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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의 음식 코드
이 글에서 참고한 시집은 다음과 같다. 정끝별, 『모래는 뭐래』, 창비, 2024(초판 3쇄).: 이규리,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문학동네, 2025.: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2020(1판 2쇄).: 유종인,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문학동네, 2024.: 손택수, 『눈물이 움직인다』, 창비, 2025.: 조온윤, 『자꾸만 꿈만 꾸자』, 문학동네, 2025.
김효숙 (문학평론가)
1. 끝없는 시 레시피
어느 시집을 펼쳐보더라도 음식 소재 시가 눈에 잡힌다. 시대를 불문하고 당대인의 구체적 현실과 정서를 음식에 투사하고 있다. 그만큼 음식은 우리에게 거리를 잴 수 없을 만큼의 밀착성으로 의식 이전의 욕구를 부추긴다. 같은 음식을 놓고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때문에 근대 시기에 백석이 썼던 국수 소재의 시와 현대시의 그것은 의미 범주가 다르다. 개인의 환경에 따라 형성된 식습관 때문에, 이전에 공유했던 공동체의 가치는 지금, 이 시대를 반영하면서 파편화한다. 신경림의 시에서 국밥·막걸리·국수·메밀묵은 민중의 애환을 대리하며, 고된 노동 뒤에 하루의 피로를 풀며 시대적 울분을 삼킬 때 먹었던 음식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 한 공기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의 가없는 정감을 자아올린다.
날것인 자연물을 가공하여 풍미와 미적인 외관을 선사하는 음식이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건 문화가 주도하는 시대의 한 증상이다. 외모 계급화 시대의 루키즘처럼, 보기 좋은 음식이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식이 대중화하면서 외적 우아함을 조성하는 음식은 중산층의 격과 능력의 표지이자 계급적 문법이기도 했다. 그들은 취향을 중시하면서 어떻게 우아하게 먹을까를 궁리하는 부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국적을 지운 혼종의 레시피가 전통적인 먹을거리들을 식탁에서 밀어내고 있다. 그만큼 어느 시대에나 음식 문화의 이면에는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당대인의 처절한 고투가 있고, 급진전하는 기술산업의 시대에는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음식과 부상하는 음식이 있다.
당연히 거기에는 첫입에 반하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도 있다. 어떤 음식은 맛도 느끼기 전에 씹어 삼켜 배를 불리지만, 또 다른 음식은 불편한 분위기에서 견딤의 시간을 거치면서 맛도 모른 채 삼키게 된다. 앞의 경우가 ‘행위’의 표징이라면, 뒤의 경우는 음식을 먹는 이유에 대하여 ‘가치’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는 단지 음식의 맛만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지위나 분위기·장소·인간관계 등과 엮인 문제다. 최근의 시인들이 펼치는 음식 상상력은 소극적인 상징이나 묘사로 일관하기보다 개인의 아비투스를 갖가지 직·간접 경험과 감정으로 버무려 내는 양상을 보인다.
새로운 음식을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구가하는 현대인에게 음식이 단지 생존에 기여한다는 관념은 식음의 이유가 일차원적인 것만큼이나 그 질량이 가볍게 다가온다. 음식이 여러 차원을 지닌 문화 매개물일 때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2차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취향에는 독특한 경제 논리가 작용하고 계급의 지표로도 기능한다. 그는 culture를 ‘문화’ 또는 ‘교양’이라 풀이하면서 미려한 취향을 말할 때 특히 음식 맛을 들어 이 문제를 강조한다.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 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1995, 20~21쪽.
그만큼 음식에 대한 미감은 누구나 즉자적이다. 여기서 핵심은 문화·교양이라는 약호가 일종의 문화 자본의 기능을 하면서 문화적 실천을 추동하는 경제 논리에 속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이다. 이는 취향이 경제 논리를 따라 형성된다는 의미다. 누가 어떤 음식을 어떤 장소에서 먹느냐가 그의 계급을 대변한다. 음식은 생존 문제를 포괄하면서도 경제 논리·자본 계급·사회적 지위를 지닌 기호이기도 하다.
2. 우선은 먹사니즘, 그다음은?
