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문화원과의 인연은 팬플릇 강의를 듣기 위해 검색하던 중 유일하게 동작문화원에서 강의를 하기에 고양시 일산에서 2시간씩 다니며 배우러 다녔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유일한 박사님의 동상을 보고 너무 반가운 마음으로 이력내역을 읽어 가던 중 지난일 들이 오버랩 되며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오류초등학교를 졸업 후 더벅머리를 삭발하고 중학생이 된다는 가슴 부푼 설레임으로 교복과 모자를 지급 받고 첫 등교 며칠 후 유일한 박사님이 1971년 3월 11일 돌아가셨다. 전교생이 학교 앞 정문부터 경인 로를 양쪽으로 도열하여 운구차를 맞이하였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조화도 보내오고 각종 언론사 취재진들도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정문 옆 동산에 산소를 마련하였다. 참배도하고 훌륭하신 박사님의 얼을 배우고 익히며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학교의 교훈은 성실이었다. 유한공고는 당시 경쟁률도 치열하고 학비가 없었음으로 전국의 모범생들이 많이 모였다. 유일한 박사님은 기업을 공개하여 투명경영을 실현하였고 정직한 세금납부로 산업훈장을 받았다. 국가는 세금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므로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또한 인재 양성에도 힘써 1965년에는 개인 주식 5만 6천주를 팔아 학교법인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해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고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셨다. 학교 부지는 행정구역상 부천 쪽에 땅이 많이 들어가 있었으나 학교 정문이 서울로 향해 있어서 일까 서울에 있는 오류초등학교와 고척초등학교 학생들이 대부분 입학하였다.
기독교 학교여서 성경 공부도 많이 하고 훈화 시간에도 기도를 하고 그래서 지금도 찬송가 10여곡은 외우고 있다. 유한양행 회사 입사시험을 유한 중. 고등학교에서 치러지곤 하였다. 박사님은 기업 경영의 목표를 이윤 추구에 두지 않고 건전한 경영을 통한 사회 헌신을 평생 신념으로 삼으셨다. 회사운영도 세습으로 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겼으며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였다. 요즈음 정치권과 대기업 오너 가족들이 자녀에 대한 각종 비리와 재산문제로 소송을 제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일한 박사님과 같은 훌륭하신 자녀 사랑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영향을 받으셔서 그런지 저의 부모님도 제가 1982년 2월 전투경찰로 제대 후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인사 드렸더니 여동생에게 집 옆 슈퍼에서 맥주 2병만 사 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신 뒤 나에게 맥주 한 잔을 손수 따라주시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셨다. 전투경찰 출신이어서 경찰로 갈 수 있으나 저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까지 친가와 외가 그리고 고향 친척들을 50여명이 넘게 취직을 시켜주었다. 허나 내 아들이라고 생각되니 취직 부탁을 못하겠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바로 다음날부터 마포구 아현 도서관에 도시락 2개와 1,000원을 받아 가지고 다녔다. 당시 전역한 친구들이 5명 정도 같이 공부하였다.
아버님은 이북에는 오산 고보, 이남에는 고창고보가 있던 시절에 고창으로 유학 가서 고창고보를 졸업하심을 긍지를 가지고 말씀하시곤 했고 친구 분들도 법조계와 학계 등 다방면에 친구 분들이 많고 미원회사 사장이 큰 집 할머니 친조카여서 미원회사에도 상당한 분들을 취직시켜 주었다.
아버님도 신학문을 배우시고 명문학교를 나오셔서 훌륭하셨지만 우리 어머니가 더 훌륭한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어렵던 시절 친정, 시댁 식구들 서울 올라오면 우리 집이 정거장이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치러내고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애쓰시던 분이었다. 어머님이 57세의 빠른 나이에 돌아가시게 되자 1986년 그때에도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없었던 터였는데 5~60대의 나이 드신 분들이 자진해서 어머님 상여를 메겠다고 하셨다. 냇가 앞을 지나게 되면 우리풍습에 노제를 지내며 쉬었다 가는 과정에서 한 분이 저에게 오셔서 “자네 어머니를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왔네.”라고 말하시며 “서울에 처음 올라가서 자네 집에서 먹은 쌀밥 한 그릇이 평생을 잊지 못하고 살았네.” 말씀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자네 어머니는 참으로 덕인이었네 하신다. 60년 초.중반에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서울로 돈 벌러 무작정 상경하는 분들이 참 많은 때였다.
부모님의 은덕으로 복을 많이 입은 것 같다. 바로 밑 동생은 서울대학교와 삼성전자라는 글로벌 기업에서 상무직을 8년간 맡았고, 여동생은 건설회사에서 30여년간 회계업무를 맡아 인정받고 있고 막내도 독학으로 방송통신대와 성균관 대학원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고 정보통신부 행정사무관으로 퇴직하였고, 아이티 관련회사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있으니 참으로 부모님의 은덕이 아니겠는가.
