워있는데
열리는 현관문새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어라? 송민이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이불도 안덥고~.”
엎어져 있는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듯, 여자는 이러면 안된다며 장난끼가 가득한 구자현이 다가오는게 느껴졌고
엎드려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당연히 그 뒤에는 조민서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온 것으로 지금 시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상태에 놀랄 구자현의 호들갑보다 화난 목소리로 물을 조민서에게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때였다.
“아퍼?”
제대로 감기에 걸린 모양인지 걸걸하게 변한 조민서가 아프냐며 물어왔고 그제서야 알았는지 나를 흔드는 구자현덕에
띵하기만 했던 머리가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하여간 눈치코치없는 구자현은 이래나 저래나 도움이 안된다.
흔들지 말라는 조민서의 말에 나를 잡고 있던 구자현의 손이 떨어진 대신 나를 바로하던 조민서의 손이 내 이마위에
얹어졌다.
“이송민 너 진짜.”
눈꺼풀이 무겁고 자꾸 눈이 감기길래 대충 열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조민서가 화낼만큼인줄은 몰랐다.
나를 일으키는 조민서에게 괜찮다고 말했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약을 사오겠다는 구자현이 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인 지금, 어디서 약을 사오겠다고. 그것도 일요일인데.
날도 날이고 시간도 시간이니 문을 연 약국은 당연 없을테고 구자현에게 전화해 그냥 오라고 말해야하는데
엉뚱하게도 마른 내 입술새로는 힘에 겨운 숨소리만 나올뿐이였다.
“왜이렇게 속상하게 하냐..”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 너는 뭐 다를줄 아냐.
아프면 구자현한테 맡기고 일찍 좀 들어와 쉴것이지. 아무리 니가 사장이지만 너 없이도 가게는 잘 돌아간다고.
구자현이 니 밑에서 일하는게 하루이틀도 아닌데.
“등신.”
웃긴다 조민서. 지금 등신이 누군데.
맞다. 남승주가 윤희수도 감기기운있다고 했는데.
하하하..이 순간에도 노느라 피곤해서 감기에 걸렸을 윤희수를 걱정하는거보면 조민서 니 말대로 나는 등신인갑다.
순간 내 몸이 붕떠지는게 느껴지고 거친 숨소리가 가깝게 들려왔지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그렇게 푹신한 침대에 뉘여졌고 따뜻한 이불은 목끝까지 덮여졌다.
요즘 기르는 중이라 자르지 않아 눈을 덮는 앞머리는 어느 손길에 의해 옆으로 정리되었고 훤해진 이마위에서는
식을만하면 금새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같은 숨소리에 나를 향한 지긋한 시선도 틀어짐없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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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참! 얘가 나이가 몇인데 선이예요! 것도 아픈애한테!
정성이 가득한 간호를 받으며 푹 자고 일어난 나는 조민서가 직접 쒀준 죽을 먹고 어떻게 구해온건지 모르겠지만
구자현이 사온 약까지 먹고서 소화를 시키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현관벨소리가 울리더니 예상치못한 손님이 찾아왔고 그 손님은 다름아닌 큰원장님이였다.
몇일전에 대구로 최고의 집을 이사한 큰원장님이 이런저런 일들을 정리할겸 밑반찬들을 갖고 우리집에 들르셨다.
그리고는 무작정 선을 보라는 큰원장님이 건낸 사진속에는 꽤 건장한 남자가 있었다.
“CEO다. 젊은 나이에 성공했지. 괜찮은 청년이야.”
방정맞은 구자현이 사진을 잽싸게 뺏어가느라 사진속 남자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본 그는 선한 인상이였다.
“자현이랑 같은 스물여덟이다. 궁금한 것은 만나서 천천히 얘기해보는 것이 낫겠지.”
이봐요 큰원장님. 나는 아직 나가겠다는 대답도 안했는데 왜 꼭 내가 나갈것처럼 말하는건가요.
나랑 동갑이라면서 뭐 이렇게 동안이라며 징징대던 구자현과 소화하기 쉽게 여지껏 내 등을 두드려주던 조민서는
손을 거두고 구자현에게 뺏은 사진을 보며 입술을 떼었다.
“낯이 익네요.”
유난히 눈썰미가 좋은 조민서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그를 보던 큰원장님의 시선은 다시 내게 꽂혔다.
“너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지만 한번 만나봐. 나쁠것은 없잖니.”
“그런 사람을 왜 굳이 저한테..”
“그래 아버지! 왜 맨날 임자있는 민서형이랑 송민이한테만 선보라는건데!”
어렸을 때부터 큰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며 이제 짝을 찾아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가 되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는지
자신도 선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구자현은 말실수를 한 것을 아직 느끼지 못한 듯 떼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끄러! 임자도 임자 나름이지.”
떼쓰는 구자현을 한번에 제압한 큰원장님은 나를 보고 조민서를 보았다. 그를 보는 큰원장님의 시선은 거둬질줄을 몰랐다.
허면 그 시선을 마주한 조민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나 싶더니 웃어보였다.
웃음도 웃음 나름이다. 상대방이 받기에는 적절치 못한 그의 웃음은 큰원장님의 미간을 좁히기엔 충분했다.
“저녁에 출근해야되서 먼저 들어가 쉬겠습니다. 송민이가 아파서 간호하느라 쉬질 못했거든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조민서가 일어남으로 일렁이는 쇼파에 의해 내 몸이 잠시 흔들렸다.
“못난 놈.”
진심이 가득한 큰원장님의 말과 함께 우리를 지나친 조민서가 방문으로 향하면 큰원장님의 목소리는 이어 들려왔다.
“너도 예외는 없어. 준비하고 있거라. 곧 자리를 마련할테니.”
“자현이 말대로 송민이와 저, 임자 있습니다.”
등을 지고 말하는 조민서의 목소리에 아직 고르지 못한 내 숨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면 거실에 남은 구자현과 나는 큰원장님의 눈치만 보았고 큰원장님은 그를 삼킨 방문만 볼 뿐이였다.
“아버지는 왜 맨날 민서형한테 선보라고 해. 뻔히 알면서. 아버지가 실수한거야.”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말하는 구자현은 쇼파 손잡이에 앉았고 큰원장님의 시선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있었다.
“뻔히 아니까 그렇지. 언제까지 그런 여자를..”
다 알면서도 독설을 뱉어 악역이 되는 것을 자처하는 큰원장님은 역시나 우리의 부모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맞선남의 사진을 집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내려보았다.
어디가서 뒤지지않을 외모였으며 여자들의 시선을 한번쯤은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이미지였다.
사진으로 보아 그런 사람일 것이라 판단된 나는 집어든 사진을 챙겨 쇼파에서 일어났고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던 구자현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휘청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 볼게요. 장소는 나중에 그쪽이랑 정해서 알려주세요.”
“송민아!”
나를 부르는 구자현의 목소리의 의미가 넘어뜨려서 원망스러운 것인지, 선을 보겠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민서오빠 대신이예요. 그러니까 당분간 민서오빠는 보류해주세요.”
퇴근 후, 집으로 온 뒤로 여지껏 옆에서 간호해준 조민서에게 보답하는 내 마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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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기저기서 치이기만하네요 뉴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