초고도 산업화 단계인 오늘의 사회에서는 음식도 개발한다.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개의 관점으로 음식 시를 맛볼 것이다. 최근의 음식 소재 시가 어떤 동기를 따르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행위냐 가치냐’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응답을 몇 편의 시로 마련해 본다. 단지 섭생의 문제일 뿐이라는 감각으로는 음식문화를 왜곡할 것이고, 의미와 가치만을 따진다면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누군가의 사정을 배제할 가능성이 크므로 음식이 지닌 양면성을 살핀다. 하나는 먹는 행위로서 음식, 다른 하나는 가치로서 음식이다. 앞은 생존 문제에서 가장 절실한 것, 뒤는 사회적 개인이 마주하는 문화적 매개물로서의 가치와 관련한다.
먹방을 떠올려 보더라도 음식 섭취 행위란, 오장육부의 협업으로 온몸을 살아 있게 하는 재료를 먹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음식의 산업화를 이끌어내는 포식의 자세를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사정이 그들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음식을 실컷 먹어 배가 불러 보인다는 외부자의 반응이 먹방의 주체에게 전적으로 부합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즐기는 맛과 포식의 자세는 모름지기 구별된 자의 그것이다. 먹어야 산다는 절대 명제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맛을 즐기는 그들에게 음식은 먹사니즘을 공고히 해주는 매개체일 수만은 없다.
음식을 먹어야 산다는 일차 욕구와 의미 간 가치의 충돌은 빈번히 일어난다. 먹사니즘을 우선순위로 하면서도 이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말할 때 음식은 하나의 상징 기호로 변신한다. 단지 생존을 위한 물질을 넘어설 때 수다한 매개 변수를 지니면서 음식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같은 음식을 놓고도 나라마다 반응이 다르고, 심지어 구역질을 유발하는 혐오물이 되는 경우를 보더라도 음식 선호도가 단지 소화 생리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음식 섭취의 즐거움 또는 혐오 감정을 문화적 맥락에서 찾는 시도가 있어 온 이유도 이런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음식을 놓고 선호 또는 기피의 경향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음식 그 자체의 기능이나 본질과 전적으로 관련하지는 않는다. 향유자의 의식이나 가치관, 요컨대 사고 유형에 따라 달라지면서 개인의 기호嗜好는 기호記號로 전환하기도 한다. 특히 뒤의 기호는 시문학에서 갖가지 상징으로 변장하여 나타난다. 어느 시인이 빚어낸 언어가 음식과 관련한 가난의 은유일 때 우리는 그에게 빚진 자가 된다. 배가 고프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정신주의자의 관념을 추종하기에는 현시대가 너무 풍요로운 까닭이다. 배가 고픈 시인이 정신의 고상함과 풍요를 일군다며 생활 문제를 비켜갈까 봐 염려를 보태게 되고, 세계 경제 순위가 앞자리를 차지하는 우리 사회에서 가난을 말하는 시가 과연 실재를 반영하고 있느냐는 의심을 품게도 된다.
그런가 하면 어느 시인은 과일을 저항의 기호로 내세워 외력 주체의 폭력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에 가깝거나 당사자성을 지녔다면 단지 시적인 상상력으로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음식들이 발산하는 냄새·맛·감정·의식 등은 고상한 정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거친 현실 쪽으로 환류한다. 이 시대 대부분의 시인은 정신의 밭 일구기를 우선순위로 아는 전통적인 선비 정신을 구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쓰는 일도 먹사니즘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지속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시 바깥의 현실이 시 쓰기의 지속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시 쓰기를 먹고 사는 문제와 분리하여 너끈히 감당하는 전업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경우에 시인은 먹고사는 문제와 시 쓰기가 같은 지평에 놓인 하나의 삶이라는 점을 부단히 이야기하면서 ‘가난’이라는 기표를 빈번히 사용한다.