아버님이 일산 암센터에 계실 때 막내 동생 형제와 나의집사람과 넷이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간호를 하던 중 하루는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아버님의 살아온 과정을 다 말씀하셨다. 동생이 1살, 내가 3살 되던 해에 시골소식을 접하고서는 “자네 처와 점영이가 못 먹어 부황이 나서 점영이는 배가 남산만 하다네.”라는 왕심 집안 소식을 듣고 아버님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1961년 삼월 보름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서울 간다고 하니 십시일반 건네준 100여만 원의 돈을 안주머니에 꽁꽁 싸매고 천원역(정읍 바로 전 정거장)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오다가 천안 즈음해서 젊은 청년 4명이 지나가면서 뚝 치고 가길래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때는 몰랐는데 영등포역에 도착하여 주머니에 있는 돈을 확인하니 돈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열차에서 소매치기들한테 가진 돈을 다 날리고 영등포 역전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신풍동에 거주하고 계시던 남희북씨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부모님은 벽돌 공장에서 일하고 큰 고모는 나와 함께 길문이를 키우고, 길문 동생이 하도 울어대니까? 그때 당시 아침에 울기 시작하면 저녁 시간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으니 도저히 서울 집에서 나와 길문이와 둘 중에 하나는 시골집으로 내려 가야 될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시골로 내려가게 되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다시 올라오게 되었다. 수소문해서 남희북씨 연락처를 찾아내어 전화 통화를 하였는데, 그때 당시 아버지 혼자 들어오시어서 이만 저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고, 어머니가 징그럽게 고생 많이 하셨다고 말씀하시었다. 내가 3살, 동생이 1살 때이니 갓 시집온 새색시가 벽돌 공장에서 일을 하며 시동생, 시누이 등과 한방에서 살아야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도 가끔 벽돌 공장의 기름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라 생각이 나서 이번에 정읍 햅쌀 10KG 한 포대를 우편 주문하여 보내드렸다.
이 글을 쓰니 자꾸 나도 눈물이 난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당시 육성회비가 제일 많이 내는 학생이 한달에 900원이었는데 일 년 치 11,800원을 한 번에 내고 담임선생님에게 과외 받고 그랬는데, 아버님 사업 실패 후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담임선생님이 그러실 때에는 학교 다니고 싶지 않았던 적이 있다. 그래도 아버님은 항상 희망을 갖게 해주시고 직접 수학.영어를 가르쳐 주시어 중2 때는 영어,수학 올 100점을 맞고 하니 친구들이 놀라며 어디서 과외 받느냐며 물어보던 기억이 난다.
아현도서관에 도시락 2개씩 싸가지고 다니며 독학으로 공무원시험 준비할 때 오전 공부를 마치고 오후 시간이 되면 다른 친구들은 대학입시 학원과 공무원 취업반 학원에 수업을 받으러 가고 나면 혼자 남아 공부하였다. 사실 나도 대학에 가고 싶어 재수 학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가정 형편을 뻔히 아는지라 말 한마디 꺼내보지도 못하고 혼자 남아서 서러움에 복받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저녁 6시만 되면 국기하강식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는 꼭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겠노라는 나만의 다짐을 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다짐을 하고 나면 자신감도 생기고 긴장되어서 그런지 공부하는데 힘도 들지 않았다.
당시 천안에 독립기념관 건립 성금을 모금한다는 뉴스를 보고 나도 벽돌 한 장 값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3,000원을 기부하였다. 나한테는 실로 거금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려고 도서관 구내식당에 우동국물 50원짜리 국물에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밥을 말아먹으면서 공부하던 때였으니 3,000원은 나에게 큰 돈이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후손으로서 독립 투쟁을 하다가 모진 고생을 하고 돌아가신 선열들을 생각하면 그까짓 돈이 뭐가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하며 기부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유일한 박사님의 유지를 보고 자라온 세월이 어느새 환갑의 나이가 지나고 유일한 박사님의 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정치권 지도자와 대기업 오너들의 자식문제를 생각해보면 더욱더 유일한 박사님의 깊고도 깊은 나라 사랑과 자식 사랑을 새삼 더 깊고 넓게 느끼게 된다. 코로나19로 많은 국민들이 피로감에 지쳐있는 이때에 유일한 박사님과 같은 훌륭한 현인이 있다는 게 큰 기쁨을 느낀다.
동작문화원은 타구보다 많이 앞서가는 것 같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알찬 강사진을 확보하고 운영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코로나 때문에 팬플릇을 배우러 가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며 하루빨리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서 마스크를 벗고 동작문화원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동작구민들의 모습을 보고 어깨를 함께 하고 싶고 문화원 입구에 있는 유일한 박사님의 동상 모습을 보며 희망과 꿈을 키워 나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선열들 중에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다. 개인적으로 문인으로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을 무신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우리집안으로는 안중근의사를 존경하고 흠모하며 63년의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학교생활 중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은 유일한 박사님이시다. 유일한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자꾸 보고 싶어진다.
선열들의 좋은 점을 되새겨서 IT강국의 면모와 전세계에서 코로나19 극복 우수국가를 계속 유지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웅비하는 대한한국의 국민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본다.
*동작문화원에 응모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