이렇게 분리가 불가능한 행위와 가치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다. 이는 최근 힙한 디저트 중 하나인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를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와 곁들여 먹기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거나, 동파육에 얽힌 소동파 시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 고기를 먹어보지 못한 미경험자이기에 푸념 섞인 타령조의 동파육 이야기에 냉소를 담은 시인 편에서의 발화가 될 것이다. 영양을 공급받는 차원을 넘어 자본 권력의 상징이 되었거나, 미래라는 희망을 자기화하기 어려운 계층이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하루의 즐거움을 좇을 때 선택하는 값비싼 음식들은 예외로 한다. 그편에서 쓴 시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다.
3. 계층·계급에 따른 아비투스
의미와 가치를 앞세우는 음식 이야기는 애초에 신성의 영역에서 왔다. 첫 수확물을 신에게 바칠 때의 의례 음식인 포도주,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음료인 ‘암브로시아’를 전유한 유사 명칭의 대중 음료가 판매되는가 하면, 왕의 음식이나 궁중음식이었던 것이 지금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대중 상품으로서 구매력을 지닌다. 그리고 음식 종류를 세분하여 나쁘거나 좋은 음식을 촘촘히 분류하는 비건들에게 좋은 음식은 대부분이 식물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좋거나 나쁜 것으로 분류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는 동물 살해자라는 가학성의 주체가 바로 자신인 점을 피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를 내세워 인간이 육식 동물임을 암시했을 때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그 육질을 일상 음식의 표현으로 읽었다. 이 여자는 인간과 동물종을 일치시키면서 동종 살해자의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시 장르로 가보면, 동종 살해의 주범이 바로 자신이라는 감각을 환기하는 시는 더할 나위 없이 많아서 일상의 보고서처럼 보일 정도다. 그중 인간의 육식 욕망을 끝나지 않을 밤의 비유로 말하는 시(이영주, 「밤은 끝나지 않아」, 『포엠피플』, 2025년 겨울)에서 타자의 피와 살은 숙면(=건강)에 좋은 레시피의 끝판왕이다. 시인은 혈육血肉의 메타포로 세대를 잇는 동종 살해의 이유를 들추면서, 남의 피와 살과 뼈가 죽은 자도 일으켜 세우는 불멸의 레시피라는 점을 풍자한다. “산 자의 마음을 만지”는 일은 연약한 자의 정서일 뿐이고, 죽은 자도 일으켜 세우리라는 기대를 “육식 레시피”에 거는 일. 이 같은 발상이야말로 끝없이 아끼는 “나의 허벅지”를 구원할 것이라 믿는 어둠의 세계라는 것이다. 거기에 세대를 잇는 육식의 “삼복 레시피”가 놓여 있다.
최근 시의 음식 레시피에는 전통과 현대를 꿰어 내는 감각이 살아 있다. 재료 하나로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요리사처럼 시인도 감정과 의식을 빚어 넣은 레시피를 선보인다. 지금은 소비 왕이 경제를 살리는 시대. 먹방에서 대신 먹어주는 이들의 만족감과 미감을 상상하며 쾌락에 빠지는 일이 헛배 부른 자의 것일 수만은 없는 시대. 새 음식 개발로 소비자의 기호를 자극하는 식당도 늘어나고, 맛집을 찾는 순례자들이 늘어선 줄도 골목길의 풍경을 바꿔 놓는다. 개인이 누리는 문화의 다름에서부터 사회적 인간의 위상도 달라진다. 어떤 음식을 어느 장소에서 소비하느냐가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할 때가 있다. 소셜 다이닝이라는 용어가 말해 주듯이 식음 행위는 단지 일차 욕망에 그치지 않는다. 관계 맺기의 지형을 만들어 주고, 음식을 나누는 장소는 음식 제공자의 사회적 지위나 소유의 정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차원적인 먹사니즘이 고상한 가치의 생산으로 이어지고, 만남의 장소는 그것을 공유하는 곳으로 전환한다. 미감과 상호 유대감이 만나는 곳에서 음식의 가치는 본래의 자연성을 벗어나 문화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런데도 요즘 시에서 흔한 건 도리어 ‘혼밥’의 주체다. 일인 가구의 폭증과 ‘홀로’의 감각은 같은 맥락에 놓인다. 조온윤 시인이 「영원한 빵 이론」에서 “내가 받은 빵도 누군가의 절반이었던” 것을 분배받은 엄연한 하나의 지분이라고 적었을 때, 지명할 수 없는 그 누군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엄연히 살아 있다는 감각이 우세하다. 끝없이 세분되는 빵의 효능감을 시인이 헤아려 보고 있듯이 누군가 흘린 빵 부스러기조차 곤충의 먹이가 되는 하나의 연쇄 고리 안에 놓인다. 여기서 빵의 은유는 일차 행위로서 음식 섭취와 관련한다. 혼밥을 먹는 이가 등장하는 「사인용 식탁」에는 제목과 어긋나는 감정이 실려 있다. “여느 날처럼 침묵을 두르고/밥을 먹으며 생각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배를 채우는 일차 행위는 타자와의 유대감이나 대화 상실에서 오는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이 감정은 곧잘 그리움의 연쇄를 낳는다. 음식 섭취 행위의 개인화가 타자와의 유대를 희박하게 만드는 여기서 혼자 먹는 일은 비사회성의 표본이다.
외로움은 일인 분의 식사가 아니다
사인용 식탁의 빈자리들이다
그리움은 인간을 본뜬 석고를
보며 그린 소묘를
또다시 베끼는 일이다
그걸 베끼고 또 베끼다 보면
언젠가는
추상적인 동그라미 몇 개만 남게 될 것이다
식기를 치우면
책상이 되기도 하는
식탁 앞에 앉아
닫힌 창문을 보며 창밖을 그렸다
그릇을 씻고 덜 마른 손에
동그라미가 번져서
무언지 알아볼 수 없었다.
― 조온윤, 「사인용 식탁」 부분
이 그리움은 달콤하지도 아련하지도 않다. 혼밥족의 식사라는 이유에서다. 손을 대기조차 꺼려지는 석고처럼 고형화한 감정에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마저 고체나 다름없을 터. 그리움이 깊으면 “추상”이 되는 이치는, 실물감 없이 한낱 감정일 뿐인 것이 허기의 형태로 마음을 차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식탁과 책상의 혼용인 하나의 사물이 배를 채우는 일차 행위의 장소일 때도 마찬가지로 대화 상실과 유대감의 불모 때문에 외로움의 장소가 된다. 생활인의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정작 “추상적인 동그라미”들일 뿐이고, 생활을 공유하는 타자의 부재도 신체가 느끼는 허기와는 감도가 다르다. “무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그것이 없음으로써 공허한 것, 사인용 식탁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상대의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추상을 만들며 번지는 텅 빈 감정이다. 일차 욕구로서 음식 섭취는 단지 행위로 그치지 않는다.
손택수 시인은 홀로 또는 ‘같이’의 가치에 앞서 음식 자체가 지닌 온기를 사람을 대하듯 애호한다. “갓 나온 빵이 내는 소리를” “눈 오는 소리”나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들이 내는 소리로”(「빵 나오는 시간」) 듣기도 한다. 빵에 대한 기호嗜好를 혈류를 따라 번지는 짜릿한 감각으로 묘파하면서 불의 시간을 통과한 음식의 정결한 맛을 상상한다. 이 시를 지나 「저녁을 짓다」에 이르면, 밥을 지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을 “이 지상의 습관”으로 알아 온 지극함에 관한 발화가 이어진다. 공깃밥이라는 칭호에서 “무한”을 들은 시인이기에 한량없는 공기가 우리 목숨의 원천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필멸의 인간에게 무한의 상징을 안기는 공기+밥. 이는 다함이 없는 공기를 담은 밥을 공깃밥이라 부르는 시인의 온기 어린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한편, 정끝별 시인이 「이 시는 다섯 발톱의 별 시입니다」에서 그린 식탁은 가족의 일원을 떠나보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마주 앉은 가운데 서로 얽혀드는 시선, 중구난방 쏟아내는 말들에는 밥과 꿈이 한데 엉켜 있고, 이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한(“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시선들이 따 따 따따따 타전한다/밥이라니까 꿈이라니까 아니 가족이라니까”) 행위이자 가치이면서도 “쉼 없이 서로를 채우다 서로를 떠나”는 일로 귀결된다. 식탁 앞에서 분란을 경험하지 못한 조온윤 시의 화자, 이와 달리 분란 끝에 식탁을 떠나는 정끝별 시의 인물에게서 읽히는 것은 타자와 함께하는 일이 반드시 유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식사 행위의 내면을 파고드는 시를 더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개념상 식사는 음식을 먹는 일이다. 여기에 전적으로 목숨을 맡겨놓은 우리로서는 이 일의 영구성을 의심치 못한다.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방식의 먹는 일은 종결되지 않을 것이며, 끝없이 생산되는 음식 상품을 선별하게 되지 않을까.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의 상품 전략이 음식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므로 전형적인 식사 방식을 대체하는 상품은 여전히 진보 중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를 가정 내에서 요리하는 경우가 음식의 전형이 되는 일을 말하는 시는 이와 다른 말을 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족의 식사에서 우선 한자리에 모이는 일부터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일이다. 서로 마음이 맞아 맞장구칠 수 있는 소통의 분위기, 개인의 식성을 존중하는 공통 의식, 타자가 필요로 하는 것에 주목하는 마음의 여유 등을 중요시하게 된다. “모처럼 식구 수대로 수저 내려앉는 된소리가 으늑한” 저녁 시간에 “맑은 침을 흘리는”(유종인, 「저녁의 물음」) 배고픈 개 한 마리가 반들거리는 코를 앞세워 달려드는 장면은 인간의 식사 시간과 개의 시간을 확연히 다른 장면으로 내건다. 식사 중인 인간 가족의 표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구성체에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번뇌와 피곤으로 절여진 듯한 외로운 ‘개’의 표정과는 확연히 다르다. 식사의 즐거움과 삶의 즐거움은 모름지기 동의어로 기능한다.
사회적 개인이 처한 계층에 따라 형성된 습관을 아비투스라는 용어로 정리한 부르디외가 개인의 취향에 앞서 주목한 것은 생래적 환경이다. 제2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는 개인의 계급의식이 작동하는 스타일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격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거지와 시인이 한통속이어도 좋다”(유종인, 「폭설과 동파육」)라고 적은 문장에서 시인과 거지가 동류로 묶일 때, 시인의 계급은 거지와 다름없는 스타일을 지닌다. 어떤 날은 “진시황이 먹었다는 저잣거리의 음식 이름을”(「죽을 좀 저으라기에」) 냄비 바닥에다 나무 주걱으로 쓰는 동작이 죽을 젓는 일이 되기도 한다. 시인과 거지, 왕과 저잣거리의 장삼이사가 동일한 계급이 되면서 식습관도 같은 계급적 문법을 따른다. 특정 계급의 음식을 서민이 누리게 된 이 시대에도 시인의 환경은 변함없이 시인이기만 한 채 저잣거리의 거지 생태를 몸으로 살아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또 배고픈 눈이 온다고
그러니 배고픈 눈으로 배부른 눈사람을 만든다고
저녁을 거른 눈사람을 세워놓고서
나는 동파육을 떠올린다
한 번도 못 먹어본 이 음식을 나는
무척 잘 아는 듯 마음에 한 접시 올리니
잣나무들이 눈을 털면서 또 눈을 맞는 일과 같은가
― 유종인, 「폭설과 동파육」 부분
화자가 무척 잘 아는 동파육은 사실상 관념이 만들어낸 음식이다. 동파육을 알기 전에 시인 소동파를 먼저 알았을 그에게 이 기름진 음식과 시인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폭설처럼 쏟아질 고기 맛을 한낱 마음에 들여야 하는 시인에게 결핍인 것은 언제나 고기의 육질보다도 긴장된 언어였다. 생활난과 시 쓰기의 길항이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던 김수영의 후예인 유종인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가난을 매일 맑히어 쓰는 구제舊製 같은 시인”(「먼동」)이 “흰옷 빨래처럼 바지랑대 높이 걸고”(「능사」) 가난마저 허공에 훌훌 비워내듯이 하고 있다고. 그런 가운데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욕망을 허전하게 하여 마음이 맑아지면 청량한 언어가 자신에게 온다는 기대를 안고 그것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토록 허심한 시인의 언어에서 우리가 읽는 건 세간의 잡사와 거리를 두고, 뱃속이 허허로울수록 물욕이나 식욕이 동하지 않을 만큼 탐욕의 수위가 낮아진 그의 자세다.
장인은 만날 때마다 내게 무얼 하느냐고 묻지요
글을 조기처럼 낚아 말리는 내게 치욕이 솟고
서른 해 가까이
발등을 찧는 시를 캐내는 내게 섭섭함이 돋지요
맛과 양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 식도락가처럼
당신은 다시금 생활의 입맛을 쩝쩝 다시지요
… (중략) …
당신의 물음이 실골목처럼 답답할 때도 대로변처럼 허심할 때도 지나쳐
내내 굴비처럼 생활의 곡절을 엮고 돌부리처럼 시를 캐냈으나
내내 꿈결에도 내가 무얼 하는지 묻겠다고 웃지요
무심을 거쳐 무아를 엿보려는 내게
끝끝내 당신은 내게 화두를 일삼는 조실祖室이 되겠다
물음이 끊겨가는 내게 물음의 책을 엮어주겠다니 허공을 다 삼켜 웃지요
― 유종인, 「장인」 부분
인간 욕망의 발현은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의한다. 이 허기가 우리를 욕망의 화신으로 만든다. 위의 시에서 밥과 시의 관계는, 시인은 오로지 시를 써야 한다는 본질주의만도, 생활에 투신하지 못하는 시인의 무능을 들추는 차원만도 아니다. 시를 짓는 일과 밥을 버는 일 간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에 시인과 그의 장인이 있다. 시인은 시에, 장인은 시보다 생활에 집중한다. 장인은 생활비용을 감당해 낼 만큼의 상품화가 불가능한 시에 대한 의심을 “무얼 하느냐”는 반복 질문으로 표명한다. 시작詩作과 생활 간 불안정이 갈등 상황을 만들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시인은 해결되지 않는 것에 대한 발화의 주체, 장인은 생활비를 해결하는 일에 복무하는 전통을 세습한 주체여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내심을 더 읽어야 한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사실이 명백할수록 장인의 의심이 깊어지지만, 시가 아닌 글도 써서 “생활을 비호”한 시인으로서는 이 작업이 치욕이며, 시 바깥으로의 외유임이 자명하다. 생활 편에서 “잡문을 쓰고”는 했다는 답변을 보건대 그는 가장으로서 항성의 자세, 시를 쓰는 주체로서 행성의 자세 사이에서 고투했음이 분명하다. 꿈속까지 따라와 요령부득 무얼 하는지 추궁하면서 ‘시’라는 기표를 피해 가는 장인 앞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시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계속하여 질문을 던지는 장인의 성화와 의심이 역설적이게도 시심을 자극하는 이치대로 그는 이후에도 그렇게 할 태세다. 부단히 “물음의 책을 엮어주”는 장인 덕분에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시작의 주체가 시인이다. 그가 “허공을 다 삼켜 웃”는 이유는 이것 하나. 가난에서 발생하는 언어를 허허로운 마음으로 환대하는 일, “가난을 매일 맑히어 쓰는 구제 같은 시인이/세 들어 사는”(「먼동」) 세계로 ‘익사’하는 일이다. 그는 생활인으로서는 ‘나 죽었소’ 해야 할 무능자이지만 시인으로는 ‘나 살겠소’의 정체성을 지닌다. 유종인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시인은 “세상 욕심에 한쪽이 물들어/혼쭐이 나게 털리고 돌아온/아직도 순수의 풀물이 덜 빠진” 사람, “빨아도 빨아도/희푸르기만 한 노 브랜드 청바지”처럼 질기게 희푸른 사람, “초특가로 한 단에 천 원 하는 바람에/넉 단이나 덥석 사 와서는 열무를 절이”며 희희낙락하는 사람, 값싼 “열무 혁명의 가을”을 환영하면서도 속내는 “어슬한 청춘”(「열무」)의 아이콘이기를 바라는 사람, 어둠도 빛도 아닌 어슬함 속에서 언어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작가의 뜻에 따라 일부만 올립니다-----------------------------------------)
